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401 - Chapter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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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1화

“그러면 방해하지 않을게요, 나중에 봬요.”“네. 나중에 봬요.”예의상 먼저 끊기 전까지 기다리는 소예지였지만 임현욱도 마찬가지였는지 말없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예지 씨가 먼저 끊어요.”그의 웃음 섞인 한마디에 소예지는 살짝 놀란 듯 웃으며 그제야 통화를 종료했다.이른 아침, 따사로운 햇살이 통유리를 타고 서재 안으로 부드럽게 쏟아졌다. 소예지는 컴퓨터 앞에 앉아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고 모니터에는 프로젝트 보고서가 빼곡히 띄워져 있었다.발목 부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라앉았지만 아직은 걷기에 불편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목을 주물러가며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이내 컴퓨터 화면 오른쪽 아래쪽에선 주현우, 탁도경, 임세현의 메신저 알림이 연이어 반짝이며 도착했다.[군 쪽에서 테스트 요구 추가했어요. 계획안 조정 가능할지 검토 부탁드립니다.][소 팀장님, 안정성 테스트 데이터 나왔습니다. 다소 이상치가 있는데 확인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소 팀장님, 회의록 정리 끝났어요. 이메일로 보냈어요!]재택근무라고 해도 그녀의 하루는 한시도 쉴 틈 없이 흘러갔다.오후가 되어 박시온이 그녀를 찾아왔다. 이어폰을 낀 채 SNS를 보고 있던 박시온은 어느 순간 영상을 멈추더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와, 얘 진짜 대단하네.”“누구 말이야?”소예지가 고개를 돌려 묻자 박시온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말했다.“우리 제일 싫어하는 그 여자. 이번 주 금요일에 독주회 연대래.”그 말에 소예지는 바로 누군지 눈치챘다.“이번 주 금요일, 경주에서 독주회 연대. 그것도 예술의 전당에서.”박시온은 휴대폰을 탁 내려놓으며 씁쓸하게 말했다.심유빈은 요즘 딸이 다니는 학교에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더니 아마 그동안 독주회 준비로 바빴던 모양이었다.하지만 지금 소예지의 머릿속을 채우는 건 오직 눈앞의 프로젝트뿐이었다.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고하슬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곧장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하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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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2화

“대표님, 나 이사님께서 F 국으로 출국하셨습니다.”“지금 당장 F 국행 비행기표 예약해.”비서가 조심스럽게 만류했지만 윤하준은 단호했다.“대표님, 정말 또 가시려는 겁니까? 그분은 이미 이사회에서 대표님 작은아버지를 지지하기로 뜻을 굳히셨습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그동안 한 번이라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나요?”그러나 윤하준의 눈빛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 사람의 표는 결정적이야. 반드시 확보해야만 내가 윤화그룹의 주도권을 쥘 수 있어.”그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잠시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작은아버지는 벌써 이사회 원로들을 끌어모아 그를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이건 단순한 경영권 분쟁이 아닌 윤씨 가문을 둘러싼 전면전이었다.그리고 그는 절대로 질 수 없었다.소예지의 차가 사라진 골목 끝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 눈동자엔 더 깊고 단단한 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구걸하든, 얼마나 비참하게 몸을 굽히든, 윤화그룹은 반드시 그의 손으로 되찾을 것이다.그에게 소예지는 강해져야 할 이유이자, 끝까지 걸어갈 동력이었다.그 시각, MD테크의 회의실엔 무거운 공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구 박사 쪽에서 최종 테스트를 3일 안에 마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주현우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보고했다.“하지만 우리 AI 시뮬레이션 모듈은 아직도 조정 중이고요...”그때, 안채린이 말을 끊고 거칠게 끼어들었다.“문제는 소예지의 이론이에요. 소예지가 그 미완성된 설계를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일정이 이렇게까지 밀리진 않았을 겁니다.”순간,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소예지에게 향했다.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테스트 직전의 변수는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압박이 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냉정했고 가끔씩 곁에 앉은 강준석과 조용히 의견을 나눌 뿐이었다.한편,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가지러 나가던 안채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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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3화

한편, 임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오늘 오후 잠깐 시간 내실 수 있을까요? 호텔에서 회의가 예정돼 있습니다.”소예지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 조용히 대답했다.“회의를 저녁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물론입니다. 그럼 저녁 7시에 시작하겠습니다. 식사 먼저 하시고 회의는 그 후에 진행하시죠.”임재석은 그녀의 스케줄을 세심하게 고려해 일정을 조율해 주었다.“좋아요.”소예지는 짧게 대답하고 통화를 마쳤다.곧 다가올 5월 황금연휴를 앞두고 있었지만 주현우가 이끄는 연구팀은 지금이야말로 전력을 다해야 할 시기였다. 연휴는 자연스레 반납되었지만 대신 임금은 세 배로 지급되고 있었기에 팀원들 모두 묵묵히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소예지는 문득 자신이 얼마의 급여를 받고 있었는지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돈에 쪼들릴 일도, 소비에 욕심을 낼 일도 없었기에 그저 오래된 기억 속 숫자일 뿐이었다.차는 벌써 5년 전 모델이었고 옷은 늘 깔끔한 기본 스타일 위주로 손목에 찬 시계도 몇 해 전 구입한 클래식 디자인이었다.오후 4시 반, 소예지는 딸을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했다.“엄마, 오늘도 늦게까지 일해요?”“응, 오늘은 호텔에서 회의가 하나 있어서 저녁에 나가야 해.”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그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정말 얌전히 있을게요!”뜻밖의 제안에 소예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회의에 따라가고 싶어?”“네. 가보고 싶어요!”“좋아. 그럼 엄마랑 같이 가자.”소예지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는 이 자리, 이 책임을 아이가 이어받게 될지도 모를 터였고 그래서 그녀는 지금부터라도 세상의 무게를 조금씩 보여주고 싶었다.다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이가 회의 분위기를 낯설어하거나 지루해할 경우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해 곧바로 박시온에게 연락을 넣었다.“완전 좋아! 대신 저녁, 비싼 걸로 시켜야 해?”박시온이 장난스럽게 말했다.“호텔에 있는 메뉴 전부 다 골라서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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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4화

고하슬은 케이크를 밀고 가는 직원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언니, 이 케이크 누구한테 주는 거예요? 여기서 생일 파티 하는 사람이 있어요?”직원은 아이의 고운 옷차림만 보고도 단번에 부잣집 공주님이라는 걸 눈치채고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예쁜 언니 한 분이 여기서 축하 파티를 열고 계세요.”“그 언니 이름이 뭐예요?”고하슬은 눈을 반짝이며 끈질기게 물었다.직원은 잠시 망설였지만 어린아이가 그 이름을 안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심유빈’이라는 분이에요. 심유빈 씨의 축하 파티죠.”“유빈 이모요?”고하슬은 놀란 듯 걸음을 멈췄다.직원이 케이크를 싣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박시온이 뒤에서 다가왔다.“하슬아!”“시온 이모, 방금 그 케이크는...”고하슬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 안에서 손님 한 명이 내렸다. 고하슬은 고개를 쭉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며 케이크를 보려 했다.그러다 문득, 낯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놀람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아이가 그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닫혀버렸다.“시온 이모!”고하슬이 다급히 박시온의 손을 꽉 잡았다.“왜 그래, 하슬아?”박시온은 놀란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아까 엘리베이터 안에 아빠가 있었어요! 진짜예요, 아빠가 올라갔어요!”고하슬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 위층 버튼을 가리켰다.엘리베이터는 10층에 멈춰 있었고 박시온은 순간 그 층의 위치를 떠올렸다.10층은 연회장이 있는 층이었다.“진짜 아빠 본 거 맞아?”박시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진짜예요! 저 아빠 얼굴 제대로 봤어요. 아빠 맞아요!”고하슬은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박시온의 소매를 세차게 당겼다.“우리 아빠 찾으러 가요, 네?”정말 그 사람이 고이한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고하슬이의 간절한 눈빛 앞에서 박시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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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5화

“아빠!”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연회장 한가운데를 뚫고 울려 퍼졌다.고이한은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샴페인 타워 옆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지더니 곧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는 주저 없이 아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하슬아, 여긴 어떻게 온 거야?”그 순간, 심유빈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고하슬? 이 아이가 어떻게 여기... 설마 소예지도 같이 온 건가?’연회장 바깥에서는 이미 박시온이 급히 소예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한 손으로 연회장 문을 밀며 안을 들여다본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역시나, 고하슬이 본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고이한은 이곳에 있었고 하필이면 심유빈의 축하연 한가운데에 있었다.“하슬이가 어디 있다고?”전화를 받은 소예지의 목소리엔 조급함과 불안이 가득 실려 있었다.박시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예지야, 걱정 마. 하슬이는 지금 제 아빠랑 같이 있어. 우리 10층 연회장이야. 빨리 올라와.”전화를 끊은 박시온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며 고이한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고 대표님.”“소예지는요?”고이한은 곧장 그녀를 향해 물었다.“지금 아래층 회의실에서 회의 중이에요. 제가 대신 하슬이를 데리고 있었고요.”박시온이 대답하자 고하슬은 아빠의 다리를 꼭 끌어안은 채 삐죽삐죽 입술을 내밀었다.“아빠 나빠요. 맨날 나랑 안 놀아줘...”울먹이는 목소리에 고이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그는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하슬아, 아빠는... 정말 너를 사랑해.”하지만 고하슬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흥, 거짓말. 아빠는 나 안 좋아하잖아요.”그 말에 고이한의 가슴이 조여들었다.장난감이나 과자를 사달라며 투정 부릴 때 하던 그 말투가 아니었다.이번엔 진심으로, 아빠에게 실망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때, 심유빈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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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6화

“엄마.”고하슬이 아빠의 품에서 몸을 돌려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소예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소예지는 딸을 꼭 끌어안으며 조용히 박시온을 향해 말했다.“우리, 이제 가자.”“근데 아빠는...”고하슬은 고개를 돌려 아빠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듯 속삭였다. 그 순간, 고이한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아빠도 같이 갈게.”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이한 오빠!”심유빈이 불러세우려 했지만 그녀의 팔은 하종호에게 붙들렸고 고이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소예지와 고하슬을 따라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심유빈의 눈빛 속에는 억눌린 분노와 함께 지워지지 않는 씁쓸함이 묻어났다.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하종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고 대표가 소예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하슬이가 그 사람 인생에서 얼마나 큰 존재인지 유빈 씨도 잘 알잖아요.”심유빈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고하슬이 고이한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녀는 모를 리 없었다.그때, 매니저가 다가와 억지로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말을 꺼냈다.“유빈아, 이제 슬슬 케이크 자를 시간이야. 다들 기다리고 있어.”심유빈은 모든 걸 아무렇지 않은 듯 감추려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같이 케이크 자르죠.”하종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함께 케이크 앞으로 향했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의례적인 웃음을 띠고 나이프를 들었다.한편, 소예지는 고하슬을 안은 채 조용히 호텔 안의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고이한이 뒤따라오는 기척이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휴게실에 들어서자, 소예지는 박시온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녀는 곧바로 그 뜻을 알아채고 문 쪽으로 향했다.고이한이 따라 들어오려는 순간, 박시온이 문 앞을 막아서며 차분하게 말했다.“죄송해요, 곧 대표님. 예지가 지금은 좀 쉬고 싶대요.”그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닫혔다.닫힌 문 앞에 선 고이한은 한참을 망설이다 문을 두드리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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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7화

마침 고이한의 휴대폰이 울렸다.소예지는 그 틈을 타 조용히 자리를 떴고 복도를 지나며 직원에게 작게 속삭였다.“작은 케이크 하나만 부탁드릴게요.”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뒤, 그녀는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이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예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시온이 심호흡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어우, 깜짝 놀랐잖아. 고 대표가 다시 들어오는 줄 알았네.”소예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 갔어.”“엄마, 아빠 어디 갔어요? 아까 분명 우리랑 같이 오는 거 봤는데요?”고하슬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소예지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볼일 있어서 잠깐 나간 거야.”고하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곧 직원이 케이크와 과일을 담은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소예지는 박시온과 함께 디저트와 과일을 나누며 잠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그녀는 오늘 예정돼 있던 회의를 임재석에게 전부 넘겨두었고 회의가 끝나면 회의록만 메일로 보내달라고 전했기에 이제는 따로 신경 쓸 일도 없었다.“엄마, 오늘 밤 여기서 자도 돼요?”고하슬이 반짝이는 눈망울로 물었다.“그럼. 당연히 되지. 시온 이모랑 같이 자고 갈래?”그렇게 밤 아홉 시 무렵, 벨모아 호텔의 프라이빗 스위트룸에서는 세 사람이 조용하고 아늑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고하슬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고 소예지와 박시온은 얼굴에 팩을 붙인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호텔이 이렇게 많은데 굳이 여기 예약한 거 보면...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냐?”박시온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소예지는 말없이 얼굴의 팩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손끝으로 눈가를 부드럽게 눌렀다.“아직도 나한테 과시하고 싶은 거겠지.”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았다.“벨모아는 원래 고이한 소유였잖아. 지금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야. 자기가 전처의 호텔에서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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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8화

밤이 깊어 갈 무렵, 소예지는 딸 고하슬을 데리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는 양희순이 저녁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고 거실 한편에서는 젤리가 고하슬과 장난을 치며 놀아주고 있었다.아이의 맑고 해맑은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우며, 온 집 안에 따뜻한 기운을 퍼뜨렸다.소예지의 책상 위엔 양희순이 놓아둔 꽃다발 하나가 은은한 조명 아래 곱게 피어 있었다. 부드럽고 화사한 색감의 꽃잎들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편안하게 어루만져주는 듯했고 그 소소한 정성은 하루의 피로와 번잡함을 말없이 씻어주는 위로처럼 다가왔다.이곳은 소예지에게 언제나 마음을 내려놓고 숨을 고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안식처였다.월요일 아침, 소예지는 고하슬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런데 교문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먼저 그녀를 알아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안의 보모였다.“혹시 소 대표님 맞으시죠?”소예지는 상냥한 미소로 답했다.“네, 안녕하세요. 요즘은 이안이랑 함께 등교하시나 봐요?”“네, 맞아요. 윤 대표님이 요즘 외국에 출장을 가셔서요. 다음 주쯤 돌아오신다고 하시더라고요.”보모는 밝게 웃으며 말을 잇더니 소예지를 힐끗 바라보다 장난스레 덧붙였다.“정말 아름다우세요. 윤 대표님이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그 말에 소예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보모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눈치챘는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허둥댔다.“어머,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죄송해요.”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곧장 차 쪽으로 발길을 옮긴 보모를 보며 소예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혹시 그녀가 무언가를 오해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털어내고는 다시 차에 올라 MD 빌딩으로 향했다.오늘 역시 하루 종일 회의가 줄줄이 잡혀 있는 바쁜 날이었다.사무실에 도착하자 다른 부서 직원들은 벌써 황금연휴에 어디로 놀러 갈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실험실에서는 주현우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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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9화

한적한 일식당의 조용한 룸.아늑한 조명 아래, 안채린은 홀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은은한 조명 속에 드리운 부드러운 그림자, 바깥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된 그 공간은 누가 봐도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문이 열리자 이지원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섰다.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실험실에서 그대로 달려온 듯 단정한 체크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안경 너머의 눈빛은 피곤이 묻어났고 그는 숨을 고르며 자리로 다가왔다.“미안, 실험 마무리하느라 좀 늦었어.”그는 자리에 앉으며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지었고 그러다 안채린의 화려한 메이크업과 몸에 꼭 붙는 드레스를 보고는 순간 당황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과거 대학 시절, 안채린은 모두가 인정한 ‘차가운 여신'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평범한 가정 출신인 이지원이 다가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먼저 식사를 청해 단둘이 마주 앉다니 이지원으로선 어색하고도 묘한 기분이었다.안채린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요즘 완전 연구벌레 다 됐더라? 괜찮아, 이해해. 자, 메뉴부터 고르자. 오늘은 내가 사는 날이니까.”음식을 주문한 뒤, 그녀는 무심한 듯 슬쩍 화제를 꺼냈다.“그나저나 들었어. 소예지 프로젝트를 네가 이어받았다며? 어떻게 돼가?”그 말에 이지원의 눈빛이 확 달라졌고 피곤하던 눈이 반짝이며 생기를 띠었다.“순조롭게 진행 중이야. 특히 소예지가 설계한 타깃 전달 시스템은 정말 대단해. 정밀도랑 효율성이 말도 안 될 정도로...”하지만 안채린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그래, 소예지는 뭐든 잘하지. 우린 감히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이지원은 말이 적은 편이지만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불편해한다는 걸 금세 알아채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넌 요즘 어때? 도윤재는 좀 아쉽더라. 얼마 전 얘기 나왔는데 지금은 4S 매장에서 영업 일 한다며?”안채린 역시 그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하지만 도윤재 같은 남자에게 다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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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0화

안채린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소예지는 그저 널 이용하는 거야! 걔가 성공하고 나면 넌 아무것도 못 얻게 될 거라고!”그 외침에 문을 나서려던 이지원의 발걸음이 멈췄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안채린을 바라봤다.눈동자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어린 듯했다.“안채린, 넌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어쩌다 이렇게까지 변한 거야?”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문을 열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그 말에 그녀의 정교한 메이크업으로 가려졌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억눌렀던 분노가 터지듯, 그녀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세차게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이지원, 그 멍청한 놈이 감히 소예지를 여신처럼 떠받들고 있어?”이지원은 한때 자신을 향해 풋풋한 연정을 품었던 순박한 사내였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여자의 편에 서 있었다.다음 날은 5월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소예지는 퇴근 준비를 하며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었고 그때, 가방 안에 있던 휴대폰 화면이 은은하게 깜빡였다. 임현욱이었다.[예지 씨, 바쁘신가요? 저, 돌아왔어요.]소예지는 손을 멈추었다.“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하지만 오늘은 그와 식사할 여유가 없었다. 산더미 같은 업무가 남아 있었고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현욱 씨, 며칠 후에 식사 자리를 잡는 건 어떨까요? 오늘은 일이 좀 많아서요.]솔직하게 메시지를 보내자 잠시 후,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괜찮아요. 그냥 돌아왔다는 말만 전하고 싶었어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그의 따뜻한 배려는 언제나 예상 밖의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이내 또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정말이에요, 부담 가지지 마세요.]그 짧은 문장을 읽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한 한숨이 흘러나왔다.‘정말 섬세하고, 다정한 남자네...’그러나 그녀는 이미 마음의 방향을 결정해 둔 상태였고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이틀 동안 소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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