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451 - Chapter 1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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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1화

소예지는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화장품 파우치에서 심플한 진주 귀걸이를 꺼내 귀에 달았다.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어깨 뒤로 넘겨 흘러내리게 두었다. 오늘은 학술 만찬이 있는 날이었다. 화려하게 꾸밀 필요 없이 자연스럽고 단정한 모습이면 충분했다.일곱 시 반이 되자 소예지는 정확히 시간에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이한은 이미 호텔 로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짙은 남색 슈트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흰 셔츠의 윗단추를 풀어 편안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를 풍겼다.소예지를 발견한 순간 그의 깊은 눈동자에 순간적인 감탄이 스쳤다.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이한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가 다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마치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그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한때 소예지는 언제나 들뜬 얼굴로 다정하고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향해 달려오곤 했다.하지만 이혼 이후 그녀는 완전히 달라졌다.그에게는 차갑고 무심해졌으며 의도적으로 그를 피했다.그녀의 곁에는 늘 훌륭한 남자들이 있었고, 누구에게나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에게만은 마치 없는 사람인 듯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달랐다.조명 아래에서 소예지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연한 블루 드레스 자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는 목덜미 뒤로 곱게 흘러내렸다.옅은 화장을 더한 얼굴에서는 맑고 단아한 분위기가 풍겼고 그 눈빛 역시 예전과 다르지 않게 또렷하고 맑았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조용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마치 지난 세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오해와 마음의 벽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두 사람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듯했다.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출발선에 선 것만 같았다.고이한의 가슴이 묵직해졌다.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은 듯한 기쁨이 천천히 밀려왔다.소예지는 조금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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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2화

고이한은 예의를 갖춰 아일라와 악수를 나눴다.그러자 아일라는 소예지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가자. 저쪽으로.”세 사람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도 소개가 한 차례 더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의학과 관련된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고이한은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다가 가끔 샴페인을 한 모금씩 마셨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대부분 소예지에게 머물러 있었다.예전에는 투자자의 자격으로 그녀 곁에 서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이제는 정말 친구라는 관계로 그녀 곁에 서 있었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소예지는 아일라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실험 비화를 듣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이한이었다.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조명 아래에서 마주한 그의 시선은 이상할 만큼 깊고 뜨거웠다.소예지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여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그때 아일라가 불쑥 말했다.“이따 무도회 있는 거 알지? 소 박사, 고 대표님한테 꼭 한 곡 신청해.”“나 춤 못 춰.”소예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쉬워. 고 대표님은 분명 잘 추실 거야.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되잖아.”아일라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마자 은은하게 흐르던 재즈가 왈츠로 바뀌었다. 조명이 한층 어두워지자 연회장 안에는 순식간에 낭만적인 분위기가 내려앉았다.아일라는 곧바로 자신의 파트너와 팔을 맞잡고 자연스럽게 몸을 기대더니 연회장으로 향하기 전 소예지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소 박사, 부끄러워하지 말고!”소예지는 웃으며 두 사람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그제야 소예지는 오늘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파트너와 함께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하나둘 파트너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들어가 즐겁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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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3화

고이한은 소예지가 다시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갈망이 다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오래전부터 억눌러 왔던, 그녀를 향한 욕망이었다.마침내 한 곡이 끝나자 소예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고이한은 살짝 붉어진 그녀의 뺨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같이 가.”강당 밖으로 나오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층 고요하고 아름다웠다.맞은편에는 인공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달빛이 내려앉은 수면은 잔잔한 물결 위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소예지는 호숫가 벤치에 앉았고 고이한은 그 옆에 조용히 서서 함께 밤 풍경을 바라봤다.그는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 이마에 옅은 땀이 맺히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그 역시 오랜만에 마음의 긴장을 풀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소예지는 문득 떠오른 듯 고개를 들어 물었다.“내일 진기태 대표님 뵙고 식사 한 번 대접할 수 있을까?”고이한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진 대표님을 만나려고?”“이번에 귀국하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해야 하잖아. 내 연구를 믿고 지원해 주신 것에 직접 감사드리고 싶어.”소예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고이한은 잠시 말을 삼켰다.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살짝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결국 그는 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낮게 대답했다.“그래. 내가 대신 약속을 잡아둘게.”소예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고마워.”두 사람이 다시 강당으로 돌아왔을 때는 무도회가 이미 끝난 뒤였다.아일라 일행은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소예지와 고이한도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로 이끌려 갔다.어느새 술은 샴페인 대신 레드와인으로 바뀌어 있었다.소예지는 사람들과 차례로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나눴고 어느새 두 번째 잔까지 비우고 말았다.“소 박사,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뇌-컴퓨터 프로젝트를 세계 최초로 성공시키셨고, 구형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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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4화

다음 날 아침, 소예지의 휴대폰으로 고이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진 대표님이 출장 중이라 지금 M국에 안 계셔. 귀국 일정도 내일로 미뤄졌어. 오늘은 우리도 계속 쉬자.”소예지는 잠시 의아했지만 진기태의 위치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여겼다. 워낙 바쁜 사람이니 식사 약속을 잡으려면 미리 일정을 조율해야 할 것 같았다.“알겠어. 고마워.”소예지가 답장을 보내자 곧바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침 같이 먹자. 지금 방문 앞에 있어.”소예지도 마침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문을 열어 보니 정말 고이한이 복도에 서 있었다.소예지는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머리는 낮게 묶어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어젯밤의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과는 달리 한결 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겼다.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잘 잤어?”어젯밤 술을 마신 탓에 숙취로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응, 잘 잤어.”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술기운 덕분인지 평소보다 깊이 잠들 수 있었다.아침을 먹던 중 고이한이 먼저 오늘 계획을 물었다.“밖에 나가서 좀 걸을까? 근처에 괜찮은 박물관이랑 미술관이 몇 군데 있어. 아니면 바다를 보러 가도 좋고.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소예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며칠 동안 이어진 강도 높은 회의 탓에 몸도 마음도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다.“그럼 바다에 가서 좀 걷자.”소예지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좋아했다.“그래. 체크아웃하고 차 준비할게. 오늘은 해변 호텔에서 하루 묵자.”고이한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아침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출발했다. 차로 삼십 분쯤 달리자 눈앞에 푸른 해안선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사유지에 가까운 조용한 해변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지 않았다.체크인을 마친 소예지는 곧장 해변으로 내려갔다. 마침 날씨도 좋아 하늘은 씻은 듯 맑았고, 푸른 바다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소예지는 신발을 벗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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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5화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각자 쉬기로 했다. 소예지는 딸과 영상 통화도 한 차례 나눴다.화면 속 아이는 벌써부터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소예지가 모레 아침이면 만날 수 있다고 달래 주자 그제야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저녁이 되자 고이한은 소예지에게 호텔 최상층 레스토랑에서 식사하자고 제안했고 소예지는 거절하지 않았다.최상층에는 해산물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었다.정갈하게 차려진 해산물 요리와 멀리서 깜빡이는 등대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오랜 어둠 속에서 다시 길을 찾게 해주는 불빛처럼 느껴졌다.식사가 절반쯤 진행됐을 무렵 고이한의 깊은 시선이 소예지에게 머물렀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무겁고 진지해졌다.“심유빈에 관한 일은 당신한테 전부 확실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아. 귀국하면 그때 나와 심유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우리가 주고받았던 모든 연락 기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 줄게. 절대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거야.”소예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알아.”지금까지 함께 여러 일을 겪으며 소예지는 심유빈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심유빈은 언제나 치밀하게 움직였고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에 오해와 균열을 만들어 내는 데 능숙했다.과거에 증거처럼 보였던 것들과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 역시 결국 심유빈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오해에 불과했다.소예지도 이미 오래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연락 기록까지 다시 볼 필요 없어. 불쾌했던 일들을 굳이 또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당신이나 나나 거기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잖아.”소예지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을 끝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소예지가 고개를 들자 솔직하면서도 깊은 고이한의 시선과 마주했다.“아니. 나는 우리 사이에 서로 모르는 일이 없었으면 해. 더는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고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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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6화

“귀국하면 많이 바빠질 거야. 할 말이 있으면 오늘 밤에 다 해. 돌아가고 나면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소예지가 문득 다시 말을 꺼내자 고이한은 몇 초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눈앞의 소예지는 의학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바쁜 사람이었고 앞으로 그녀에게 여유 있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 터였다.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신 방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소예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이따 해변이나 산책하자.”고이한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나를 그렇게 못 믿어?”소예지도 웃으며 창밖의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그건 당신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어.”고이한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더 이상 그 화제를 붙잡지 않고 순순히 말했다.“그래. 당신 말대로 하자. 우선 해변부터 걷고.”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는 일곱 시 반쯤이었다. 밤이 내려앉은 개인 해변은 낮보다 훨씬 고요하고 아늑했고 두 사람은 길게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어디서부터 이야기하고 싶어?”소예지가 고개를 돌려 고이한을 바라봤다.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한 만큼, 그녀도 끝까지 들어볼 생각이었다.고이한은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시작할게. 알아? 그해 여름 병원 도서 코너에서 당신을 보려고 하다가 공부를 하나도 못 했어.”소예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해 여름 도서 코너에서 아버지가 읽으라고 했던 책을 펼쳐 놓고도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얼굴에 슬며시 열이 올랐다.“책은 안 보고 뭘 봤는데?”소예지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자 고이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당신을 봤지. 당신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그런데 우리 그때 한마디도 안 했잖아.”소예지도 그해 여름을 떠올리며 말했다.“말을 걸고 싶었는데 당신이 놀라서 도망갈까 봐 겁났어.”고이한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소예지 역시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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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7화

심유빈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인지 소예지는 직접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소예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 시절 진가영이 자신을 갈수록 까칠하고 냉담하게 대했던 태도와 결혼 4년째 되던 크리스마스, 심유빈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나는 고신 그룹의 핵심 사업을 전환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사회에서는 몇 번이나 나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했지.”“내가 약속한 만큼 프로젝트를 진척시키지 못하면 언제든 경영권을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었어.”“그 압박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심유빈이 어머니와 수경이의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오해를 깊이 심어놓은 뒤였어.”소예지는 순간 숨이 막혔다.“당신은 나한테 그런 얘기 한 번도 안 했잖아.”“미안해. 어머니한테 심유빈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보려고 하기는 했어. 하지만 내가 우유부단했고 제대로 선을 긋지 못한 탓에 결국 심유빈이 그런 일들을 벌일 틈을 주고 말았어.”소예지는 당시 고이한이 처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어머니의 목숨을 구해 준 유일한 은인에게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 해도 완전히 등을 돌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심유빈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매달리면 결국 고이한이 그녀를 달래고 수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야. 회사 일 말이야.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소예지가 나직이 묻자 고이한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그런 일을 그때 당신한테 말했어도 걱정만 끼쳤을 거야. 게다가 나는 언제든 경영권을 잃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어. 당신 앞에서 실패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소예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고이한은 분명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하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 왔다. 이제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들이 있었다. 왜 그 몇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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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8화

갑작스러운 포옹에 소예지는 잠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 품이 싫지 않았다.고이한의 턱이 소예지의 정수리에 가볍게 닿았고 단단한 두 팔이 그녀를 힘주어 감쌌다.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을 쉽게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예지야...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줄 수 없을까? 정말 마지막으로.”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고이한의 목소리에는 고통과 후회가 뒤섞여 있었고 평소의 그에게서는 보기 힘들 만큼 간절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소예지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녀는 그저 과거와 화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결혼 생활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까지 된 것은 아니었다.한 번 상처받고 넘어진 사람은 전보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혼은 때로 사람을 다시 상처 속으로 끌어들이는 관계가 되기도 했다. 소예지는 적어도 지금은 그 족쇄를 다시 차고 싶지 않았다.소예지는 고이한의 과거를 이해했고 그가 얼마나 후회하며 달라지려 했는지도 지켜봤다.하지만 마음 깊숙이 남은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그가 곁에 다가오는 것을 허락할 수는 있었고 그의 포옹도 더는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다시 자신의 삶과 마음을 모두 그에게 맡길 준비가 됐다는 뜻은 아니었다.어쩌면 남은 인생에는 다시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관계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소예지는 그렇게 생각했다.품 안에서 길게 이어지는 침묵을 느낀 고이한도 천천히 팔을 풀었다. 마음속으로는 불안이 스쳤지만 억지로라도 냉정을 되찾아야 했다.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몰아붙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소예지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재촉하는 말도, 억지로 다가가는 행동도 아닌, 오랜 시간 이어 온 행동으로 자신의 진심을 보여 줘야 했다.“미안해. 지금 이런 말을 꺼낼 때가 아니라는 거 알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고이한의 목소리에는 이해와 절제가 묻어났다.“계속 걷자. 아직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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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9화

소예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날 윤하준의 차가 자신의 곁에 멈춰 섰고 그가 집까지 데려다주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내 차는 윤하준의 차에서 그리 멀지 않은 뒤쪽에 있었어. 당신이 그의 차에 타는 걸 봤지...”고이한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날의 감정이 다시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했다.“그러니까 그날 물에 빠진 나를 하준 씨가 구해 줬다는 이유로 질투하고 혼자 삐쳐 있었던 거야?”소예지가 고이한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야? 걱정된다는 말 한마디조차 안 한 거고?”“미안해. 그날의 나는 정말 어리석었어. 용서받기 힘든 행동을 했어.”고이한의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있었고 짙은 자기혐오가 묻어났다.“당신에게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야. 오히려 너무 신경 쓰고 있었어. 용기가 없었고 너무 두려웠어. 감정이 이성적인 판단을 완전히 흐려 버렸지.”“당신 곁에 있던 윤하준이 질투가 났고 당신이 나한테 와서 왜 가장 먼저 구해 주지 않았느냐고 따질까 봐 겁났어.”“어머니의 병은 모두에게 숨기고 있었고 당신한테도 말할 수 없었어.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택한 거야...”소예지는 그날 밤 고이한이 보였던 침묵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그녀에게는 그것이 그저 자신을 향한 무관심으로만 느껴졌다.“그 후 당신이 떠난 뒤 차를 몰고 따라갔어. 그런데 윤하준이 나보다 먼저 나가서 당신을 데려간 걸 알게 됐지. 나는...”고이한은 고개를 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질투가 났어. 분명 죽어 마땅한 건 나였는데도 그날 밤에는 정말 질투가 났어. 다음 날 당신이 아프다는 걸 알고 돌봐 주고 싶었지만 당신은 나를 거절했지.”“나는 당신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당신 곁에는 강 박사도 있었고 윤하준도 있었는데, 왜인지 나만 필요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소예지는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그날 고이한은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그 와중에도 양희순에게 연락해 집으로 가서 자신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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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0화

소예지는 그동안 이어졌던 불필요한 회의들을 떠올렸다.고이한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그때마다 모든 내용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럼 앞으로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아도 돼.”소예지가 말했다.고이한이 낮게 웃으며 물었다.“왜? 이제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나랑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뜻이야?”소예지는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마 그럴 시간은 없을걸.”“그럼 나는 계속 돈을 쏟아부어야겠네.”고이한이 입꼬리를 올렸다.“적어도 당신 일에 투자하고 있으면 우리 사이에 이어질 이유가 생기잖아. 당신도 나를 쫓아낼 수 없을 테고.”소예지는 멀리 보이는 등대를 바라봤다.깜빡이는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조용히 방향을 알려 주는 듯했다.고이한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다행이야.”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우리가 다시 마주 앉아 과거를 이야기하고 오해를 풀 수 있어서.”“고이한.”소예지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지난 일은 이제 충분히 이야기했으니까 놓아주자. 우리 둘 다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이미 달라졌으니까.”“과거 이야기는 이제 지겨워졌어?”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의 얼굴에 머물렀다.“그럼 이제부터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자. 우리에게는 아직 긴 미래가 남아 있으니까.”소예지는 맑고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였으면 좋겠어.”그녀가 말을 이었다.“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하슬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 주고. 서로 지나친 압박은 느끼지 않았으면 해. 당신도 동의해?”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이제 소예지는 더 이상 감정에만 휩쓸리지 않았다. 스스로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그녀는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을지, 그 편안한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있었다.고이한은 끝까지 진지하게 들었다.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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