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871 - Chapter 880

946 Chapters

제871화

안채린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감정은 마치 독사처럼 천천히 심장을 조여 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무의식중에 꽉 쥔 주먹이 그녀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임서윤 역시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소 박사님, 정말 대단해. 이렇게 잘생기고 존재감 강한 남자 셋이 한 사람을 위해 나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니.’누가 보아도 압도적인 장면이었다.양수아는 아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윤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소 박사님, 이분은...”소예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히 소개했다.“제 친구 윤하준 씨에요. 경주에 출장 왔다가 양 교수님 수술 소식을 듣고 들렀어요. 이분은 양 교수님 여동생분이세요.”“윤 선생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윤하준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양수아는 다시 소예지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소 박사님, 호텔에 가서 조금 쉬는 게 어때요? 여기는 저희가 지킬게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게요.”소예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때 임현욱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양 여사님 말씀이 맞아요. 지금은 휴식이 필요해요.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받을 수 있어요.”소예지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버틸 수 있어요.”“그렇게 무리하다가 저혈당까지 왔다고 들었어요. 거의 쓰러질 뻔했다면서요.”양수아의 말은 별다른 의도 없이 흘러나왔지만 그 한마디는 고이한의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쳤다. 그는 즉시 소예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녀가 휘청이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그의 눈빛에 노골적인 걱정이 스쳤고 윤하준 역시 소예지를 다시 한번 살폈다. 영상 속 장면이 바로 이 상황이었음을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임현욱이 소예지를 안았던 이유는 단순한 보호였다는 사실이 그제야 분명해졌다.윤하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안채린을 스쳐 지나갔다.안채린 역시 고이한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고이한이 소예지를 향해 숨기지 않는 걱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Read more

제872화

소예지는 무심한 듯 고이한 쪽을 흘낏 보았지만 별다른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담담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의 존재가 눈에 띄는 듯했다.임현욱과 윤하준 그리고 소예지는 나란히 휴게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모습을 고이한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서운함 같은 감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는 누구도 쉽게 읽어낼 수 없는 미묘한 기류가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안채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소예지를 바라보았다. 소예지는 마치 세 남자의 중심에 서 있는 듯 그녀의 한 걸음, 한 시선이 모두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억지로 자리에 앉았지만 이 광경은 솔직히 버겁게 느껴졌다.휴게실은 크지 않았다. 간이 테이블 하나와 의자 몇 개뿐인 작은 공간이었고 소예지는 포장 봉투를 열며 빵과 김밥, 죽, 그리고 작은 반찬 몇 가지를 꺼냈다. 임서윤은 그 옆에서 커다란 빵 두 개를 따로 챙겨 두었으며 병원 식당에서 배를 채울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었다.임현욱이 빵 하나를 반으로 갈라 소예지에게 내밀었다.“조금이라도 드세요. 몸이 버텨야 합니다. 양 교수님도 깨어나시면 예지 씨가 쓰러졌다는 소식 듣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윤하준도 부드럽게 거들었다.“몸이 먼저예요. 드세요.”소예지는 두 사람의 시선을 느끼며 빵을 받아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한입 베어 물었다.임현욱은 다른 봉투들도 재빨리 정리했다. 동작에는 군인 특유의 간결함이 묻어 있었다.“윤 대표님도 드십시오.”윤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반으로 쪼갰다. 반찬을 곁들여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빵과 반찬뿐인 식사였지만 소예지와 함께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소예지는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윤하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들었다.“양 교수님 수술 후 회복 방안이요. 연세가 있으셔서 항암이 부담이 클 수 있거든요. 다른 보완 방법이
Read more

제873화

남아 있던 빵 하나는 이미 임현욱이 먹은 뒤였다. 결국 두 남자 모두 김밥보다는 단순한 빵을 더 선호하는 모양이었다.소예지는 남아 있던, 자신이 몇 입 베어 문 반쪽 빵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베어 문 부분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찢어내고 남은 쪽을 윤하준에게 내밀었다.“괜찮다면, 이거 드세요.”윤하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받아서 들었다.“괜찮고말고요.”사실 굳이 떼어내지 않았어도 그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먹던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임현욱이 잠시 고개를 들어 윤하준을 바라보았다. 소예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두 남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짧게 스쳤다.그러나 곧 그 기류는 가라앉았고 경쟁심은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지금 이 자리는 감정을 앞세울 자리는 아니었다.한편, 복도 의자에 홀로 앉아 있던 고이한은 여전히 수술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고요했지만 꽉 다문 입술과 미묘하게 굳은 턱선이 그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몇 번이고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 문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오가는 것이 어렴풋이 들리면서 그 안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지 굳이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가슴 한편이 묘하게 저릿해졌지만 그는 그 감정을 조용히 눌러 담았다. 끝까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때, 몇 분 뒤 휴게실 문이 열렸다.소예지가 먼저 걸어 나왔다. 임현욱은 정리한 봉투를 들고 쓰레기통 쪽으로 향했고 윤하준은 그녀와 무언가를 조용히 이야기하며 나란히 걸어 나왔다.고이한은 시선을 거두었지만 안채린은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두 남자가 질투로 신경전을 벌이거나 최소한 서로를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차분했고 소예지를 위해서라면 감정조차 절제하는 듯 보였다. 질투보다 더 무서운 건 존중이었다. 두 남자는 경쟁하면서도, 소예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 애썼고 그만
Read more

제874화

안채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순간, 수술실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안에서 의사가 나와 말했다.“환자분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곧 병실로 옮길 예정이니 먼저 병실로 가서 기다려 주세요.”그 한마디에 복도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동시에 살아났다. 소예지의 미간도 비로소 풀렸다.“다행이에요...”양수아의 눈가가 붉어졌다.모두가 서둘러 병실 쪽으로 향했다. 임현욱은 자연스럽게 소예지의 곁을 지켰고 그 뒤를 고이한과 윤하준이 묵묵히 따랐다.일행은 VIP 병실 앞에 도착해 잠시 기다렸다.잠시 후, 간호사들이 침대를 밀고 나왔다. 양정화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의식은 아직 완전히 돌아온 것 같지 않지만 눈은 분명히 떠 있었다.“언니...”양수아가 급히 다가가 목이 메인 목소리로 불렀다.“교수님...”안채린도 침대 앞으로 다가가며 불렀다.소예지는 곧장 다가가지 않았다.그때 주치의가 다가와 양수아와 소예지에게 수술 후 주의 사항을 설명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깨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안정을 취하게 하세요. 보호자분들께서는 상태를 잘 관찰해 주시고요.”양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들었다.이윽고 양수아가 소예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소 박사님, 들어가서 언니 한 번 보세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곁에 서서 양정화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양 교수님, 수술 아주 잘됐어요. 걱정 마세요.”조금 전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던 양정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소예지를 알아본 듯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손을 더듬었다.그 작은 반응은 분명한 응답이었다.그 장면을 지켜보던 안채린의 가슴 속에서 또다시 질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던 분이 소예지의 한마디에는 이렇게 반응하다니.’역시 양정화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소예지였다.잠시 후 양수아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소 박사님
Read more

제875화

소예지는 고이한이 쉽게 물러설 기색이 없다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그 대신 윤하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윤하준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부드럽게 웃었다.“저는 아직 고객을 한 명 더 만나야 해서요. 내일 돌아갈 예정이고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일부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괜히 시간 뺏은 것 같아서... 이제 일 보러 가세요.”“저한테는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윤하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푹 쉬세요. 무리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세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옆에 서 있던 임현욱을 바라보며 물었다.“임 대위님, 같이 가실까요?”임현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저는 소예지 씨를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가겠습니다.”그 한마디에 두 남자의 미간이 동시에 아주 미묘하게 좁혀졌다.고이한의 눈빛이 깊어졌다.“호텔이 바로 맞은편입니다. 제가 데려다주죠.”옆에 있던 김경환이 재빨리 거들었다.“맞습니다. 고 대표님 방도 맞은편 호텔에 잡아 두셨습니다. 곧 짐 가지러 가실 예정입니다.”이번에는 소예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낫지 고이한의 배웅은 받고 싶지 않았다.임현욱이 한발 먼저 나섰다.“저희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번거롭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는 소예지가 전남편과 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럴 때일수록 거리를 분명히 해 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하준은 고이한을 흘끗 바라봤다.눈 깊은 곳에 아주 짧은 동정의 기색이 스쳤다.자신 역시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지만 고이한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밀려나는 장면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소예지는 몹시 피곤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관자놀이까지 욱신거렸지만 세 남자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긴장만큼은 또렷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임현욱에게 시선을 멈추고 낮게 입을 열었다.“
Read more

제876화

보행자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들어 신호를 확인한 뒤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피로가 몰려온 탓에 뒤에서 조용히 따라붙은 고이한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도로 건너편에서 임현욱의 시선은 끝까지 그녀를 따라갔다. 사람들 사이로 점점 멀어지는 소예지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뒤쪽에서 몇 번의 경적이 울렸지만 그의 바로 뒤에 선 차량만은 끝내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차주가 번호판을 알아보고 차마 누르지 못한 것이다.곧 군청색 SUV가 화살처럼 앞으로 치고 나갔고 뒤이어 검은색 벤틀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는 윤하준의 비서였다.“윤 대표님, 호텔은 이미...”“병원 맞은편 그 호텔로만 예약해.”윤하준이 짧게 말을 끊었다.비서는 잠시 멍해졌다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네, 가장 좋은 객실이 있는지 바로 확인하겠습니다.”“일반 객실이어도 괜찮아.”뒤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덧붙여졌다.“네, 알겠습니다.”소예지는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무심코 이마를 짚어보니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오른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 벽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았다가 뜨며 빨리 방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그때였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며 키 큰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왔다.소예지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왜 또 따라온 거야...’엘리베이터가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순간 어지러움이 몰려오며 시야가 크게 흔들렸고 최근 계속된 실험실 근무로 인한 체력 소진과 고열까지 겹친 피로가 한꺼번에 덮쳐 오면서 눈앞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마지막으로 남은 의식 속에서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팔의 감촉이 스쳤고 그녀의 몸은 힘없이 기울며 그대로 남자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고이한은 소예지가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소예지.”그는 곧바로 그녀를 안아
Read more

제877화

고이한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순간도 흔들림 없이 깊이 잠든 소예지를 향해 머물러 있었다.창백한 얼굴 위로는 열로 인한 비정상적인 홍조가 옅게 번져 있었고 잠든 표정은 한없이 풀어져 있었다. 마치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은 아이처럼 무방비한 모습이었다.고이한은 끝까지 그녀를 따라온 자신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래야 제때 병원으로 데려올 수 있었으니까.겨울철 수액은 팔을 쉽게 차갑게 만들었고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수액이 꽂힌 소예지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손끝에 닿은 온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거의 얼음처럼 서늘했다.그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천천히 체온을 전하듯 온기를 건넸고 김경환은 병실 밖에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히 안으로 들어와 이 조용한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창밖에는 겨울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고 빗소리는 병실의 적막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간호사가 문을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고이한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수액 다 들어갔어요.”간호사가 바늘을 뽑았다.고이한은 바늘자리를 눌러 지혈을 마친 뒤, 상처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손을 떼지 않았다.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등을 내려놓은 뒤, 이마에 손을 얹었다.열은 조금 내려갔지만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고 고이한은 다시 그 손을 감싸 쥐었다.충분히 따뜻해졌다고 느껴질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고 그제야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다시 손을 넣어주었다.병실 안에는 복도 벽 등 하나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요한 순간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소예지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마치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눈매에는 평온함과 묘한 만족감이 어렸다.평소 그가 보던 차갑고 단정한 거리감은 사라지고 대신 한없이 연약하고 조용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고이한은 천천히 그녀의 이목구비를 더듬었고 그 순간 기억들이 제멋대로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밀려들었다.
Read more

제878화

“내가 데려다줄게.”고이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고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기색이 분명했다.“괜찮아.”소예지는 즉시 말을 잘랐다. 호텔은 길 건너 바로 맞은편에 있었고 여기는 경주였다. 치안도 나쁘지 않았다.고이한의 미간이 천천히 좁혀졌다.“또 아무도 없는 길에서 쓰러지는 일은 없었으면 해.”소예지는 순간 말이 막혔다. 이번에는 분명 그의 도움을 받은 게 사실이었고 그가 없었다면 상황은 더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처지는 달갑지 않았다. 더구나 그 상대가 전남편이라면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 정도 아니야.”소예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정신도 아까보다 훨씬 또렷해졌고 이마를 짚어보니 열도 많이 내려가 있었다.병실 문을 나서자 고이한이 곧장 뒤따랐다.새벽 네 시의 병원은 고요했다. 광장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고 바람은 매섭게 불어 공기가 뼛속까지 차갑게 스며들었다.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찬 기운은 막히지 않았고 몸이 저절로 가볍게 떨렸다.그 순간, 뒤에서 고이한이 재킷 단추를 풀었다. 이내 그의 재킷이 소예지의 어깨 위로 덮였고 무게가 얹히는 동시에 남자의 체온과 은은한 시더우드 향이 천천히 스며들었다.소예지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재킷을 벗어내려 했다.“치워. 필요 없어.”차가운 목소리였다.하지만 그녀의 손이 재킷 끝에 닿기도 전에 고이한의 손이 먼저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입고 있어.”귀 가까이에서 낮고 단호한 음성이 떨어졌다.소예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녀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치우라고 했어.”이번에는 더 강했다.“말 들어.”고이한의 목소리가 달래듯 한층 부드러워졌다.“아직 열 있어. 더 바람들면 안 돼.”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고 재킷은 매서운 바람을 확실히 막아주고 있었다.소예지는 억지로 빠져나오려 했다. 그에게 빚지는 느낌조차 싫었다.그러나 그 순간, 고이한은 재킷으로
Read more

제879화

소예지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뒤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몸에 맺혀 있던 한기가 조금은 가신 듯했고 머리도 한결 맑아졌다. 창밖은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다섯 시 반이었다. 곧 날이 밝을 시간이었다.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더 눈을 붙인 뒤, 곧장 양정화의 병실로 갈 생각이었다.아침 일곱 시 반, 문을 열자마자 소예지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순간 숨을 멈췄다. 고이한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윤하준이었다. 그가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예지는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하준 씨? 여기서 뭐 해요?”“조식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요.”윤하준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 묵고 있었어요?”소예지가 되물었다.“네. 어젯밤 늦게 체크인해서 연락 안 드렸어요.”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덧붙였다.“양 교수님 뵈러 가시죠?”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먼저 아침부터 먹고 가죠.”솔직히 배가 고팠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윤하준과 함께 호텔 조식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그때 레스토랑 입구로 고이한과 김경환이 동시에 들어섰다.고이한의 시선이 날카롭게 실내를 훑었다. 잠깐의 멈춤도 없이 그는 단번에 소예지를 찾아냈고 그 순간 그의 미간이 미묘하게 좁혀졌다. 윤하준이 이곳에 묵고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김경환 역시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윤하준이 출장을 왔다면 보통 시내 최고급 호텔에 묵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소예지 씨 때문인가?’김경환은 무심코 상사를 흘끗 바라봤다.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거두고 뷔페 코너로 가 접시를 들었다.윤하준도 그들을 이미 발견한 상태였다.잠시 후 고이한이 트레이를 들고 와 윤하준 옆자리에 앉았다.“고 대표.”윤하준이 먼저 인사했다.고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Read more

제880화

양정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그래,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초대해야지.”그때 문밖에서 임서윤이 얼굴을 내밀었다.“양 교수님, 고 대표님이 오셨어요.”양정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어오라고 해.”잠시 후, 임서윤의 안내를 받아 고이한이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의 고이한은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평소처럼 날카롭고 냉정한 기세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고 대신 절제된 온화함이 은은하게 묻어났다.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양 교수님, 좀 괜찮으십니까?”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진심 어린 염려가 실려 있었다.“많이 좋아졌어.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고맙네.”양정화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양 교수님은 우리 연구실의 중요한 축입니다. 모두가 하루빨리 쾌유하시길 바라고 있습니다.”고이한의 말에 양정화의 눈빛이 조금 밝아졌다.“경주까지 직접 와 줘서 정말 고마워. 바쁠 텐데 말이야.”“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입니다.”말을 잇는 동안, 고이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침대 곁에 서 있는 소예지에게 닿았다.그 순간, 소예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양 교수님, 저는 주치의 선생님을 다시 찾아가서 상황을 조금 더 확인해 볼게요.”“그래, 다녀오렴.”양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소예지가 병실을 나서자 잠시 뒤 고이한도 뒤따라 나왔다. 그는 방향을 가늠하듯 고개를 돌리더니 의사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진료실 안.소예지는 이 교수와 수술 후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고이한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이 교수는 그를 자연스럽게 보호자 중 한 사람으로 여긴 듯 고이한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다.“현재로서는 수술이 성공적입니다. 다만 회복 경과를 지켜보면서 항암 계획을 세밀하게 조정해야 합니다.”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경청했다.소예지는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을 던졌고 이 교수는 그 질문 하나하나에 성실히 답했다. 고이한은 책상 가장자리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이 교수의 시선은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종종 그를 의식하듯
Read more
PREV
1
...
8687888990
...
95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