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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1화

민하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하도진에게 손목을 붙잡혔다.곧 뜨거운 입맞춤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졌다.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거칠었다.민하윤은 몇 번이나 밀어내 보려 했지만 끝내 이리저리 휘둘리며 온몸에 입맞춤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어느새 실크 슬립 잠옷은 조용히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민하윤은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바닥에 떨어진 슬립을 주워들었다.그런데 시선이 쓰레기통 안에 처박힌 금박 붉은 청첩장에 멈췄다.하도진은 팔을 베고 누운 채 민하윤의 시선을 따라 한번 흘끗 보더니 뜻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물었다.“어제 누구 만났어?”“아무도 안 만났어요.”민하윤은 분명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고 어제 마신 술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민하윤은 잠옷을 챙겨 입고 욕실로 들어가서 일부러 한참을 꾸물거렸다.손끝이 불어 주름질 만큼 물속에 있다가 그제야 물을 끄고 벽장 안에 가지런히 접혀 있는 수건과 큼직한 가운을 바라봤다.몇 초 망설인 끝에, 결국 아주 못 이기는 척 손을 뻗어서 넉넉한 남성용 가운을 걸쳤다.민하윤의 젖은 머리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눈가도 촉촉했다.민하윤이 하얗고 말간 얼굴로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하도진이 손짓했다.“이리 와.”“싫어요.”민하윤은 제자리에 선 채 잔뜩 하도진을 경계했고 눈빛에는 노골적인 방어심이 서려 있었다.하도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뭐 하세요?”민하윤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하도진이 손목을 잡아 욕실 쪽으로 끌고 갔다.민하윤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버럭 쏘아붙였다.“도진 씨는 전생에 발정 난 강아지였어요? 정말 끝도 없네요. 참...”하도진은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를 누른 채 민하윤을 대리석 세면대 앞에 세웠다.그리고 옆 벽장에서 새 수건을 꺼내 민하윤의 머리 위에 덮었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하도진이 민하윤의 정수리를 한번 문지르더니 수건을 걷어 냈다.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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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2화

민하윤은 날카롭게 하도진을 한 번 흘겨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면봉과 밴드를 하도진의 손에 툭 쥐여줬다.“도진 씨가 알아서 붙이세요.”그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안 붙여도 되고요. 그냥 흉터 남아서 못생겨지면 되죠.”하도진이 혀를 차더니 늘어지는 듯한 특유의 말투로 느긋하게 받아쳤다.“너 요즘 성격 왜 이렇게 더러워졌냐? 누구한테 배웠어? 좋은 건 안 배우고...”그러면서도 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목을 붙잡아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스스로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내가 못생겨지면 이제 아무도 너랑 안 경쟁하겠네. 그렇지?”민하윤은 그 말에 또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쏘아붙였다.“진짜 뻔뻔하시네요.”하도진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한데 눈은 또 곱게 휘어졌고 입가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더 해 봐. 듣기 좋네.”민하윤은 어이없어 숨을 들이켜더니 입술을 깨문 채 마지못해 하도진의 상처를 소독하고 결국 밴드까지 붙여 줬다.“끝이야? 이걸로 다야?”하도진은 몹시 성에 안 찬 표정을 지으며 민하윤을 따라붙듯 귀찮게 물었다.“다시 좀 봐주지 그래? 상처가 생각보다 깊을 수도 있잖아. 나는 얼굴로 먹고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머리카락 한 올까지 보험 들어놨거든... 진짜 흉터라도 남으면 나 어떻게 장가가겠어? 평생 혼자 살아야 하잖아?”민하윤은 완전히 힘 빠진 얼굴이 됐다가 결국 성질이 뻗쳤는지 하도진의 발등을 힘껏 밟았다.맞춤 제작한 수제 가죽구두 앞코에 바로 작고 선명한 홈이 생겼다.민하윤의 하이힐 굽 자국이었다.서 비서는 운전하면서 룸미러 너머로 뒷좌석의 두 사람을 연신 훔쳐봤다.두 사람은 삐져서 서로 말도 안 섞는 초등학생 같았다.“하윤 씨, 먼저 은행으로 모셔다드릴까요?”서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원래는 아침마다 민하윤을 먼저 태유 은행에 내려 주고 그 뒤에 에스티 그룹 본사로 이동하고는 했다.한 사람은 회사원이고 한 사람은 대기업 대표였다.누가 지각하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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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3화

오전 내내 민하윤은 컴퓨터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다.민하윤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 반을 가리고 작은 머리가 자꾸만 앞으로 떨어졌다.이남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마침 민하윤은 노트북에 꾸벅 인사를 하고 있었다.이남주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360도로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그런데 앵글을 바꾸다가 그만 카펫에 발이 걸렸다.몸이 앞으로 확 쏠리면서 손목은 책상 모서리에 툭 부딪히고 얼굴은 아래로 엉덩이는 위로 들린 채 엎어졌다.그래도 한 손만큼은 끝까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민하윤은 그제야 퍼뜩 잠이 깨서 멍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봤다.“뭐 하시는 거예요?”그러자 이남주는 히죽 웃으면서 대답했다.“일단 좀 일으켜 줘요.”민하윤은 이남주를 바닥에서 겨우 일으켜 세웠다.이남주는 옷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하더니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어젯밤 몇 시에 잤어요? 왜 이렇게 졸려 보여요?”민하윤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술에 취한 뒤 기억이 중간부터 끊겨 있어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실컷 먹고 마시고 배부른 김에 하도진을 한바탕 욕했던 것까지만 어렴풋이 떠올랐다.그 뒤로는 그냥 눈 떠 보니 아침이었다.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던 차마 말로 못 할 일들만큼은 또렷하게 기억나고 있었다.이남주가 이상하다는 듯 소리를 냈다.“어라?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열나요?”민하윤은 고개를 저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키보드를 두드리며 메일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이남주는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검은 눈동자 두 개가 민하윤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민하윤은 한숨을 쉬며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를 살짝 돌렸다.“아직 할 말이 있어요?”이남주는 닭이 모이 쪼듯 고개를 미친 듯 끄덕였다.그런데도 입은 안 열고 눈만 반짝였다.“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남주는 눈이 확 밝아졌다.“어제 만난 그 여자... 누구예요? 기사에 나온 하씨 가문과 심씨 가문의 결혼설 당사자 맞아요?”“네.”민하윤은 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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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4화

하도진은 싸늘한 얼굴로 휴대폰을 쥔 채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민하윤에게는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닿지 않았다.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만 들려왔다.이혼 후 연락이 완전히 끊겼던 그 2년을 제외하면 민하윤이 이렇게까지 하도진의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은 없었다.아예 휴대폰까지 꺼버리고 바깥세상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다니.하도진은 바로 차를 준비시키려 했다.직접 우통 인터내셔널 하버로 가서 민하윤을 찾을 생각이었다.“회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들어가셔서 준비하시라고요...”서 비서가 난처한 얼굴로 문 앞을 막아섰다.“내일이 28일입니다. 대표님과 심가희 씨의 약혼식 날이잖습니까.”“그래서?”하도진이 차갑게 내뱉었다.“내 말 안 들려? 비켜. 길 막지 말고.”하지만 서 비서는 고개를 숙인 채 꼼짝하지 않았다.이 일은 자기의 일자리까지 걸린 문제였다.그 순간, 하도진은 머리가 띵할 만큼 화가 치밀었다.몸을 돌려 찻상 앞으로 걸어가더니 청화백자 찻잔 하나를 집어 서 비서 쪽으로 던졌다.서 비서는 놀라지도 않고 눈꺼풀만 내리깐 채 한 발짝도 피하지 않았다.찻잔 파편이 서명인의 발치에서 요란하게 튀었다.“마지막으로 말해. 차 키 줘.”하도진은 서명인의 앞까지 다가가 멱살을 움켜쥐었다.잘생긴 하도진의 얼굴 위로 분노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서 비서는 결국 포기했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건넸다.하도진은 문을 거칠게 밀어 열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택시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민하윤은 참지 못하고 문을 열어젖힌 채 뛰어내렸다.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때부터 민하윤은 손과 몸이 계속 떨렸다.온몸이 가늘게 떨리는 채, 올라가는 숫자만 긴장한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봤다.병실 문을 밀고 들어간 순간, 민하윤은 서정아가 말한 상태가 안 좋다는 게 어떤 뜻인지 똑똑히 알았다.서동민은 너무 야위어 있었다.두 볼은 푹 꺼졌고 잿빛 얼굴 위로 광대뼈만 도드라졌다.몸 여기저기에 기계가 연결돼 있었고 인공호흡기가 돌아가고 있었으며 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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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화

“아빠는 평생 너한테 남겨준 게 아무것도 없구나. 오히려 이렇게 오래 아파서 너만 몇 년을 고생시켰어. 우리가 살던 그 집도 큰돈은 안 되겠지만 팔든 재개발을 기다리든 다 네 뜻대로 해.”서동민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흐릿한 눈동자에는 초점도 제대로 없었고 간신히 붙잡고 있는 마지막 기운으로 뒷일을 정리하듯 말을 이었다.민하윤은 서동민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민하윤은 그 집이 사고가 난 직후 이미 법원 경매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끝내 말하지 못했다.집을 판 돈과 집에 있던 저축, 사고 배상금까지 의료비로 쓴 일부를 빼고는 전부 엄마의 묫자리를 마련하는 데 써버렸다.“착한 우리 딸아... 울지 마라. 지금 난 몸도 안 아프고 정신도 또렷해. 아빠는 이제 다 됐어. 네가 보살펴 준 덕에 이렇게 흐릿하게나마 몇 년을 더 살았구나. 다만... 네가 시집가고 아이 낳는 건 못 보고 가는 게 조금 아쉽네.”민하윤은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민하윤은 서동민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퍼렇게 드러난 혈관 위로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했다.“아빠는 이제 네 엄마 만나러 먼저 갈게.”민하윤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고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이어지지 않았다.“안 돼요. 아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가 앞으로 더 자주 올게요. 더 오래 같이 있을게요...”“내가 가고 나면 너는 꼭 네 인생 잘 살아야 해. 너무 슬퍼하지 말고... 아빠는 이렇게 효도하는 딸 둬서 이번 생은 헛살지 않았...”그 순간, 서동민은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고 천장만 뚫어지게 올려다봤다.민하윤은 다급히 몸을 숙여 서동민의 가슴을 계속 쓸어내렸다. 손바닥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문질러서야 서동민은 겨우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그 순간, 민하윤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어린이날 행사 뒤 갑자기 고열이 올랐던 밤, 한밤중에 서동민이 민하윤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었다.작디작은 민하윤은 넓고 단단한 등에 엎드려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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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6화

명원시의 밤은 점점 더 짙어졌다.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뒤였다.하도진은 민하윤을 부축하고 있었다.시신이 차에서 내려지는 순간, 하도진은 품에 안겨있는 민하윤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곧 다시 민하윤은 너무 조용해졌다.하도진은 민하윤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혹시라도 민하윤이 그대로 정신을 놓을까 봐 두려웠다.민하윤은 지나치게 담담해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직원이 다가와 지금 비어 있는 화로가 있다고 하면서 언제 화장할 거냐고 물었다.그 말에 하도진은 민하윤을 한 번 돌아봤다.하지만 민하윤은 못 들은 사람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싸늘한 복도에 나란히 앉아 철문 안쪽에서 울려 나오는 둔탁한 소리만 묵묵히 듣고 있었다.결국 하도진이 대신 결정했다.직원이 고인과의 관계를 묻자 하도진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고인의 사위라고 답했다.그래도 민하윤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곧 직원이 유족 동의서를 가져왔고 하도진은 민하윤의 손을 감싼 채 대신 서명했다.잠시 뒤, 직원 두 명이 옆 냉장실에서 침대 하나를 밀고 나왔다.민하윤은 무심코 그쪽을 봤다가 흰 천 밖으로 축 늘어진 손 하나를 발견했다.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한 손이 보였다.민하윤은 목울대에서 울음 같은 소리를 한 번 삼키더니 그대로 달려들듯 몸을 내밀었다.그러자 하도진이 재빨리 민하윤을 붙잡아 눌렀다.민하윤은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멎어 버린 사람 같았다.목에서 기묘한 소리만 새어 나왔고 너무 슬퍼서 오히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직원들이 침대를 밀고 철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간 뒤에야 하도진은 천천히 손을 풀었다.그리고 민하윤을 다시 품에 안고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울고 싶으면 울어. 속으로만 삼키지 말고.”하지만 민하윤은 하도진의 옷깃을 움켜쥔 채, 자기 손등을 입에 물고 끝내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하도진의 품에 안겨있는 민하윤은 자꾸 몸을 떨고만 있었다.하도진이 고개를 내려다보자 민하윤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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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7화

민하윤은 말없이 하도진을 바라봤다.하도진은 갑자기 민하윤을 놓더니 무너진 사람처럼 운전대에 엎드려 자기 허벅지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도진 씨, 그러지 마세요. 저 무서워요.”민하윤의 목소리는 정말 떨리고 있었다.하도진은 그제야 잔뜩 죄어 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하도진은 운전대에 이마를 댄 채 한참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초췌한 눈빛으로 민하윤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너 때문에 진짜 놀랐잖아...”민하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뒤늦게야 깨달았다.하도진은 민하윤이 충격을 못 이기고 예전처럼 또 말을 못 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하도진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앞서가던 검은 차를 따라잡고 두 차는 적당한 간격을 둔 채 앞뒤로 산길을 올랐다.그때 하늘은 갑자기 잿빛으로 가라앉았다.앞 차량에서 덩치 큰 남자 몇 명이 내리더니 곧장 묘를 팔 준비를 시작했다.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공기마저 답답하게 눌러앉았다.하도진은 민하윤의 손을 꼭 잡은 채, 차 안에서 민하윤과 함께 기다렸다.장례가 시작될 때쯤 하늘에서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하도진은 우산을 받쳐 들고 민하윤의 여윈 어깨를 감쌌다.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우산은 민하윤 쪽으로 더 기울였다.민하윤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을 뿐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더는 울 수도 없었다.민하윤의 눈은 불에 타는 것처럼 아프고 화끈거렸다.민하윤은 무릎을 꿇고 묘비 앞에 단정히 세 번 절하면서 말했다.“아빠, 엄마. 저 잘 살게요. 혼자서도 잘 살고 잘 버텨 볼게요.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제가 두 분을 더 잘 챙겨드릴게요.”눈가가 뜨거워진 하도진은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우산은 여전히 민하윤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얼굴에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는 본인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돌아오는 길에 민하윤은 창가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꿈결 속에서 하도진이 누군가와 다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민하윤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조금 움직이자 몸 위에 덮여 있던 하도진의 재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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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8화

조명 사이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머리카락 한 올까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다.“어머니, 여기에는 왜 오셨어요?”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채선화를 한 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민하윤의 신발을 벗겨 주는 데 집중했다.하도진은 민하윤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받쳐 든 채, 기꺼이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였다.민하윤은 순간 굳어 버렸다.본능적으로 발을 빼려 했지만 하도진의 두 손이 단단히 발목을 잡았다.“움직이지 마. 아직 다 안 끝났어.”그 말에 민하윤은 더는 몸을 뺄 수 없었다.얼굴은 벌겋다가 하얘지기를 반복했고 민망한 듯 신발장을 짚은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채선화는 화가 치밀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자기가 공들여 키운 아들이 저렇게 바닥에 무릎 꿇다시피 앉아 가사도우미처럼 다른 여자 신발을 벗겨 주고 있다니.더구나 그 여자는 예전부터 채선화의 눈에 차지 않던 바로 벙어리 민하윤이었다.채선화는 자기 아들이 왜 하필 이 벙어리를 좋아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같은 여자 때문에 두 번이나 넘어지는지 말이다.“너는 결국 저 여자 때문에 심가희를 안 만나겠다고 한 거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있니? 명원에서 이름 좀 있는 사람들은 다 모였는데 정작 예비 신랑이 나타나지 않았어.”채선화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간신히 몸을 세웠다.하도진은 일어나 민하윤이 갈아 신을 슬리퍼를 마저 신겨 줬다.그러고는 민하윤의 어깨를 감싸 자연스럽게 계단 쪽으로 이끌었다.“도진아, 거기 서지 못해! 엄마가 말하잖아.”그 순간, 하도진의 얼굴에도 서서히 짜증이 올라왔다.하지만 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목을 한 번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위층에 올라가 있어. 내가 부르기 전에는 내려오지 마. 피곤하면 좀 쉬고. 음식 시켜 놨으니까 이따 내려와서 먹어.”둘은 겉으로 보기에는 과한 스킨십 하나 없었지만 말투와 행동에는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들 특유의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민하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채선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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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하도진은 벌떡 일어나 본능처럼 민하윤을 향해 다가갔다.민하윤은 작은 새처럼 하도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품 안의 민하윤은 여전히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하도진은 두 팔을 벌려 민하윤을 더 꽉 끌어안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머릿결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탐하듯 오래 숨을 들이켰다.“왜 이렇게 뛰어오는 거야? 넘어질 뻔했잖아.”그런데 품 안의 민하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가늘고 하얀 두 팔로 하도진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작게 떨기만 했다.그제야 하도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하도진은 민하윤을 품에서 조금 떼어 내려 했지만 민하윤이 너무 세게 안고 있어서 쉽지 않았다.하도진은 목소리가 잠긴 채, 다급하고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왜 그래? 악몽 꿨어?”하지만 민하윤은 고개를 저었고 대신 하도진을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하도진은 민하윤이 친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 무너진 줄 알고 조용히 달래듯 말했다.“하윤아, 무서워하지 마. 나 있잖아.”그때 민하윤이 하도진의 품에서 살짝 몸을 떼더니 입을 열었다.“도진 씨, 우리 다시 시작해요.”그러고는 하도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가볍게 입을 맞췄다.하도진은 한순간 아무 반응도 못 했다.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 서 있다가 방금 입 맞춤이 닿았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하도진은 정말 자기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고 한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민하윤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하도진을 올려다봤다.“미안해요. 방금 도진 씨랑 어머니가 한 대화를 다 들었어요. 제 뜻은... 우리 다시 시작하자는 거예요.”민하윤은 다시 한번 또렷하게 말해 주면서 먼저 두 팔을 하도진의 목에 둘렀다.민하윤은 긴장한 탓에 눈을 꼭 감은 채, 발끝을 들어 하도진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후회 안 해?”하도진의 목소리는 분명 달라져 있었고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하도진은 심지어 이게 혹시 꿈일까 싶어 자기 뺨까지 한 번 꼬집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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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0화

민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반대쪽 귀로 옮겨 댔다.“선배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임형섭의 목소리에는 씁쓸한 기색이 묻어 있었고 몇 초 머뭇거리더니 낮게 말했다.“아냐. 나중에 시간 되면...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가고 싶었어.”민하윤은 입가에 맺혔던 희미한 웃음을 거뒀다.“선배님, 고마워요.”“하윤아.”전화를 끊기 직전, 임형섭이 다급하게 민하윤을 불렀다.민하윤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네? 왜요?”“난 아무것도 안 원해. 그냥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민하윤은 코끝을 훌쩍였다.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네. 저는 행복할 거예요.”‘그래. 난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임형섭은 속이 후련한 듯 웃으며 말했다.“끊을게. 나중에 너희 결혼하면 꼭 불러 줘. 술 한잔은 얻어 마셔야지.”민하윤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도진을 흘끗 바라봤다.하도진은 어설프게 죽을 끓이다가 결국 냄비를 눌어붙게 했고 집 안에는 구수하면서도 탄내가 진하게 퍼져 있었다.손에 물 한 방울 묻혀 본 적 없는 재벌 도련님이 대체 뭘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네. 진짜 그런 날이 오면 꼭 초대할게요.”전화를 끊고 민하윤은 의자를 밀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까치발을 들어 냄비 안을 들여다보니 죽은 이미 새카맣게 눌어붙어 있었다.민하윤은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불을 끄며 허둥대기만 하고 도와주긴커녕 일을 더 키운 하도진을 나무랐다.“도진 씨, 진짜 너무하네요. 죽 하나 끓이면서 냄비까지 다 태워 먹어요?”“통화 끝났어?”그러자 민하윤은 하도진을 흘겨보며 쉰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네. 왜요?”“그 잘난 선배 전화였지?”민하윤은 하도진이 또 질투를 시작하는 줄 알고 허리에 손을 짚었다.“도진 씨, 또 왜 이래요?”“물어보지도 못해? 그냥 물은 거야. 걱정하지 마. 나 이제 그 사람 질투 안 할 거니까. 어차피 나중에 우리 결혼식 와서 축하주 마실 사람인데.”민하윤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바로 알아차렸다.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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