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521 - Chapter 530

552 Chapters

제521화

고이한의 눈빛이 짙어졌다.목젖이 부드럽게 움직이다 그는 끝내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들고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자 소예지는 책상 앞에 선 채 이를 악물고 낮게 중얼거렸다.“개자식.”입술을 앙다문 채 욕설을 내뱉은 그녀는 곧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툭툭 쳤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이렇게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릴 여유 따위 그녀에겐 없었다.병실을 돌고 돌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봉투 하나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 봉투를 보아하니 근처 카페에서 방금 사 온 듯, 포장도 뜯기지 않은 상태였다.소예지는 단번에 고이한이 사람을 시켜 보냈음을 알아챘다. 봉투를 집어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생각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쳤다. 오늘도 밤 열 시까지 병원에 있어야 했고 멍해진 머리를 깨우기 위해서는 각성제처럼 커피 한 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무의식적으로 종이봉투를 움켜쥔 그녀는 결국 커피를 꺼내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컴퓨터 화면 속 보고서에 시선을 고정했다.저녁 6시 무렵, 양정화 교수가 소예지를 찾아왔다.“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고 집에 가서 아이랑 시간 좀 보내.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전화할게.”소예지도 마침 딸이 보고 싶던 참이었다.“감사합니다, 교수님.”7시쯤, 소예지는 차를 몰아 고씨 저택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가정부가 문을 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오셨군요. 큰 사모님께서 안으로 모시라고 하셨어요.”원래는 딸만 데리고 곧장 돌아가려 했지만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 잠시 들르기로 했다.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밥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병원 식당 음식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지만 이 집에서 풍겨오는 집밥 냄새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예지야, 밥 다 됐어. 먹고 가.”최현숙이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아니에요, 할머니...”“네가 올 줄 알고 많이 준비하라고 했어. 걱정 말고 어서 앉아.”소예지는 순간 당황스러웠다.‘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고?’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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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2화

소예지의 얼굴에 머물던 미소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 순간, 고하슬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그대로 달려 나갔다.“아빠!”고이한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굽혀 딸을 번쩍 안아 올렸고 그대로 품에 안은 채 아이를 내려다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오늘은 착하게 잘 지냈어?”“그럼요! 저 엄청 착했어요! 할머니도 저 칭찬해 주셨어요!”고하슬은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고이한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동그란 볼을 손끝으로 살짝 찔렀다.“정말 대단하네, 우리 딸.”하지만 소예지는 오래 머물 생각이 없어 아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하슬아, 아빠한테 인사하고 이제 집에 가자.”고이한은 아이를 안은 채 차 뒤편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뒷좌석 카시트에 앉혔다. 허리를 숙여 안전벨트를 채우는 손길 하나하나가 유난히 다정하고 세심했다.소예지는 아무 말 없이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고, 고이한은 그 자리에 선 채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밤이 깊어 갈 무렵, 소예지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딸을 품에 안고 동화를 읽어주고 있었다. 고요한 방 안에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잔히 울리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호흡이 함께 느려졌다. 며칠째 이어진 수면 부족에 지친 소예지도 결국 아이와 함께 잠에 빠져들었고, 모녀는 서로에게 기대어 아침이 올 때까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고하슬을 데리고 여름방학 수업이 열리는 학교로 향했다. 주차를 막 마쳤을 때, 바로 옆에 은색 벤틀리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차에서 내린 이는 다름 아닌 윤하준이었다. 그 역시 이안을 데려다주러 온 모양이었다.두 아이가 손을 맞잡고 나란히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소예지가 윤하준에게 물었다.“이안도 여름방학 수업 듣게 된 거예요?”윤하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네. 학교에서 배우는 게 더 많잖아요. 어머니가 워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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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3화

[고 대표, 큰일 났어.]박시온의 메시지를 받은 소예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첨부된 링크를 눌렀다.[고신 그룹, 성양 그룹 상장 지원, 규제기관 대상 뒷거래 정황 포착]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소예지의 눈썹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자업자득이지.”곧이어 박시온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나 한마디만 해도 돼? 자업자득이야.]소예지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맞는 말이야.][안영수가 어떤 인간인지 업계 사람들은 다 알잖아. 평판은 바닥이고 그런 놈을 상장까지 밀어준다? 도와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번엔 고이한도 제대로 물렸어. 어떻게 빠져나올지 궁금하네.]소예지는 별다른 말 없이 기사를 끝까지 훑었다.내용은 예상대로였다. 몇몇 언론이 성양 그룹의 과거 비리 정황을 집중 보도하며 이를 고신 그룹의 ‘상장 지원’과 연결 지어 고이한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어쩌면 경쟁자가 고이한의 약점을 노리고 판을 짠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 소예지는 이런 일에 마음을 쓰고 싶지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한편, 고신 그룹 회의실.회의실 안은 긴장감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십여 명의 임원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 가운데 프로젝터 화면에는 각종 언론의 부정적 헤드라인이 실시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고 대표님, 주가가 벌써 7%나 하락했습니다. 이대로 두면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공식 성명을 내서 허위 보도라고 반박해야 합니다.”“전 성양 그룹과의 협력을 아예 접는 게 좋다고 봅니다. 괜히 엮였다가 같이 매도당하면 손해만 커집니다.”서로 다른 의견이 조심스레 오가는 가운데 고이한은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회의 테이블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회의장은 일순 조용해졌다.“필요 없습니다.”차갑고도 위험할 만큼 침착한 목소리였다.“법무팀에 연락하세요. 허위 보도를 주도한 매체들 상대로 소송부터 진행하고요.”“그럼 여론 대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한 임원이 조심스레 물었다.고이한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냉 처리합니다.”그 짧은 한마디에, 모두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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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4화

다음 날 오후 한 시.소예지는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는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들자 간호사가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소 선생님, 정 과장께서 위층 회의실로 오시래요.”“네, 금방 갈게요.”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비록 그녀의 정확한 직책은 연구원이었지만 병원에서는 대부분 ‘소 박사님’ 혹은 ‘의사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직책이 애매한 탓도 있지만 환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호칭이기도 했고 소예지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서류를 챙겨 회의실로 올라가니 이미 양정화와 이지원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정 과장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소예지 씨, 일단 앉아요. 아직 손님 한 분이 안 오셨어요.”소예지는 다른 병원에서 온 외부 인사쯤으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앉았고 이지원과 새 치료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런데 불과 2분 후, 회의실 문이 열리며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그 순간, 소예지의 표정이 굳었다.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고이한이었다.그가 전날 밤 심유빈과 호텔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그의 몸에서 심유빈의 향기가 퍼져 나오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같은 공간에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예지는 공기가 탁해지는 느낌이었다.“소예지 선생, 오늘은 업무 보고 겸해서 고 대표에게 신약 시범 투여 상황을 공유할 거야.”양정화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했지만 소예지에게는 그 말조차 메마르게 들렸다.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서류를 가방에 다시 넣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교수님께서 보고하시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아요. 저는 아직 마무리할 일이 남아서 먼저 내려가겠습니다.”더는 말하지 않고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간 그녀의 뒷모습에 남은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시선을 고정했다.양정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이한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소예지 씨 좋을 대로 하면 되죠.”한 시간쯤 후, 회의가 끝났고 고이한은 소예지의 사무실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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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5화

소예지의 사려 깊은 말에 방아현의 마음도 따뜻해졌다.“그럼 전 이만 갈게요.”그녀는 웃으며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사실 소예지는 점심도 거른 터라 속이 허했다. 막 갓 간식을 한입 베어 물던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대표님? 혹시 소예지 찾으신 건가요?”곧이어 짧고 차가운 남자의 음성이 이어졌다.“아닙니다.”얼결에 마주친 이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고이한을 바라보다가 곧 서류를 들고 소예지의 사무실로 들어왔다.“방금 고 대표님이 널 찾으신 거 아니야?”소예지는 고이한이 문 앞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기에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글쎄, 잘 모르겠네. 이거 먹어봐. 맛있어.”“와, 냄새 좋은데?”이지원은 감탄하며 과자 몇 조각을 집어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소예지는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주 여사님, 도시락 잘 받았습니다. 감사드려요. 괜히 번거롭게 해드린 건 아닌지 걱정돼요.]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번거롭긴요. 다음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꼭 말해요. 언제든 보내드릴게요.]그 호의가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제 일이 수시로 바뀌는 편이라 매번 번거롭게 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정중하게 사양하자 주경화는 눈치를 챈 듯 따뜻하게 답을 보냈다.[그럼 시간 날 때 집에 와서 식사해요. 요즘 소예지 씨랑 하슬이 얼굴 본 지 좀 됐네요.][네, 감사합니다. 조만간 꼭 인사드릴게요.]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소예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인간관계란 언제나 어렵고 조심스러웠고 특히 자신처럼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어느덧 추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소예지는 딸과 함께 조용히 명절을 보내려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병원에서 예상치 못한 통지가 내려왔다.경주 지역에 신약 투여를 위한 두 번째 임상시험 센터가 개설되며 열 명의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한 2차 테스트가 진행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그 현장 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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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6화

소예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천천히 눌렀다.여전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고 무엇보다 지금은 이지원에게 넘겨야 할 업무 정리를 먼저 끝내야 했다.저녁 여섯 시 반.소예지가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하자, 딸과 젤리가 현관 앞으로 달려 나왔다.“엄마가 왔어요! 엄마, 출장 가야 한다면서요?”고하슬이 먼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소예지는 순간 걸음을 멈췄고 곧 아이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았다.“어떻게 알았어?”“아빠가 말해줬어요. 엄마 이번 출장은 되게 힘든 거래요. 그래서 내가 할머니 집에 가서 잠깐 지내야 한다고 했어요. 엄마 걱정 마세요. 저 착하게 말 잘 듣고 있을게요.”고하슬이 너무도 어른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내자 소예지는 가슴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 아이에게 말해버린 고이한에게 화가 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런 문제는 애초에 그의 입에서 결정되어야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아이의 맑고 의젓한 눈망울을 마주하고 있자니 올라오던 감정이 어느새 스르르 가라앉았다.소예지는 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 엄마가 열흘 정도 출장 다녀올 거야. 그동안은 우리 하슬이 할머니 집에서 잘 지내야 해. 알겠지?”딸과 이렇게 오래 떨어지는 일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아니,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네! 엄마 보고 싶으면 전화할게요!”고하슬이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건네자 소예지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쪽이 살짝 저려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딸은 영특하고 따뜻한 아이였으나 동시에 돌보기가 까다로운 면도 있었고 감정 표현이 예민하고 애착이 깊어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양희순이 낮 동안에는 어떻게든 아이를 돌볼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결국 소예지나 고이한, 혹은 진가영만이 아이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밤이 되자 소예지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비행은 다음 날 아침이었고 열흘간의 일정이긴 했지만 신약 테스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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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7화

소예지는 국군경주병원에서 마련한 숙소에 배정되었다.도착하자마자 모든 것이 세심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그녀를 맞이한 건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극진한 대우였다.군의대 소속 병원에 도착하자 원장이 직접 나와 그녀를 반겼다.여러 명의 의학 전문가들이 함께 대기 중이었고 한 여자 직원은 예쁜 꽃다발까지 내밀었다.예상치 못한 환대에 소예지는 잠시 당황했다.늘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걸 선호하던 그녀에게 이런 격식 있는 환영은 오히려 낯설고 불편했다.“소예지 씨, 나는 당신 아버지의 대학 후배예요. 아마 그분이 내 얘긴 안 하셨을 텐데 대학 시절에 축구도 같이했지요.”방건일은 옛 추억을 떠올리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소예지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원장님. 아버지께선... 대학 이야기를 거의 하신 적이 없어서요.”방 원장은 그 시절을 떠올리듯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소영욱 교수는 그때 우리 학과의 스타였어요. 그런데 그분 딸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뤄낸 성과라니, 참 대단하네요.”곧이어 그는 손짓으로 조교를 부르며 말했다.“일단 조교 선생이 병원 이곳저곳을 안내해 드릴 거예요. 이후엔 간단한 회의도 하나 예정되어 있습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따라 병원 시설을 둘러보았다.그날 하루는 병동을 확인하고 회의에 참석하느라 쉴 틈 없이 바빴고 밤이 되어서야 겨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늦은 밤, 실험 대상자들의 자료를 들고 숙소에 돌아온 소예지는 피곤했지만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집중해서 자료를 검토하고 있던 밤 9시 반쯤, 휴대폰이 울렸다.고이한이 영상통화를 보내왔지만 소예지는 통화의 주인공이 딸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예상대로, 통화 연결과 동시에 귀엽고 익숙한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엄마! 이것 봐요, 아빠가 사줬어요!”고하슬은 뭔가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화면에서 살짝 물러나더니 손에 들고 있던 토끼 인형을 흔들어 보였다.“엄마, 예쁘죠?”“응, 정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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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8화

경주에서의 업무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군의대 팀은 전반적으로 실력도 탄탄했고 실험 대상자들의 반응도 안정적이었다. 약효 또한 정밀하게 측정되고 있었기에 프로젝트는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어느새 시간이 흘러 출장 다섯 번째 날이 되었다. 병원 안팎으로 은근한 명절 분위기가 감돌았고 직원들에게는 송편 선물이 나눠졌다.유예나는 예쁜 포장 상자에 담긴 송편을 들고 와 소예지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두며 말했다.“소 선생님, 올해 추석은 병원에서 보내셔야 할 것 같아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요.”“괜찮아요. 일이 우선이죠.”소예지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핸드폰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추석에 시간 돼요? 식당 예약해 놨는데, 같이 추석 보내지 않을래요? 애들도 있으면 덜 심심할 것 같아서요.]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윤하준의 따뜻한 배려에 마음이 조금 뭉클해졌다.[고마워요. 마음만 받을게요. 제가 지금 경주에 출장 와 있거든요. 하슬이는 지금 할머니 댁에 있고요.][경주요? 언제 간 거예요?][거의 일주일 됐어요.][업무 때문에 간 거예요? 그러면 출장 끝나고 돌아오면 다시 봐요.][네, 업무 때문에요.]잠시 후, 윤하준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그날 우리 엄마가 보모한테 간식이랑 보양식 챙겨서 보내라고 했다면서요. 혹시 놀라진 않았죠?]뒤늦게 들은 이야기인 듯했다.[아니에요.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 정말 감사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 번거롭게 해드릴 순 없을 것 같아요.]소예지는 완곡하게 사양했지만 그 말 속엔 더 이상 주경화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윤하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의중을 곧장 읽고 답장을 보냈다.[알겠어요. 엄마께 말씀드릴게요. 출장지에서도 몸 잘 챙기시고 추석 잘 보내세요.][윤 대표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윤하준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다음 날, 소예지는 평소처럼 팀원들과 병동을 돌았다. 환자들의 약물 복용 후 상태를 확인하고 반응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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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9화

소예지는 딸의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조용히 고이한에게 말했다.“당신은 바쁠 테니 가봐. 하슬이는 내가 데리고 갈게.”그러자 고하슬이 놀란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엄마, 우리 아빠랑 같이 밥 안 먹어요?”소예지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이따가 엄마가 시내 데려가서 재미있는데 보여줄게, 어때?”하지만 고하슬은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근데 난 아빠랑 엄마랑 셋이서 같이 놀고 싶은데...”맑고 또렷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명절이라는 걸 느껴서일까, 아이는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는 시간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고이한은 말없이 소예지를 바라봤고 그녀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오직 딸만을 바라보았다. 고하슬의 얼굴엔 실망이 어른거렸고 혹시 엄마가 거절할까 봐 조심스러운 기색마저 스쳤다.그 모습에 소예지의 마음이 아릿하게 저려왔다.결국 그녀는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조용히 말했다.“그래, 저녁은 같이 먹자.”그 말을 들은 고하슬은 두 팔을 번쩍 들고 깡충 뛰며 외쳤다.“야호! 드디어 아빠랑 엄마랑 셋이서 같이 보낼 수 있어!”고이한이 예약한 식당은 경주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병원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고하슬은 낯선 도시가 신기한 듯 창밖을 연신 바라보며 이곳저곳에 반응을 보였다.소예지는 그런 딸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고이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꾹 눌러내며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식당은 아늑한 프라이빗 룸이었고 고하슬은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앉아 두 눈을 반짝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소예지는 고이한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딸이 좋아하는 반찬을 골라주고 먹기 좋게 잘라주며 시종일관 시선을 아이에게만 두었다.고이한은 의외로 부드러운 눈빛을 띠고 있었고 고하슬 입가에 묻은 스테이크 소스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는 그의 손길은 낯설 만큼 정갈해 보였다.소예지는 거의 먹지 않았고 딸이 맛있게 배부르게 먹는 모습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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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0화

“네.”소예지는 짧게 대답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바로 그때, 조용했던 룸의 문이 열리며 고이한이 고하슬의 손을 잡고 들어섰다.그는 복도에서 소예지가 웃으며 통화하던 모습을 봤는지 무심한 듯 그녀 쪽을 스치듯 바라봤다.그 시선에는 말은 없었지만 분명한 오해와 불쾌함이 배어 있었고 단순한 ‘업무’ 때문만은 아니라는 판단이 고이한의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엄마, 손이 끈적끈적해서 아빠가 나 손 씻으러 데려다준다고 했어요.”고하슬은 밝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고 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딸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소예지가 룸으로 돌아와 막 젓가락을 들려던 순간, 테이블 위에 놓인 고이한의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무심코 고개를 돌린 소예지는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을 보는 순간 눈빛이 차갑게 흔들렸다. 진동은 잠시 후 멈췄지만 곧바로 네댓 개의 메시지 알림음이 연이어 울렸고 사진 첨부 알림까지 뜬 걸 보니 심유빈이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낸 모양이었다.잠시 뒤 고이한이 고하슬을 데리고 돌아왔지만 그는 끝내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았다.“오늘 밤 하슬이 나랑 잘 거니까 먼저 데리고 갈게.”소예지가 먼저 말을 꺼내며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그러자 고하슬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엄마, 나 아직 밖에서 더 놀고 싶어요!”소예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럴까? 엄마랑 같이 시내 구경하러 가자.”그 순간, 고이한도 계산을 마치고 돌아왔다.“운전기사가 데려다 줄 거야.”“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이제 어떤 형태로든 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고이한은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하슬의 안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사실 경주는 비교적 안전한 도시였지만 낯선 곳에서 어린 딸과 함께하는 상황에서 그의 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결국 소예지는 딸을 안고 조용히 그의 차에 올랐다.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백미러 너머로 고이한이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차가 도로로 들어서자 소예지는 기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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