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861 - Chapter 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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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1화

딸을 맡기려면 태도도 그에 맞아야 했다.소예지는 짧게 숨을 고른 뒤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고이한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김 비서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어.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야.”이미 전화를 해 둔 모양이었다. 김경환은 호출에 대비해 같은 단지 다른 동에 집을 얻어 둔 상태였다.소예지는 순간 멈칫하며 고이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별다른 설명도 감사 인사도 기대하지 않는 얼굴이었고 그저 잠든 고하슬을 안은 채 조용히 문을 나섰다.소예지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배려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새벽 비행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결국 그녀는 빠르게 캐리어를 챙겨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지하 주차장.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김경환이 곧장 다가왔다.“오셨군요. 타시죠.”차는 고이한의 마이바흐였다. 김경환은 능숙하게 캐리어를 받아 트렁크에 실었고 소예지는 말없이 뒷좌석에 올라탔다.그 시각, 27층 안방.고이한은 조심스럽게 고하슬을 침대 위에 눕혔다. 아이가 작은 발을 움찔거리며 뒤척이자 그는 곧바로 옆에 누워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괜찮아. 아빠 여기 있어.”고하슬은 금세 안정을 찾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품에서 잠든 날이 셀 수 없이 많았기에 그의 체온과 심장 소리는 아이에게 무엇보다 익숙하고 확실한 안정감이었다. 두어 번 가볍게 몸을 뒤척이던 아이는 이내 작은 얼굴을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품에 묻었다.고이한은 한동안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소예지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로의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고 김경환은 불필요한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대신 몇 차례 울리는 휴대전화 진동 소리만이 차 안의 적막을 가로질렀고 소예지는 누군가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한 시간 뒤, 공항에 도착했다.김경환은 차에서 내려 직접 보안 검색대 앞까지 배웅했다.“소 박사님, 도착하시면 대표님께 연락 한 번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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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2화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책임지면 된다.이미 남이 된 사람에게 도착 여부를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차는 경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따라 부드럽게 달렸다. 창밖으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고 동이 틀 무렵 하늘은 옅은 회백색으로 번지기 시작했다.소예지는 좌석에 몸을 깊이 기대고 눈을 감았다. 운전기사는 말없이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고 차 안에는 낮은 엔진음만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호텔에 도착하자 기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소 박사님, 짐 위로 올려 드리겠습니다.”“괜찮습니다. 여기까지로 충분해요. 감사합니다.”기사는 고개를 숙였다. 태도는 절제되어 있었고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그 순간, 소예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임현욱은 지금 기지에 있다. 그렇다면 오늘 차량을 배치한 쪽은 장관 관저 쪽일 가능성이 컸다.‘설마... 이 분은 장관님 전담 기사인 건 아닐까?’묘한 당혹감이 가슴 한편에 번지면서 어쩐지 과분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체크인을 마치고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네 시 반이었고 그녀는 두 시간 만이라도 눈을 붙이기로 했다. 오전 여덟 시 수술이라면 그 전에 병원에 도착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여섯 시 반.소예지는 병원에 도착했다.양정화의 병실 앞 복도 벤치에는 임서윤이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고 인기척에 눈을 뜨자마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소 박사님, 오셨어요!”임서윤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양정화의 여동생과 조카도 이미 경주에 도착해 맞은편 호텔에서 대기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두 사람은 짧게 상황을 정리했다. 양정화는 여전히 수면 중이었다.“간단히 뭐라도 먹고 올까요?”임서윤의 제안에 두 사람은 병원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박사님도 거의 못 주무셨죠? 다크서클이 내려왔어요.”소예지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버틸 수 있어요.”임서윤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빨리 전이될 줄은 몰랐어요. 지난번 검사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수술이 빠를수록 좋죠. 지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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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3화

소예지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설마 돌아온 건 아니죠?]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답장도 오기 전이었다.그때 복도 엘리베이터 쪽에서 또렷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울렸고 군인 특유의 일정한 박자로 단단하고 절제된 보폭이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소예지는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다.곧게 뻗은 소나무처럼 단정한 한 남자가 수술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짙은 녹색의 군 상복 차림에 어깨 위 계급장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임현욱, 그가 정말로 온 것이었다.소예지는 놀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몇 걸음 다가갔고 안채린의 눈에도 동시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는 이처럼 강한 기세를 지닌 남자를 멀리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임서윤 역시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머물렀고 몇 초쯤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렸다. 그의 눈빛이 묘하게 날카로워 오래 마주 보고 있기 어려웠기 때문이다.“왜 돌아왔어요?”소예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놀람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공무로 복귀했습니다. 겸사겸사 교수님도 뵙고 싶었습니다.”임현욱 역시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소예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공무 때문이었을까.’임현욱의 시선이 소예지의 얼굴을 조용히 훑었다. 피로가 쌓인 기색, 눈가에 드리운 옅은 그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상황은 어떻습니까?”“아직 수술 중이에요.”소예지는 수술실 위의 붉은 표시등을 바라보며 말했다.“복잡한 수술이라 시간이 걸릴 거예요.”“저도 같이 기다릴게요.”담담했지만 단호한 말이었다.소예지는 잠시 그를 살폈다.“집에 가서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낫지 않겠어요?”임현욱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여기 있겠습니다.”망설임 없는 눈빛이었다.소예지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자리로 돌아와 앉았고 임현욱은 자연스럽게 소예지의 옆자리에 앉았다.임서윤이 소예지에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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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4화

안채린은 은근히 두어 번 더 임현욱을 바라보았다.저런 외모와 신분을 지닌 남자를 만날 수 있다면 자신이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자신의 인간관계 안에는 애초에 저런 급의 인물을 소개받을 기회조차 없었다.소예지는 달랐다. 아버지의 인맥은 국내외 학계에 촘촘히 뻗어 있고 그 덕분에 자연스레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과 연결된다. 그것이 안채린이 소예지를 넘지 못한다고 느끼는 지점이었다.원로급 학자의 딸이라는 배경은 분명 다른 무게를 지녔다.시간은 느리게 흘렀다.어느덧 오후 한 시가 가까워졌고 점심시간도 이미 지났지만 누구도 제대로 식사를 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끝없이 이어지는 기다림은 체력과 정신력을 동시에 갉아먹고 있었으며 소예지는 전날 밤 전화를 받은 뒤로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 아침에도 몇 숟가락 겨우 뜨는 데 그쳤고 팽팽한 긴장감이 몸을 놓아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조이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나 물이라도 마시려던 순간,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며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과 함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그때 단단한 팔이 재빨리 허리를 감싸안았고 떨어질 듯 기우는 몸을 단단히 받쳐 올렸다.“괜찮아요?”임현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소예지는 그의 품에 반쯤 기댄 채 숨을 고르며 말했다.“괜찮아요. 아마 저혈당인 것 같아요.”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넘어졌을 터였다. 소예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봤고 임현욱은 팔을 놓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해진 안색이 한눈에 들어왔다.“소 박사님, 여기 사탕 있어요!”임서윤이 급히 사탕을 건넨 뒤 곧장 물을 가지러 달려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안채린의 눈이 순간 번뜩였고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어 조용히 1분가량 영상을 찍은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소예지, 괜찮아?”그 순간에도 소예지는 거의 임현욱의 품에 안긴 채였고 보호하듯 감싼 그의 자세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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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5화

그 시각, 심유빈은 여전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매니저 유미나는 조용히 과일을 깎아 접시에 담아 건네며 말했다.“조금이라도 먹어.”그때 휴대전화가 낮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안채린이었고 메시지에는 영상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심유빈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서 있던 유미나를 돌아보았다.“잠깐만 나가 있을래?”유미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은 이미 익숙했다. 심유빈이 혼자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면 굳이 묻지 않는 것이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과일은 꼭 먹어.”문이 닫히자 심유빈은 곧장 영상을 재생했다.화면에는 병원 복도가 비쳤고 그 한가운데에서 소예지가 휘청이며 임현욱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임현욱은 소예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채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걱정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은 누가 보아도 연인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심유빈의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그녀는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어디야?]안채린의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양 교수님이 경주에서 수술 중이라 내려왔어. 우연히 찍은 거야.]심유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늘 평가 일정 아니었어? 왜 경주에 있어?][강 선배한테 말씀드리고 연기했어.]그제야 심유빈은 조금 숨을 돌렸다.그리고 다시 영상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화면 속 소예지의 창백한 얼굴과 그녀를 감싸안은 임현욱의 보호적인 자세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친밀감이 눈에 또렷하게 박혔다.심유빈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뒤, 그녀는 하종호의 메신저 창을 열어 영상을 그대로 전송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유빈 씨, 이건 누가 찍은 거예요?]심유빈은 차분하게 답했다.[경주에 있는 제 동생이 보내줬어요. 하 대표님,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소예지는 윤하준 씨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거라고요. 이제 믿으시겠어요?]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이건 우리만 보세요. 절대 퍼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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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6화

[방금 로비에서 수경 씨를 만났어. 곧 병실로 올라온대.]매니저 유미나의 메시지를 확인한 심유빈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그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심유빈은 일부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잠시 뒤 문이 열리며 고수경이 고개를 내밀었다.“언니?”막 들어오려던 고수경은 심유빈이 휴대전화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뭐 봐, 언니?”그 순간 심유빈은 흠칫 놀라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가 황급히 다시 집어 들며 고수경을 막아섰다.“수경아, 보지 마.”애초에 볼 생각도 없었던 고수경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오히려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왜? 내가 보면 안 되는 거야?”마침 그때 화면에서는 영상이 그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고수경의 시선이 스치듯 화면에 닿았다.영상 속에는 병원 복도가 비쳤고 그 한가운데에서 소예지가 한 남자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그 남자는 소예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고 있었으며 그의 시선에는 노골적인 걱정과 애정이 서려 있었다.고수경은 망설임 없이 심유빈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았다.“잠깐만.”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영상이 끝나자 고수경의 눈빛에 노골적인 혐오가 스쳤다.심유빈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되찾으며 말했다.“이건 네 오빠한테 말하지 마. 괜히 이런 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고수경은 코웃음을 쳤다.“이게 오빠를 흔들 수 있겠어? 오히려 더 질색하겠지.”심유빈은 한층 더 조심스러운 어조로 덧붙였다.“어쨌든 말하지 마. 그리고 이 영상을 내 휴대전화에서 본 거라는 것도 절대 말하지 말고. 동생이 찍어 준 거야. 괜히 문제 만들고 싶지 않아.”고수경은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걱정 마. 설령 보내더라도 오빠는 관심도 없을걸? 소예지가 누구 품에 안기든 그 사람 일이잖아.”고수경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소예지만 자기 오빠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그러나 심유빈은 한 번 더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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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7화

윤하준의 회사 직원들 가운데 하종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제지하는 이 하나 없이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윤하준의 집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사무실 안에서 윤하준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그는 하종호를 발견하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낮은 목소리로 통화를 마무리한 뒤 휴대전화를 정리하며 걸어왔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어?”그는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던져두고 미간을 눌렀다. 최근 업무 강도가 상당했는지 얼굴에는 피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하종호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문제의 영상을 다시 재생해 윤하준 앞에 내밀었다.“똑바로 봐, 윤하준. 이런 여자한테 네가 이렇게까지 마음 쓸 가치가 있어?”윤하준은 의아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영상은 이미 중간쯤 재생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소예지는 창백한 얼굴로 임현욱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임현욱은 고개를 숙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윤하준의 숨이 잠시 멎었다.‘이건 어디서 찍은 거지?’무엇보다도 그의 시선을 붙잡은 건 두 사람의 밀착된 모습이 아니라 소예지의 상태였다.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봤지? 난 네가 안타까워서 이러는 거야.”하종호가 목소리를 높였다.“소예지는 널 붙잡아 두면서 다른 남자랑 저렇게 붙어 있어. 영상에 다 찍혀 있잖아.”윤하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누가 보낸 거야? 어디서 찍은 거지?”“누가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오늘 찍힌 거고 경주의 한 병원이야.”윤하준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곧장 휴대전화를 들어 소예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예지 씨, 지금 경주 병원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하종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는 윤하준이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끼며 후회할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곧 답장이 도착했다.[네, 경주에 있어요. 양 교수님 수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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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8화

그랬다.만약 누군가 애매한 영상 하나를 들이밀며 심유빈이 다른 남자와 얽혀 있다고 말한다면 하종호 역시 가장 먼저 “그럴 리 없다”고 단언했을 것이다.역지사지라는 말 그대로였다. 윤하준이 소예지를 믿는 마음 역시 정확히 그와 같았다.하종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미안하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어.”윤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그 영상, 누가 보낸 거야?”하종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윤하준은 그 반응만으로도 대강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다음부터는 그렇게 성급하게 움직이지 마. 어떤 일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그 말을 듣는 순간, 하종호는 묘한 허탈감에 휩싸였다. 윤하준은 이미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경주.”윤하준은 짧게 답하며 문을 나섰다. 소예지가 자신을 필요로 하든 아니든 그 곁에 누가 서 있든 말든 상관없이 이 상황을 알게 된 이상 직접 가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그 임현욱이라는 사람, 지금 소예지 옆에 있잖아. 큰일 날 상황도 아닐 거야.”하종호의 말에도 윤하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내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돼.”결국 하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녀와. 운전 조심하고.”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아까 내가 한 말은 예지 씨한테는 하지 마.”윤하준은 돌아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조용히 닫혔다.하종호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잠겼다. 윤하준의 판단이 옳기를 바라면서도 혹시라도 상처받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결국 그는 간절히 원하면서도 얻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경주 시각, 오후 네 시 반.수술실 위에 켜져 있던 불이 마침내 꺼졌다. 복도에 서 있던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문이 열리고 집도의가 먼저 걸어 나왔다.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지만 표정은 한결 밝았다.“수술은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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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9화

임현욱은 고이한을 발견했지만 곧장 소예지의 팔을 놓지는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다.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짧게 맞물렸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한 긴장이 흘렀다. 찰나의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오갔고 결국 임현욱이 먼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이한 역시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소예지에게 향했다.소예지가 한 걸음 다가섰다.“하슬이는?”“어머니 댁에 있어.”고이한이 담담하게 답했다.“양 교수님은 어때? 수술은 잘됐어?”그 질문에 안채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방금 주치의 교수님이 수술이 아주 잘됐다고 하셨어요.”고이한은 안채린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소예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 때문인지 소예지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그 옆에 당당하게 서 있는 임현욱의 모습까지 겹쳐지자 고이한의 눈빛이 잠시 복잡하게 흔들렸다.그러나 그는 이내 감정을 정리했다.“수술이 잘됐다니 다행입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양정화의 여동생 양수아가 고이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소 박사님, 이분은...”소예지는 잠시 멈칫했다가 차분히 미소 지었다.“양 교수님 연구실 투자자이신 고 대표님이에요.”“아, 고 대표님이시군요.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번거로우셨죠.”“아닙니다.”고이한은 짧게 웃으며 답했다.양수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다들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제가 맞은편 식당에서 대접하겠습니다. 친척으로서 도리니까요.”“저는 여기 남을게요.”소예지가 조용히 말했다.“입맛도 없고요.”“저도 남겠습니다.”임현욱이 자연스럽게 덧붙였다.그때 김경환이 말을 받았다.“저와 고 대표님은 이미 식사했습니다.”양수아는 고개를 돌렸다.“임서윤 씨, 안채린 씨는 가서 좀 드세요.”임서윤은 솔직히 배가 고팠기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모.”안채린은 고이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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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0화

고이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맞은편 수술실 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어려운, 늘 그렇듯 단정하고 절제된 표정이었다.그때 엘리베이터 쪽에서 또 한 번 인기척이 들렸다.복도 모퉁이를 돌아 한 남자가 성큼 걸어 나왔다. 먼 길을 서둘러 달려온 듯 숨이 고르지 않았고 한 손에 재킷을 걸친 채 미간에는 급히 달려온 흔적과 걱정이 겹쳐 스쳐 지나갔다.윤하준이었다.그는 길게 늘어선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는 순간, 걸음을 아주 잠깐 멈추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표정을 정리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소예지 씨, 고 대표.”그리고 임현욱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임 대위님.”그의 시선은 다시 소예지에게 돌아갔다. 창백하긴 했지만 방금 전보다는 안색이 조금 나아 보였다. 그 사실에 윤하준은 속으로 조용히 안도했다.“왔어.”고이한이 가볍게 눈썹을 들어 보였다.“윤 대표님.”임현욱 역시 담담하게 인사를 받았다.세 사람 중 가장 놀란 표정은 소예지였다.“여긴 어떻게 왔어요?”메시지로 안부를 묻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직접 경주까지 내려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윤하준은 잠시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마침 경주에 출장 일정이 있어서요. 교수님 수술 소식도 들었고 겸사겸사 들렀습니다.”그러고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양 교수님 수술은요?”“잘됐어요. 아주 성공적이라고 하셨어요.”“다행이네요.”짧은 대답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분명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고이한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빛을 낮게 가라앉혔다. ‘출장’이라는 말은 소예지에게만 통할 만한 핑계였다. 임현욱 역시 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했지만 굳이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모두 비슷했고 정말 따지자면 누구도 ‘겸사겸사’는 아니었다.그때 복도를 지나던 젊은 간호사 몇 명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아 있거나 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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