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881 - Chapter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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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1화

소예지는 임현욱의 진심 어린 시선을 마주하자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끝내 삼켜 버렸다.그녀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임현욱의 호의는 늘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만큼 다정했고 괜히 단호하게 거절했다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망설여졌다.“번거롭게 하는 건 아닌지...”소예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임현욱이 먼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후에 마침 일정이 비어 있어요. 공항에 들러 친구도 데려올 겸 가는 길입니다.”정말로 공항에서 만날 친구가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소예지는 병원에서 양정화 곁을 지키며 오후 한 시 반까지 함께했다. 양정화는 혹시라도 비행기를 놓칠까 봐 어서 돌아가 짐을 정리하라며 그녀를 재촉했다.오후 한 시 오십 분.퇴원 수속을 마치고 캐리어를 끌고 병원 로비로 나오니 그곳에는 이미 임현욱이 기다리고 있었다.임현욱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캐리어 손잡이를 받아 들었다. 동작은 매끄럽고 자연스러웠으며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 왔던 사람처럼 익숙했다.공항으로 향하는 길에서 임현욱은 자연스럽게 양정화의 이후 회복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소예지도 어느새 그 화제에 깊이 빠져든 듯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공항에 도착한 뒤에는 탑승 수속까지 챙겨 준 뒤, 군인 신분의 편의를 이용해 그녀를 대기실 안까지 배웅했다.임현욱은 소예지와 함께 삼십 분가량 머무르며 그녀가 탑승구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곁을 지켰다.“도착하면 문자 하나 남겨 주세요.”임현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근처에 있던 몇몇 젊은 여성들이 수줍은 얼굴로 그를 힐끔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서 이런 완벽한 미남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는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사방에서 부러움이 섞인 시선이 쏟아지자 소예지는 괜히 어색해졌다.“현욱 씨, 오늘 정말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세요.”“몸 잘 챙기시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임현욱은 일부러 한 번 더 당부하듯 말을 건넸고 소예지는 가볍게 손을 흔든 뒤 탑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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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2화

소예지는 집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고하슬을 데려오지 않았다.먼저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몸을 누이고 그동안 부족했던 잠을 보충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 여덟 시가 되어 있었다.소예지는 휴대전화를 들어 고이한의 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고이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잠겨 있었다.“나 집에 도착했어. 하슬이 데려다줘.”소예지는 짧게 말했다.“알겠어.”고이한은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십오 분쯤 지나 초인종이 울렸다. 양희순이 문을 열어 주자 고하슬이 작은 강아지처럼 신이 난 얼굴로 집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엄마! 엄마!”고하슬은 소예지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달려와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엄마 보고 싶었어요.”소예지는 안도한 얼굴로 아이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엄마도 우리 하슬이 많이 보고 싶었어.”그때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던 고이한이 안으로 들어왔다.“하슬아, 먼저 가서 놀고 있어. 아빠가 엄마랑 할 말이 있어.”양희순이 얼른 다가와 고하슬의 손을 잡았다.“이리 오렴.”아이의 모습이 사라지자 소예지는 고이한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 한동안 해외에 나가 있어야 해. 빠르면 한 달, 늦으면 석 달 정도야. 그동안은 아마 한국에 못 들어와.”소예지는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무심하게 말했다.“당신 일정까지 나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어.”고이한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래도 말해 두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그동안 하슬이는 당신이 조금 더 신경 써줘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시간 나면 우리 할머니도 한 번 뵈러 가 줘. 할머니가... 계속 너 찾으셔.”“고하슬은 내 딸이야. 돌보는 건 당연히 내 책임이고 부탁받을 일도 아니야.”소예지의 말투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할머니 댁에는 시간 나면 찾아뵐게.”“고마워.”고이한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더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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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3화

고이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층 더 신중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가 소예지를 부탁하는 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정 때문에 하는 말이야. 너희 관계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면 돼.”윤하준은 그 말 속에서 체념에 가까운 내려놓음을 읽어냈다. 그는 순간 놀란 듯 고이한을 바라보았다.“이번에 해외에 나가는 이유가 정말 개인적인 일 때문이야?”“그냥 개인적인 일이야.”고이한은 담담하게 답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아닌 듯 평온해 보였지만 그 안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윤하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나 하종호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 괜히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그리고 곧 덧붙였다.“예지 씨랑 고하슬은 내가 잘 챙길게.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고마워.”고이한은 짧게 답한 뒤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시간 됐네. 공항으로 가야 해.”윤하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조심해서 다녀와. 무사히 돌아오고.”두 사람은 함께 카페를 나섰다. 어려서부터 쌓아 온 묵은 신뢰와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 덕분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단지 안을 걷던 윤하준은 마음 한편이 묘하게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이한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모습을 그는 거의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고이한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하지만 소예지를 돌보는 일이라면 윤하준에게는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꺼이 하고 싶은 일이었다.그날 밤, 소예지는 고하슬을 품에 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러던 중 고하슬이 갑자기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엄마, 아빠가 우리 아래층에 사는 거 왜 말 안 해줬어요?”소예지는 순간 멈칫했다.지난 금요일 밤, 잠든 고하슬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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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회의실 안에는 펜촉이 종이를 긁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고 문제의 난도에 눌린 몇몇 사람들은 이마에 잔잔한 땀이 맺힌 채 시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안채린은 턱을 괴고 앉은 채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이 시험지가 소예지의 손에 들어갔다면 과연 몇 점을 받았을지 상상해 보았다.마침내 제출 시간이 되자 강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험지를 모두 거둬들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회의실을 나섰다.결과는 오후 세 시 반에 발표된다고 했다.안채린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두 시가 되자 이미 회의실 근처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주치는 동료들마다 얼굴빛이 어두워 모두 자신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공기에는 초조함과 불안이 짙게 깔려 있었다.그때 한 여자 동료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안채린, 너 뭐가 걱정이야. 우리 중에 네가 제일 잘 하잖아. 이번엔 분명 붙었을 거야.”다른 동료도 곧바로 말을 보탰다.“맞아. 강 선배랑 사이도 좋잖아. 분명 널 뽑을 거야.”안채린의 속은 씁쓸했지만, 그런 말들이 싫지는 않았다.그녀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결과는 나와 봐야 알지.”약 삼십 분 뒤, 강준석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명단 한 장이 들려 있었다.강준석의 시선이 천천히 사람들을 훑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채린에게 멈췄다.“안채린.”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안채린은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섰다.“네.”“61점이야. 간신히 합격선 넘겼어.”강준석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안채린은 순간 멍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겨우 61점이라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점수는 고작 합격선에 턱걸이한 수준이었다.하지만 다른 동료들의 시선은 부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때 강준석이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다른 사람들은 다 탈락이니까 돌아가.”회의실을 나서는 발걸음들이 하나둘 무겁게 이어졌다.강준석은 채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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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5화

지금 이 선택은 강준석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고 그의 곁에서 일할 기회도 얻을 수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고 안채린은 스스로를 설득했다.안채린이 평가를 통과했다는 소식은 곧 연구실에도 전해졌다.이서연은 소예지의 자료를 정리하다가 그 이야기가 떠올라 입을 열었다.“안채린, 그래도 대단하긴 하네. 붙었다면서? 물론 간신히 합격선 넘긴 거라던데.”소예지는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본인의 능력이지.”담담한 한마디였다.“그래도 이제 부서 옮기면 다행이지. 너도 좀 조용해지겠네.”이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안채린이 종종 고이한의 ‘처제’라는 위치를 은근히 내세우며 기세를 부리던 모습을 떠올리면 이번 이동은 연구실 분위기에도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소예지는 이미 다시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다.이서연은 더 말을 잇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안채린의 인사이동을 은근히 반기고 있었다.그때 이지원이 다가와 실험 상황을 보고했다.소예지와 이지원은 나란히 앉아 데이터를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이서연은 옆에서 귀를 기울이다가 곧 포기했다. 두 사람이 논의하는 내용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특히 소예지가 제시한 이론은 의학 분야에서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개념이었다.한편, 안채린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이 소식을 심유빈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지금쯤 비행기에서 내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번 여행은 몇 달씩 이어질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고이한이 직접 동행한다는 사실이었다.최근 몇 번이나 심유빈의 기분이 좋지 않았으니 고이한이 함께 해외로 나가 기분 전환을 시켜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세계 곳곳을 돌며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안채린은 내일 연락하기로 마음먹었다.그녀는 가방을 들고 아버지 회사에 들르기로 했다. 한동안 방문하지 못했던 터였다.아버지 회사는 최근 도심의 오피스 빌딩 한 채를 통째로 매입했고 노을이 내려앉은 저녁 햇빛 속에서 성양 그룹의 외관은 제법 위엄 있어 보였다.하이힐을 또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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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6화

도윤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자연스럽게 소예지를 떠올렸다. 연구계 소식도 틈틈이 챙겨보는 편이었기에, 요즘 소예지의 이름이 얼마나 자주 언급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의 명성은 요즘 연구계에서 유난히 두드러지고 있고 국가 주요 인사에게까지 불려 갔다는 이야기까지 조심스럽게 돌고 있었다. 다만 그런 대우는 아직 안채린에게는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다.“미안해. 일 얘기는 괜히 꺼냈네.”도윤재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그래도 나는 성양 그룹에서 잘 지내고 있어. 회장님도 나를 꽤 좋게 봐 주시고 중요한 프로젝트도 맡겨 주셨어. 나...”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근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안채린이 그 노력과 변화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윤재야.”안채린이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끊었다. 말투에는 분명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나 지금 바빠. 아빠 회사에서 잘하고 싶으면 그냥 노력해. 그걸로 충분해.”도윤재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는 자신의 몸에 걸친 몇십만 원대 정장을 내려다본 뒤, 안채린의 손에 들린 가방과 몸에 걸친 고급 브랜드 옷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열등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한때 그는 그녀와 나란히 실험실에서 이상을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의 아버지 회사에서 어정쩡한 위치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본래 자존심이 강한 안채린에게서 한 번의 눈길, 한 번의 인정이라도 얻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잘 지내면 됐어.”안채린은 말을 마친 뒤 일부러 덧붙였다.“나 지금 강준석 선배 팀에서 일해.”그 말에는 분명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녀가 여전히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강준석이며 괜한 기대는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안채린은 그를 스쳐 지나 아버지의 사무실로 향했고 도윤재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서류 가방을 쥔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이렇게까지 멀어지겠다는 건가...’그는 돌아서는 안채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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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7화

오후 다섯 시 반, 소예지는 학교로 고하슬을 데리러 갔다.마침 그곳에는 윤하준도 와 있었기에 두 사람은 교문 앞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쳤다.“고 대표가 해외로 나간다는 얘기 들으셨어요?”윤하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들었어요.”“왜 그렇게 오래 머무는지 이유는 아세요?”윤하준이 다시 물었다.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저랑은 이미 이혼했어요. 그 사람 사적인 일은 저랑 상관없어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윤하준은 자신이 물어볼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 교문이 열렸고 학부모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잠시 뒤 소예지는 고하슬의 손을 잡고 교문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윤하준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하준 삼촌!”윤하준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답했다.사실 그는 소예지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 경주에서 돌아온 그녀가 피곤할 것 같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그날 밤 윤하준은 하종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이미 술집에 와 있으니 나오라는 연락이었고 또 술에 취해 있을까 걱정된 그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술집 2층에 있는 별도의 룸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작은 공간처럼 대부분의 음악과 소음을 차단하고 있었다.하종호는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눈은 흐릿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또 마신 거야?”윤하준이 맞은편에 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하종호는 며칠째 제대로 자기 관리를 하지 않은 사람처럼 초췌해 보였다. 윤하준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이러지 말고 정신 좀 차려.”하종호는 취기가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 갑자기 비웃듯 웃었다.“정신 차리라고? 어떻게?”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자조가 묻어 있었다.“아무 말도 없이 이한이랑 같이 떠나서 둘이 세계 여행이라도 하듯 돌아다니는데? 난 뭐야? 난 좋아할 자격도 없었어!”그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취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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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8화

하종호는 스스로도 더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술병을 집어 들려 했다.그러나 윤하준이 재빨리 술병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연애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정신 차려.”윤하준은 한숨 섞인 눈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한때 하종호는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거칠게 웃던 사람이었다. 장난스러웠지만 누구보다 패기 있고 자존심도 강했으며 자기 목표와 자부심이 분명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한 사람에게 매달려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난... 내가 더 노력하면 더 진심이면 언젠가는 마음이 움직일 줄 알았어.”하종호의 목소리는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근데 이제 알겠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한이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그 말에는 짙은 무력감과 절망이 묻어 있었다.윤하준의 마음도 복잡해졌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하종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만 마셔. 내가 데려다줄게. 가서 푹 자고 내일은 같이 밥이나 먹자.”하종호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윤하준이 그를 부축하자 비틀거리며 몸을 맡겼다. 윤하준은 그를 차에 태워 안전벨트를 채운 뒤 곧장 그의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연애라는 건 언제나 당사자는 눈이 멀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만 또렷하게 보게 되는 법이었다.집에 도착하자 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윤하준은 하종호를 방까지 직접 데려다 눕히고 몇 마디 당부를 남긴 뒤에야 돌아섰다.윤하준이 막 떠난 직후, 현관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집사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혹시 윤하준이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싶어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 속에는 단정한 차림에 온화한 분위기를 지닌 젊은 여성이 서 있었고 집사는 그녀를 곧바로 알아보았다.하씨 집안에서 직접 점찍어 둔, 미래의 ‘하종호의 아내’ 후보였다. 문을 열자 그 여성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엄가온 양, 오셨군요. 도련님은 방금 술에 취해서 들어오셨습니다.”여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술을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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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9화

하종호가 입을 맞추려 하자 그제야 엄가온은 당황했다.하지만 이미 술에 깊이 취한 남자는 눈앞의 여자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쉽게 물러설 리는 없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곁에서 들려오는 하종호의 숨소리는 점점 무거워졌고 결국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의 팔은 여전히 엄가온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마치 마지막으로 붙잡은 부표라도 되는 것처럼 끝내 놓지 않았다.엄가온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하종호가 잠든 뒤에는 팔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풀려 있었고 그녀가 이불을 살짝 젖힌 채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순간 시선이 침대 시트 위에 번져 있는 붉은 자국에 멈췄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엄가온은 숨이 멎은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완전히 거부하지 않은 일이었다. 엄가온은 조용히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고 그가 이 침실에 머문 시간은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밖으로 나오자 집사가 곧바로 다가왔다. 긴 머리를 풀어 내린 채 나온 그녀의 목 아래에는 몇 군데 선명한 붉은 자국을 본 순간, 집사는 눈을 크게 떴다.“엄가온 양, 이건...”엄가온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차분하게 말했다.“집사님, 오늘 제가 왔던 일은 밖에 말하지 말아 주세요. 종호 오빠에게도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그리고 침대 시트가 더러워졌어요. 종호 오빠가 일어나시면 새것으로 갈아 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천천히 집을 떠났다.집사는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술에 그렇게 취해 있던 도련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술이 사람을 망친다니까...’다음 날 아침.전날 밤 기억이 끊긴 채 잠들었던 하종호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눈을 떴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나른한 기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잠시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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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0화

하종호는 곧바로 집사를 불렀다.“집사님!”집사는 재빨리 올라왔다.“도련님, 부르셨습니까?”하종호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어젯밤 우리 집에 또 누가 왔었어요?”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엄가온 양이 다녀가셨습니다. 도련님 방에서 두 시간 정도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떠나실 때는 도련님께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고, 또...”“또 뭐요?”하종호가 날카롭게 물었다.“침대 시트를 정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침대 시트?”하종호는 중얼거리듯 되뇌었다.순간 아침에 보았던 그 붉은 흔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는 곧장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 시트 어디 있어요? 빨리 가져와요!”마침 가정부가 막 시트를 처리하려고 봉투에 넣어 두고 있었다.하종호는 봉투를 거의 낚아채듯 열어 시트를 꺼냈고 회색 시트 한가운데 번져 있던 붉은 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그 순간 그의 머릿속이 웅 하고 울리는 듯 멍해졌다.얼굴 위로 깊은 자책과 뒤늦은 후회가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술에 취해 이성을 잃는 일이라니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도련님...”집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버려요.”하종호는 짧게 말하고 돌아섰다.그는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난감한 기분으로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엄가온은 부모님과 오래 알고 지낸 집안의 딸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녀를 심유빈의 대용으로 착각한 채, 심지어 억지로 붙잡기까지 했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하종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예전에 저장해 두었던 엄가온의 번호를 찾아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종호 오빠.”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그는 급히 말했다.“미안해, 가온아. 정말 미안해.”말이 꼬일 정도로 당황한 목소리였다.“어젯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정말 미안해.”전화기 너머에서 엄가온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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