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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한다고 말해줘: Chapter 381 - Chapter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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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1화

민하윤은 그대로 멈춰 섰다.민하윤은 하도진이 당황한 얼굴로 고은율의 손을 뿌리치는 모습을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바라봤다.민하윤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고 싶었다.그냥 하도진을 피하고 싶었고 무슨 설명을 하든 듣고 싶지 않았다.“민하윤!”하도진은 안색이 싸늘하게 굳은 채, 민하윤이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를 불렀다.벽에 기대 쭈그리고 앉아 있던 인턴 서용우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서용우 눈에 들어온 건, 덩치 큰 남자가 민하윤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고 있는 모습뿐이었다.두 사람은 말없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누구세요? 손 놓으세요!”상황을 전혀 모르는 서용우는 벌떡 일어나 민하윤의 앞을 막아섰다.“비켜.”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젊고 무모한 남자를 한 번 훑어봤다.바로 아까 1층 로비에서 봤던 그놈이었다.하도진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나랑 하윤이 사이 일이야. 네가 끼어들 일 아니야. 눈치 있으면 그냥 꺼져.”“그쪽은 누구냐고요!”서용우는 물러서지 않았다.민하윤의 얼굴색을 한 번 확인한 뒤 이를 악물고 말했다.“손부터 놓으세요. 안 그러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젠장, 말귀를 못 알아듣나!”하도진의 마음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하도진은 눈앞에 거슬리게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그러고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뒤, 다시 민하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언제 여기 온 거야? 왜 나는 몰랐지? 민하윤, 날 보자마자 도망친 건 또 무슨 뜻인데?”민하윤은 바닥에 쓰러진 서용우를 보자마자 하도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그러고는 곧장 서용우 옆에 쪼그려 앉았다.민하윤은 급히 수어로 물었다.[어디 다쳤어요? 괜찮아요?]하도진은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민하윤은 자기 존재는 없는 사람처럼 흘려보낸 채, 다른 남자 걱정만 하고 있었다.속이 발칵 뒤집힌 하도진은 성큼 다가가 민하윤을 다시 잡아 일으켰다.턱을 꽉 쥐어 올려 억지로 자기 눈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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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2화

호텔은 사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민하윤의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서용우는 민하윤을 혼자 내보낼 수가 없었다.“당신 누구예요? 왜 하윤을 병원까지 데려왔고 왜 산부인과를 접수했죠? 무슨 일 있었어요?”하도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민하윤에게 뺨을 맞고 나서야 겨우 조금 이성을 되찾은 상태였다.“하윤이가 왜 명원시에 온 거죠? 당신은 하윤의 동료입니까?”서용우는 안색이 좋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본점 파견 출장입니다. 우리 팀은 열다섯 명이고 민하윤 씨는 우리 팀장이에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셔서 제가 차로 모시고 왔습니다.”하도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서용우의 퉁퉁 부은 뺨에 시선을 두더니 지갑을 꺼냈다.심지어 세어 보지도 않고 두툼한 돈다발을 그대로 뽑아 서용우에게 내밀었다.그러자 서용우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무슨 뜻인데요?”하도진은 자기 뺨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아까 상황도 모르고 한 대 쳤습니다. 제 마음이에요. 하윤이를 호텔까지 좀 데려다줘야겠습니다.”서용우는 두 팔을 끌어안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필요 없습니다. 당신들이 묵는 호텔 위치만 알려 줘요.”서용우는 내키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민하윤은 얼굴도 무척 예뻤고 일도 잘했다.서용우는 신용대출 팀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부터 이미 민하윤에게 마음이 흔들렸었다.그런데 눈앞 남자는 외모부터가 압도적이었다.입고 있는 바람막이는 겉보기에는 수수해 보여도 족히 수백만 원이 넘을 것 같았고 손에 든 건 에르메스 지갑이었다. 발에 신은 등산화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비싸 보였다.이런 남자가 민하윤을 쫓고 있다니 서용우는 순간 괜히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결국 서용우는 번호 하나를 남기고 호텔 주소를 문자로 찍어 보냈다.하도진은 그 젊은 남자가 민하윤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가는 걸 보며 가슴이 시큰하게 조여 왔다.민하윤과 법적으로 남편은 자기인데 왜 둘 사이에는 늘 이렇게 서로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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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3화

민하윤은 명원시에 도착하기 전에 사직서를 본점 인사부 내부 메일로 먼저 보내 두었다.하도진은 고은율을 호텔까지 데려다준 뒤, 의사가 처방한 약을 고은율의 조수에게 건넸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고은율의 곁을 한순간도 비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화장실에 갈 때조차 시야에서 놓치면 안 된다고까지 말했다.젊은 조수는 눈이 충혈된 채 차갑게 굳어 있는 하도진의 얼굴을 보며 감히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저 심각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하도진은 밤새 차를 몰았다.지갑 속 현금을 몽땅 꺼내 호텔 프런트에 내밀며 말했다.“운전할 줄 아는 직원 한 명만 부탁합니다. 당분간 제 기사 역할을 좀 해 줬으면 합니다.”여직원은 곧장 마른 체구의 남자 직원을 불러왔다.하도진은 뒷좌석에 몸을 깊이 묻었다. 몸은 극도로 지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만은 계속 깨어 있었다.잠은 오지 않았다.하도진은 억지로 정신을 붙든 채 버텼고 차가 민하윤이 묵는 호텔 로비 앞에 멈춰 서고 나서야 겨우 눈을 떴다.“사장님, 저는 근처에 차 세워 두고 기다리겠습니다. 끝나시면 전화 주세요.”하도진은 관자놀이를 한 번 눌렀다. 그리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하도진은 곧장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안에는 잔뜩 들뜬 남녀 십여 명이 타고 있었고 다들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진한 명원시 사투리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하도진은 맨 마지막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복도를 빠르게 훑으며 방 번호를 하나씩 확인했고 마침내 아까 그 젊은 남자가 알려 준 객실 앞에서 멈춰 섰다.하지만 하도진이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하도진은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곧바로 민하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차가운 기계음만 무한히 반복됐다.하도진은 다시 프런트로 내려갔다.몇 번이나 확인한 끝에 민하윤이 새벽 일찍 체크아웃했고 캐리어를 끌고 내려와 프런트에 차를 불러 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들었다.“어디로 간다고 말은 안 했습니까?”하도진의 목소리는 단숨에 다급해졌다.서북은 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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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4화

“고양이?”하도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생각해 보니 민하윤이 예전에 정말 작은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워 온 적이 있었다. 아직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조그만 새끼였고 한 번은 민하윤의 여린 피부를 할퀴어 상처를 내기도 했다.그런데 나중에 나지혜가 명절을 보내러 고향에 내려가게 됐고 하도진과 민하윤도 어른들을 뵈러 본가에 들어가야 했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그 고양이는 나지혜가 고향으로 데려가서 돌보게 됐다.그 뒤로는 민하윤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지혜에게 그냥 고향에서 계속 키워 달라고 했다.그때부터 고양이든 강아지든 다시 키우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 고양이를 명원시로 데려오라고 했다고?’하도진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하도진은 그제야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건 민하윤이 나지혜를 집에서 내보내기 위해 급히 둘러댄 허술한 핑계일 뿐이었다.“별장 CCTV는?”하도진은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물었다.서명인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화면은 사모님이 집에 들어오는 장면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사모님이 직접 감시 회선을 전부 끊어 버리셔서 더는 어떤 흔적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하도진은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마셨고 가슴속에서 강한 예감이 치밀어 올랐다.이번 일은 민하윤이 단순히 삐졌다거나 화가 나서 잠시 사라진 정도가 아니었다.하도진이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훨씬 더 치밀하게 민하윤은 준비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이 정도로 판을 크게 벌였는데 그저 부부싸움일 리는 없었다.하도진은 점점 더 불길한 느낌이 들었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하도진은 별장 출입 비밀번호를 몇 번이고 다시 눌러 봤지만 전부 실패했다. 결국 관리사무소 사람들을 불러 전문 기사에게 비밀번호를 풀게 했다.넓은 별장은 하도진이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늘 그랬듯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했다.하지만 하도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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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5화

민하윤은 은행에 사직서를 냈고 그 뒤로는 누구도 민하윤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하도진은 잔뜩 굳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다가 정면에서 임형섭과 마주쳤다.“하윤이는 어디 갔죠?”임형섭은 미간을 좁혔다. 눈빛은 물처럼 차가웠다.“저도 모릅니다.”“웃기지 마세요.”하도진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윤이가 가장 믿는 선배가 임형섭 씨 아니에요? 둘이 제일 가까웠잖아요. 임형섭 씨도 아직 하윤을 못 잊고 있잖아요. 속으로 다른 마음 없다고 떳떳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그 순간, 임형섭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주위를 한번 살핀 뒤 텅 빈 복도를 확인하고는 낮게 말했다.“하 대표님,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저와 하윤 사이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윤이가 어디에 갔는지는 정말 저도 모릅니다. 인사팀에 사직 메일만 들어왔고 퇴사 절차도 안 밟았습니다. 저도 지금 하윤을 찾고 있습니다.”하도진은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관자놀이가 지끈거렸지만 겨우 화를 눌러 담았다.“좋아요. 명원시를 다 뒤집어서라도 저는 하윤을 찾아낼 거예요.”“하 대표님,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임형섭은 갑자기 하도진의 앞을 막아섰고 눈빛에는 애원 같은 기색이 스쳤다.“하지만 하윤이라면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절대 바꾸지 않습니다. 하윤이 그렇게까지 결심하고 떠났다면 이제 좀 놓아주시면 안 됩니까?”그 말에 하도진은 갑자기 웃었다.그러더니 곧장 손을 뻗어 임형섭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하도진의 두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내가 놓아주면 그다음은 네가 차지하겠다는 거야? 민하윤 옆에 네가 자연스럽게 들어가려고 그러지? 꿈 깨!”하도진은 이를 악물고 낮게 내뱉었다.“민하윤이 혼자서 어디까지 숨어 다닐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그 말을 끝으로 하도진은 임형섭을 거칠게 밀쳐 냈다.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임형섭은 구겨진 흰 셔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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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6화

“하 대표님께서 직접 촬영장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회사에서 저한테 이렇게 귀한 기회를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 정말 연기 더 열심히 갈고닦아서, 꼭 잘 보답하...”하도진은 싸늘한 얼굴로 손을 들어 백누리의 말을 끊었다.“요즘 민하윤이랑 연락했어요?”“누구요?”백누리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백누리는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뭐라고요? 저랑 하윤이요? 하 대표님이 하윤이랑 친하세요? 아니. 잠깐만요. 갑자기 왜 그걸 물으세요?”“하윤이 백누리 씨한테 연락했는지만 대답해요.”하도진은 두 사람 관계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말 많은 백누리 때문에 하도진은 점점 더 짜증이 올라왔다.“아뇨. 저는 요즘 촬영장에서 밤샘 찍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가끔 명원시에서 같이 밥은 먹었는데 하윤이가 얼마 전 서북으로 출장 갔다고는 들었어요. 하윤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백누리는 워낙 눈치가 둔한 편이라 한참 뒤에야 이상한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꼈다.백누리는 묘한 표정으로 민하윤의 번호를 바로 눌렀다.하지만 그건 이젠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어라?”백누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대낮의 뙤약볕 아래서 곧장 민하윤에게 문자도 보냈지만 역시 아무 답이 없었다.하도진은 갑자기 백누리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더니 음성 메시지를 연달아 보내기 시작했다.“민하윤, 그렇게 막무가내로 굴면 안 되잖아. 왜 나한테 설명할 기회도 안 줘?”“하윤아, 지금 어디 있어?”“답장해.”백누리는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진짜 도도하고 차갑기만 하던 하도진이 맞나 싶었다.‘하도진은 고은율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나? 그럼 지난번 전화 받던 남자가 정말 하 대표였던 걸까?’백누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하도진이 더 큰 짓을 하기 전에 얼른 휴대폰을 도로 낚아채듯 빼앗아 왔다.그리고 보물 다루듯 자기 휴대폰을 한번 쓸어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여배우 휴대폰에는 비밀이 너무 많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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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7화

병원.하도진은 VIP 병실 문턱을 막 넘자마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심지어 중심을 잃고 뒤로 몇 걸음이나 비틀거릴 정도였다.진호영이 제일 먼저 달려와 하도진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두 팔을 벌린 채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쳤다.“준오 형, 지금 뭐 하는 거야!”“오늘 날 말리는 놈은 다 같이 처맞을 거야.”구준오는 차갑게 진호영을 노려보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눈빛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호영아, 비켜. 안 비키면 너도 같이 맞아.”“미쳤어?”진호영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뒤에 있는 사람을 걱정하면서도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듯 목소리를 높였다.“우린 어릴 때부터 같이 큰 사이잖아. 팬티도 제대로 못 입던 때부터 같이 놀았다고! 은율 누나 일로 형이 화난 건 알아. 그래도 도진이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먼저 명원시로 돌아간 데는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구준오가 노골적으로 위협해도 진호영은 죽어도 비킬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저 고개를 쉴 새 없이 내저었다.하도진은 손끝으로 입가에 밴 피를 훔치더니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채, 자기 앞을 막고 선 진호영을 밀어냈다.“나 여기 그대로 서 있을게. 마음껏 때려.”하도진은 맥이 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은 푹 꺼져 있었고 목소리는 다 갈라져 있었다. 심지어 하도진은 서북에서 돌아올 때 입었던 그 옷 그대로였고 예전의 기세나 여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구준오는 허공에 든 주먹을 한참 내리지 못했다.“도대체 넌 자신을 왜 이 꼴로 만들어 놨어? 내가 다 알아봤어. 하씨 가문 어른들은 다 멀쩡하시더라. 그럼 대체 무슨 일이길래 걸핏하면 죽겠다고 하는 환자를 2,00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곳에 내팽개치고 혼자 돌아온 건데?”“말해!”구준오는 감정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그 벙어리랑 오래 붙어 있더니 너까지 말하지 못하게 된 거야?”구준오가 허겁지겁 서북으로 날아가 손목에 두툼한 흰 붕대를 감은 고은율을 봤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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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8화

“쯧쯧... 형, 왜 이래? 기분이 별로야? 무슨 재수 없는 일이라도 있었어? 어디 한번 말해 봐. 나도 좀 즐겁게.”어둠 속에서도 주민혁의 창백한 피부가 환하게 보였다. 보기만 해도 어딘가 병색이 도는 얼굴이었다.주민혁은 두 달 가까이 조용했다.휴가를 간 것도 아니고 해외에 나간 것도 아니었다.그저 주씨 가문의 독한 친형한테 거의 죽을 뻔했을 뿐이었다.몸이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병원에 두 달을 처박혀 있다가 겨우 지옥에서 목숨 하나 주워 온 상태였다.“너는 진짜 말귀를 못 알아들어?”하도진은 비웃듯 웃으며 술기운에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조용한 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민하윤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술이나 처마시고 있는 거야?”주민혁은 태연하게 웃었다.그리고 하도진이 정말 걸음을 멈춘 걸 보자 자기 짐작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어디 한번 맞혀 볼까? 무슨 일 때문인지...”주민혁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그러다가 문득 예전 일이 떠오른 듯 눈을 가늘게 떴다.“아, 그 일 때문이야? 민하윤이 부감독한테 거의 당할 뻔했던 그 일 있잖아...”하도진은 그대로 몸을 돌리더니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민혁을 노려봤다.자기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뭐라고?”“아.”주민혁은 일부러 아쉬운 척 혀를 찼다.“내가 괜한 말을 했네. 형은 아직 그 일을 모르는 모양이군.”주민혁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덧붙였다.“그래도 그 일은 민하윤이 완전히 피해자였어.”“X발, 방금 뭐라고 했는지 다시 말해 봐! 누가 당할 뻔했다고?”하도진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주민혁의 멱살을 틀어쥐었고 양손으로 주민혁의 목을 조이며 당장이라도 목을 부러뜨릴 듯 힘을 줬다.“컥... 컥...”주민혁의 얼굴은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보디가드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지만 진호영이 눈치 빠르게 앞을 가로막았다.“형, 그냥 날 죽여. 그러면 민하윤이 그날 얼마나 처참했는지 얼마나 가엾었는지 얼마나 사람 마음을 흔드는 얼굴이었는지 영영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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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9화

명원시 외곽의 오래된 동네.초록빛 녹나무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고 길가에 놓인 벤치에는 흰 민소매 러닝셔츠 차림의 노인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수박을 가득 실은 손수레가 서 있었다.명원시는 이제 막 8월에 들어섰을 뿐인데도 기온이 무서울 만큼 치솟아 있었다. 견디기 힘든 무더위 속 나무 그늘에는 매미 소리와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흰 긴소매 셔츠를 입은 여자는 팔다리가 가늘었고 아랫배가 아주 살짝 불러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여자는 연한 색 밀짚모자를 쓰고 냉동 만두 한 봉지를 든 채 수박 좌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한 킬로에 2000원입니다. 안 달면 돈 안 받아요.”노인은 부채를 흔들며 느긋하게 벤치에 누운 채 말했다.민하윤은 원래 수박 고를 줄을 몰랐다. 괜히 아는 척 몇 번 두드려 보다가 결국 제일 작은 걸 하나 골랐다.“통으로 줄까요? 반으로 잘라 줄까요?”민하윤은 휴대폰에 글자를 입력한 뒤 화면을 돌려 노인에게 보여 줬다.[절반만 주세요.]수박 장수 노인은 담배를 문 채 손놀림 좋게 수박을 반으로 잘라 주었다. 그러면서 이상하다는 듯 민하윤을 한번 힐끗 바라봤다.민하윤은 반쪽 수박을 들고 월셋집으로 돌아왔다. 물을 올려 만두를 삶으려던 순간, 휴대폰이 갑자기 크게 울렸다. 은행에서 입금 완료 문자가 도착한 것이었다.민하윤은 미간을 살짝 좁히고 문자에 적힌 숫자의 소수점 자리를 속으로 세기 시작했다.‘일, 십, 백, 천, 만, 십만... 통장에 왜 갑자기 4,000만 원이나 더 들어온 거지?’민하윤은 태유 은행에서 일한 지난 몇 년 동안 전혀 돈을 모으지 못한 건 아니었다.어쩌면 은행원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민하윤은 리스크를 피하려는 감각이 유난히 강했다. 따로 계좌 하나를 만들어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양아버지를 위해 거액의 의료사고 보험까지 들어 두었다. 떠나오기 전에는 서정아에게도 카드 한 장을 남겨 두었다. 안에 들어 있던 돈도 2,000만 원 정도였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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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0화

백누리는 민하윤에게 음성 메시지를 거의 백 개 가까이 보냈다.민하윤은 맨 위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재생했다.음성이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순간, 민하윤은 휴대폰을 놓칠 뻔할 정도로 손이 덜덜 떨렸다.익숙하면서도 낯선 남자 목소리였다.예전처럼 비꼬고 장난치는 말투는 조금도 없었다. 하도진의 콧소리는 무거웠고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억울함과 후회가 잔뜩 밴 소리였다.“하윤아,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굴면 안 되잖아? 왜 나한테 설명할 기회도 안 줘?”“하윤아, 지금 어디 있어?”“대답해 줘.”민하윤은 싸늘한 얼굴로 예전에 쓰던 유심을 뽑아냈다.그리고 새 번호가 들어 있는 유심을 휴대폰에 끼웠다.살짝 부은 아랫배가 묵직하게 아픈 느낌이 들자 민하윤은 불안한 마음에 잠깐 배 위에 손을 올렸다가 곧바로 손을 치웠다.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옷을 갈아입은 뒤 외출할 채비를 했다.민하윤의 셋집은 외곽 바깥쪽에 있었다.집주인과 임대계약서를 쓰던 날, 쉰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진한 사투리 섞인 말투로 이렇게 당부했었다.“여기 위치가 좀 외지긴 하지. 택시도 정말 잡기 힘들어. 아예 기대도 하지 마. 버스로 시내까지 나가려면 세 시간은 걸리니까 그것도 번거롭고... 대신 좋은 점이 하나 있긴 해. 단지에서 삼백 미터만 걸어가면 지하철역이 있어. 4호선인데 1호선이랑 6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어. 이 단지에는 출퇴근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 입주민 단톡방도 있으니까 들어가 봐. 출근 동선 비슷한 사람 찾으면 기름값이랑 차비 나눠 낼 수 있어서 시간도 많이 아낄 수 있지.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민하윤은 집주인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그래서 그냥 택시는 포기하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일단 지하철을 환승해서 산모 등록을 해 둔 지벤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검진을 받으러 갈 생각이었다.그런데 환승역에서 민하윤은 서명인과 마주치고 말았다.서명인은 민하윤을 발견했지만 바로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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