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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차가 하씨 가문의 본가로 들어섰다. 민하윤은 익숙한 건물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태유 은행 신용대출팀을 대표하여 하진석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집사가 민하윤을 대신하여 차 문을 열었고 모든 직원들이 밖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들 모두 민하윤을 이 집안의 주인 중 한 명으로 여기는 듯했다.민하윤은 심호흡을 한 뒤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아냥댔다.“정말 자기가 안주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그 말에 민하윤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민하윤은 옆에 선 남자를 몰래 힐끔거렸다.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베스트를 입은 하도진은 나른하고 냉담해 보였고 온몸에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젯밤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차가운 모습이었다.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하도진의 부모님은 뵈어야 했다. 민하윤은 그 탓에 자기도 모르게 불안해져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을밤은 서늘했기에 민하윤은 외출하기 전 무난한 베이지색 긴 원피스에 핑크색 카디건을 걸쳤고, 검은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풀어 헤쳤다. 그녀는 마치 연못 속에 핀 연꽃처럼 청순해 보였다. 밤바람이 불자 금목서 향기가 느껴졌고, 민하윤의 맑은 눈동자를 본 하도진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너는 나랑 결혼한 것뿐이야. 내 가족들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고 잘 보일 필요도 없어. 아이를 낳은 뒤에는 그냥 돈 받고 떠나면 돼. 그러니까 이런 짧은 인연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돼.”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의 민하윤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은 달래주고 싶었는데 의도와 다르게 또 상처 되는 말을 내뱉었다.조금 짜증이 난 하도진은 애써 민하윤을 동정하지 않으려고 하며 그녀를 홀로 내버려두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민하윤은 쓴웃음을 지어 보인 뒤 이내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하도진의 말대로 열 달 동안 열심히 몸조리하다가 하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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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민하윤은 연신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너무 귀한 거라 받을 수 없어요.]소파 끝자락에 앉아 있는 여자는 열심히 관리했는지 피부가 굉장히 좋았다. 젊었을 때 상당한 미인이었을 듯싶었다. 금빛의 긴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귀티가 흘러넘쳤다. 여자는 목에 자줏빛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손목에는 비취 팔찌를 하고 있었다. 김옥자가 민하윤에게 선물로 주려는 팔찌와 한 쌍인 듯 보였다.기민한 감각을 지닌 민하윤은 그곳에서 눈앞에 계시는 김옥자만 자애롭다는 걸 빠르게 눈치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특히 아름다운 미모의 중년 여성은 표정이 매우 싸늘했다.“우리 집에서 수화하지 마.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없으니까. 그리고 어른이 주는 거면 그냥 얌전히 받아.”입을 연 사람은 하도진의 어머니였다. 살짝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채선화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눈치 빠른 민하윤은 채선화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걸 바로 눈치챘고,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김옥자는 며느리를 힐끗 쳐다본 뒤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민하윤을 바라보았다. 김옥자는 민하윤의 배를 어루만지면서 물었다.“몸이 너무 말랐어. 밥을 많이 먹어야 아기도 쑥쑥 크지. 요즘도 입덧이 많이 심하니?”다들 민하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김옥자가 아이를 언급하자 모두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심지어 엄숙한 표정이던 하진석도 보기 드물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직업은 뭐니? 일하는 게 힘들면 집에서 쉬어. 건강 관리가 가장 중요하니까.”채선화는 자신의 시부모님을 굉장히 무서워했었고 시집온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들의 말에 늘 고분고분 따랐다. 채선화는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단 한 번도 하씨 가문 본가에서 성질을 부린 적은 없었다. 채선화는 자기 며느리가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도 못할 수화를 하는 게 싫어서 민하윤이 대답하기 전에 자기 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도진아, 할아버지가 물으시잖아. 쟤 무슨 일 하니?”민하윤은 비록 겉으로는 차분한 척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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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차가 하씨 가문 저택에서 빠져나갔다. 돌아가는 길 내내 민하윤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 안이 너무 조용해서 숨을 쉬는 것마저 불편하게 느껴졌다.하도진은 손을 들어 넥타이를 잡아당긴 뒤 옆에 앉아 있는 수척한 민하윤의 얼굴을 힐끔거리면서 민하윤이 또 무엇에 화가 났길래 자신에게 옆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를 고민했다.“고개 돌려.”하도진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명령했다.그러나 민하윤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뒷모습만 보여주었다.하도진의 인내심이 서서히 닳았다. 하도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말만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듣지도 못하는 거야? 말을 할 줄 모르는 데다가 사람 말도 못 알아듣네.”민하윤은 그의 말에 몸을 움찔 떨더니 고개를 홱 돌려 하도진을 바라보았다. 민하윤의 눈동자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와 불만이 보였다. 민하윤은 손을 움직여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수화를 해 보였다.[저는 원래 말을 못 해요. 그런데도 하도진 씨와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 건가요?]하도진의 수려한 미간이 순식간에 찡그러졌다. 그는 화가 났다.‘빌어먹을, 왜 자꾸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수화를 하는 거야?’화가 난 하도진은 민하윤의 턱을 쥐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상대방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하도진은 순간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민하윤에게 입을 맞췄다. 민하윤의 부드러운 입술에서 단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 하도진은 자신을 마구 때리는 민하윤의 손을 틀어쥐며 더욱 깊이 키스했다.민하윤의 몸이 살짝 떨렸다. 숨이 차는 것 같아 민하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하도진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그러나 힘 차이가 너무 큰 탓에 민하윤은 하도진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속도를 늦추었고, 뒷좌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차에서 내릴 때 민하윤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분통한 눈빛으로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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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민하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아침은 매우 풍성했다. 샌드위치, 샐러드, 수프, 우유, 그리고 많은 약재가 들어간 삼계탕도 있었다.민하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공짜 아침을 앞에 놔두고 먹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하도진은 식탁 앞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잘 다려진 정장을 입은 그는 엘리트처럼 보였다. 하도진은 아주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우유를 마셨다.반대로 민하윤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샐러드를 먹었고 그러다 목이 막히면 수프를 마셨다.가정부는 몇 번이나 말하려다가 참았다. 그러고는 묵묵히 자신이 세 시간 동안 정성 들여 끓인 보양식을 민하윤의 앞으로 밀었다.입안이 가득 찼던 민하윤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다가 가정부가 챙겨준 보양식을 꿀꺽꿀꺽 마셨다.맛을 느낄 새도 없이 민하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저 먼저 가볼게요.]하도진은 여유롭게 티슈로 입을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민하윤의 앞길을 막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결국 눈싸움에서 진 민하윤은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빠르게 타자했다.[무슨 일 있어요? 저 더 늦으면 지각이에요.]하도진은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더니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알아. 같이 가.”민하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방향이 달라요.]“문자로 말해.”하도진이 민하윤의 휴대전화를 가져갔고 이내 알림음이 들려왔다.휴대전화를 돌려받은 민하윤은 하도진이 자신의 카톡을 추가한 것을 보게 되었다.민하윤은 채팅창으로 들어가서 빠르게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눌렀다.[방향이 다르잖아요. 전 택시 타고 갈게요.]하도진은 미간을 찡그리며 민하윤을 힐끗 보았다.“마음대로 해.”민하윤은 도망치듯 별장에서 나와 앱으로 택시를 예약했다.태유 은행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많은 동료들이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민하윤은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동료들에게 인사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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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다행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민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15층에 도착했다.셀리나는 인턴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나갔고, 민하윤은 셀리나가 자신을 발견하면 반면교사로 삼을까 봐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그들은 곧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임형섭과 마주치게 되었다. 넓은 어깨와 얇은 허리, 남다른 분위기의 소유자인 임형섭은 다른 이들과 똑같은 정장을 입고 있는데도 매우 눈에 띄었다. 임형섭을 본 인턴들은 곧바로 눈을 반짝였다.“임형섭 팀장님, 이분들은 새로 온 인턴들이에요. 인턴들이 처음으로 근무하게 될 곳은 신용대출팀이에요. 그리고 이건 인수인계 서류와 근무 성적 평가표예요.”조금 전까지 인턴들의 군기를 잡던 셀리나는 임형섭을 대할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임형섭은 서류를 받은 뒤 인턴들이 아닌 그들의 뒤에 있는 민하윤을 바라보았다.“이리 와. 너한테 할 얘기가 있었어.”임형섭의 목소리는 매우 온화했다. 인턴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임형섭이 자신을 불렀을 거라고 짐작하며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민하윤은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고 싶었으나 결국 어쩔 수 없이 임형섭에게로 다가갔다.임형섭은 들고 있던 서류를 옆에 있던 직원에게 넘긴 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민하윤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직도 열 나는 거 아니지? 며칠 전에 드레스를 입었다가 감기에 걸린 건가? 왜 하씨 가문에서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일주일이나 병가를 낸 거야?”임형섭처럼 잘생긴 남자는 어딜 가든 인기가 많았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솔로인 여직원들 모두 잘생기고 돈도 많은 임형섭을 이상형으로 꼽았다.심지어 인사팀에서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 셀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예민한 편인 민하윤은 사람들의 못마땅함과 호기심 어린 눈빛을 금방 알아챘다. 물론 가장 많이 느껴지는 것은 적개심이었다.민하윤은 본능적으로 임형섭의 손길을 피하며 황급히 손을 움직였다.[전 괜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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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하도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허공에 멈춰 있는 임형섭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임형섭과 악수할 생각이 없었다. ‘이 손으로 민하윤의 이마를 만졌다는 거지?’게다가 민하윤은 싫어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로서 그것이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자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하도진은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느꼈는데 분노보다는 원망이 더 컸다. 하도진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민하윤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말이다.정작 민하윤은 거짓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하도진을 모르는 척했다.“하 대표님, 이쪽은 저희 신용대출팀 클라이언트 매니저 민하윤 대리입니다. 주로 대출 심사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민하윤은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임형섭은 일부러 민하윤을 소개해 주었다. 하씨 가문은 명원에서 아주 대단한 가문이었고 임형섭은 자원이나 인맥을 늘 민하윤에게 아낌없이 제공했기 때문이다.“제가 아는 누구랑 굉장히 닮으셨네요.”하도진은 일부러 민하윤을 훑어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임형섭은 분위기를 풀려고 웃으면서 물었다.“누구를 닮았나요?”하도진은 덤덤한 눈빛으로 임형섭을 힐끗 보았다.“제 아내를 닮았어요.”임형섭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하씨 가문의 후계자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설령 하도진이 결혼했다고 해도 어느 재벌가의 딸과 정략결혼을 했을 테니 절대 민하윤일리는 없었다.그래서 임형섭은 하도진이 농담한 거라고 여기며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티 나지 않게 민하윤을 자신의 뒤에 숨겼다.“농담이 과하시네요.”하도진도 둘의 관계를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민하윤을 바라볼 뿐이었다.민하윤은 켕기는 게 있어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하윤은 법적으로 하씨 가문 후계자인 하도진의 아내였다.하도진이 오늘 태유 은행을 방문한 이유는 사업 때문이었다. 태유 은행은 개인이 지분 전체를 소유한 사립 은행으로 명원에 본점이 있고 전국 각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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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다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임형섭이 앞으로 나서며 하도진을 설득했다.“민하윤 대리는 조금 특별한 케이스라 업무 소통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저희 팀에는 실력 좋고 경험도 풍부한 다른 팀원이 있습니다. 그 팀원이라면 업무 진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할 겁니다.”임형섭은 아까 민하윤의 이마를 짚으면서 친근하게 굴었고, 지금은 하도진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민하윤을 지키려 했다.하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임형섭을 내려다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희와 협력할 의향이 없으시다면 서로 시간 낭비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저는 그저 오늘 한 번 태유 은행에 방문해 본 것뿐이지, 태유 은행과 협력하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거든요.”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눈치가 빠른 능구렁이들이었다. 그들은 하도진의 말을 통해 오직 민하윤이 이 프로젝트를 맡아야지만 에스티와 협력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에스티의 신용대출은 다른 기업의 대출과는 달리 담보 대출이 아니라 수익을 태유 은행에 예치하는 형태였다.다른 곳은 은행에 자금을 대출받지만 에스티는 은행에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다.에스티는 수많은 분야를 섭력했고 그 산하에 대형 기업만 해도 수백 개 였으며 자산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러한 이유로 에스티 신용대출은 올해 태유 은행의 핵심 프로젝트였다.임형섭은 하도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커리어까지 내걸 수는 없었기에 결국 민하윤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민하윤 대리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민하윤 대리는 특별한 사정이 있으니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하도진은 차갑게 코웃음을 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민하윤은 속이 조금 울렁거려 화장실로 달려가서 구역질을 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임형섭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넋을 놓은 채 핑크색 털실 뭉치를 바라보고 있었다.“이건 뭐야?”임형섭은 반쯤 만들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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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명원에서는 비싼 차가 흔하지만 특이한 번호판에 롤스로이스라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침 퇴근 시간이라 오가는 사람들 모두 그 차를 힐끔거리며 보았다.민하윤은 만들다 만 핑크색 양말과 털실을 가방 안에 넣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녀는 혹시라도 누군가 알아볼까 봐 밖으로 나가기 전 마스크를 끼고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하도진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민하윤을 바라보았다. 긴 속눈썹에 가려진 맑은 눈동자에서는 냉정함과 다정함이 공존했다.“내가 그렇게 창피해? 낮에는 일한다고 모른 척하더니. 남편을 모른 척하는 게 되게 재밌나 봐?”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목을 잡고서 가볍게 쓰다듬었다.하도진이 굳은살 박인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목을 쓰다듬자 민하윤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간질거려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하도진은 그녀에게 저항할 기회를 주지 않고 힘주어 민하윤의 손을 잡았다.깍지를 끼게 된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해 보였다.그들은 이미 잠자리까지 가진 관계였기에 그 정도의 스킨십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작 깍지를 낀 것으로 조용해졌다. 그들이 탄 차는 육교를 달리고 있었다. 붉은 노을은 서서히 지고 있었고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꽉 막혔다.그러한 평화로움은 보기 드물게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가정부는 이미 저녁을 다 준비한 상태였다. 별장 창문은 매우 깨끗했고 조명은 환했으며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 앉아 식사했다.하도진은 평소와 달리 빈정거리지 않고 민하윤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 민하윤은 쑥스러운 얼굴로 젓가락을 깨물며 고마운 표정으로 하도진을 힐끔 보았다.두 사람의 화목한 분위기에 가정부는 자기도 모르게 웃으면서 말했다.“역시 가정이 중요하네요. 할머님께서 두 분이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걸 보면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이 별장은 크고 썰렁했는데 몇 달만 더 지나면 아이의 목소리로 가득 차겠죠. 삶이란 원래 그래요. 둘이서 소소한 나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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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이제 곧 완성될 핑크색 양말을 빼앗기고 나서야 민하윤은 뒤늦게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자각했다. 그리고 마침 하도진과 눈이 마주쳤다.하도진은 꽤 오랫동안 민하윤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하윤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온화하고 따스한 분위기에 그는 차마 민하윤을 방해하지 못했다.민하윤은 들고 있던 털실을 내려놓으면서 의아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에요?]“머리 왜 안 말렸어?”하도진은 시선을 돌리며 핑크색 양말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어쩐지 목이 살짝 잠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도진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감기 걸려.”하도진이 왜 갑자기 그녀를 걱정하는 걸까?민하윤의 의심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하도진이 다짜고짜 민하윤의 손목을 잡았다.하도진의 그윽한 눈빛만 봐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내 따뜻한 바람이 물이 떨어지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민하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하도진을 바라보았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혀 본 적 없이 귀하게 자랐을 하도진이 직접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다.민하윤은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마음이 자꾸 들떴다.머리를 다 말린 뒤 하도진은 헤어드라이어를 껐다.민하윤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는데 하도진 곁에 있으니 아주 작아 보였다.“그 남자는 누구야?”하도진은 거울 속 민하윤을 바라보았다. 흰 피부에 예쁜 얼굴, 순수함이 느껴지는 겨울의 서리꽃처럼 맑은 눈동자.민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뒤늦게 하도진이 말한 그 남자가 임형섭임을 깨달았다.민하윤은 습관처럼 수화를 하려다가 하도진이 수화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빠르게 침대맡으로 걸어가 휴대전화로 타자했다.하도진은 민하윤을 따라 욕실에서 나온 뒤 나른한 자태로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민하윤의 갸름한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민하윤은 하도진에게 메모장에 적은 글을 보여주었다.[대학교 선배인데 지금은 제 상사예요. 오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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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하도진은 노기등등한 얼굴로 민하윤의 팔을 잡고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민하윤은 씩씩대면서 하도진을 때리고 발로 찼지만 하도진에게 있어서는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민하윤이 임형섭의 편을 들수록 하도진은 더 화가 났고 불만도 더 커졌다.하도진의 머릿속에 아침에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임형섭은 자연스럽게 민하윤의 이마에 손을 올려 온도를 쟀다. 그런 친밀한 행위는 평범한 사이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위였다.‘거절할 줄 모르는 거야?’어쩌면 누군가 보살펴주는 걸 은근히 즐기는 걸지도 몰랐다.이상한 감정이 하도진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고 분노는 하도진의 남은 이성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하도진은 민하윤을 깔아뭉개면서 거칠게 저항하는 민하윤의 두 손을 속박했다.하도진은 분풀이하듯 민하윤에게 키스했고 방 안의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민하윤은 하도진이 평소보다도 더욱 거칠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 창밖에서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바람도, 비도, 하도진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지금 민하윤은 임신한 상태였다.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심지어 상대방의 심장 박동까지 들릴 정도였다.하도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힘주어 부드러운 옷감을 찢어버렸고 침대 위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민하윤은 하도진의 넓은 어깨 너머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쉼 없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민하윤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절한 눈빛으로 하도진을 바라보았다.밖에서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민하윤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점점 더 빨라지는 걸 느꼈고 머리 위 샹들리에도 더 심하게 흔들렸다. 강렬한 조명 아래 민하윤은 하도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민하윤은 몸을 덜덜 떨었지만 제대로 된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샹들리에가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민하윤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하도진은 무언가를 참듯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민하윤, 정말 날 밀어내야 만족하겠어?”하도진은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주워 든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냉담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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