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461 - Chapter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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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1화

고이한이 가늘게 눈을 뜨며 말을 흐렸다.“미안하지만 그건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그 말에 양정화는 순간 멈칫했다.‘혹시... 구하려는 사람의 신원이 그토록 민감한 건가?’그러나 고이한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조용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한편, 실험실에 있어야 할 소예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며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그녀를 연구에 몰입시키기 위해 고이한은 끝까지 거짓말을 해왔던 것이다.사실 그가 처음부터 그녀 어머니의 유전자 샘플을 제공한 진짜 이유는 심유빈을 살리기 위해서였다.지난 6년 동안, 그가 직접 나섰던 모든 일에는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심유빈이 얽혀 있었다.방금 전에도 기증자의 용도를 끝내 밝히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그 때문이었고 그 애매하고 조용한 침묵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설명하고도 남았다.이 모든 일은 그가 철저히 계산한 수였다.고이한은 만약 자신이 심유빈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면 소예지가 그걸 빌미로 일부러 시간을 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심유빈의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을 것이다.하지만 소예지가 이 연구에 몰입하게 된 진짜 이유는 단순히 심유빈이라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녀가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온 건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이었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언이기도 했다.오후 세 시.소예지는 다시 실험실로 들어섰다.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눈치챈 이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아?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응. 괜찮아. 오늘 데이터 좀 보여줘.”이지원은 준비해 둔 실험 데이터를 건넸고 소예지는 정신을 다잡은 채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그런데 여섯 번째 페이지를 넘기던 순간,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이건...”옆에 있던 이지원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물었다.“그거 지난주에 받은 백혈병 환자 조혈모세포 샘플이야. 네가 제안했던 새로운 필터링 방식 적용해 봤거든. 왜, 뭐 이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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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2화

그날 저녁, 소예지는 양희순에게 전화를 걸어 딸을 학교에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오늘은 실험실에서 밤 아홉 시까지 추가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었다.그런데 오후 다섯 시 반, 양희순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소예지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 하슬이 아버님께서 학교로 오셔서 아이를 데려가셨어요. 오늘은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밤 아홉 시쯤 다시 데려다주시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시네요.”“네, 알겠어요.”소예지는 짧게 대답했다.“하슬이도 무척 신난 모양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아빠랑 그 집 어르신들이 그리웠던 것 같아요.”양희순은 혹시나 소예지의 기분이 상할까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네...”소예지는 다시 한번 짧게 응답했을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아마 양정화가 실험실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전했고 그래서 일부러 학교로 아이를 데리러 갔을 터였다.하지만 딸아이가 즐겁게 지내고 있다면 굳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지금은 눈앞의 실험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었다.밤 아홉 시.소예지는 실험 장비의 전원을 끄고 이지원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하루 종일 흥분에 들떠 있던 이지원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르다 주차장 입구에 이르러 환하게 웃었다.“소예지, 너랑 같은 팀에서 일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영광이야.”소예지는 가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오늘도 고생했어. 어서 들어가서 푹 쉬어. 눈 밑 다크서클이 너무 심하잖아.”그 말에 이지원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응. 너도 운전 조심하고.”소예지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직 고하슬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향했다.그리고 장식장 속 깊은 곳에서 포장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종이백에 담아 들고 내려왔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희순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사모님, 그건 뭐예요?”하지만 소예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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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3화

아이의 작고 동그란 얼굴은 나날이 더 예쁘게 피어났다.양 갈래로 땋은 머리끈이 흔들릴 때마다 하얗고 동그란 이마가 드러났고 검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눈동자는 또랑또랑 빛나고 있었다.소예지는 몸을 살짝 숙여 아이의 머리에 가볍게 입 맞춘 뒤 작은 손을 꼭 잡고 현관문을 나섰다.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무렵, 그녀는 우연히 윤하준과 마주쳤다.이안은 이미 교실로 들어갔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하준 삼촌!”고하슬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자 윤하준은 따뜻한 미소로 아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인사했다.“하슬아, 안녕.”소예지가 딸을 교실까지 데려다준 뒤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차 옆에는 여전히 윤하준이 서 있었다.“실험실 가는 길인가요?”그의 물음에 소예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번 주 토요일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뜻밖의 제안에 소예지는 눈을 가볍게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이안 생일이에요. 혹시 하슬이랑 같이 와줄 수 있을까 해서요.”그 말에 소예지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번 자신의 생일에 윤하준이 이안이를 데리고 와 축하해주고 선물까지 건넸던 일이 떠오르자 그녀도 마땅히 답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하슬이 데리고 갈게요.”그제야 윤하준은 안도한 듯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그럼 토요일에 뵐게요.”말을 마친 그는 소예지를 위해 운전석 문을 열어주었다.소예지는 조금 놀란 듯 멈춰 섰다가 작게 인사한 뒤 차에 올라탔다.“운전 조심하세요.”그는 마지막까지 조용히 덧붙였다.소예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차에 올라 출근길에 나섰다.그러나 교차로를 지나는 순간, 한 차량이 갑자기 끼어들며 그녀의 차 뒤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본 윤하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다행히 상대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밟아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그는 한동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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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4화

“윤 대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진가영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분명 얼마 전 주 여사 말로는 지금 연애도 안 하고 사귀는 여자도 없다더니...’“그래서 그 윤 대표가 좋아한다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어느 집안 따님이래?”호기심이 묻어난 눈빛으로 묻는 순간, 고수경의 눈동자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무슨 명문가 따님 같은 소리예요. 하준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소예지라고요!”그 한마디에 진가영의 얼굴이 굳어졌다.며칠 전, 윤하준이 소예지와 함께 차에 타는 모습을 얼핏 본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막상 딸의 입에서 그런 말을 직접 듣게 되니 충격은 훨씬 더 컸다.“뭐라고? 윤 대표가 소예지를 좋아한다고?”고수경은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췄고 결국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어깨가 떨릴 만큼 격하게 흐느끼는 딸을 보고 진가영은 다급히 다가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달랬다.“수경아, 잠깐만. 아직 확실하지도 않잖아. 혹시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진가영은 속으로도 윤하준이 소예지를 좋아할 거란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윤하준은 어린 시절부터 고이한과 함께 자란 사이였고 소예지는 한때 고씨 가문의 며느리였다.그런 여자를 마음에 품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나도 처음엔 그냥 착각이었길 바랐어요. 아니라고 믿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확신해요. 하준 오빠, 소예지를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요.”진가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지만 소예지는... 그쪽 집안에서도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은 아닐 거야. 윤씨 가문도 가만있지 않을 텐데...”그러자 고수경은 울음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써요. 소예지를 위해서라면 뭐든 포기할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그 말과 함께, 다시금 고수경은 울음을 터뜨렸고 진가영은 말없이 딸을 바라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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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5화

“그리고...”마침내 이서연이 입을 열었다.“심유빈도 왔어. 아까 안채린이랑 로비에서 얘기 나누고 있더라!”그 말을 들은 소예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온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어차피 이번 연구가 정말 그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발표회에 참석하는 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었다.“오든 말든 상관없어. 오늘 발표회는 원래 공개 행사니까.”소예지는 덤덤하게 말하며 다시 발표 자료에 집중했다.이서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문밖으로 빠져나갔다.그리고 오전 10시 정각.소예지는 강준석과 함께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회의장은 이미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 차 있었고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강준석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무대로 올라가.”소예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연단 위로 올라섰다.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객석 전체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소예지는 차분히 청중석을 바라보며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해갔다.가장 앞줄에는 이성열과 양정화 그리고 의료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엔 고이한과 하종호, 심유빈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심유빈은 여느 때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채, 하종호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뭔가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지만 고이한의 시선은 오로지 무대 위의 소예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소예지는 시선을 거두고 이내 침착하게 발표를 시작했다.그녀는 연구의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며 조리 있게 말을 이어갔고 또렷하고 안정된 목소리와 함께 스크린을 통해 실시간으로 투사되는 수치와 분석 자료가 어우러지며 발표는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한편, 회의장 뒷줄에 앉아 있던 안채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그 무표정한 얼굴 아래 감정은 드러내지 않아도 또렷이 느껴졌다.사실 그녀는 오늘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그런데 양정화가 직접 전화를 걸어 반드시 와서 소예지의 연구 결과를 확인하라고 강하게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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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6화

그 뒤로 이성열의 발표가 이어지는 동안, 소예지는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와 강준석 옆에 자리를 잡았다.십여 분 뒤, 발표회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하지만 소예지는 곧바로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양정화가 따로 부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의료계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며 짧은 교류의 시간을 꼭 가져달라는 당부였다.소예지는 양정화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고 그녀는 미리 대기 중이던 박사급 연구자들을 하나씩 소개해 주었다.그들 모두의 눈빛에는 진심 어린 찬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나는 네 아버지 두 학번 아래 후배야. 예전에 그분이랑 축구도 같이 했었지.”백발이 성성한 한 원로 교수가 먼저 말을 건넸다.소예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정 교수님, 안녕하세요.”정 교수는 시원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대단하구나. 따님이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으니 소 교수도 하늘에서도 분명히 자랑스러워하실 거야.”그 옆엔 고이한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는 몇몇 이사진들과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들의 눈빛에는 분명한 관심과 기대가 어렸다.의학이 만들어낼 미래와 그로 인해 따라올 상업적 가능성까지 그들에겐 소예지의 성과가 단순한 연구 그 이상이었다.잠시 후, 고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예지 쪽으로 걸어왔다.그러나 그녀는 마치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린 채 정 교사와 임상 관련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고 전혀 그를 의식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그 모습에 고이한은 끝내 다가가지 못하고 양정화와 이성열에게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발걸음을 돌렸다.소예지가 몸을 살짝 틀었을 때, 시야 끝으로 고이한이 하종호와 함께 복도를 나서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그 뒤로는 심유빈과 고수경이 팔짱을 낀 채 나란히 따라나서고 있었다.소예지가 시선을 거두자 곧 강준석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이제 점심시간이네. 같이 식사하러 갈래?”“좋아.”소예지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양정화와 이성열에게도 정중히 동행을 청했지만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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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7화

이서연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응!”“게다가 괜찮은 맛집 하나 있어. 지난번에 우리 갔던 거기, 강 선배한테 데려가 달라고 해.”소예지가 덧붙였고 강준석도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그때 그 집 말하는 거야?”소예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거기 진짜 괜찮았어.”이서연은 설렘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단지 경주라는 도시 때문만은 아니었다.그녀를 들뜨게 만든 건 세계 각국의 의료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의미 깊은 국제 학술회의에 직접 참석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하지만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안채린은 씁쓸한 눈빛으로 조용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점심 식사를 마친 뒤, 소예지는 이지원, 이서연과 함께 실험실로 복귀했고 안채린은 강준석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몇 초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강 선배, 나도 그 국제 교류회에 가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강준석은 조용히 그녀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이미 이서연이랑 가기로 했어.”안채린은 안전벨트를 매면서 손가락을 꽉 쥐었다.“하지만 전공 실력은 내가 이서연보다 훨씬 낫잖아...”차를 출발시키며 앞만 바라보던 강준석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전문성도 중요하지만 나는 팀워크랑 직업윤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그 말에 안채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그가 자신을 배제한 이유는 분명 아까 소예지 어머니의 샘플을 꺼냈던 자신의 경솔한 말 때문일 터였다.‘소예지랑 아무 가능성도 없다는 거 뻔히 알면서도 왜 저렇게까지 감싸고 도는 거야.’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빛엔 억눌린 불만이 서려 있었다.그날 오전 있었던 소예지의 발표회는 벌써 점심 뉴스에 보도되었고 그녀의 연설 영상은 다양한 채널에서 반복 송출되며 빠르게 화제가 되고 있었다.한편, 도시 반대편의 고급 라운지에서는 몇몇 사모님들이 모여 오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그중에는 주경화의 모습도 있었다.우아하게 홍차를 홀짝이며 대화를 듣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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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8화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소예지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딸아이가 환하게 지어 보이는 그 사랑스러운 미소와 연신 입에 담는 달콤한 엄마라는 말이었다.딸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소예지는 세상에 다시금 마음을 열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그리고 가족의 식사부터 생활 전반까지 정성껏 챙기며 언제나 이 집을 포근하고 평온한 안식처로 가꿔주고 있는 양희순을 생각하면 그녀는 늘 감사한 마음이 앞섰다.바깥에서 아무리 바쁘고 치열한 하루를 보내더라도 돌아오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귀중한 위로였다.“엄마, 내일은 이안이 생일인데 무슨 선물을 주면 좋을까요?”고하슬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소예지는 웃으며 말했다.“내일 아침에 엄마랑 같이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보자. 이번 선물은 하슬이 네가 직접 고르는 거야, 어때?”고하슬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우리 하슬이, 이제 다 컸네. 어쩜 이렇게 어른스러워졌을까.”양희순이 흐뭇한 눈길로 딸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소예지는 그런 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바랐다.‘이 아이가 하루빨리 자라서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기를.’‘아마 십 년쯤 후엔 그 바람이 현실이 되겠지.’그날 밤, 소예지는 해외 실험실의 스미스 박사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축하의 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메일에는 그가 운영하는 연구소에서 백혈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수집한 임상 데이터가 정리된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소예지는 그 실험실에 고이한이 투자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이번 자료 제공 역시 자원 공유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그녀는 감사 인사와 함께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학술적으로 더 깊은 교류를 하고 싶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냈다.뜻밖에도 스미스 박사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다음 주 국내에 들어올 예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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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9화

박시온은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바로 눈앞에 앉은 자기 ‘절친’이 사실상 자기 회사의 ‘최고 보스’라는 현실이 새삼 얄밉게 느껴졌다.“됐어! 무슨 신혼여행도 아니고!”그녀는 투덜거리듯 말했다가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반응이 귀여워 소예지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래도 젊을 땐 일도 사랑도 열정적으로 해야지 안 그래?”“지금 나 놀리는 거야?”박시온은 바로 손을 뻗어 소예지의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작은 룸 안은 두 사람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소파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고하슬도 엄마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웃었다.소예지는 숨을 고르며 웃음을 멈췄다.“알았어, 알았어. 안 놀릴게.”“그럼 너도 얼른 누굴 만나. 임 대위 어때? 난 그 사람 괜찮은 것 같던데?”박시온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예지에게 윙크를 보냈다.막 차를 마시던 소예지는 당황한 나머지 마시던 차를 그대로 컵 안에 뿜고 말았다.박시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왜? 너 설마 벌써 시도해 봤어? 그 사람 별로야?”소예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귀까지 붉게 물들며 외쳤다.“무슨 소리야! 나랑 그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그래그래, 알겠어.”박시온은 능청스럽게 웃었지만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고이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쯧, 비록 몸은 좋을지 몰라도 한 번 내다 버린 쓰레기는 다시 주워 올 수는 없지.’그녀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 생각을 지워냈다.“자, 점심도 다 먹었으니 이제 선물 고르러 가야지.”고하슬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었다.그렇게 셋은 백화점 안에 있는 고급 장난감 매장으로 향했다.고하슬은 진지한 눈빛으로 매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결국 작은 오르골 하나를 골랐다.며칠 전 이안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오르골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소예지는 그런 딸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많이 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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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0화

소문에 따르면 주경화는 이번에 손녀 이안의 생일을 맞아 성대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그 말에 고수경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도 없다는 듯 안심했다. 오늘 밤, 이곳에서 소예지를 마주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그녀는 곧장 드레스숍으로 향했다.‘오늘 밤만큼은 누구보다 더 돋보여야 해.’한편, 소예지는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뒤 조용히 거실에 앉아 고하슬의 외출 준비를 도왔다.화려하게 반짝이는 파란색 공주 드레스를 입은 고하슬은 마치 애니메이션 속에서 막 튀어나온 공주처럼 빙글빙글 돌며 즐거워했고 긴 머리카락을 예쁘게 땋아 공주풍으로 정리한 뒤 머리띠까지 얹자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소예지 역시 옷장을 열고 지난번에 사두었던 체크무늬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과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캐주얼하지 않은 예의를 갖춘 차림이었다.“엄마, 우리 이제 가요!”오늘의 생일 파티 장소는 윤하준의 별장이었다.운전대를 잡은 소예지는 일부러 돌아가는 길로 방향을 틀었지만 뒷좌석에 앉아 있던 고하슬은 단번에 눈치챘다.“엄마, 이거 우리 예전에 살던 집 가는 길 아니에요?”소예지는 그 말에 잠시 흠칫하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맞아. 오늘은 하준 삼촌 집에서 놀 거야.”그곳, 고이한과 함께 6년을 보낸 그 호화로운 저택은 소예지에게 감옥 같은 곳이었다.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에 힘을 주었다.차가 별장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시계는 어느새 여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붉은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정원은 다채로운 풍선과 리본으로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왔어요.”윤하준은 짙은 톤의 셔츠에 캐주얼한 슬랙스를 매치한 차림이었고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고 편안한 인상이었다.“하준 삼촌! 나 이안이한테 줄 선물 들고 왔어요!”고하슬이 들뜬 목소리로 선물 봉투를 흔들자 윤하준은 미소를 지었다.“이안이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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