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531 - Chapter 540

552 Chapters

제531화

고이한의 차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소예지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딸과의 짧은 만남이 끝났다는 사실은 그녀의 가슴 한편을 시리게 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 앞에 반드시 이겨내야 할 전쟁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후 소예지는 전력을 다해 신약 테스트 업무에 매달렸다.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전투였고 그녀는 단 하나의 수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직접 시험자들의 반응을 추적하고 기록하고 실험 매개변수를 반복적으로 교차 검토했다.그 와중에도 테스트 결과를 더욱 정밀하게 다듬기 위해 무려 여섯 건의 최적화 방안을 정리해 양정화에게 제출했다.일주일이 지나자, 출장 일정은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그녀의 치밀한 태도와 냉철한 분석력은 팀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제 모두가 그녀의 실력과 성실함을 인정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병동에서 일하고 있던 소예지에게 한 간호사가 숨을 고르며 급히 달려왔다.“소 선생님! 3번 병상 대상자에게 약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났어요.”소예지는 곧장 병실로 달려가 환자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고 빠르게 대처해 약물 처방을 조정했다.병실을 나오자, 비로소 짧은 피로가 몰려왔다.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소 선생, 내 사무실로 잠깐 와요.”병원장이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병원장실로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책상 앞에는 정갈한 군복을 입은 남자의 단단한 체격과 강직한 인상이 한눈에 들어왔다.눈매와 이마에는 묘하게 따스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고 기품 있는 미소는 그의 존재를 더욱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소예지 씨, 오늘 국방부 장관님이 병원 시찰차 방문하셨어요. 신약 테스트 책임자라고 들으시곤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순간, 당황과 긴장, 놀라움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소예지는 곧바로 감정을 다잡고 허리를 숙였다.“장관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임성국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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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2화

“보도에 따르면...”뉴스 앵커의 또렷한 목소리가 고씨 저택 안 곳곳에 울려 퍼졌다.“국방부 장관께서 이번 신약 투약 상황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해당 신약의 수석 연구원인 소예지 씨와도 따뜻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졌습니다.”그 순간 최현숙은 귀를 의심했다.“이한아, 방금... 소예지 이름이 들리지 않았니?”놀라 고개를 홱 돌려 손자를 바라본 그녀의 눈빛은 또렷했다.고이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소예지, 지금 경주 병원에 있습니다.”최현숙의 얼굴엔 순식간에 환한 기색이 번졌다.“예지는 정말 대단하구나! 국방부 장관님께서 직접 만나 오시다니... 세상에, 이게 어디 쉬운 일이니. 참 자랑스러운 일이야.”그때 마침, 거실 한편에서 가정부와 대화를 나누던 진가영이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한편, 고이한은 딸이 가지고 놀던 블록을 손에 든 채 무언가에 깊이 잠겨 있었다.그러다 동그란 얼굴이 눈앞을 콕 들이밀었다.“아빠, 차례에요.”고이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전화 하나만 하고 금방 올게.”그는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고 잠시 후, 연결된 상대방이 간결하게 보고했다.“국방부 장관께서 소예지 씨와 단독으로 15분 이상 대화를 나누셨습니다.”그 순간 고이한의 뇌리에는 며칠 전 추석 밤, 소예지가 임현욱과 즐겁게 통화하고 있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이제 그 아버지와 단독 면담이라니...’그는 휴대폰을 쥔 손에 불필요할 만큼의 힘을 주었다.창밖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 속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먹먹한 파도가 일렁였다.사흘 뒤.소예지는 현장에서의 업무를 깔끔히 마무리한 뒤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애초에 열흘짜리 출장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열닷새나 현지에 머물며 기술 지도를 맡았고 이제는 A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그곳에는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이번 주부터 새 학기를 시작하는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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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3화

차 안은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이야기의 중심은 대부분 아이였고 대화 사이사이엔 자연스러운 웃음이 번졌다.긴 비행 끝에 찾아온 피로도 윤하준과의 담담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소예지의 집 앞에 도착하자 윤하준은 말없이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고 그녀의 캐리어를 꺼내 조심스레 건넸다.“내일 유치원에서 봐요.”“네, 고마워요. 조심히 가요.”소예지는 진심이 묻어나는 말투로 인사했다.그녀의 눈 밑에 희미하게 드리운 푸르스름한 다크서클을 본 윤하준은 요즘 그녀가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오늘은 꼭 푹 쉬어.”그 말을 끝으로 그는 조용히 차 문을 열고 자리를 떴다.소예지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이제 정말, 더는 신세를 지지 말자...’오늘도 그저 ‘오늘 안에 돌아온다’고만 말했을 뿐인데 윤하준은 반나절 일정을 비워 공항까지 직접 마중 나와주었다.그의 배려는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오후 다섯 시.소예지는 진가영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를 데리러 가겠다고 전했고 진가영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래. 옷이랑 장난감 좀 챙겨놓을게.”약 10분 뒤, 소예지가 초인종을 누르자 진가영은 고하슬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엄마!”고하슬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엄마 품에 안겼고 소예지는 딸아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무슨 그런 말을 해. 내 손녀인데 당연히 돌봐야지.”진가영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께 인사드려야지.”소예지의 말에 고하슬은 공손히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고 진가영은 그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불과 1년 전만 해도 이 집 문 앞에서 어색하게 서 있던 여자가 이제는 몸짓 하나, 눈빛 하나에도 당당함과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집으로 돌아온 소예지는 온전히 엄마의 역할로 돌아가 딸의 새 학기 준비물과 가방을 정리하고 방학 숙제를 한 번 더 점검했다.부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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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4화

이번 신약 출시로 인해 연구팀의 기존 프로젝트는 모두 중단되었고 전 인력이 신약 연구에 집중됐다.테스트가 안정 단계에 접어들자 양정화는 직접 현장을 총괄하기로 결정했고 동시에 소예지 본래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새로운 연구 과제를 맡기기로 했다.그리고 그 결정은 고이한 역시 바라던 방향이기도 했다.“소예지, 네 이번 성과는 정말 인상적이었어. 솔직히 말하면 너의 실력은 이미 나를 뛰어넘었고 이제는 독립적으로 팀을 이끌 수 있는 수준이야.”소예지는 민망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교수님, 저 놀리시는 거 아니에요?”“아니야, 진심이야. 농담 아니야.”양정화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고 오직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네가 얼마나 뛰어난지 이번에 확실히 증명됐어. 국방부 장관님이 직접 시간을 내서 너를 만났잖아? 솔직히 말해 나는 수많은 제자를 지도해왔지만 너처럼 타고난 재능을 가진 학생은 처음이야.”“그건...”소예지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장관과의 만남이 오롯이 자신의 실력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왜?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어?”양정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억지로 웃으며 넘겼다.“그냥, 제가 운이 좋았던 거예요. 마침 장관님 일정이 맞았던 거고요.”양정화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건 운이 아니라 실력 때문이야. 참, 이거 봐. 네가 맡게 될 다음 연구 과제야.”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 한 장을 꺼내 건넸다.소예지는 의외라는 듯 문서를 받아 펼쳤고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자 눈이 커졌다.이번엔 유전체 분석 심화 연구 과제였다.“지난번에도 이 분야에서 네가 굉장한 능력을 보여줬잖아. 이번엔 더 큰 성과를 낼 거라 믿어.”서류를 천천히 덮은 소예지는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조용히 고개를 들어 양정화를 바라보았다.“교수님, 전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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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화

“양 교수님께 제 결정을 이미 말씀드렸어. 우리 사이에도 더 이상 할 얘기는 없어.”소예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커피가 든 컵을 들고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삼십 분 뒤에 봐. 내가 직접 찾아갈 거니까.”소예지가 대답할 틈도 없이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고 짧은 통화음만 남았다.소예지는 짜증 섞인 숨을 내쉬었다.그의 말투는 마치 자신이 여전히 그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인 양 들렸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가 오든 말든, 전혀 상관없었다.이번 신약 테스트가 마무리되면 예정대로 실험실을 떠날 생각이었고 그 누구도 그녀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었다.같은 시각, 양정화의 사무실.젊은 연구원 서지나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양 교수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응, 들어와. 무슨 일이야?”서지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교수님 통화하시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요... 소예지 선배에게 독립 PI 자리를 주신다고 해서요. 혹시 가능하다면 제가 그 팀에 합류할 수 있을까요? 제 대학 논문도 그 분야였고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양정화는 잠시 멈칫한 채 서지나를 바라보았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하지만 교수님, 다음 달이면 PI가 설립된다면서요?”서지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양정화는 깊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사실은 소예지가 실험실을 떠날 생각이래. 아직 설득 중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선...”서지나는 놀라서 말을 끊었다.“뭐라고요?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한다고요?”그녀는 소예지의 팀에 합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기에 충격은 더 컸다.“그래서 나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설득 중이야.”양정화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사무실을 나온 서지나는 복도를 걸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만약 소예지 선배가 정말 떠난다면 다음 과제는 누가 맡게 될까?’그 순간,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소예지와 강준석을 제외하면 그만한 경력과 실력을 가진 이는 안채린뿐이었다.망설임 없이 그녀는 메시지를 보냈다.[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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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6화

소예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그건 당신이 허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고이한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무거운 감정이 깔려 있었다.“소예지, 제발 고집부리지 마. 내가 줄 수 있는 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최상의 자원이야.”소예지는 비웃듯 코웃음을 흘렸다.“주고 싶은 건 당신 사정이고 받을지 말지는 내 선택이야.”고이한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어졌고 눈동자엔 얽히고설킨 감정이 스쳤다.“정말 그렇게까지 나를 미워해?”‘미워한다고?’그를 미워할 시간조차 아까웠다.감정도 관심도 더는 낭비할 가치가 없었다.소예지는 대꾸 없이 침묵했고 고이한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그렇게까지 하면서 정말 떠날 거야?”소예지는 고개를 들었다.맑고 서늘한 눈빛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고이한, 난 지금 허락을 구하러 온 게 아니야. 그냥 통보하러 온 거지.”고이한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최소한 신약 테스트 결과가 나올 때까진 있어 줘. 앞으로 석 달 정도 남았잖아.”소예지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테스트 종료까지 석 달, 지금 떠나겠다고 말하기엔 시기가 조금 이르긴 했다.“물론. 책임지고 마무리할 거야. 해야 할 일은 다 끝내고 떠날 테니까 걱정 마.”고이한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다시 덧붙였다.“그 석 달 동안 한 번만 더 생각해 봐.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결정해도 늦지 않아.”그러나 소예지의 대답은 단호했고 그 한마디가 모든 여지를 닫아버렸다.“이미 내린 결정이야.”고이한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단단히 굳은 눈빛과 물러섬 없는 얼굴 속에서 그는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읽었고 더는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고 싶은 마음만은 가슴 깊은 곳에서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독립 PI 건은 이미 양 교수님께 넘겼어. 연구 자금도 제한 없이 지원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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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7화

짐 정리를 끝낸 안채린은 붉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소예지, 이번 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널 이겨야겠어.”“네가 실험실에서 절대적인 존재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대체 불가능한 인물은 아니야. 나 안채린도 있으니까.”그 시각, 양정화는 조교에게서 고이한이 잠시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그가 직접 연구소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양정화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소예지를 붙잡으러 온 거겠지.’개인적인 감정이나 관계를 떠나 양정화는 진심으로 소예지가 이곳에 남기를 바라고 있었다.이곳은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 인프라를 갖춘 환경이었고 무엇보다 고이한이 그녀를 위해 만들어준 조건은 국내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힐 정도로 뛰어났다.특히 이번에 추진 중인 독립 PI 프로젝트는 연구비에 제한이 없는 파격적인 지원이 예정되어 있었고 소예지가 원하기만 한다면 고이한은 어떤 자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런 최상의 환경에서도 그녀가 정말로 떠나겠다면 그건 너무도 아쉬운 일이었다.오후 두 시 반.안채린이 다시 연구소로 복귀했다.여유롭고 자신감이 담긴 미소를 머금은 채, 양정화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양 교수님, 저 돌아왔습니다.”안채린은 양정화가 직접 지도한 제자이자 늘 기대를 걸어온 인물 중 하나였다.양정화는 고개를 들며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채린아, 이렇게 빨리 왔네? MD 쪽 프로젝트는 다 끝난 거야?”“네, 거의 마무리 단계라서 강 선배가 마저 맡기로 했어요.”안채린은 말하면서 한 권의 보고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이건 MD 쪽에서 진행한 연구 보고서예요. 시간 나실 때 한 번 봐주세요.”양정화는 보고서를 받아 몇 장을 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잘했네. 정리도 깔끔하게 잘했고.”짧은 칭찬 한마디에 안채린의 속은 은근히 들뜨기 시작했다.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는 확신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움트고 있었다.“교수님, 아까 1층에서 서지나를 만났거든요. 소예지 선배가 실험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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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8화

바로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소예지가 서류를 안고 조용히 들어섰다.안채린의 눈빛 깊은 곳엔 질투의 불꽃이 번뜩였다.소예지도 안채린을 보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곧 조용히 입을 열었다.“교수님, 제가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하지만 양정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들어와.”그리고는 안채린을 향해 덧붙였다.“채린아, 넌 먼저 나가봐.”그 한마디에 안채린의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갔다.짧은 지시였지만 그 안에는 누가 더 중요한지에 대한 양정화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네, 교수님.”안채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그녀는 소예지 쪽으로 걸어가며 일부러 마주 보았지만 소예지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평온한 눈빛으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안채린이 이렇게 서둘러 실험실로 복귀한 이유가 독립 PI 프로젝트를 차지하기 위함이라는 걸 소예지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무엇보다 그녀는 자신과 고이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그 자리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은 안채린일 수밖에 없었다.소예지가 자리에 앉자 양정화가 조용히 물었다.“아까 고 대표가 다녀갔지? 어땠어, 널 붙잡던가?”소예지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양 교수님, 전 이미 결정했어요.”짧은 대답 속에는 어떤 말로도 되돌릴 수 없는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양정화는 그 말에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억지로 붙잡을 순 없지. 그래도 신약 테스트가 아직 석 달 남았으니까 그동안은 천천히 다시 생각해 봐도 돼.”소예지는 서류를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마지막까지 책임은 다하겠습니다.”소예지가 사무실로 돌아간 직후, 양정화의 휴대폰이 울렸다.“여보세요? 고 대표.”전화기 너머로 고이한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양 교수님, 방금 하나 제안이 떠올라서요.”“그래? 무슨 제안인데?”양정화는 흥미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독립 PI 자격은 그대로 유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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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소예지는 고이한이 자신을 쉽게 놓아주지 않으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런 제안을 들고 나올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미 떠나기로 결심한 이상, 그가 어떤 조건을 내걸든 누구를 보내 설득하려 하든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양 교수님, 제 대신 고 대표님께 전해주세요.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이제 그만하시라고요. 전 그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 없습니다.”양정화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번 제안은 사실상 고이한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큰 양보이자 마지막 타협이었고 소예지가 이 기회를 받아들인다면 연구자로서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터였다.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조금만 더 생각해 봐.”양정화는 조심스럽지만 진심을 담아 권했다.“이 조건은 너한테 나쁠 게 하나도 없어. 실험실을 떠나도 계속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니?”잠시 생각에 잠긴 소예지는 고개를 들어 조용히 말했다.“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교수님.”양정화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이건 고 대표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야. 나 역시 연구자로서 네게 권하고 싶은 길이기도 해. 과학 연구라는 게 자원과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잘 알잖아. 감정적인 이유로 너 자신의 미래를 가로막지 않았으면 해.”소예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소예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조건이 누구에게든 거절하기 힘든, 꿈같은 제안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조심스레 몇 마디쯤은 권했을 터였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양정화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듯 설득을 이어갔다.“너무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이걸 그냥 ‘협업’이라고 생각해 봐. 고 대표는 네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거고 넌 그의 자원과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잖니.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거야. 간섭하지 않고 각자 갈 길을 가는 것, 그게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일 수도 있어.”소예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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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0화

소예지는 잠시 멍해졌지만 윤하준이 이 소식을 알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어차피 이곳에는 지난번 지유선 연구소 출신 연구원들이 여럿 새로 들어왔고 소문이 퍼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맞아요. 3개월 후에 떠나려고요.」그녀가 답장을 보내자, 윤하준은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이제 좀 쉬어야 할 때가 됐어요.」「네. 이번 기회에 좀 쉬려고요.」「좋아요. 그럼 나중에 시간 나면 밥 한 번 사요.」소예지는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윤하준에게 이미 두 번이나 밥을 사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그냥 넘겼던 일이 떠올랐고 이제는 정말 제대로 대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럼 내일 어때요? 오전에 시간 있어요?」스케줄을 확인한 그녀가 먼저 제안하자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좋죠. 내일 연락할게요.」그렇게 대화를 마친 윤하준은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실험실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후 소예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지난 1년 동안 제대로 쉬어본 적 없이 달려왔지만 신약 테스트 결과마저 점점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게다가 초기 백혈병 환자 중 한 명은 증상이 완전히 호전되어 완치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다.그 성과가 담긴 최신 보고서를 바라보며 소예지는 잔잔한 기쁨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그날 저녁, 임재석은 다음 날 오전 회의 참석을 요청했고 소예지는 마침 윤하준과 점심 약속을 잡아둔 터라 회의 후 업무에 지장 없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다.다음 날, 소예지는 양정화에게 반나절 연차를 신청했다.오전 10시에 예정된 회의에 참석해야 했기에 그녀는 평소처럼 단정하게 차려입고 호텔로 향했다.호텔에 도착하자 임재석과 몇몇 고위 간부들이 차례로 그녀에게 업무 보고를 시작했고,소예지는 이미 1년 동안 호텔 운영 전반을 파악해 왔기에 회의는 막힘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이번 여름 성수기 동안, 지난 분기에 비해 객실 이용률이 18% 상승했습니다. 평균 객실 요금도 안정적으로 오르고 있고요.”소예지는 통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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