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801 - Chapter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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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1화

고이한은 하종호에게서 온 메시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눈빛은 깊고 어두웠다.그의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 위에서 잠시 머물다가 마침내 두 글자를 눌러 보냈다.[좋아.]고이한은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고 말없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뒤따라온 김경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오늘 저녁 일정 조정할까요?”“전부 취소해.”단호한 한마디였다.김경환은 더 묻지 않았다.오늘따라 유독 말수가 적었던 고이한이었다.분명, 방금 전 회의실에서 소예지가 단 한 번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던 일이 그의 마음에 깊은 파문을 남긴 것이다.수년간 고이한의 곁을 지켜온 김경환이었다.그의 속내를 전부 읽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서너 할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한편, 소예지는 회의를 마친 뒤 곧장 임재석과 함께 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식사 후에는 호텔 내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각 부서 고위 간부들의 업무 보고를 받았다.소예지는 회의실 상석에 앉아 차분한 시선으로 직원들을 바라보았다.“시작하세요.”마케팅부장이 먼저 일어나 프로젝터를 켰다.“대표님, 지난 분기의 호텔 스마트화 개조 프로젝트는 현재 약 3분의 1 정도 진행된 상태입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해 들었다.중간중간 예리한 질문을 던졌고 전문적인 영역에 접어들면 임재석이 재빠르게 보조 설명을 덧붙였다.재무 이사는 자료를 넘기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이 안건의 경우 예산 통제가 조금 더 최적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편성된 비용으로는...”그 말에 임재석이 소예지를 바라보았다.예산은 그의 권한 밖이었고 재무팀은 이 문제로 계속 이의를 제기해 왔다.그러자 소예지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예산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고객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안이에요. 기준을 낮춰가며 비용을 아끼는 방향은 필요 없습니다.”그 말에 임재석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이런 결단력에 이런 안목까지, 외적으로는 우아하고 침착했지만 그 내면은 단단하고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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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2화

“너희 집에서는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걸 알아? 아니면 너희 오빠는 바빠서 동생 하나 제대로 훈계할 시간도 없는 거야?”윤하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고수경을 내려다보았다.그 시선에 고수경은 손에 들린 가방끈을 꽉 움켜쥔 채 억지를 부렸다.“저는 저 자신을 대표해서 말한 거예요. 우리 오빠랑은 상관없어요.”“그래도 한때는 네 새언니였던 사람이야. 네가 그렇게 막말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윤하준의 말투는 단호했다.그는 고수경을 어릴 때부터 지켜봐 온 사이였고 동생처럼 아껴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실망과 분노가 앞섰다.고수경은 눈물을 머금은 채 윤하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하준 오빠는 왜 항상 저 여자 편만 드는 거예요? 계속 오빠한테 치근덕거리는 건 저 여자잖아요!”“소예지가 너희 오빠를 쫓아다니는 건지, 아니면 너희 오빠가 소예지를 붙잡고 있는 건지 그것부터 제대로 알고 말해.”윤하준의 어조는 냉정했다.“그리고 다시는 예지 씨를 괴롭히거나 하슬이한테 이상한 말 한 번만 더 해봐. 그땐 나도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그 말에 고수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윤하준의 말은 지난번, 그녀가 고하슬에게 ‘고모부’를 운운했던 일을 분명 염두에 둔 경고였다.입술을 꾹 깨문 고수경은 끝내 울음을 삼킨 채 눈가만 촉촉해졌고 윤하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은 채 소예지를 향해 돌아섰다.“아이들 데리러 가죠.”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수경을 한 번 힐끗 바라본 뒤, 윤하준과 나란히 학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던 고수경의 눈동자에 선명한 질투와 분노가 스쳤다.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스포츠카에 올라탔고 액셀을 세게 밟으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방금... 고마웠어요.”소예지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윤하준은 잠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이제는 고수경도 조금은 혼나야 할 때예요. 아무리 이한의 동생이라고 해도 계속 막무가내로 구는 걸 그대로 두는 건 아니죠.”소예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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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3화

하종호는 옆에 놓인 위스키 잔을 들어 올렸다.목을 뒤로 젖혀 단숨에 들이킨 뒤, 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그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깊은 곳에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이 술기운을 타고 서서히 일렁였다.“네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 얼마나 유빈 씨를 대신해서 억울했는지 말이야.”하종호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네가 내 친구니까 그동안은 이런 말들 전부 삼켜왔어.”그는 다시 술을 따랐다.이번엔 잔의 절반이 넘도록 들이켜고는 숨을 고르듯 짧게 들이마셨다.“오늘 너 불러낸 건 유빈 씨를 당장 책임지라고, 결혼하라고 압박하려는 게 아니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유빈 씨는 네가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누군가의 곁에서 소중히 여겨져야 할 사람이야. 네가 유빈 씨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면 차라리 빨리 놔줘. 그 사람 인생 망치지 말고... 다른 사람 인생도 망치지 말고.”“나와 심유빈은...”고이한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하종호가 잔을 다시 한번 세게 내려놓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너랑 유빈 씨 사이의 일은 네가 알아서 정리해. 하지만 분명히 말해둔다, 이한아.”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났다.“네가 또다시 유빈이 마음 다치게 하면 우리 친구 사이도 거기까지야.”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하종호는 흠칫했다. 고개를 들자 심유빈이 그들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그는 순간 술기운에 헛것을 본 건가 싶어 벌떡 일어서며 말을 더듬었다.“유, 유빈 씨가 왜 여기에...”심유빈은 그를 힐끗 바라본 뒤, 곧장 고이한을 향해 말했다.“이한 오빠, 나랑 하 대표...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고이한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이내 의자 등받이에 걸쳐 있던 외투를 집어 들며 하종호에게 말했다.“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그 말을 남기고 그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심유빈은 고이한이 앉아 있던 자리에 조용히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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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4화

심유빈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힘없이 웃었다.“이한 오빠를 탓하지 마요. 그 사람이 아니라 제가 원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하종호의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하지만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그의 목소리에는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스며 있었다.“유빈 씨는 십 년 동안 고 대표 곁을 지켰어요. 이제는 유빈 씨에게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요.”심유빈은 그를 향해 가볍게 눈을 흘기며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다.“하 대표님, 아까는 앞으로 이한이랑 제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벌써 말을 바꾸는 거예요?”그 말에 하종호는 말문이 막혔다.그는 투덜거리듯 옆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꿀꺽 넘겼다.“알겠어요. 앞으로는 안 껴들게요.”심유빈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불빛과 꽃장식, 고요한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종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지금의 그녀는 마치 액자 안에 걸린 한 폭의 유화처럼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심유빈은 그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 순간 하종호의 심장이 울려대기 시작했고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모든 감정이 들켜버린 것만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다.심유빈은 다시 시선을 내리깔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조용히 한 모금 마셨다.하종호는 그 찻잔이 조금 전까지 고이한이 마시던 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질투심이 차오르면서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같은 찻잔을 나눠 마시는 게 뭐 대수일까.’‘두 사람은 사실상 부부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사이일 텐데...’그녀의 아름다움도, 유혹적인 모든 순간도 고이한 앞에서는 이미 아무런 비밀이 아니었을 것이다.하종호는 그런 장면들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게 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감정이었다.식사가 끝났을 무렵, 그는 완전히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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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5화

안채린의 심장은 저절로 빨라졌다.‘독립 법인’이라는 말은 곧 독립 예산과 자체 관리를 의미했고 그건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온 기회 그 자체였다.그녀는 눈을 들어 슬쩍 소예지를 바라보았다.소예지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안채린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넌 그냥 연구원이잖아. 이걸 최종 결정할 사람은 결국 고 대표야. 그리고 그는 곧 내 미래의 형부가 될 사람이기도 하지.’“물론입니다. 고 대표님께서는 반년 안에 시제품을 확인하길 원하고 계십니다.”주현우가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갔다.“현재 민간 프로젝트 중에서도 이 세 분야가 시장성 면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습니다.”강준석은 얼굴이 다소 굳은 채로 입을 열었다.“이 문제는 고 대표님과 직접 논의가 필요합니다.”“강 박사님, 이 사안은 곧 이사회에서 결의될 예정입니다. 그 이후에 적절한 시점에 대표님과 미팅을 가지시죠.”주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답했다.사실 소예지 역시 이렇게 이른 시점에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프로젝트를 분리하는 데에 대해 우려가 없지는 않았다.하지만 고이한이 이 분야에서 이미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온 만큼, 이사회가 이 결정을 반길 가능성은 높았다.소예지는 이것이 어쩌면 고이한이 이사회를 달래기 위해 내민 하나의 카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뇌-컴퓨터 프로젝트에 과도하게 투자해 온 상황에서 이제는 수익이 가시화될 민간 응용 분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회의가 끝나자 강준석은 소예지와 조용히 몇 마디를 나눴고 이틀 안에 고이한과 직접 면담을 갖기로 했다.한편, 안채린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심유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언니, 고 대표님이 민간 프로젝트를 독립 연구팀으로 분리하려고 해. 나, 그중 하나 맡아서 독립 연구하고 싶어.][내가 이야기해 볼게.][나 자신 있어. 언니도 알잖아.][응. 기다려봐.]안채린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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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6화

그 남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탁월했다.소예지가 강준석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가 얼마나 예민해져 있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소예지는 내선 전화를 걸어 강준석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고 대표님이랑 식사 겸 얘기 나누기로 했어.”강준석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더는 문제를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오후 다섯 시, 소예지는 먼저 딸을 데리러 갔다.차 안에서 고하슬에게 오늘 저녁 고이한과 강준석이 집에 올 거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설명해 주었다.“정말요? 너무 신난다! 아빠를 볼 수 있는 거네!”고하슬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고 소예지는 그 반응을 보며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여섯 시를 막 넘긴 시각이었다.강준석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던 순간, 현관의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고하슬은 기다렸다는 듯 현관 앞으로 달려갔다.“분명 아빠일 거야!”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고이한이 서 있었다.“아빠!”고하슬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고 고이한은 그런 딸을 가볍게 안아 올린 채 거실로 들어왔다.강준석은 소파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고 대표님.”소예지는 미리 딸에게 오늘 만남은 업무적인 자리라는 걸 설명해 둔 상태였다.고하슬은 크게 묻지 않고 얌전히 TV 앞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2층 서재에서 얘기해.”소예지는 두 남자를 차가운 눈빛으로 한 번 훑어본 뒤,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고이한은 이 집을 이렇게 차분히 둘러볼 기회가 없었기에 뒤따르며 자연스럽게 집 안 곳곳을 살폈다.깔끔하고 세련된 공간 곳곳에 여주인의 손길이 남아 있는, 모든 것이 소예지다운 집이었다.2층 서재.문이 닫히자 세 사람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강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고 대표님, 제가 정리한 민간용 프로젝트의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너무 이른 상용화는 자칫하면...”“강 박사님의 우려는 이해합니다.”고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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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7화

얽혀 있는 이해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고이한이 이사회 인사들의 심기를 제대로 달래지 못한다면 그들은 언제든 집단 반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무엇보다 지난번 소예지가 작성한 3년 계획안에도 이미 민간 프로젝트 착수가 명시돼 있었다.고이한은 다만 그 시점을 앞당긴 것뿐이었다.물론 지금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판단될 만큼 연구가 충분히 진척된 시점이기도 했다.강준석은 그런 복잡한 상업적 맥락까지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소예지를 믿었다.그녀라면 무턱대고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고 분명 그 나름의 판단과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그는 안경을 벗어 이마를 짚으며 나직하게 말했다.“이해했어. 더 이상 이 문제로 이의 제기하지 않을게.”“고마워, 강 선배.”소예지가 극렬히 반대하지 않은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이론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도 그녀였고 이 프로젝트를 진짜로 이끌 자격이 있는 사람 역시 소예지였기 때문이다.저녁 시간이 되자 양희순은 정성껏 차린 한 상을 식탁에 올려놓았다.소예지와 강준석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거실에서는 고이한이 딸과 나란히 앉아 블록 놀이에 몰두하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강준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하지만 그 모습을 본 고이한의 미간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강준석의 이완된 표정과 느슨해진 분위기는 위층에서 소예지가 설득에 성공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고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블록을 꽉 움켜쥐었다.그 사이 강준석은 자연스럽게 양희순을 도와 부엌으로 향했다.그 모습마저도 이 집의 주인처럼 익숙해 보이는 태도마저도 고이한의 가슴 한편을 묘하게 저리게 만들었다.고이한은 소예지 옆으로 다가와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말투로 물었다.“보아하니 강 박사님도 생각을 정리하신 모양이네?”소예지는 그를 슬쩍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득력이 갈수록 좋아지네, 소 박사.”고이한은 한쪽 눈썹을 가볍게 올리며 비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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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8화

고하슬이 고이한을 돌아보며 시선을 보냈을 때, 소예지의 눈빛이 잠깐 차갑게 스쳤다.그 시선을 느낀 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하슬아, 착하지. 아빠는 오늘 밤 일이 있어서 이제 가봐야 해.”“하지만...”고하슬은 입을 삐죽이며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그럼 주말에 아쿠아리움 가자. 어때?”고이한은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소예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허락을 바라는 미묘한 기대가 담긴 눈빛이었다.“정말요? 약속해요!”고하슬은 이미 신이 난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고이한도 잠시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걸었다.“아빠, 약속 꼭 지켜야 해요. 나 속이면 안 돼요.”“아빠가 약속할게.”고이한이 떠난 뒤, 고하슬은 소예지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엄마도 우리랑 같이 아쿠아리움 갈 거예요?”“엄마는... 시간 보면서.”소예지는 부드럽게 답했다.그 말에 고하슬은 만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다시 소파로 돌아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소예지는 알고 있었다.자신이 아무리 고이한을 인생에서 지워내려 해도 이 아버지와 딸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만큼은 결코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잠시 뒤, 양희순이 다가와 고하슬과 함께 목욕 준비를 하러 갔고 소예지는 조용히 서재에 앉아 다음 날 발표할 연설문을 다시 점검했다.수요일 아침.고신 그룹 재단 설립 기념식이 벨모아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다.소예지는 아침 일찍 호텔에 도착했고 임재석은 그녀와 함께 행사장을 둘러보며 준비 상황을 점검했다.오늘 연회장은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국내 유력 인사들과 의료계 전문가, 기자들까지 자리를 가득 채울 예정이었다.소예지는 베이지색 투피스에 긴 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연설자로서 배정된 자리도 확인했다. 2열 정중앙, 가장 눈에 띄는 위치였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수경과 심유빈의 이름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달가워하지 않던 인물들이 없는 덕분에 오히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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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9화

“이안이가 토끼랑 햄스터도 키우고 싶대요.”윤하준은 조카 이야기를 꺼내며 눈가에 은은한 애정을 띠었다.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처지라서인지 걱정거리도 자연스레 겹치는 모양이었다.“조용한 동물을 원한다면 고양이도 괜찮을 것 같아요.”소예지는 조용히 말했다.사실 그녀 역시 한때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젤리만으로도 신경 쓸 일이 많아 더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좋아요. 그럼 다음에 직접 데리고 가서 골라보라고 해야겠네요. 자기 손으로 돌보는 법부터 배워야 하니까요.”윤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고신 그룹 측에서 도착했습니다. 행사 전 프로세스 확인 부탁드립니다.”임재석이 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했다.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고이한이 이렇게 일찍?’“고 대표님은 1번 귀빈실에 계십니다.”임재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예지는 곧장 가방을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1번 귀빈실에 도착했을 때,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쪽에서는 누군가와 업무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예지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고이한은 테이블 앞에 서서 몸을 기울인 채 문서를 살펴보고 있었다.금테 안경이 콧등에 걸려 있었고 그는 손끝으로 그것을 천천히, 우아하게 밀어 올렸다.옆에서는 재단 매니저가 차분히 보고를 이어가고 있었다.“소 대표님 도착하셨습니다.”김경환이 먼저 알아보고 말했다.고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소예지를 보는 순간 한층 깊이를 더했고 그 덕분에 평소보다도 훨씬 강렬한 존재감이 배어 나왔다.그는 조용히 안경을 벗어 접은 뒤,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가까이서 보니 그 안경은 시력 교정보다는 장식에 가까워 보였다.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경환도 잠시 놀란 듯했다.‘고 대표님, 시력도 좋으신데 왜 오늘은 굳이 안경을?’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안경이 고이한에게 한층 더 성숙한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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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0화

그때였다.하종호는 홀 안에서 임재석을 발견하자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를 불러 세웠다.“임 이사님.”“하 대표님, 오셨군요.”“윤 대표는 못 보셨어요?”“소 대표님이랑 함께 계시던데요.”임재석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 말에 하종호의 눈빛이 잠시 가늘어졌다. 그는 임재석의 어깨를 가볍게 톡 건드리며 말했다.“그래요. 바쁜 일마저 보세요.”임재석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하종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윤하준이 자신을 외면한 이유는 분명했다.결국, 소예지와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하종호는 오래전부터 그들 사이의 형제 같은 우정이 변질되고 있다고 느껴왔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윤하준의 마음속에서 소예지의 존재는 이미 ‘우정’이라는 경계를 넘어 훨씬 깊은 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소예지와 심유빈 사이의 복잡한 인연은 결국 이 오래된 우정마저도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하종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행사 시작까지는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그는 조용히 로비 한편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그 시각, 행사장 안에서는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고 뒤편 대형 스크린에서는 ‘고신 제약 재단’의 홍보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영상 속에는 어린 백혈병 환자와 눈을 맞추며 앉아 있는 소예지의 모습이 선명히 담겨 있었다.“내빈 여러분, 고신 그룹 재단 설립식이 곧 시작됩니다. 좌석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사회자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안내했다.그 순간, 소예지와 윤하준이 함께 행사장으로 들어섰다.임재석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을 보자마자 다가와 자리를 안내했다.“대표님, 두 번째 줄 중앙 좌석입니다. 윤 대표님은 첫 번째 줄 좌측 두 번째 자리입니다.”윤하준은 본능적으로 찌푸린 눈썹을 펴지 못했다.‘예지 씨랑 자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다니.’하지만 소예지는 그에게 밝게 웃어 보이며 이미 자신의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윤하준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린 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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