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921 - Chapter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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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1화

“아가씨, 여기는 대표님이 투자하신 개인 연구소입니다.”김경환은 고수경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고수경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오빠 거라고요?”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고이한의 자산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연구소가 또 하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넓게 펼쳐진 로비와 정교하게 설계된 검사 구역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연구원들의 모습까지, 이곳은 병원 같으면서도 어딘가 일반 연구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때였다.회의실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한 사람은 고이한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흰 가운 대신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분위기만 봐도 학계 인사라는 것이 단번에 느껴졌다.고이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사님, 제 여동생입니다.”그는 스미스 박사에게 고수경을 소개했다.지난번 고수경의 건강검진은 스미스 연구소가 아니라 병원에서 혈액만 채취해 보내 검사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고수경은 스미스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스미스 박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수경을 바라보았다.“고수경 씨, 지금부터 정밀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잠시 협조해 주시면 됩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고수경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뭐요?”그녀는 곧바로 고이한을 바라봤다.“오빠, 갑자기 왜 나 검사해? 나 멀쩡한데.”목소리에는 짜증과 당황이 뒤섞여 있었다.요즘 들어 몸이 조금 피곤하고 어지러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밤늦게까지 놀고 생활 방식이 엉망이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아직 스물여섯이었다.설령 몸에 문제가 있다 해도 그저 작은 병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동생 앞으로 다가가 잠시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그의 시선이 이내 고수경의 눈 아래에 멈췄다. 눈꺼풀 아래쪽에는 붉은 점처럼 보이는 미세한 출혈 흔적이 남아 있었다.그것은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증상이었다. 예전에 어머니에게도 똑같이 나타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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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말도 안 돼...”고수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연신 저으며 고이한을 바라보았다.“오빠, 거짓말이지? 나 이렇게 멀쩡한데 유전병이라니?”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고 있었다.“엄마도 멀쩡하잖아. 그냥 가끔 가슴이 아픈 거지... 오래된 지병 같은 거라면서...”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공포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호흡도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단단한 힘으로 그녀를 다시 소파에 앉혔다.그의 손길은 차갑고 단호했다.“수경아.”“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정신 차려.”그 말 한마디에 고수경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그때 옆에 서 있던 스미스 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고수경 씨, 최근에 몸이 자주 피곤하거나 힘이 빠지는 느낌이 있었나요?”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식욕이 떨어지거나 이유 없이 몸에 멍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그 질문을 듣는 순간 고수경의 숨이 크게 흔들렸다.스미스가 말한 증상들은 전부 그녀에게 실제로 나타나고 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어제만 해도 종아리에 커다란 멍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단순히 어디에 부딪힌 줄로만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멍은 최근 몇 달 사이에 여러 번 생겼었다.고수경은 마지막까지 버티듯 말했다.“그거 다 밤새 놀아서 그런 거 아닌가요?”그녀는 애써 웃어 보이려 했다.“요즘 스트레스도 많고 기분도 안 좋았거든요.”하지만 스미스 박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안타깝지만 고수경 씨는 이미 어머님과 같은 병의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그 말은 마치 무거운 쇳덩이가 가슴 위로 떨어진 것처럼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순간 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키면서 눈물이 순식간에 눈가에 차올랐다.“오빠...”고수경의 목소리는 금세 울음에 잠겼다.“왜 이래... 나 진짜 아픈 거야? 나 죽는 거야?”그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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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고수경은 이제야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모든 선택이 결국 자신과 어머니를 살리기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이었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길은 오빠 고이한의 계획에 협조하는 것뿐이었다.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고수경은 여전히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어릴 때부터 아무 걱정 없이 살아온 재벌가의 막내딸로, 언제나 제멋대로 굴어도 결국은 모두가 받아 주는 세계 속에서 자라왔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단 두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마치 동화 속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현실 한가운데로 끌려 나온 것처럼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 앞에 서 있었다.잠시 후 고이한과 스미스 박사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실험실 직원 한 명이 고수경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준 뒤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고수경은 잠시 멍하니 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하지만 컵을 쥐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 잡아도 그 떨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컵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여러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그동안 자신이 소예지에게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 비꼬는 말투와 노골적인 무시 그리고 차갑게 내리꽂던 시선들까지 하나하나 또렷하게 스쳐 지나갔다.특히 소예지가 조심스럽게 건강검진을 받아 보라고 권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무례했는지 떠올리자 고수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짜증을 냈고 심지어 심한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럼에도 소예지는 그 일에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행동했다.사실 그녀라면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고 고수경의 병이 점점 악화되더라도 그저 지켜보기만 하며 방관하는 선택도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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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설 연휴가 막 지나간 어느 날, 임성태가 주최하는 연례 자선 만찬이 성대하게 열렸다.이 만찬은 해마다 열리는 행사로, 정치권과 재계의 거물들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인사들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였다. 사회 각계의 유명 인사들과 엘리트들이 초청장을 받았고 그만큼 행사장 안에는 평소라면 쉽게 마주치기 힘든 인물들이 가득했다.소예지 역시 초청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사실 그녀는 이런 사교적인 행사에 큰 흥미가 없는 편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는 자리보다는 연구실이나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익숙했다.하지만 며칠 전 임성태의 부인이 직접 전화를 걸어 정중하게 참석을 부탁해 왔고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있는 만큼 더 이상 거절하기는 어려웠기에 결국 소예지는 그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저녁 여섯 시.외출 준비를 마친 소예지는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그녀가 선택한 것은 간결한 디자인의 검은색 이브닝드레스였다. 장식은 거의 없었지만 재단이 매우 정교해 몸의 선을 우아하게 살려 주는 옷이었다. 긴 머리는 느슨하게 묶어 올렸고 화장 역시 과하지 않게 자연스럽게만 했다.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는 오히려 절제된 품격과 세련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준비를 마친 소예지는 곧 행사장으로 향했다.행사가 열리는 곳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의 대형 연회장이었다.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화려한 분위기가 눈앞에 한꺼번에 펼쳐졌다. 샹들리에의 눈부신 조명이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사람들은 와인잔을 든 채 서로 인사를 나누며 활발하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곳곳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고급 향수와 드레스에서 풍기는 향이 공기 속에 은은하게 번지고 있었다.소예지는 임재석과 함께 행사장에 들어왔다.임재석은 얼마 전 소예지가 직접 벨모아 호텔 그룹 CEO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현재 소예지의 여러 사업을 총괄 관리하며 사실상 그녀의 오른팔 역할을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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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고이한은 몇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윤하준이 자연스럽게 소예지의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함이 전혀 없었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이한의 눈빛이 아주 미묘하게 흔들렸다.그의 시선은 잠시 윤하준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소예지에게로 옮겨 갔다. 깊은 눈동자 속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스스로도 명확히 자각하지 못한 은근한 소유욕이었다.그때 옆에 앉아 있던 임재석이 웃으며 윤하준에게 말했다.“윤 대표님, 저기 보세요. 고 대표님도 와 계십니다.”그 말을 듣고서야 윤하준이 뒤를 돌아보았다.몇 개의 테이블 너머에서 고이한이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윤하준은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이한아, 너도 왔네.”멀리 떨어진 자리였지만 고이한은 와인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멀리서 답례하듯 인사를 건넸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아주 가벼운 몸짓이었다.그 모습을 본 소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접시에 놓여 있던 멜론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과일을 입에 넣으며 자연스럽게 윤하준에게 물었다.“요즘 이안이 학교 알아보고 있다고 했죠?”윤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요즘 이안을 어느 학교에 보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의 재력이라면 딸을 가장 좋은 곳에 보내는 것 자체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택지가 너무 많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윤하준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차라리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이들도 친구가 있으면 훨씬 편하게 적응하잖아요.”소예지는 짧게 미소 지었다.“저는 아직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요.”윤하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직 시간 있으니까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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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심유빈은 소예지 앞에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턱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붉은 입술에 느긋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고 마치 이미 승패가 정해진 게임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너무 차갑게 굴지 말아요.”심유빈이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소예지 씨, 사실 제가 이렇게 붙잡은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예요. 어떤 일이 있는데... 미리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덧붙였다.“괜히 나중에 충격받지 않도록 말이에요.”그러고는 노골적인 암시를 담아 한마디를 더 얹었다.“혹시 아직도 기대하면 안 될 사람에게 미련 같은 걸 품고 있다면... 괜한 환상은 미리 접어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소예지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표정은 차갑고 담담했다. 그 눈빛에는 조금의 동요도 담겨 있지 않았다.“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요.”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저 바쁘거든요.”심유빈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그녀의 손가락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에 끼워진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천천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명 아래에서 반지가 눈부시게 빛났다.그리고 느긋하면서도 은근히 사람을 찌르는 말투로 말했다.“제가 말하려는 건요.”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랑 이한 오빠... 아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는 거예요.”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소예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이한 오빠, 당신한테 말 안 했나요?”그 말을 듣는 순간 소예지는 미간을 아주 살짝 찌푸렸다.심유빈의 말은 분명 단순한 자랑이 아니었다.떠보는 말이었다.고이한과 자신 사이의 관계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고이한이 이미 기증자 문제를 그녀에게 이야기했는지 알아보려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의도는 분명했다.하지만 소예지는 이미 고이한에게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그래서 그녀의 대답은 아주 단순했다.“당신들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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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엄가온은 하종호의 감정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래서 복도에서 마주한 그 장면을 보았을 때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몇 초 동안 상황을 조용히 바라본 뒤, 곧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듯 표정을 정리했을 뿐이었다.하지만 하종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그는 엄가온을 보는 순간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당황과 미안함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고 방금 전까지 심유빈의 어깨 위에 올려 두고 있던 손도 거의 반사적으로 거두어 내렸다.그 미묘한 변화는 찰나에 불과했지만 심유빈은 그런 순간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도 감각이 예민한 성격이었고 무엇보다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심유빈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엄가온 쪽으로 돌렸다. 그녀를 위에서 아래까지 한 번 훑어본 뒤, 다시 하종호를 보며 물었다.“두 분, 아는 사이예요?”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에는 분명한 호기심과 탐색이 어려 있었다.하종호는 잠깐 표정을 정리한 뒤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유빈 씨, 이쪽은 엄가온 씨예요.”그는 그렇게 말한 뒤 시선을 살짝 피한 채 엄가온에게도 소개했다.“이분은 심유빈 씨입니다.”엄가온은 잠깐 멈칫했지만 곧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심유빈 씨, 안녕하세요.”그리고 덧붙였다.“지난번 피아노 공연, 저도 현장에서 봤어요.”그녀의 태도는 매우 차분하고 당당했다. 하종호 옆에 서 있는 여자가 자신의 처음을 함께한 남자의 연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엄가온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그 모습은 하종호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그는 사실 이 상황이 훨씬 더 난감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가온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한 태도와 단정한 말투로 예상보다 훨씬 품위 있고 성숙한 인상을 남겼다.그 순간 하종호의 마음속에 차 있던 당황과 미안함은 이상하게도 조금씩 다른 감정으로 바뀌고 있었다.그 감정은 존중과 호감에 가까운 것이었다.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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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자선 만찬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소예지는 슬슬 자리를 정리할 생각을 했다.행사는 아직 절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이런 사교적인 자리는 오래 머무르기엔 그다지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 가는 것보다 연구실이나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익숙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임재석에게는 조금 더 남아서 손님들을 응대해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은 먼저 돌아가기로 했다.소예지는 연회장 안을 가볍게 둘러본 뒤 곧 임성태에게 다가가 작게 인사를 건넸다.“시장님,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임성태는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소 박사.”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현욱이 일은... 조금만 더 이해해 주세요.”소예지는 잠깐 멈칫했다.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여전히 손님들이 많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의미를 깊이 따져 물을 상황도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더 묻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렇게 짧게 인사를 마친 뒤 소예지는 연회장을 나서려 했다.그때였다.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예지 씨.”소예지가 돌아보자 윤하준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이제 가려고요?”그가 물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제 들어가려고요.”윤하준은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 그런데... 혹시 집까지 태워 줄 수 있을까요?”말투에는 약간의 부탁이 담겨 있었다.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도 사실상 같았다.소예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조금 더 있다 가실 줄 알았는데요.”윤하준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돌아가려고요.”그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집에 아이도 있으니까요.”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같이 가요.”두 사람은 나란히 연회장을 나섰다.그 장면은 멀지 않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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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소예지 쉬는 데 방해할 생각은 없어.”고이한은 그렇게 말하며 윤하준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이어서 소예지를 바라볼 때는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며 조심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잠깐 이야기 좀 해도 될까?”소예지는 손목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이미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올라가서 이야기해.”그 말을 듣는 순간 고이한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그는 윤하준을 향해 말했다.“우리 먼저 올라갈게.”윤하준은 소예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태워줘서 고마워요.”소예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같은 방향이잖아요.”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조심히 들어가요.”두 사람이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윤하준의 마음속에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고 어딘가 씁쓸한 기분과 함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력감이 조용히 밀려들고 있었다.그는 그동안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조금씩 소예지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해 왔고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히고 그녀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며 천천히 마음을 쌓아 올리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소예지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끝내 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반면 고이한은 달랐다.소예지와 이혼한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의 삶 곳곳에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도 윤하준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끼어들 수 없는 방식으로 마치 그 자리가 원래부터 그의 자리였던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소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면 패널에 떠 있는 층수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특별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저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일 뿐이었다.고이한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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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소예지는 고개를 급히 돌렸다.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들킬까 봐서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손등으로 눈가를 재빨리 훔쳐 내리며 억지로 감정을 눌러 담았다.하지만 그 모습은 이미 고이한에게 들킨 뒤였다.그의 시선이 묵직하게 그녀에게 머물렀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 속에서는 쉽게 읽히지 않는 감정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이를 악물듯 눈물을 닦아 내는 소예지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침내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 대위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소예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더 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짧지만 묵직한 침묵이 복도 위로 가라앉아 있었다.잠시 후 고이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다가온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더니 말없이 그녀에게 내밀었다.“여기.”그러나 소예지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집 문 쪽으로 걸어갔다.뒤에 서 있던 고이한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마치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떠 있던 손은 이내 천천히 내려갔다.복도 조명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절반쯤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눈빛은 읽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고 턱선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에서 걸어가는 소예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소예지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엄마!”고하슬이 밝은 얼굴로 달려왔다.그러다 소예지 뒤에 서 있는 고이한을 발견하는 순간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아빠! 아빠도 왔어요?”아이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더 밝아졌다.고하슬은 소예지 옆을 스쳐 지나 그대로 고이한에게 달려갔고 고이한은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고하슬은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보고 싶었어요.”그때 거실 한쪽에서 기르던 강아지 젤리도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달려왔다. 고이한은 한 손으로 딸을 안은 채 다른 손으로 강아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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