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541 - Chapter 550

552 Chapters

제541화

윤하준은 소예지가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는 그 짧은 동작을 놓치지 않았고 무언가를 눈치챈 듯 시선을 살짝 돌려 VIP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이윽고 음식이 차려지자 그는 자연스럽게 아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자칫 딱딱해질 수 있었던 식사 분위기 속에서 소예지가 편하게 웃을 수 있도록 배려했고 그의 그런 배려는 꽤 효과가 있었다.한 시간이 흘러 식사를 마친 후, 윤하준은 시계를 슬쩍 바라보다가 말했다.“아직 이른데 근처 카페라도 갈래요?”소예지는 미안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늘 오후에 실험실 회의가 하나 있어서요.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그녀의 일정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윤하준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오랜만에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래요. 오늘 식사 즐거웠어요. 나 이번에 보름 정도 해외 출장이 잡혀서 아마 다시 뵙는 건 11일 이후쯤 될 것 같아요.”소예지는 잔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일 잘 마무리하고 돌아와요. 시간 맞으면 또 봐요.”윤하준은 소예지의 조용한 배려 속에서 그녀 특유의 따뜻함을 다시금 느꼈다.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고 담백했으며 진심으로 예의를 다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동시에 그 시선 속에는 자신을 ‘친구 그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분명한 선이 있었다.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 외의 만남은 대부분 윤하준이 우연을 가장해 만든 필연이었고 교묘하게 설계된 마주침에 불과했다.그녀를 식당 입구까지 배웅해 함께 걷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임재석이 다가왔다.“윤 대표님, 오랜만입니다.”임재석이 반갑게 인사하자 윤하준은 자연스럽게 물었다.“소 대표님, 찾으신 건가요?”“네, 업무 관련해서요.”임재석은 특유의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그럼 두 분 업무 보시죠. 전 이만 가볼게요.”윤하준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소예지 씨, 국가 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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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2화

“서두를 필요는 없어. 당신에겐 아직 석 달이라는 시간이 있으니까.”고이한은 그 한마디를 남긴 채 조용히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엘리베이터 버튼은 아직 눌리지 않은 채였고 소예지의 시선은 허공에 머문 채 멈춰 있었다.마음은 이미 지금 이 순간을 떠나, 2년 전 그 밤으로 되돌아가 있었다.D국의 지하 연구실에서 실험에 몰두하고 있던 그날 밤, 양희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고이한이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고 차 안에서 다른 여자를 보았다는 이야기였다.그 한 통의 전화는 마치 청천벽력처럼 그녀를 덮쳤고 손에 들고 있던 실험을 멈추게 만들었다.소예지가 하고 있었던 건 바로 전신마비 판정을 받은 원숭이에게 뇌에 이식한 칩을 신경과 연결하여 회복 가능성을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그 원숭이는 야생에서 벼락을 맞은 후 거의 생명을 포기해야 했던 개체였고 소예지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그리고 바로 그날 밤, 기적이 일어났다.그 원숭이가 스스로 앉아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이를 지켜본 지도 교수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이라며 숨을 죽이고 감탄했다.세상은 그 한밤의 사건을 알지 못했지만 소예지에게 있어 그것은 의학과 과학, 그리고 신념이 교차한 결정적 순간이었다.하지만 그 기적을 만들어냈던 원숭이는 한 달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소예지는 실험실을 정리한 뒤 조용히 가정으로 돌아갔다.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연구도 결국 고비용이라는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끝내 중단되고 말았다.그 일은 어느 의학지에도 실리지 않았고 어떤 회의에서도 논의되지 않았으며 세간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았다.기적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그리고 몇 년이 흐른 지금, 고이한이 선구안 있게 그 분야의 연구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나선 것이다.정신을 차리고 보니,소예지는 엘리베이터 앞에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잊었다고 믿었던 과거의 파문은 조용한 일상에서도 여전히 잔잔한 물결을 남기고 있었다.MD, 고이한의 영향력과 자금력이라면 그가 말한 뇌-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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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3화

소예지는 미안함이 담긴 눈빛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미안해, 강 선배.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한 일이라 따로 얘기할 시간이 없었어.”강준석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역시 소예지가 고이한 산하의 실험실에서 견뎌온 지난 시간이 얼마나 답답하고 벅찼는지를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네 마음, 충분히 이해해. 다만 정말 아쉽네. 너 없는 실험실은 왠지 공허할 것 같아서.”소예지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선배, 나 그냥 이곳을 떠나는 것뿐이지 연구 자체를 그만두는 건 아니잖아.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올 거야. 꼭.”강준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웃었다.“그렇지. 네 실력이라면, 널 데려가고 싶어 하는 실험실이 수도 없이 많을 거야. 국가 연구팀도 분명 너를 원할 거고.”잠시 말을 멈춘 그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조심스레 물었다.“그 사람 동의는 한 거야?”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누구를 말하는지는 서로 알고 있었다.소예지는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담담히 대답했다.“내가 어디에 있든 그 사람의 동의 같은 건 필요 없어.”강준석도 알고 있었다.고이한은 투자자일 뿐, 그녀를 통제할 자격은 없다.하지만 문득 어제 주현우가 스치듯 전했던 말이 떠올랐다. MD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포함한 미래 의료 기술 분야에서 대대적인 연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였다.비록 소예지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 거라 여겼지만, 동시에 그녀가 과연 그 매혹적인 프로젝트를 외면할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그 순간, 문서 뭉치를 들고 지나가던 안채린이 강준석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그녀는 순간 심장이 빨라졌지만 강준석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오롯이 소예지만 바라보고 있었다.안채린의 시선은 서서히 가라앉았다.소예지가 있는 한 그의 눈길은 단 한 번도 다른 곳을 향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다면 강준석을 마주할 기회는 자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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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4화

오후 회의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소식들로 가득했다.양정화는 몇몇 환자들의 회복 상황을 보고했고 비록 모든 과정이 여전히 시간을 요하는 일이긴 했지만 전반적인 수치는 확실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회의 내내 양정화의 시선은 여러 차례 소예지를 향했다.그 눈빛엔 칭찬과 신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안채린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한때 자신이야말로 양정화가 가장 신뢰하던 연구원이었다.하지만 돌이켜보면 소예지는 기회도 환경도 언제나 자신보다 더 좋은 조건 속에 있었다.실험실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두 개의 핵심 프로젝트 중심엔 늘 소예지가 있었고,반면 자신은 MD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실상은 연구원이라는 이름 아래 데이터 정리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 뿐이었다.정작 중요한 결정과 연구의 중심은 늘 소예지의 몫이었고 자신은 어깨너머로 지켜보기만 할 수 있었다.그런 상황이 쌓일수록 자존심은 조금씩 금이 갔고 질투심은 서서히 피어올랐다.그때, 안채린의 휴대폰 화면이 깜빡이며 알림이 도착했다.조금 전 저녁 식사를 제안했던 심유빈의 답장이었다.“채린아 오늘 저녁엔 어렵겠어. 오늘 밤 고 대표랑 해외 출장 가기로 했거든.”짧은 한 줄의 메시지였지만 안채린의 입가엔 묘한 웃음이 번졌다.‘그래. 하늘은 모든 걸 다 주진 않지.’소예지가 연구 성과를 가졌다면 적어도 ‘고이한의 마음’만큼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이번 신약 프로젝트의 성공은 단지 실험실의 업적에 그치지 않았다. 이는 곧 고신 그룹 제약 부문이 벌어들일 천문학적인 수익과 직결된 일이었고 그 모든 이익이 어쩌면 심유빈과 그녀가 낳은 아이의 몫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통쾌함이 밀려왔다.회의가 끝난 후, 소예지는 먼저 화장실로 향했다.곧이어 서지나와 안채린도 함께 들어왔고 각자 칸으로 들어선 그때, 서지나가 말을 꺼냈다.“채린 선배, 우리 조카가 심유빈 씨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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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5화

소예지는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완벽한 결혼식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박시온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두 사람은 이내 자연스럽게 결혼 준비에 필요한 세부 사항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며 계획을 나눴다.결혼식은 11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시간은 넉넉했다.그때 박시온의 휴대폰에 연예 뉴스 알림이 떴고, 무심코 화면을 내려다본 그녀는 익숙한 이름인 ‘심유빈’을 발견해 기사를 열어보았다. 독일의 한 국제 향수 브랜드가 새 모델을 발표한다는 소식이었으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국제 피아니스트 심유빈이었다.얼마 전 심유빈의 근황이 궁금해 잠깐 검색했던 탓인지 요즘은 그녀의 뉴스가 계속 추천되고 있었다.며칠 전에는 그 향수 브랜드가 A시에서 주최한 만찬 행사에도 그녀가 초청되었는데 대접은 그야말로 브랜드의 여왕처럼 화려했다.박시온은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지금 심유빈이 누리고 있는 명성과 부, 화려한 삶의 대부분이 결국 고이한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신했다.게다가 최근엔 고이한이 성양 그룹의 상장까지 주도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느껴지는 감정은 솔직히 억울함과 분노였다.“무슨 생각해?”소예지가 손을 씻고 돌아오며 고하슬의 손을 잡고 다정히 묻자, 박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응, 그냥 결혼식 준비할 거 몇 개 떠올려봤어.”그때 고하슬이 불쑥 물었다.“엄마, 내일 아빠한테 나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할머니 집에 가고 싶어요.”순간, 소예지는 짧게 멈칫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대답했다.“아빠는 출장 중이야. 열흘쯤 있어야 돌아오실 거야.”“알겠어요.”고하슬은 입을 살짝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장난감에 집중했다.박시온은 조금 전 뉴스에서 심유빈이 독일에 있다는 내용을 떠올렸다.‘혹시 고 대표도 그 여자와 함께 출국한 걸까? 정말 어디든 같이 다니는 모양이네.’저녁 8시 반,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소예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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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6화

아침 8시, 고하슬이 잠에서 깨어나자 집 안은 조금씩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양희순은 이미 정갈한 아침 식사를 모두 준비해 두었고 세 사람은 9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다.8시 반쯤, 거실 한쪽에 엎드려 자고 있던 젤리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무언가를 감지한 듯 코를 킁킁거리던 녀석은 이내 잔뜩 경계한 채 마당 쪽으로 달려 나갔다.그리고는 담장 근처에서 다시 한번 냄새를 맡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깜짝 놀란 젤리는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고 양희순은 이른 아침부터 누가 찾아온 건지 궁금한 얼굴로 인터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잠시 뒤,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세상에, 지난번에 왔던 그 멋진 청년이잖아!’현관문을 열자 고급스러운 검은색 랜드로버 한 대가 집 앞에 주차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편안한 캐주얼 차림의 임현욱이 서 있었다.“안녕하세요. 소예지 씨 댁 맞죠?”그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부드러웠고 미소 너머로 느껴지는 분위기엔 단정함과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맞아요! 사모님이랑 하슬이는 지금 막 아침 먹는 중이에요. 이따가 박물관 간다고요.”식탁에 앉아 있던 소예지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현관 쪽을 향해 나서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언제 왔어요?”“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원래는 미리 연락드리려 했는데...”쑥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소년 같은 순수함을 느끼게 했다.“아침은 드셨어요?”소예지가 묻자 그가 대답할 틈도 없이 반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현욱 아저씨다!”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달려왔고 임현욱은 등 뒤에서 조그만 선물 상자를 꺼내 건넸다.“하슬아, 이거 선물이야.”“와, 감사합니다!”딸아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소예지는 자연스럽게 말했다.“저희도 막 식사 시작했어요. 들어와서 함께 하세요.”임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오늘 박물관 간다고 들었어요. 저도 마침 시간이 비어서요... 혹시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그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소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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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7화

고이한은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무릎 위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더니 그는 손목시계를 흘끗 바라본 뒤 짧게 말했다.“박물관으로 가자.”김경환은 곧장 액셀을 밟았고 차량은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약 삼십 분쯤 지난 뒤 임현욱의 차가 먼저 박물관에 도착했고 그는 소예지와 고하슬과 함께 넓은 정원을 지나 본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차 한 대가 주차장에 급히 도착했다.타이어가 바닥을 스치며 날카롭게 브레이크를 밟은 그 차에서 뒷문이 열리자마자 고이한이 내려섰다.그 시각, 박물관 로비 안.임현욱은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소예지의 운동화 끈이 풀린 것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가만히 서 있어요.”뜻밖의 말에 소예지는 멈칫했고 옆에 있던 고하슬도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아저씨, 우리 게임해요?”“아니야.”그는 살짝 웃으며 조용히 소예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무슨 일인가 싶어 내려다보는 소예지의 시야 아래, 임현욱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신발 끈을 묶고 있었다.당황한 소예지는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서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그의 손이 그녀의 발목을 부드럽게 잡았다.“움직이지 말아요. 금방 끝나요.”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고하슬이 갑자기 물었다.“아저씨, 나비 모양으로도 묶을 수 있어요?”임현욱은 딸아이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그때였다.박물관의 커다란 유리문 앞, 막 들어서던 고이한의 시야에 그 장면이 고스란히 들어왔다.북적이는 로비 한복판, 소예지는 딸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고 임현욱은 무릎을 꿇은 채 정성스럽게 그녀의 신발 끈을 묶고 있었다.고이한의 걸음이 문 앞에서 우뚝 멈췄고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고하슬은 무언가를 임현욱에게 속삭였고 이내 까르륵 웃는 목소리가 로비를 환하게 울렸다.임현욱은 이어서 고하슬에게 다가가 아이의 운동화 끈도 다시 묶어주었고 그의 손끝에는 다정함이, 눈빛엔 장난기 어린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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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8화

하지만 소예지는 곧 생각을 바로잡았다.고이한이 했던 말은 아마 딸을 달래기 위해 내뱉은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딸은 이미 심유빈만큼의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소예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딸 앞에 쪼그려 앉아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빠가 일이 워낙 많아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나 봐. 그래서 못 온 걸 거야.”고하슬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시무룩해졌다.“난 진짜 오는 줄 알았는데.”소예지는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가볍게 웃었다.“그래도 오늘 재밌었지?”고하슬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청 재밌었어요.”“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메뉴 하나, 특별히 허락해 줄게.”“정말요? 그럼 아이스크림 먹을래요!”아이의 눈이 단숨에 반짝였다.소예지는 작게 한숨을 삼키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약속했으니까. 가자.”식당 안에서는 임현욱이 이미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직원과 몇 마디를 나누며 아이가 먹기 편한 메뉴를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고 소예지가 다가갔을 즈음엔 직원이 아이용 식단을 설명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며 소예지는 그의 자연스러운 배려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하슬이는 편식 안 해요. 그냥 아무거나 시키셔도 돼요.”소예지가 웃으며 말하자 고하슬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나 아이스크림 먹을래요!”임현욱은 웃음을 머금은 채 아이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몇 가지 더 골랐다.잠시 뒤, 고하슬 앞에는 커다란 바나나 스플릿 아이스크림이 놓였고 아이는 금세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식사를 하던 중, 임현욱이 자연스럽게 물었다.“이후 일정은 어떻게 돼요?”소예지가 대답하려는 순간, 고하슬이 먼저 신나게 끼어들었다.“엄마가 나 바닷가도 데려가기로 했어요!”임현욱은 기대가 담긴 눈빛으로 소예지를 바라봤다.“저도 사흘 정도 시간이 비어요.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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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9화

두 여자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죄송해요. 저희가 오해했네요.”임현욱은 예의 있게 고개를 끄덕였고 시선을 조용히 창밖으로 돌렸다.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 중 한 명은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 친구에게 몸을 기울이더니 조심스레 속삭였다.“어머, 싱글맘을 좋아하고 있는 거네...”둘은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였고 민망함을 감추지 못한 채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는 식당을 빠져나갔다.잠시 후, 소예지가 고하슬과 함께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두 여자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가 방금 전 상황을 놓친 것이 왠지 아쉽기도 했고 혹시 임현욱이 연락처를 건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어? 아까 그 아가씨들은 어디 갔어요?”고하슬이 궁금한 듯 물었고 임현욱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대답했다.“다 먹고 일어났나 봐요.”그러곤 소예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근데 외부 사람 눈에는 제가 소예지 씨 시동생처럼 보이나 봐요?”소예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글쎄요, 뭐... 그럴 수도 있죠.”임현욱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 미소 너머로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스쳐 지나갔다.그가 되고 싶은 건, 결코 그녀의 ‘시동생’ 따위가 아니었다.식사를 마친 후, 임현욱은 소예지와 고하슬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차 안에서 고하슬은 곧 깊은 잠에 빠졌다. 하루 종일 신나게 뛰어놀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집 앞에 도착하자 소예지는 조심스럽게 잠든 딸을 안아 들며 말했다.“오늘 하루 정말 감사했어요. 조심해서 가세요.”현관문이 열리자 양희순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하슬을 받아 안으며 물었다.“사모님, 임 선생님 안에 들어오셔서 좀 쉬었다 가시게 할까요?”뜻밖의 제안에 소예지는 당황해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들어오셔서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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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0화

소예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았다.사실 답장을 보낼 생각조차 없었지만 그가 불쑥 들이닥치는 걸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입력했다.[하슬이 자고 있어. 오지 마.]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되돌아온 답장은 단호했다.[조금 있다가 갈게.]소예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한 번 오겠다고 마음먹은 그를 몇 마디로 돌려세울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이 짧은 휴식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온 그녀는 서재 소파에 몸을 기대었고 곧이어 밀려든 나른한 피로에 이끌려 이내 눈을 감았다.저녁 다섯 시.정원 한쪽에서 젤리가 갑자기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뭔가를 감지한 듯 코끝을 실룩이며 대문 쪽을 주시했고 이내 기다렸다는 듯 낮고 흥분한 소리를 냈다.“젤리야, 왜 그래?”양희순이 이상함을 느끼고 밖으로 나섰다.녀석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곧장 대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 앞에 멈춰 섰다.바로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양희순은 인터폰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외쳤다.“어머, 하슬이 아버님!”서둘러 대문을 열자 문 앞에는 고이한이 정장을 한 손에 걸친 채 서 있었다.얼굴엔 피로가 엷게 배어 있었고 눈가에는 밤샘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하슬이 깼나요?”그가 묻자 양희순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자고 있어요. 사모님은 서재에서 쉬고 계시고요.”고이한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혼자 계신가요?”“네. 임 선생님은 모셔다드리고 곧장 가셨어요.”양희순이 담담히 사실을 전하자 고이한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거실로 들어섰다.“앉으시겠어요? 제가 하슬이 깼는지 볼게요.”양희순이 조심스레 묻자 고이한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직접 볼게요.”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이미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2층.서재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고이한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문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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