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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고은율은 차갑게 웃으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먹이던 여자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도진아, 내가 너를 배신했다고 하지 마. 네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야. 나보다 네 이익이 더 먼저였고 나한테 상처를 주었잖아.”하도진은 고개를 들고 눈앞의 청순한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고 독기가 서려 있었다.“늦었으니 일찍 쉬어. 내일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면 알겠지.”그는 외투를 집어 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적당히 하고 자.”고은율은 하도진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녀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도진아,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네가 그 벙어리를 이토록 사랑할 줄 몰랐거든.”다음 날 아침, 따스한 햇살이 병실에 내려앉았다. 잠에서 깬 민하윤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명원의 겨울은 늘 추웠는데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나지혜는 분주히 움직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을 만들어서 식탁에 올려놓았다.“사모님, 외투를 걸치세요.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려줘요.”민하윤은 넋을 잃은 채 높게 늘어선 건물과 길을 가득 채운 차량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쪽으로 걸어가면서 미소를 지었다.[맛있어 보여요. 아주머니, 잘 먹을게요.]“사모님, 많이 드세요. 고양이는 며칠 사이에 살이 올라서 더 귀여워졌어요. 퇴원한 후에 고양이를 별장에 데리고 갈게요.”그 말에 민하윤은 환하게 웃더니 수어로 고마움을 전했다.[정말 감사해요.]“사모님, 대표님께서 좋은 병실을 마련해주었네요. 병실이 아니라 집인 줄 알았어요.”나지혜는 따뜻한 죽을 그릇에 담아서 가지고 왔다. 향긋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고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민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죽을 먹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나지혜는 미소를 지은 채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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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나지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조금 전에 아침을 먹었는데 괜찮을까요? 혈액 검사를 하는 줄 알았다면 먹지 않았을 거예요.”“일반적인 혈액 검사를 할 때는 밥을 먹어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간호사는 체온계로 민하윤의 체온을 재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아직 미열이 있네요. 무리하지 마시고 누워서 푹 쉬세요.”“미리 가서 등기하거나 예약해야 하나요?”나지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러자 간호사는 능숙하게 링거를 꽂으면서 말했다.“주치의 선생님께서 예약하셨으니 시간에 맞춰 내려가면 돼요.”나지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간호사가 나간 뒤, 그녀는 민하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고 메모장에 뭐라고 적었다.[4층에서 채혈하고 2층에서 폐 CT를 찍어야 한다]“제가 대표님께 연락해서 말씀드릴까요?”그러자 민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며칠 동안 바쁠 테니 이런 일로 연락하지 마세요. 별일 아닌 걸로 유난 떠는 것 같잖아요.]“하지만 사모님은 대표님의 아내예요. 대표님은 남편으로서 사모님의 상태를 알아야 하고 보살펴야죠. 아내가 무슨 검사를 받고 몸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나지혜는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도로 삼켰다. 외부인이 부부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링거를 다 맞은 후, 간호사는 빈 링거 통을 가지고 나갔다.나지혜는 카디건을 민하윤에게 건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대표님께 그래도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퇴원한 후에 연락해도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민하윤은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한 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원래 피부가 하얀 민하윤은 앓아누운 탓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늘따라 채혈하는 사람이 많아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만 했다.나지혜는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요즘 감기가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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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민하윤은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하도진과 고은율의 뒷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축 늘어진 풍선처럼 의자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이때 나지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다급히 달려오면서 잔뜩 긴장한 채 말했다.“사모님, 괜찮으세요? 계속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깜짝 놀랐어요.”나지혜는 민하윤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자 민하윤은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애써 미소를 짓더니 손을 내저었다.“사모님이 채혈할 순서가 되었으니 얼른 가요.”나지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민하윤을 부축하고 채혈실로 향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끼어든 것을 보고 화가 솟구쳐 올랐다.그녀는 눈앞의 남녀를 노려보면서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번호표를 뽑았으면 순서대로 채혈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쪽만 아픈 줄 알아요? 이럴 거면 왜 번호표를 뽑겠어요?”민하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나지혜는 삿대질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불안한 예감이 든 민하윤은 고개를 들자마자 뒤돌아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익숙한 분위기, 그윽한 두 눈에 담긴 의문, 분노와 알 수 없는 감정...하도진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노려보았다.채혈하는 사람이 많아서 번호표를 뽑고도 한참 동안 기다렸다. 나지혜가 민하윤을 부축하고 오는 사이에 젊은 남녀가 채혈실 입구 쪽에 서 있었다.그녀는 화가 나서 마스크를 낀 남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양심이 있으면 새치기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들이 뻔뻔스럽기 그지없네요.”나지혜는 씩씩거리면서 채혈하고 있는 여자를 노려보았다.“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환자를 보고도 새치기하고 싶었어요? 부끄러운 줄 알면 비켜야지, 떡하니 앉아 있는 꼴을 보니 우습네요.”팔에 하얀색 패딩을 걸치고 있는 하도진은 앉아 있는 여자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고 민하윤을 뚫어져라 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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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깜짝 놀란 나지혜는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하도진인 줄 알았으면 절대 소란을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열이 나면 주치의를 만나러 가. 입원해서 푹 쉬면 될 텐데 굳이 이런 식으로 내 관심을 받으려는 이유가 뭐야? 그만 연기하고 돌아가.”민하윤은 온몸이 덜덜 떨렸다.의사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감각기관은 서로 통한다고 했다. 그녀는 말할 수 없기에 다른 감각 기관이 더 발달했다.하도진이 뱉은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민하윤은 통증이 귀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남편의 관심을 받으려고 이상한 행동을 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하도진은 고은율을 보호하고 민하윤을 질타했다. 그의 눈에는 이 모든 게 관심을 끄는 것처럼 보였을까?민하윤은 억울하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에 깊게 박히면서 통증이 밀려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씁쓸하게 웃었다.주위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는 소리, 수군거리는 소리, 하도진의 차가운 말과 나지혜의 거친 숨소리가 그녀를 옥죄어왔다.시끄러운 소리가 귀 안으로 흘러들면서 마음을 어지럽혔다.“대표님, 관심을 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주치의 선생님이 검사를...”하도진은 나지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돌아섰다. 그는 하얀색 패딩을 입고 얼굴을 가린 고은율을 부축하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첫 번째, 저는 전문의 진찰을 예약했고 우선 진찰 비용을 냈어요. 두 번째, 여러 채혈실 중 이 채혈실에 마침 환자가 없었어요. 또한 이 채혈실은 병원의 특수한 환자와 우선 진찰 비용을 낸 환자들이 우선으로 채혈하는 곳이에요. 아무도 없는 채혈실에 들어간 게 새치기라고요? 마땅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하도진이 주위를 둘러보자 사진을 찍던 사람들은 압도감에 눌려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하도진은 고은율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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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다음 날 오전, 고은율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모자를 꾹 눌러썼다.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차에 올라타려고 할 때, 검은색 벤틀리가 천천히 멈춰 섰다.“어디에 가는 거야?”차에서 내린 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고은율은 말에서 굴러떨어져 일주일 동안 휴식하면서 치료받기로 했다. 그녀의 매니저는 이번 주의 스케줄을 전부 미루었기에 일하러 갈 리 없었다.하도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고은율은 애써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위가 아파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가.”“너 혼자 검사받으러 가는 거야?”하도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차 안을 둘러보았다. 매니저 없이 병원에 간다는 것이 아주 수상했다.“도진아, 나랑 같이 갈래?”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꼈다.“그래.”그러자 하도진은 피식 웃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면서 말했다.고은율은 그에게 속내를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하도진의 팔을 감싸안으면서 싱긋 웃었다.“네가 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정말 고마워.”하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차량이 병원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선 후, 고은율은 마스크를 쓰면서 입을 열었다.“도진아, 기자가 사진을 찍을지도 모르니까 넌 여기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어. 기사가 뜨면 사람들이 또 나를 욕할 거야.”그 말에 하도진은 피식 웃더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네가 언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다고 그래? 아무도 사진을 찍지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는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 고은율은 뜻대로 되지 않아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위내시경 검사를 예약한 건 사실이었기에 먼저 가서 번호표를 뽑았다. 검사 전에 채혈해야 하기에 또 4층으로 가야만 했다.하도진은 그녀를 뒤따라가면서 유심히 지켜보았다. 진심으로 고은율을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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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하도진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네 마음대로 해.”그러자 고은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먼저 지하 주차장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채혈실에 두고 온 것 같으니 얼른 다녀올게.”그녀는 하도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는 모자를 꾹 눌러썼다.문이 닫힌 순간, 그녀는 얼굴이 삽시에 굳어졌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끝내 4층 버튼을 눌렀다.4층에서 멈췄지만 고은율은 내리지 않고 13층을 눌렀다.하도진은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춘 것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수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해져서 고은율을 오해한 걸까?’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하자 화면에 발신자 이름이 나타났다. 하도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한편, 고은율은 13층에 도착한 후 잃어버렸다고 한 귀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착용했다. 고가의 브랜드 옷을 입지 않아도 남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하이힐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어느 병실에 있는지 몰라요. 이름은 민하윤인데...”그러자 간호사는 고개도 들지 않고 곧바로 알려주었다.“왼쪽 세 번째 병실이에요. 환자분은 안정을 취해야 하니 10분 안에 나오세요.”“감사해요.”고은율은 사악한 미소를 짓고는 병실 앞으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설거지하고 있던 나지혜는 앞치마를 두른 채 재빨리 문 쪽으로 걸어갔다.“사모님, 서 비서님이 돌아온 게 아닐까요?”민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나지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어제의 일로 인해 민하윤은 충격을 받았고 하루 종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누워 있었다. 초점 없는 두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나지혜는 문 앞에 선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구시죠? 혹시 병실을 잘못 찾아온 건 아니에요?”그러자 고은율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 병실로 들어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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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도진은 왜 당신 같은 여자와 결혼했을까요?”고은율이 마스크와 모자를 벗자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드러났다. 민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르겠어요. 나를 두고 굳이 당신을 선택한 이유가 뭘까요?”고은율은 차갑게 웃고는 민하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어로 답하려던 민하윤은 침대맡에 놓인 볼펜을 집어 들고 종잇장에 글을 적었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이미 끝나버린 관계에 연연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죠?]고은율은 종잇장에 적힌 글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민하윤은 더 강한 여자였고 불청객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앓아누워서 얼굴이 창백했지만 고은율이 무슨 말도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도진과 7년 동안 만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하씨 가문에서 말렸지만 도진은 나랑 함께 제누오에 갔어요. 재벌가의 도련님으로 태어나 정해진 길을 걸으면 행복했겠지만 나를 위해 용기를 낸 남자예요. 우리는 서로의 첫사랑이고 가족이나 다름없어요.”순간, 울상짓고 있던 고은율은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종잇장을 마구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나랑 도진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당신 탓이에요. 연인 사이에 흔히 있을 법한 말싸움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해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끼어드는 바람에 모든 게 변했다고요! 민하윤 씨, 도진과 결혼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줄 알았어요?”고은율은 차갑게 웃으면서 민하윤의 턱을 움켜쥐었다.“도진이 사랑에 빠질 때 어떤 모습인지 잘 알아요. 민하윤 씨, 도진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제멋대로 착각하지 마세요.”그 말에 민하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그깟 사랑에 목매는 모습이 비참해 보였다.고은율이 거칠게 잡는 바람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고은율은 손을 떼더니 의자를 끌어와서 편하게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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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나한테 7년이란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요?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청춘을 하도진에게 바쳤어요.”민하윤은 고개를 숙인 채 종잇장을 구겼다.“도진과 어떻게 만난 거예요?”고은율은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재벌가 도련님과 결혼해서 인생 역전하겠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도진의 가족이 어떻게 당신을 며느리로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구겨진 종잇장이 민하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혹시 도진이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요?”고은율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나는 도진과 결혼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한약을 먹었어요. 그런데 도진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번번이 실패했죠. 귀국한 후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아이를 가진 줄 알았어요. 이런 생각밖에 못 하는 내가 우스워요.”그녀는 술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우리가 함께한 7년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감정이 솟구쳐 올라서 그런지 목이 메고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민하윤과 눈이 마주쳤고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동정 따위 필요 없으니 그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지 말아요. 나는 당신보다 하도진이 더 밉거든요.”자리에서 일어난 고은율의 아름다운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민하윤은 조용히 앉아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아주 오래전, 민하윤은 하도진과 진호영의 대화를 듣고 생각이 많아졌다. 하도진이 고은율과 비슷하게 생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해서 잠자리한 줄 알았다.그런데 눈앞의 여자를 보니 자신과 닮은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완전히 다르게 생겼으니 하도진이 민하윤을 대체품 취급한 것도 아니었다.“도진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러 왔어요. 나를 미워해도 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붙잡는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만약 도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끌지 말고 나에게 돌려주세요.”고은율은 말하면서 씁쓸하게 웃더니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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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민하윤은 숨이 쉬어지지 않아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이따금 숨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민하윤, 나한테 결혼하자고 빌던 사람은 너였어. 그런데 나를 돌려주겠다고?”빨개진 두 눈에 분노와 실망이 뒤섞여 있었다. 소리를 듣고 주방에서 나온 나지혜는 깜짝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다가갔다.“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모님께서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당장 비키지 못해!”화가 난 하도진은 얇은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겁에 질린 나지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민하윤이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문손잡이를 잡은 고은율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달려와서 온 힘을 다해 하도진을 밀쳤다.침대에 내쳐진 민하윤은 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침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고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도진아, 민하윤 씨를 죽일 생각이었어?”고은율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용기를 내어 하도진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하도진을 노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이제야 정신이 든 하도진은 숨을 몰아쉬면서 믿기지 않는 듯한 눈빛으로 손을 쳐다보았다.이성을 잃은 채 손에 힘을 더 주었다면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하도진은 심호흡한 후에 고개를 돌리고 민하윤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병실 안의 모든 사람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민하윤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기침했다.그녀는 하도진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그저 이불을 꽉 잡은 채 평온한 시선으로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을 뿐이다.“민하윤, 나한테 할 말 없어? 변명이라도 하란 말이야.”하도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수어로 표현했다.[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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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민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등지고 누웠다.“이만 가볼게요.”고은율은 조금 전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가면서 생각에 잠겼다.하도진은 종래로 그녀에게 이 정도로 화낸 적이 없었다. 인내심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하도진은 그 여자를 목 졸라 죽이려던 게 아니야. 그저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기를 바랐겠지.’고은율은 심호흡하면서 감정을 추슬렀다. 하도진이 민하윤을 향한 사랑은 생각보다 더 깊을지도 모른다.세 날 뒤, 주치의는 민하윤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퇴원해도 된다고 전했다.나지혜는 이른 아침부터 물건을 정리하면서 말했다.“그동안 서 비서님이 필요한 물건과 식재료를 사 준 덕에 맛있는 음식을 차릴 수 있었어요. 그런데 며칠 동안 보이지 않네요.”병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나지혜는 고개를 돌리고 쓸쓸한 그녀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민하윤은 환자복을 입은 채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지혜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물건을 정리했다. 그녀는 며칠 내내 하도진이 민하윤을 목 졸라 죽이는 악몽을 꾸었다.그 장면은 트라우마가 되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당사자인 민하윤에게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나지혜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도로 삼켰다. 재벌가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면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겉보기에는 화려하고 위풍당당해도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 비슷한 형편의 가문끼리 협력을 위해 결혼을 추진했기에 부부가 아닌 비즈니스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가문에서 버린 거나 다름없는 민하윤은 실어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 여자가 한 손에 꼽히는 재벌가의 도련님과 결혼했으니 안 봐도 뻔한 결말일 것이다.물건을 정리한 뒤, 나지혜는 퇴원 절차를 밟으러 가는 길에 다급히 걸어오는 서명인과 마주쳤다.“서 비서님!”그녀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서명인을 쳐다보았다.“사모님을 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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