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901 - Chapter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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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1화

가정부는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다시 전화를 집어 들었다.“방금 제가 서류를 하나하나 다 확인해 봤는데요. 대표님이 찾으시는 병력 보고서는 보이지 않아요. 혹시 다른 곳에 두신 건 아닐까요?”전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가정부는 잠시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아직 듣고 계세요?”잠시 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더 찾지 마세요.”고이한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 거칠었다.“할머니랑 제 동생... 잘 돌봐 주세요.”“네, 알겠습니다.”가정부가 대답하자 전화는 곧 끊어졌다.한편, D국.지금 그곳은 막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이었다.고이한은 스미스 연구소 병실 밖에 서 있었다.병실 안에서는 약을 복용한 뒤 잠든 진가영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그는 유리창 너머로 어머니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피로가 짙게 내려앉은 얼굴 위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고 그 눈빛 깊은 곳에서는 억눌러 온 생각들이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그때였다.누군가가 뒤에서 조용히 다가왔다.“고 대표님, 커피 한잔하시죠. 조금은 정신이 들 겁니다.”뒤돌아보니 스미스 박사였다.고이한은 커피를 받아 들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어머니 병력 보고서 하나를 국내에 두고 왔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소예지가 그걸 본 것 같습니다.”스미스는 순간 놀란 표정이 되었다.이 사실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비밀로 숨겨 온 일이었다.그는 고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의 깊은 검은 눈동자 속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스미스가 분명히 읽어 낸 감정이 하나 있었다.해방감이었다.스미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이 세상에서 당신의 딸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소예지 씨와 당신 두 사람뿐일 겁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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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2화

스미스의 사무실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고이한은 꽉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그의 눈 깊은 곳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피로와 갈등, 그리고 복잡한 생각들이 뒤엉켜 있었지만 잠시 후 그 모든 감정은 서서히 가라앉았다.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냉정한 평정이었다.그는 스미스가 말한 그 치료 방법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박사님, 짐을 정리하세요. 팀 전원을 데리고 저와 함께 돌아갑시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소예지를 초청해 박사님과 함께 최종 치료 방안을 공동 연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시에 국내 연구소도 바로 가동하겠습니다.”스미스의 얼굴에 곧바로 기색이 밝아졌다.“그건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소예지 씨가 합류한다면 연구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겁니다.”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저도 팀 전원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장기 연구를 진행하려면 그게 가장 좋습니다.”잠시 생각하던 스미스가 덧붙였다.“가족이 한곳에 모여 있는 편이 치료에도 더 유리합니다.”그때였다.스미스의 컴퓨터 화면에 새로운 메일 알림이 떠올랐다.그는 무심코 메일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소예지 씨에게서 온 메일입니다.”고이한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모니터로 향했다.발신자는 분명 소예지였다.메일 제목에는 이미 핵심 연구 분야가 정확히 짚여 있었다.그 순간 고이한의 마음속에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소예지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직후 그에게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스미스에게 연락을 보낸 것이었다.스미스는 메일을 열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메일 속에는 불필요한 말이 단 한 줄도 없었다.소예지는 스미스 연구소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최신 연구 자료를 직접 인용하며 몇 가지 질문을 남겨 놓고 있었고 그 질문들은 놀라울 만큼 정확하고 날카로웠다.고이한은 스미스의 뒤에 서서 그 메일을 함께 끝까지 읽었다.마지막 줄을 확인한 스미스는 감탄하듯 손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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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3화

소예지는 거의 이를 악문 채 말을 쏟아냈다.지금 그녀는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도대체 그는 무슨 자격으로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진 구세주처럼 행동하면서 정작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은 채 모든 사실을 숨기고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소예지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눈가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마치 그것이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힘이 들어갔다.지금 이 순간 만약 고이한이 눈앞에 있었다면 소예지는 정말로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을지도 몰랐다.바로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고이한은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우리 어머니 병을 숨긴 건 내 잘못이야.”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내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희까지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나도 내가 얼마나 비겁한 짓을 했는지 알아. 너한테 상처 준 것도 알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지금 와서 아무리 사과해도...”그 순간 소예지가 거칠게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그만해.”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떨렸다.“그런 말 들으려고 전화한 거 아니야.”그리고 곧바로 물었다.“스미스 박사 팀, 당신이랑 같이 한국 들어오는 거 맞지?”고이한이 짧게 대답했다.“맞아.”그는 이어 설명했다.“몇 년 전에 국내에 개인 연구소 설립 허가를 받아 놨어. 스미스 팀은 거기서 계속 연구하게 될 거야. 연구소도 전면 가동할 거고.”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덧붙였다.“소예지... 네 도움이 필요해.”사실 소예지는 계속해서 그를 몰아붙이고 싶었다.그를 욕하고 싶었고, 때리고 싶었고 심지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소예지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겨우 말을 꺼냈다.“알겠어.”“스미스 박사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하자.”말을 마친 순간이었다.갑자기 몸이 휘청했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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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4화

소예지는 양희순에게 잠시 쉬겠다고 말했고 고하슬도 엄마의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놀기 시작했다.침대에 몸을 눕힌 소예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고개를 베개에 기대자마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녀는 아침부터 오후 두 시까지 내리 잠들어 있었다.잠에서 깨어난 뒤, 소예지는 한결 정신이 맑아진 것을 느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딸이 젤리와 함께 거실을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커다란 창을 통해 거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공간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고하슬은 엄마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품에 안겼다. 소예지는 딸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 뛰어다닌 탓에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 결심은 더욱 단단해졌다. 확률이 30%든, 1%든 그 가능성을 반드시 0으로 만들어야 했다.바로 그때, 소예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강준석이었다.“여보세요, 강 선배?”“오늘 연구실에 갔었는데 네가 휴가 냈다더라. 괜찮아?”강준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소예지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그 감정을 강준석에게까지 전가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응, 괜찮아.”강준석이 말을 이었다.“민간용 프로젝트 쪽에서 몇 가지 지표가 잘 안 잡혀. 너랑 좀 상의하고 싶은데.”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오늘 저녁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어. 밥 먹으면서 일 이야기도 하자.”강준석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좋아. 퇴근하고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뒤 소예지는 다시 서재로 올라갔다.컴퓨터를 켰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심장을 불안하게 만들던 그 데이터들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대신 스미스 연구소에 축적된 희귀 혈액 질환 치료 및 개입 방법 자료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그녀는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속도로 핵심 기술과 정보를 모두 파악해야 했다. 그래야 스미스가 귀국했을 때 그와 막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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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5화

고이한은 이미 4년 전에 몰래 딸의 유전자 검사를 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무려 4년 동안 소예지에게 숨기고 있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예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전화기 너머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저 남자의 조금 무거운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몇 초가 흐른 뒤, 고이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낮고 약간 쉰 목소리였다.“미안해. 내 잘못이야.”또다시 사과였다.소예지는 그 말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고이한.”그녀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대체 무슨 권리로 나한테서 엄마로서의 알 권리를 빼앗은 거야?”“어떻게 혼자서 고하슬에 대한 모든 걸 결정할 수 있어?”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당신 눈에는 내가 항상 문제만 생기면 발목 잡는 짐짝으로 보였던 거야?”고이한이 즉시 부정했다.“아니야.”그의 대답은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그리고 그는 다시 말했다.“미안해. 당신한테 숨긴 건 내 잘못이야.”그는 여전히 변명하지 않았다.그저 소예지의 분노를 전부 받아들이고 있었다.하지만 그 태도가 오히려 소예지를 더 자극했다.“미안하다고?”소예지의 목소리가 떨렸다.“그 한마디면 다 끝이야?”“고이한, 넌 항상 이래.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고 혼자 다 해결하려고 하고, 혼자서 다 옳다고 생각해.”그녀의 숨이 거칠어졌다.“당신이 구세주라도 되는 줄 알아?”“대체 나한테 얼마나 더 많은 걸 숨긴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본인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분노가 극에 달하자 눈물이 통제되지 않고 치밀어 올랐다. 바로 그 순간, 소예지는 심장 부근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숨이 순간 멎은 것처럼 막혔다.그녀는 반사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고 그대로 힘없이 쪼그려 앉았다.바로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강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걸음에 달려왔다.“예지야!”강준석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괜찮아?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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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6화

강준석은 여전히 창백한 소예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걱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예지, 모든 걸 혼자 버티려고 하지 마. 아까 네 상태 보고 정말 놀랐어. 병원에 가서 한번 검사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마음도 좀 놓이지 않겠어.”소예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시간 되면 병원에 가서 전신 검사 한번 받아 볼게.”사실 그녀 역시 방금 느꼈던 통증이 아마 어젯밤 밤을 새운 탓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조금 전 감정이 너무 격해진 탓에 심장이 놀란 것일지도 몰랐다.딸의 유전 가능성에 대한 일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사실을 숨겨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고하슬은 아직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단지 유전 가능성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비밀은 당분간 그녀가 지켜야 했다.그리고 언젠가 완전한 치료 방법을 찾게 된다면 그때 가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강준석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며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그는 더 이상 일을 늘려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소예지는 아직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아까 말한 파라미터 데이터, 나한테도 하나 보내 줘. 나중에 다시 한번 보려고.”그러자 강준석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내일 연구실에서 다시 이야기해도 돼.”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거절의 여지가 없었다.소예지는 가끔 일에 몰두하면 완전히 일 중독자가 되어 버리곤 했다. 일 하나만 손에 쥐어도 밤새 붙잡고 있기 일쑤였기 때문에 지금은 억지로라도 쉬게 해야 했다.소예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마침 양희순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 두고 고하슬을 보내 두 사람을 부르게 했다.“엄마! 준석 삼촌! 밥 먹어요!”고하슬이 베란다로 뛰어 들어와 밝게 외쳤다.강준석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지금 갈게.”저녁 식사가 끝난 뒤 소예지는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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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7화

하지만 소예지는 고이한을 동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짊어진 고통은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다.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최현숙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해외에 가면 장비가 더 발전된 경우도 있으니까요. 검사 한 번 받아서 마음 편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최현숙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숨을 쉬었다.“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그래도 왔다 갔다 하려면 얼마나 힘드냐. 나는 이제 비행기 타는 게 겁나.”그러면서도 옆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고하슬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이것 좀 봐라. 하슬이 얼마나 잘 키웠는지. 아주 하얗고 통통하게 잘 자랐네.”소예지도 딸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소원은 단 하나였다.이 아이가 평생 건강하게 자라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그렇게 딸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 고하슬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엄마, 나 위층 가서 놀아도 돼요?”지난번 아버지 서류를 엎어버렸던 일이 떠올랐는지 아이는 혹시 엄마가 허락하지 않을까 봐 조심스러운 눈빛이었다.소예지는 가방 속에서 그 병력 파일을 꺼내며 말했다.“가자. 엄마가 같이 올라갈게.”소예지는 딸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고이한의 서재로 들어갔다.소예지는 들고 온 병력 파일을 조용히 책상 위에 놓인 다른 서류 더미 사이에 다시 끼워 넣었다.그 사이 고하슬은 방 안에서 신나게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었다.그때였다.갑자기 문 하나가 세게 열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 아침부터... 조용히 못 해?”고하슬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문안에서는 고수경이 이마를 문지르며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잠에서 막 깬 듯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고모!”고하슬이 반갑게 달려갔다.고수경은 아이를 보자마자 얼굴에 떠 있던 짜증이 조금 가라앉았고 마지못해 웃음을 지었다.“어? 하슬이네. 언제 왔어?”“저 아까부터 있었어요. 고모 아직도 안 일어났어요?”고수경은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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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8화

윤하준에게 거절당한 그날 이후로 고수경의 삶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모양으로 흘러가고 있었다.그동안 고수경은 늘 기분이 내키는 대로 놀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그저 순간의 즐거움만을 좇아 살아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몸이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금은 마음껏 즐기고 나중에 몸을 다시 회복하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 고수경은 문득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스물여섯 살의 몸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묘하게 무거웠다.그녀는 잠시 문틀을 붙잡고 서 있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방으로 돌아가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 눕고는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 했다.한편 아래층에서는 최현숙이 상황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소예지가 손녀에게 괜히 기분 상한 말을 들었다는 것을 말이다.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수경이 말은 신경 쓰지 마라. 요즘 저 애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맨날 기운도 없고 짜증만 늘어서, 사소한 일에도 금방 화부터 내더라.”옆에 서 있던 가정부는 고수경의 상황에 깊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아침에 청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고수경이 잠에서 깨어난 뒤에야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 전에 청소를 하게 되면 고수경이 화를 내며 난리를 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그 말을 들은 소예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혈액 질환의 대표적인 동반 증상 가운데에는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쉽게 짜증을 내거나 기운이 없고 무기력해지는 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오전 열 시 반이 되자 소예지는 딸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최현숙이 몇 번이나 붙잡았지만 소예지는 일이 있다는 이유로 정중히 인사를 하고 떠났다.그녀는 딸과 함께 백화점에 들러 설에 쓸 물건들을 사기로 했다. 고하슬은 쇼핑몰 안에 들어서자마자 신이 난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설날이 가까워질수록 소예지의 일정도 점점 바빠지고 있었다. 연구실 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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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9화

소예지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비워 준 가장 중심 자리에 앉았다.바닥까지 이어진 커다란 창문으로 따뜻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빛은 그녀의 몸 위에 은은한 윤곽을 그리며 부드러운 광채를 만들어 냈다.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시작하죠.”임재석이 노트북을 꺼내며 연말 보고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예지는 팔짱을 낀 채 자료를 바라보며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냉정하고 집중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정장을 입은 남자 일곱 명이 한 여자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 앉아 있는 여자는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누가 봐도 그녀가 이 자리의 책임자였다.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 역시 한눈에 봐도 비즈니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처럼 보였다.그중 세 명은 외국인이었고 그들의 보고는 전부 영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소예지는 한국어와 영어를 자연스럽게 오가며 대화를 이어 갔다.그녀의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는 권위와 리더의 기질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그녀를 ‘소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 손님 몇 명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감탄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카페의 아르바이트생 세 명도 일을 하면서 슬쩍슬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소예지는 평소에도 이 카페에 커피를 사러 자주 오는 단골이었다. 무엇보다 외모가 눈에 띄게 아름다웠기 때문에 직원들도 이미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옆 라온파크에 산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회사 대표라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역시... 저 단지 사는 사람들은 다 부자거나 대단한 사람들이네.”하지만 소예지는 주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데이터 분석과 업무 보고에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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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0화

연구실에서 강준석은 하루 종일 업무에 매달려 있었다.실험 자료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휴대전화를 확인할 틈조차 거의 없었다.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그는 잠시 숨을 돌리며 사무실로 돌아왔다.책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 세 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발신자는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고이한이었다.강준석은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말해 그 전화를 다시 걸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고이한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결국 그는 휴대전화를 들어 다시 전화를 걸었고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었다.“강 박사님, 통화 가능하신가요?”고이한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 속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강준석은 바로 본론을 물었다.“고 대표님, 무슨 일이죠?”잠시 침묵이 흐른 뒤 고이한이 말했다.“어젯밤 소예지 집에서 나올 때... 상태가 어땠어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강준석의 눈빛이 살짝 차가워졌다.“정말로 걱정되신다면 더 이상 예지를 자극하는 일은 하지 마세요.”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그리고 예지에게서 좀 떨어져 계세요.”말투에는 분명한 경고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 어젯밤 고이한과 소예지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통화 이후 소예지가 그렇게 격하게 감정이 흔들렸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강준석은 그것이 아마 둘 사이의 감정 문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이미 이혼을 선택한 고이한이 더 이상 소예지의 삶에 끼어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잠시 후 고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강 박사님.”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졌다.“소예지를 좀 지켜봐 주세요.”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혹시라도 몸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병원에 데려가 주세요.”강준석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이한이 다시 말했다.“저는 아직 이틀은 더 지나야 국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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