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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Chapters

제71화

하객들 사진과 인기 검색어는 서이담이 퇴근했을 때 이미 다 내려가 있었다.아마 사진 속 인물들이 개인 생활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손을 쓴 게 분명했다.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서이담은 평소처럼 장을 보고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집 배관이 망가져 이웃집 젊은 남자가 수리해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예의도 바르고 얼굴도 단정한 그런 남자였다.서이담은 마침 과일을 산 것이 생각나 감사의 뜻으로 그에게 과일을 나눠주었다.남자가 떠난 후 박순자는 서이담의 손을 잡으며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방금 그 애, 이순녀네 집 아들이야. 중학교 역사 선생님이고 올해 27살로 이담이 너랑 동갑.”서이담은 그녀의 말에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저한테는 하율이가 있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쟤네 집도 엄마가 혼자 아들을 키웠어. 그래서 순녀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얼마나 개방적인데. 얼마 전에도 순녀가 웬 영감 하나 데리고 춤을 추는 걸 내가 봤다니까? 그리고 아까 못 느꼈어? 네가 과일 나눠줄 때 도윤이가 힐끔힐끔 쳐다본 거? 이담이 너는 지금 연애하기 딱 좋은 나이야. 그러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도윤이 사람 괜찮아. 직업도 안정적이고.”서이담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소파에 앉힌 후 부엌으로 들어가 과일을 씻었다.하지만 박순자는 포기하지 않고 서이담의 뒤를 따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너한테 선보라는 거 아니야.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아니면 하율이 수술비는 나한테서 빌리는 거로 해. 남은 돈이 조금 있어.”서이담은 박순자의 진심 가득한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연말 보너스 받으면 수술비로 충분할 테니까 돈은 그냥 넣어두세요.”서이담은 그렇게 말한 후 과일을 건네주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엄마, 이번 주 토요일이 준서 생일이래요. 엄마랑 같이 오라는데 어떤 선물을 준비해 가면 좋을까요?”서하율이 물었다.이에 서이담이 휴대폰을 확인해 보자 아니나 다를까 2시간 전에 구준서가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하지만 준서 생일 파티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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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정예진은 인사를 건넨 후 시선을 내려 서하율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자신의 동생과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준서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서이담은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자신의 딸과 정예진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예진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하율아, 준서랑 같이 저쪽으로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서이담은 서하율을 또래 친구들이 많은 곳으로 보내버렸다. 학교 친구들이라 편히 끼어들어 놀 수 있을 테니까.최명희는 도우미의 부축을 받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았다가 구준서가 서하율의 손을 잡고 신이 나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순간 그녀 역시 정예진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여자아이의 얼굴에서 정하준과 정예진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최명희는 이내 그럴 리가 없다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정하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으니까. 여자를 자주 바꾸는 망나니 같은 아들이었다면 아마 결혼 같은 건 걱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최명희는 도우미에게 디저트를 준비시킨 후 자신이 직접 위층으로 가져갔다.2층은 공간이 매우 넓었기에 아이들은 취향에 맞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최명희는 멀리 있는 아이들부터 한 명씩 디저트를 나눠주며 챙기다 제일 마지막으로 소파에 앉아 가만히 있는 서하율의 곁으로 다가왔다.서하율은 또래보다 체구가 작았다. 그래서인지 핑크색 스웨터에 양 갈래 머리까지 하고 있으니 꼭 구준서의 동생 같았다.최명희는 심장이 마구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아이를 향해 물었다.“우리 아가는 이름이 뭐야?”“서하율이에요.”“예쁜 이름이네. 할머니가 하율이라고 불러도 될까?”“네.”최명희는 서하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하율아, 할머니랑 같이 서재로 갈래? 거기도 프로젝터 있어. 하율이가 좋아하는 거 보자. 어때?”최명희는 서하율과 만난 것이 꼭 운명처럼 느껴졌다.사실 그녀는 이따금 하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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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예쁘게 떨어진 머리카락과 매끈한 어깨, 그리고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얼굴, 정하준은 생각지도 못한 서이담의 모습에 괜스레 목이 막히며 심장이 빨리 뛰었다.그는 문고리를 세게 움켜쥐더니 시선을 피하며 다시 나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미안합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웬 남자아이와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나 화장실 갈래요.”“저쪽에 있네. 같이 가자.”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화장실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정하준은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 전에 빠르게 문을 닫고 잠가버렸다.화장실 앞에 도착한 아이는 문이 열리지 않자 아빠를 보며 말했다.“아빠, 문이 안 열려요.”“그래? 아빠가 해줄게.”“사람 있습니다.”정하준이 밖을 향해 말했다.“아, 죄송합니다.”남자와 아이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서이담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심장이 미친 듯이 콩닥거렸다.정하준은 문을 닫은 다음 고개를 돌리며 서이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서이담은 가슴을 가린 손에 힘을 더 세게 주며 조금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고, 고개 좀 돌려요...”정하준의 노골적인 시선이 서이담의 얼굴에서 천천히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호흡이 조금 거칠고 미세하게 떨리는 몸을 보고 있자니 목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그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서이담은 속옷이 젖어있든 말든 서둘러 정예진의 옷을 입었다. 그런데 다 입고 보니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허리 라인은 문제가 없었지만 가슴이 너무나도 타이트하게 느껴졌다.정예진은 가슴이 큰 편이 아니라 지금 서이담이 입은 옷을 입었을 때 가슴이 돋보인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서이담은 가슴이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며 심지어 너무 딱 달라붙어 있다 보니 속옷까지 다 보이는 것 같았다.서이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금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하지만 언제까지고 화장실에 죽치고 있을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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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서이담도 아무 말 없이 쇼핑백을 건네받았다.쇼핑백을 열어보니 안에는 새 속옷과 새 옷이 들어있었다.정하준은 당직을 선 것 때문에 많이 피곤한 건지 고개를 살짝 돌리며 하품을 했다. 사실 그는 진작에 방으로 가 잠을 자고 있어야 했다.서이담은 정하준이 서재를 나간 후 얼른 옷을 벗고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사이즈가 딱 맞았다.속옷샵마다 사이즈가 미세하게 다르기에 그녀도 몇 번을 갈아입어 봐야 알맞은 사이즈로 고를 수 있는데 정하준은 그저 한번 봤을 뿐인데도 정확하게 사이즈를 골라 사 왔다.옷은 핑크색 니트였다.옷의 질감이 너무 좋아 혹시 하는 마음에 가격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였다.“여기서 제일 가까운 백화점은 차로 아무리 빨리 달려도 10분 거리일 텐데...”서이담은 정하준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백화점까지 갔다 와줬다는 것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네...”서이담은 한숨을 내뱉은 후 일단 정하준에게 옷값을 송금했다. 그러고는 젖어버린 옷을 고이 접어 쇼핑백에 넣은 후 서재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정하준의 얼굴에 서이담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사이즈는 맞아요?”서이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쇼핑백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니트 사이즈가 딱 맞더라고요.”그녀의 말에 정하준이 피식 웃었다.“삼촌!”그때 구준서가 정하준을 부르며 곁으로 다가왔다.“삼촌, 내 선물은 어디 있어요?”“삼촌 피곤해.”정하준은 힘겹게 눈을 뜨며 구준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따 저녁에 줄게.”“아! 삼촌 때문에 머리 스타일이 다 망가졌잖아요!”구준서가 불만 섞인 눈빛으로 정하준을 노려보았다.“아빠가 아침에 예쁘게 고정해 준 건데.”정하준은 아이의 말에 씩 웃고는 곧장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담이 이모, 나 어때요? 이모가 선물해 준 후드티로 갈아입었어요.”구준서가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서이담은 그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너무 예쁜데?”“하지만 내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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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고맙습니다, 아저씨.”그때 옆에서 서하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정하준이 잘 잘린 케이크 조각을 서하율에게 건네고 있었다.정하준은 서하율에게 케이크를 건넨 후 곧바로 서이담에게도 케이크를 건네주었다. 군더더기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사람들은 그 시각 각기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나누느라 누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정예진은 똑똑히 보았다. 동생의 행동을.그녀는 마치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본 사람처럼 얼른 최명희 쪽을 향해 기침으로 신호를 주었다.하지만 최명희는 딸의 신호를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준서 옆에 있는 여자애 얼굴 좀 자세히 봐봐요. 얼굴형도 갸름하고 눈망울도 크고 코도 오뚝한 게 딱 우리 하준이랑 판박이잖아요.”최명희의 말에 정윤범이 서하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닮았다고 느낄 만한 부분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당신 설마 저 애가 우리 하준이 애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준서랑 같은 반 친구면 6살이라는 건데 그럼 하준이가 대학교 때 애 아빠가 됐다는 소리야?”“왜 말이 안 돼요? 내가 하나님한테 얼마나 간절하게 빌었는데. 드디어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지도 모르잖아요.”“뭐라고 기도했는데? 하준이가 무책임하게 여자나 임신시키는 망나니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만약 저 애 엄마가 당신 말대로 정말 하준이 아이를 임신한 여자면 애가 6살이 되도록 가만히 있었겠어? 진작 책임지라며 우리 집으로 찾아왔겠지.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고 당신 좋아하는 케이크나 먹어.”정윤범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명희가 손녀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이번에도 분명히 그녀의 허황한 망상이겠거니 하며 대화를 중단해 버렸다.“여보, 내가 어제 막장 드라마를 하나 봤는데 줄거리 좀 한번 들어봐요. 남자 주인공이 첫사랑이었던 여자 주인공이랑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게 됐는데 다시 만난 그 여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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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서이담의 집에 도착하려면 30분이나 더 있어야 했다.서하율은 고개를 꾸벅이다 결국 서이담의 무릎을 베고 금세 잠이 들었다.정하준은 빨간불에서 차량이 멈췄을 때 시선을 들어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서이담만 보면 자꾸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익숙함이 드는 원인은 강보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울 속에 비친 여자를 강보람의 그림자로 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여자에게서 자꾸 강보람과 함께 있었을 때의 느낌이 드는지 그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른 사람인데 말이다.복잡한 생각을 뚫고 정하준이 도출해 낸 결론은 이거였다. 서이담이 강보람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이런 생각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간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여자들이 지나치게 많았다.사실 서이담이 행동 하나하나까지 다 계산하고 그에게 접근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꾸 강보람이 겹쳐 보여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운전대를 잡은 정하준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서하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서이담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정하준의 눈과 딱 마주쳐버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아이를 쓰다듬던 손을 뚝 하고 멈춰버렸다.평소와 달리 정하준의 눈빛이 조금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녀를 속속들이 다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서이담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동이 꺼지며 차가 길 한복판에 멈췄다.정하준이 다시 시동을 켜려고 했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에서 내려 상태를 확인했다.비는 여전히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서이담은 비를 그대로 다 맞고 있는 정하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안 되겠는지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남자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었다.“차 안에서 기다려요.”정하준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비 많이 오잖아요.”서이담은 그렇게 말하며 우산을 조금 더 그의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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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서이담은 차에서 내린 후 곧바로 우산을 폈다. 그러고는 딸을 안으려는데 정하준이 한발 먼저 아이를 안아 들었다.서하율은 갑자기 몸이 들리자 웅얼거리며 정하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정하준은 따뜻한 아이의 볼이 어깨에 닿은 순간 멈칫했다. 형용할 수 없는 따뜻한 무언가가 심장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안심시켜 주었다.그때 아이의 입에서 잠꼬대가 흘러나왔다.“아빠...”목소리가 작기도 했고 또 비 내리는 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서이담은 아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들은 건 오직 정하준뿐이었다.처음에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고른 숨소리를 내뱉으며 자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서하율의 심장이 뛸 때마다 정하준은 자신의 심장 역시 그 속도에 맞춰 같이 뛰고 있는 것 같았다.‘아빠’라고 한 게 잠꼬대였다는 걸 정하준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는데도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서이담은 두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정하준을 의아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정 선생님?”정하준은 그 말에 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순간, 품에 안긴 아이가 자신의 아이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자신의 아내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정하준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어깨가 젖어있는 서이담을 보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기 쪽으로 바짝 붙게 했다.서이담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비를 맞지 않게 하려는 그의 의도를 알고 있기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정하준은 한 손으로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이담의 허리를 감싼 채 천천히 집 쪽으로 걸어갔다.서이담은 세 명을 다 수용해버린 우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분명히 추운 날씨인데도 정하준의 품에 안기듯 있으니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한샘 아파트 12층.집 앞에 도착한 정하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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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아, 네.”서이담은 슬리퍼를 신은 후 곧바로 아이가 있는 손님방으로 들어갔다.‘비가 그치기 시작하면 바로 택시 잡아야지.’사실 서이담은 그날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늦은 시간에 택시를 타는 것이 많이 꺼려졌다.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손님방에 욕실이 있는 걸 본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따뜻한 물줄기를 맞고 있으니 온몸이 다 풀어지는 듯했다. 서이담은 비를 맞고 난 뒤에는 꼭 샤워로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니면 그다음 날 바로 감기에 걸려버리니까.서이담은 바디워시를 짜낸 후 거품을 냈다. 시원하고도 은은한 냄새가 금세 부스 안에 퍼져갔다.그녀는 바디워시 이름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며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거품 칠을 했다.꼭 누군가에게 안겨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잠시 후, 서이담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서서 거품이 다 빠지길 기다렸다. 거품이 걷히자 그녀의 배에 나 있는 핑크색 자국이 모습을 드러냈다....욕실에는 남자 가운밖에 없었다. 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이것 말고는 입을 만한 것이 없어 결국에는 집어 들고 몸을 감쌌다.이제는 젖어버린 옷을 말릴 차례였다. 서이담은 드라이기를 이용해 옷을 천천히 말렸다. 이렇게 뜨거운 바람으로 조금씩 말려주면 금방 입을 수 있을 테니까.코트가 물에 젖어버린 것이 꽤 마음이 아프기는 했다. 세일할 때 산 거라고는 하나 친구도 매장 직원도 전부 잘 어울린다며 극찬을 했던 코트였으니까.옷을 어느 정도 말린 후 서이담은 욕실에서 나와 딸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한번 확인해 보았다.송금한 지가 언젠데 정하준은 아직도 돈을 받고 있지 않았다.“엄마...”그때 서하율이 작은 목소리로 서이담을 불렀다.딸의 잠꼬대에 서이담은 얼른 휴대폰을 치워버리며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조금 전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주던 정하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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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서이담은 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소파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약하게나마 규칙적인 숨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서이담은 조용히 몸을 돌리며 발걸음을 뗐다. 자고 있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그런데 그녀가 이제 막 한걸음 옮겼을 때, 정하준이 뒤척이며 몸을 움직였다. 그 탓에 덮고 있던 담요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서이담은 담요를 집어 든 후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다시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이번에야말로 다시 손님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정하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정하준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서이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서이담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빨리 빼고 싶었지만 벗어나려고 움직이니 더 세게 잡아 왔다.“휴, 휴대폰 배터리가 조금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데 혹시 충전기...”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손목을 잡은 정하준의 손이 살짝 풀어졌기 때문이다.“서이담.”정하준의 입에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주변이 다 새까만데도 서이담의 피부는 여전히 희고 예뻤다.정하준은 서이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서이담.”“네...”서이담은 그의 눈빛을 받아낼 자신이 없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하지만 오히려 그 행동 때문에 분위기가 한순간에 더 야릇하게 달아올라 버렸다.서이담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이대로 가다가는 걷잡을 수 없어질 것 같아 얼른 입을 열었다.“하, 하율이가 깬 것 같아요. 가봐야겠어요.”서이담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그 순간, 정하준의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손목에 자국을 남기기라도 할 셈인지 아까보다 더 세게 잡았다.“저, 정하준 씨, 이것 좀... 읍!”서이담의 턱이 들리고 곧바로 정하준의 입술이 덮쳐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서이담은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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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다음 날 아침.서이담은 이제 막 잠에서 깬 서하율의 옷을 정리해 주고는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서하율은 팔을 들어 그녀의 목을 감싸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물었다.“어제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하준이 아저씨네 집에서 잠깐 신세를 지기로 했어.”“그럼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요?”딸의 순진무구한 말에 서이담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의 키스가 떠올랐다.정하준을 어떤 얼굴로 마주 봐야 할지 몰랐다.정하준이 좋은 마음으로 비를 피할 수 있게 집도 내어줬는데 고맙다는 말은 물론이고 손님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응, 맞아. 아저씨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서이담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엄마, 여기 왜 이래요? 빨개요.”서하율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서이담의 턱에 있는 빨간색 흔적을 매만졌다. 그 손길에 서이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순진한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자니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린 듯한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다.“모기한테 물렸어.”“거짓말. 겨울인데 모기가 어디 있어요?”서하율은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그녀의 목도 가리켰다.“여기 목에도 있어요. 안 아파요?”서이담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그때, 구세주처럼 누군가가 문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자 네모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안으로 들어왔다.서하율은 네모와 눈이 마주치고는 활짝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안녕, 나는 서하율이야.”아이도 엄연히 두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 작은 주인이었기에 익숙한 손길로 네모의 털을 쓰다듬어주었다.네모는 기분이 좋은 듯 아이의 앞으로 가 얼굴을 혀로 핥아댔다.“헤헤, 간지러워. 너 너무 귀엽다. 아저씨네 강아지야?”서하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몇 살이야? 나는 올해로 여섯 살이야.”서이담은 딸의 질문에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 역시 네모가 몇 살인지 알지 못했다.그녀는 강아지와 즐겁게 놀아주는 딸을 보며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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