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911 - Chapter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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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1화

고이한의 숨이 순간 턱 막혔다.그는 소파에 앉은 채 아무 움직임도 없이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고수경이 방금 보내온 사진들이 떠 있었다.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았지만 고이한의 시선은 그 위에 오래 붙들려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결국 화면을 끄고 휴대전화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마치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듯한 동작이었다.그때였다.다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고수경이었다.[오빠, 내가 보낸 사진 봤어?][대체 봤는지 안 봤는지 말 좀 해.]고이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짧은 답장을 보냈다.[봤어.]두 글자뿐인 메시지였다. 답장을 보내자마자 그는 휴대전화를 옆으로 던지듯 내려놓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짙은 눈썹이 서서히 구겨진 채 몇 분의 시간이 흘렀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에는 이미 어떤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비행 준비는 어떻게 됐습니까?”전화기 너머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대표님,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정오쯤에야 출발할 수 있습니다.”고이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그는 다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천천히 문질렀다.시선은 한 방향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분명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한편 국내.레스토랑 안에서 소예지는 턱을 괸 채 창밖의 밤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유리창 너머로 반짝이고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부드럽게 섞여 들어왔다.소예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윤하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일 생각해요?”그 말을 듣고서야 소예지는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리고 가볍게 웃었다.“그냥...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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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2화

지하 주차장의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소예지는 윤하준의 눈에 담긴 진지함과 깊은 감정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멈춰 섰다.윤하준의 고백은 담담했다. 과장도 없었고 상대를 몰아붙이려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곤란해질까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진심이 느껴졌다.그래서 더 쉽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소예지의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그녀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딸의 유전 가능성이라는 무거운 현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윤하준의 고백은 그녀에게 너무도 무거운 감정이었고 동시에 지금의 그녀에게는 맞지 않는 순간이기도 했다.소예지는 잠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몇 초 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는 감사함만이 담겨 있었고 다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하준 씨.”그녀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마워요.”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건... 저한테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하준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훌륭한 사람이기도 하고요.”그러나 다음 말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어졌다.“하지만 미안해요.”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지금 저는 누구의 감정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소예지의 시선은 차 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잠든 딸의 모습이 직접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지금 제 마음이랑 시간은 전부 하슬이랑 제 일에 쓰이고 있어요.”차분한 목소리였다.“다른 곳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여유도... 지금은 없어요.”소예지는 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병의 가능성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딸의 미래는 자신 혼자 지켜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그 무거운 현실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윤하준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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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3화

뉴스가 발표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추측을 내놓기 시작했다.다음 국무총리는 아마 임성국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소예지도 기사를 읽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 번 직접 만난 적이 있었던 임성국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는 충분히 국무총리를 맡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기사를 끝까지 읽은 뒤 소예지는 다시 일을 시작하려 했다.그때 휴대전화 화면이 잠깐 밝아졌다.[나 휴가예요. 내일 A시로 돌아가요.]임현욱이었다.소예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임성국이 국무총리에 오르게 된다면 앞으로 그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임현욱의 신분 역시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소예지는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하지만 결국 아무 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약 삼십 분쯤 지났을까, 인터넷에는 새로운 뉴스들이 연달아 헤드라인을 차지하기 시작했다.소예지는 습관처럼 뉴스 앱을 열어 주요 기사들을 훑어보고 있었다.그러다 한 기사 제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속보! 고이한, 심유빈과 열애 공개 임박? 재벌가 결혼설 확산]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마침 스미스 박사와 연구팀도 고이한과 함께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도착 시간이 언제인지 확인할 생각으로 기사를 눌렀다.하지만 기사 속 사진에는 고이한과 심유빈 두 사람만 등장하고 있었다.사진 배경은 사설 공항이었다.사진 속 고이한의 옆에는 세련된 차림에 완벽한 메이크업을 한 심유빈이 서 있었다.어떤 사진에서는 고이한이 뒤를 돌아보며 심유빈을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사진에서는 심유빈이 머리를 가볍게 넘기며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달콤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소예지는 기사를 끝까지 내려보았다.하지만 스미스 박사나 연구팀의 사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대신 화면 아래에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가득 달려 있었다.[와, 이거 사실상 확정 아니야? 우리 여신 드디어 공식 커플 되는 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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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4화

유미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어딘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가 섭외한 사람이잖아.”심유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유미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살펴보았다.이번에 귀국한 뒤로 심유빈은 전보다 훨씬 생각이 많아 보였다. 늘 마음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녀가 이미 잡아 놓았던 몇 개의 행사도 모두 거절해 버린 상태였다.유미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그 광고 하나 들어왔는데 광고비가 50억이야. 혹시...”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유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관심 없어.”유미나는 조금 아쉽다는 듯 다시 설득했다.“그래도 50억이면 적은 돈은 아니잖아.”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얼굴만 잠깐 비추고 카메라 보면서 웃어 주기만 해도 벌 수 있는 돈인데.”그 말을 듣는 순간 심유빈의 입가에 비웃음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그녀는 유미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아직도 그런 광고 찍어서 돈 벌어야 할 정도로 보여?”유미나는 그 말에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확실히 그랬다. 심유빈에게 그런 돈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처음부터 단 하나, 고이한과 결혼해 고씨 가문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었고 그 자리에 비하면 영화 출연료나 광고비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돈에 불과했다.심유빈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언니.”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고씨 가문 사모님 자리야말로 내가 진짜로 얻어야 할 자리야.”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확신이 담겨 있었다.“그건 단순한 결혼이 아니야.”“진짜 최상위 재벌가의 지위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산과 인맥이 따라오는 자리라고.”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그때가 되면 내가 언니를 박하게 대할 것 같아?”유미나는 그녀의 눈에서 번뜩이는 욕망을 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심유빈의 마음이 연예 활동에 완전히 쏠려 있지 않다는 건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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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5화

올해 설에는 양희순도 소예지의 집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딸이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 외지에서 설을 보내기로 한 터였다. 집 안은 비교적 한산했지만 명절을 앞둔 분위기만큼은 여전히 따뜻하게 감돌고 있었다.그때 소예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손이 잠시 멈췄다. 발신자는 임현욱이었다.소예지는 전화를 받을지 말지 잠시 망설이며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결국 통화를 받지 못했고 벨 소리가 멈추자마자 이번에는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예상치 못한 소리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이내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당황과 묘한 죄책감 같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설마 현욱 씨?’오히려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소예지는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내려놓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영상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화면 속에 비친 얼굴은 예상대로 임현욱이었다.소예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현욱 씨...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문 앞에 서 있는 임현욱은 긴 이동을 막 마친 사람처럼 약간 지친 기색이 보였지만 곧게 선 어깨와 단단한 자세에서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기세가 느껴졌다.그의 시선이 조용히 소예지를 향했다.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소예지는 왠지 모르게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이미 그에게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임현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거칠게 가라앉아 있었다.소예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현욱 씨, 우리 아래 내려가서 이야기할까요?”그리고 솔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할 말이 있어요.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임현욱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돌렸다.“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하지만 소예지는 이미 문밖으로 나와 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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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6화

“아버님 위치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잖아요. 앞으로 현욱 씨의 미래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될 거예요.”소예지가 조용히 말했다.임현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지 않은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 속에서 그는 이미 소예지의 눈빛에 담긴 확고한 결심을 읽어냈다.그리고 한 가지 사실도 분명히 깨달았다.지금 소예지의 마음속에는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녀의 인생 계획 속에는 애초부터 그도, 다른 어떤 남자도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잠시 후 임현욱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치 가슴 깊은 곳에 쌓여 있던 무언가를 비워 내는 사람처럼 길게 숨을 내뱉은 뒤, 입가에 씁쓸하면서도 체념한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이해했어요.”그의 목소리는 다시 평소처럼 차분하고 안정된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소예지 씨 선택... 존중할게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몸조심하세요.”말을 마친 뒤 그는 잠깐 더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추었다. 입술이 잠시 움직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조용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위까지 데려다드릴게요.”소예지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돌아가세요.”임현욱은 가볍게 웃었다.그 웃음에는 억지로 감정을 눌러 담은 흔적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이왕 인사하는 거잖아요.”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배웅 정도는 해도 되죠.”소예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다시 조용히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말없이 흐르는 정적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너무 고요해서 서로의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릴 것만 같았다.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 문도 동시에 천천히 열렸다.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소예지와 임현욱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그곳에는 고이한이 서 있었고 막 주차장에서 올라온 듯 그의 몸에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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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7화

임현욱은 소예지와 같은 사람이었다.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가진 사람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무거운 책임을 묵묵히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했다.한편 아래층.고이한은 거실의 커다란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그의 휴대전화는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손을 뻗어 받지 않았다.전화는 가족에게서 온 것이었다.설날 저녁을 함께 먹자며 그를 재촉하는 연락이었다.고이한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본 채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던 그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그리고 마치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입술 사이로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그 순간 그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다.위층에서는 양희순이 이미 설날 저녁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소예지와 고하슬, 그리고 양희순 세 사람이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식사가 끝난 뒤 양희순이 미리 준비해 둔 과일 접시를 들고 나오자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베란다로 자리를 옮겼다.베란다에 서자 멀리 강변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가 한눈에 들어왔고 밤하늘 위로 터지는 화려한 불꽃이 어둠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그 광경을 보자 고하슬은 금세 들뜬 표정이 되어 소예지의 품에 안긴 채 환하게 웃었다.“엄마, 나 너무 좋아요.”소예지는 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어린 몸이 품속으로 파고들자 그녀의 팔에도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양희순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미리 준비해 둔 따뜻한 담요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그들 위에 덮어 주었다.겨울밤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담요 안은 금세 포근한 온기로 가득 찼다.그때 젤리도 어느새 다가와 두 사람의 발치에 몸을 웅크린 채 조용히 누웠다.베란다 위에는 어느새 말없이 흐르는 평화로운 온기가 잔잔하게 감돌고 있었다.설 연휴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소예지는 딸을 하루 정도 고이한에게 보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아빠와 시간을 보내게 해 주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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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화

“감사합니다, 박사님.”소예지는 감정을 눌러 담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더 이상 스미스를 붙잡고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안내를 따라 연구소의 다른 구역들을 계속 둘러보았다.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해 보였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줄기세포 기증자는 도대체 누구일까.’‘왜 고이한은 그 사람의 신분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걸까.’‘혹시 그 기증자의 정체에 무언가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쩌면 고이한이 마음속 깊이 숨기고 있는 일은 그녀가 지금까지 짐작해 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몰랐다.오전 동안 연구소를 모두 둘러본 뒤 스미스는 소예지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를 하면서 진가영의 병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스미스도 비교적 솔직하게 정보를 공유했다. 물론 내용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어쨌든 진가영은 고하슬이의 할머니였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소예지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무거워졌다.“진 여사님의 나이가 많아 조혈 기능이 많이 약해졌습니다.”스미스가 설명했다.“그래서 지금은 줄기세포 이식 효과가 예전만큼 좋지 않습니다. 고 대표님도 그래서 새로운 치료 방안을 최대한 빨리 찾길 원하고 있습니다.”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두 번째 치료 방법은요?”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물었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있나요?”스미스는 고개를 저었다.“아직 없습니다.”그는 솔직하게 말했다.“위험이 너무 큽니다. 게다가 같은 병을 가진 실험 대상자를 찾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이 병은 워낙 희귀한 돌연변이 혈액 질환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적용은 쉽지 않습니다.”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지난번에 다른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셨죠. 줄기세포 기증자가 협조하지 않아서 진행하지 못했다고요.”스미스는 안경을 살짝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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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화

고이한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소예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앞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당신 결혼 문제에 간섭하지 않을게.”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당신이 누구를 만나든, 누구와 함께 살든... 그건 전부 당신 선택이고 당신 권리니까.”하지만 그 말은 소예지에게 아무런 감정의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애초에 그 조항은 그녀에게 위협이 된 적조차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이한이 직접 그 조항을 폐기한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그저 쓸모없는 종이 한 장일 뿐이었다.소예지는 서류를 대충 훑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탁 소리가 나도록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그리고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고이한.”그녀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이런 연극 할 시간 없어.”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기증자가 누군지만 말해.”소예지의 예상 밖 반응에 고이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몇 초 동안 그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곧 다시 평소처럼 깊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그는 잠시 침묵했다.마치 마음속에서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있는 사람처럼.그리고 결국 고개를 들어 소예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심유빈이야.”그 세 글자가 그녀의 머릿속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 말이 귀에 꽂히자 소예지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고 동공마저 크게 흔들렸다. 잠깐 동안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때 고이한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고 그는 다시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우리 엄마한테 줄기세포 계속 기증해 온 사람... 심유빈 맞아.”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10년 전부터.”그 말이 떨어지자 소예지는 완전히 멍해졌다. 머릿속의 생각이 한순간 멈춘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심유빈이라는 이름이 떠오르자 소예지는 10년 전부터 고이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던 줄기세포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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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0화

“잠깐.”소예지가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고이한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불러 세웠다.소예지는 걸음을 멈춘 채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며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기다렸다.고이한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다시 평소의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그 말... 생각해 볼게.”짧게 말을 꺼낸 그는 곧바로 덧붙였다.“심유빈 쪽은 내가 처리할 거야.”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당신도 알아 둬야 해.”그의 시선이 다시 소예지에게 향했다.“우리 가족을 살릴 수 있고 하슬이 미래까지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난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어.”소예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하지만 놀랍지는 않았다.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고이한이라는 사람은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그때 고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나도 하나 조건이 있어.”그의 눈빛이 갑자기 단단하게 그녀를 붙잡았다.소예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딸을 위해서라면 이 남자가 끝까지 싸울 거라는 사실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조금은 태도를 누그러뜨렸다.“말해.”고이한은 그녀를 바라본 채 천천히 말했다.“이 일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그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특히 심유빈한테는 더더욱.”소예지는 눈썹을 찌푸렸다.고이한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나랑 심유빈 사이에는 법적 효력이 있는 비밀 유지 계약이 있어.”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차분하게 설명했다.“그 계약에 따르면 기증자 정보와 관련된 모든 내용 그리고 그와 연결된 치료 계획까지 전부 외부에 공개하면 안 돼.”그리고 낮게 덧붙였다.“심유빈이 직접 동의하지 않는 이상.”고이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마지막 부분을 의도적으로 천천히 내뱉었다.“그렇게 되면... 모든 협력 관계를 끊을 권리가 있어.”협력이라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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