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사랑한다고 말해줘 / Chapter 751 - Chapter 760

All Chapters of 사랑한다고 말해줘: Chapter 751 - Chapter 760

797 Chapters

제751화

그 순간, 민하윤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몇 초쯤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지난번 만찬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던 길이 떠올랐다.그때 민하윤은 하도진과 통화하고 있었고 마지막에 전화를 끊은 것도 하도진이었다.그 뒤로 민하윤은 업무에 완전히 파묻혀 명원에 있는 가족들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하도진이 화가 났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러니까...’그때 민하윤이 제대로 하도진을 달래지 못했던 거였다....하도진은 두 아이를 데리고 하씨 본가에 와 있었다.식탁 양쪽에는 다리가 높은 아기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이제 이유식을 먹는 주주와 연이 앞에는 실리콘 그릇과 숟가락이 놓였고 산후 도우미가 정성껏 만든 채소 과일 퓌레와 밀가루 쌀미음이 담겨 있었다.두 아이는 신이 나서 이유식을 먹었고 얼굴이며 손이며 온통 음식 범벅이었다.하도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결벽증이 도질 것 같았다.저런 손으로 자기 옷이라도 만질까 봐 하도진은 은근히 몸까지 피하고 있었다.그때 식탁 한쪽에 놓인 휴대전화가 진동했다.하도진은 화면을 확인했다.발신자 이름을 본 채 3초쯤 가만히 있다가 하도진은 그대로 통화를 거절했다.하지만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하도진은 두 번째 전화도 가차 없이 끊었다.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집안 어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쏠렸다.“회사에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겼니?”하도진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아? 누구 전화인데?”질문이 연이어 쏟아졌지만 하도진의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아무도 아니에요. 그냥 받기 싫어서요.”하도진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화면이 보이지 않게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민하윤이 다시 전화를 걸어오기를 기다렸다.그저 조금만 더 자신을 달래 줬으면 했다.하지만 이상하리만큼 휴대전화는 조용해졌고 더는 벨이 울리지 않았다.그러자 하도진은 갑자기 속이 쓰렸다.‘일주일 내내 연락
Read more

제752화

김옥자는 화가 나서 밥맛까지 뚝 떨어졌다.남편이라는 사람이 자기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옆에서 편한 소리만 하고 있으니 더 답답했다.“됐어. 당신 말이 다 맞아.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하진석은 괜히 더 말했다가 불똥이 튈 것 같아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김옥자는 휴대전화의 대화 기록을 조금 훑어봤다.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제대로 연락을 주고받은 게 지난주였다.이렇게 오래 냉전을 벌이는 건 아무래도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그런데 이것저것 눌러 보다가 실수로 영상통화 버튼을 건드리고 말았다.김옥자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전화를 어떻게 끊는지도 찾지 못했다.한편 호텔 침대에 누워 있던 민하윤은 속이 답답해 우울한 얼굴로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는 하도진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온 것으로 표시됐다.민하윤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황급히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환하게 웃으며 통화를 받았다.하지만 다음 순간, 입가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할머니? 어떻게 할머니께서...”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자 김옥자는 그제야 크게 안심했다.“하윤아, 요즘은 왜 본가에 얼굴도 안 비치니? 일이 그렇게 바빠?”민하윤은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한동안 본가에 가지 못했다.안부 전화 한 통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으니 예의가 아니긴 했다.“할머니, 죄송해요. 요즘 로젤스로 출장 왔어요. 그래서 찾아뵙지 못했어요.”하지만 김옥자는 출장이라는 말을 듣고도 안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심이 더 짙어졌다.“너 할머니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도진이 그 녀석이 널 괴롭힌 거 아니야?”민하윤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거 전혀 없어요.”민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할머니, 도진 씨는 어디 있어요?”“도진이? 방금 2층으로 올라갔어. 휴대전화는 식탁 옆에 놓고 갔어.”김옥자는 화면 속 민하윤의 얼굴을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Read more

제753화

그때 휴대폰의 화면이 갑자기 까맣게 꺼졌다.민하윤은 벌떡 몸을 일으켜 휴대전화를 천장 쪽으로 들어 올렸다.화면을 확인하니 영상통화가 끊겨 있었다.김옥자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파악하기 전에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빼앗겼다.“할머니, 제 전화를 마음대로 받으시면 어떡해요?”하도진은 휴대전화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점점 찌푸렸다.“먼저 전화까지 거신 거예요?”“그래서 뭐 어때?”김옥자는 당당하게 받아쳤다.“하윤이가 애들 보고 싶다잖아. 솔직히 말해 봐. 하윤이랑 싸웠지? 분명 네가 또 하윤이를 화나게 했을 거야!”하도진은 한숨만 내쉬었다.대충 몇 마디 둘러대 김옥자의 질문을 피한 뒤 휴대전화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김옥자는 일부러 하도진이 2층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그러고는 가사 도우미를 불렀다.“휴대전화가 쟤한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도 있잖아.”김옥자는 두 증손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애들을 이리 데려오고 내 휴대전화로 하윤이한테 다시 걸어.”가사 도우미는 김옥자가 시키는 대로 했다.하지만 통화 화면에는 상대방이 통화 중이라는 표시가 떴다.김옥자는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지 않아 돋보기 너머로 화면을 찡그려 보며 물었다.“이건 또 무슨 뜻이지?”가사 도우미가 2층 침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아마 도련님이 올라가서 사모님이랑 직접 통화 중인 것 같아요. 저희는 일단 걸지 않는 게 좋겠어요.”...하도진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굳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를 쥔 채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한번 했다.민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하도진이 대체 뭘 원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조금 전에는 갑자기 전화를 끊더니 다시 직접 걸어 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 안 받겠다면서요?”그러자 하도진이 담담하게 물었다.“그러면 지금 끊을까?”민하윤은 이를 악물었다.정말 하도진이 얄미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끊지 마세요.”
Read more

제754화

“알겠어요. 그리고 하나 더 말할 게 있어요.”민하윤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귀국이 늦어질 수 있다는 사실까지 숨기지는 않았다.“이쪽 프로젝트가 아직 안 끝나서 로젤스에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전화기 너머는 조용했다.너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민하윤은 순간 전화가 끊긴 줄 알았다.하지만 화면에는 여전히 통화 중이라고 떠 있었다.민하윤도 지금은 화가 나 있었기에 굳이 먼저 고개를 숙여 달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지난 일주일 동안 로젤스에서 정신없이 일하느라 민하윤은 제대로 된 식사조차 몇 번 하지 못했다.겨우 시간이 나서 호텔방에 혼자 들어와 가족과 아이들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건 이런 냉랭한 반응뿐이었다.둘 다 기분이 상한 상태라면 더 이상 통화를 이어 갈 이유도 없었다.민하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집스럽게 물었다.“듣고 있어요?”그제야 하도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상의하는 것도 아니고 통보하는 거네.”잠시 후 하도진은 비꼬듯 덧붙였다.“좋아. 네 마음대로 해.”하도진은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또 할 말 있어?”민하윤 역시 더는 달래 줄 생각이 없어서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요.”그리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하도진은 찌푸린 얼굴로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수화기에서는 짧은 통화 종료음만 들려왔다.하도진은 민하윤이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나 싶어 화가 치밀었다.집에 두 아이만 아니었다면 당장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끊어 로젤스로 날아가 민하윤을 직접 데려오고 싶을 정도였다.한편 민하윤은 침대에 혼자 누워 있다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서운함과 억울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한참이 지나고 창밖이 점점 어두워질 무렵에야 민하윤은 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민하윤이 로젤스에 도착한 다음 날, 마넬에서 몸을 돌보고 있던 구이현이 만나자고 연락해 왔었다.하지만 당시에는 상대 기업에서 계속 업무를 재촉하고 있었고 국내 본점에서도 승인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Read more

제755화

“하윤 언니!”구이현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민하윤을 힘껏 끌어안았다.“조심해. 뱃속에 아기 있잖아.”구이현은 눈을 내리깔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 반응에 민하윤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한참 뒤에야 민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너... 마넬에 온 뒤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구이현은 맞은편에 앉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무 일도 없었어. 아기도 잘 있어. 어제 막 정기검진 받고 왔고 이제 임신 초기 위험한 시기도 지났어.”민하윤은 그제야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방금 구이현의 표정을 보고 아기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엄마 아빠는 지난주에 국내로 돌아가셨어.”구이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빠가 중간에서 많이 말해 준 건지 결국 아이는 낳게 해 주겠다고 하셨어. 대신 구씨 성을 쓰는 걸로 결정했어.”구이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정략결혼 이야기도 일단 미뤄졌어.”불과 몇 달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민하윤은 구이현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정확히 어디가 달라졌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다만 예전의 밝고 거리낌없던 구이현의 모습에서 무언가가 조금 빠져나간 듯했다.두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식사를 했다.누구도 먼저 송지훈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그때 구이현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주주랑 연이는 잘 지내?”“응. 둘 다 아주 잘 지내. 요즘 진짜 장난꾸러기야.”민하윤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웃었다.“이제 혼자 앉을 줄도 알고 기어다니기도 해. 가끔 꽤 또렷한 소리도 몇 번 내고... 아직 말하거나 걷지는 못하지만 말이야.”“누리 언니는? SNS 보니까 국내에서 유명한 감독 영화 들어간 것 같던데? 이러다 서른 전에 진짜 여우주연상 받는 거 아니야?”그러자 민하윤이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 다시 해 봐. 녹음해서 누리한테 보내 주게.”“왜?”“누리는 그걸 기상 알람으로 설정할걸? 그러면 새벽 한 시 야간 촬영도 신나서 할 수 있을 거야.”
Read more

제756화

민하윤은 빠르게 그쪽으로 걸어가 유창한 여운어로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돌아온 대답은 임형섭이 반드시 민하윤을 무사히 호텔까지 데려다주라고 당부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민하윤은 임형섭에게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계속 받기만 하면 언젠가는 갚기 어려울 만큼 쌓일 것 같았고 무엇보다 집에 있는 누군가가 알게 되면 또 질투할 게 뻔했다.그럼 결국 달래야 하는 사람은 민하윤 자신이었다.민하윤은 옆에 세워진 구이현의 롤스로이스를 가리키며 기사에게 영어로 설명했다.“친구가 호텔까지 데려다주기로 했어요. 이제 돌아가셔도 돼요. 임 행장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기사를 돌려보낸 뒤 민하윤은 다시 구이현의 차에 올라탔다.구이현은 창밖으로 떠나는 차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마넬 번호판이네? 근데 저 차는 평범한 택시처럼은 안 보이는데?”“선배 가족이 마넬에 정착해서 살거든. 집에서 쓰는 기사님이 아까 날 데려다주셨어.”구이현이 혀를 찼다.“쯧쯧, 도진 오빠가 질투하고 화낼 만도 하네.”민하윤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구이현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이어 갔다.“자기 아내 주변에 잘 생기고 집안도 좋은 남자가 계속 맴돌고 있잖아. 누구라도 신경 쓰이지.”“게다가 언니랑 그 선배는 알고 지낸 지 십몇 년이나 됐고 대학 동문이잖아. 그런 관계는 아무나 따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민하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잠깐, 도진 씨가 질투하고 화난 건 어떻게 알아?”그제야 구이현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렸고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렸다.“헤헤... 내가 말해도 화내지 마. 사실 언니랑 문자로 얘기하기 전부터 언니가 로젤스로 출장 오는 거 알고 있었어.”민하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도진 오빠가 따로 연락해서 언니 좀 잘 챙겨 달라고 부탁했거든.”구이현은 말을 덧붙였다.“우리 엄마 아빠랑 오빠가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마음은 약하잖아. 마넬에 나 혼자 있다고 경호원, 집사, 개인 비서랑 기사까지 다 붙여 줬어.”“혹시 언
Read more

제757화

로젤스의 긴 거리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잠깐 사람을 배웅하는 사이 큰길 위에는 어느새 눈이 두껍게 쌓였다.어둑한 저녁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그때 기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그러자 뒷좌석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던 구이현의 몸이 관성에 밀려 앞으로 확 쏠렸다.구이현은 본능적으로 배부터 감싸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무슨 일이에요?”구이현은 아직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애써 화를 참았다.“죄송합니다. 아가씨,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앞에 사람이 있는 걸 미처 못 봤습니다.”로젤스에서 구이현을 돌보는 사람들은 모두 구준오가 직접 골라 붙여 준 이들이었다.운전기사는 특수부대 출신의 퇴역 군인이었고 요리사와 생활을 돕는 직원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구이현도 그들을 믿었다.평소 기사가 얼마나 조심해서 운전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창밖을 바라보니 가로등 아래로 눈이 거세게 흩날리고 있었고 확실히 날씨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았다.“사람을 친 건 아니죠? 911부터 불러요.”기사는 얼른 상향등을 끄고 앞 유리 너머를 자세히 살폈고 이마에 맺힌 식은땀까지 닦으며 황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사람을 친 건 아닙니다. 다만...”“다만 뭐요?”구이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사의 시선을 따라 밖을 바라봤다.낯선 나라의 거리에서 쏟아지는 함박눈과 화려한 불빛 아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 서 있었다.송지훈이었다.얼마나 오래 눈 속에 서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아파트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송지훈의 베이지색 코트 어깨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검은 바짓단에도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원래도 마른 몸이 한층 더 수척하고 지쳐 보였다.늘 온화하고 단정하던 사람이 지금은 희뿌연 눈 속에 홀로 서 있었다.구이현은 자신이 헛것을 보는 줄 알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구이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한 마디도 하지 못했고 결국 차 문을 열더니 비틀거리듯 눈밭을 걸어갔다.순식간에
Read more

제758화

아무리 송지훈이 미워도 집안 어른들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구준오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추슬렀다.그러더니 응접실로 걸어가 두 어른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준오는 젊은 나이에 대단한 성과를 냈죠. 가문의 힘에 기대지 않고 직접 게임 회사를 키워 상장까지 시켰으니 또래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편이에요. 우리 집안의 그 못난 놈은 따라가기도 힘들죠.”구준오의 아버지 구정민은 직접 차를 따라 주면서도 순간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상대가 오늘 유난히 정식 군복을 갖춰 입고 선물까지 들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유를 짐작했다.이렇게 급하게 온 걸 보면 결국 더는 숨길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아마 송지훈이 막다른 데 몰려 집안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을 터였다.‘그렇다면 다음 수순은...’구정민은 자연스럽게 받아쳤다.“지훈이가 또래 중에서는 제일 성실하고 고생도 많이 했죠. 어린 나이에 의대에 진학해 지금은 어르신과 아버지를 이어 군복을 입고 병원에서 일하고 있잖습니까...”“사업한다고 나선 아이들보다 훨씬 훌륭하죠. 너무 겸손하게 말씀하지 마세요.”그러고는 구준오를 향해 은근히 눈짓했다.“준오야, 바쁜 일 있으면 먼저 가 봐도 돼.”화제를 돌려 아들을 자리에 빼 주려는 뜻이었다.그런데 송지훈의 아버지 송민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구준오를 만류했다.“오늘 저희 부자가 이렇게 불쑥 찾아온 건 두 아이 문제 때문입니다.”그러더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 일은 제 아들이 잘못했습니다. 저도 이미 호되게 혼냈고 직접 매도 들었습니다.”송민수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아무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두 사람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잠시 뒤 다시 말을 이었다.“가문으로 따져도 우리 두 가문은 충분히 어울리고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서로 성격이며 됨됨이까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그러니 차라리 두 아이 뜻을 받아 주고 우리 두 집안이 사돈을 맺는 게 어떻겠습니까
Read more

제759화

12월의 로젤스는 몹시 추웠다.크리스마스이브의 거리는 모두가 행복한 무언극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화려하고 즐거웠다.민하윤은 아무 말 없이 휴대전화를 코트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결국 휴대전화가 툭 소리를 내며 두껍게 쌓인 눈 위로 떨어졌다.민하윤은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눈길을 한참 걸었다.그러다가 아랫배를 짓누르는 통증에 그제야 정신이 조금 현실로 돌아왔다.한 시간 전, 외국계 기업과 진행하던 투자 프로젝트가 마침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본점 직원들이 귀국 항공편까지 예약해 두었다.내일 오후 2시 비행기였다.공교롭게도 오늘은 마넬에서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였다.동료들은 모두 밖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고 임형섭은 여느 때처럼 병원으로 아버지를 돌보러 갔다.임형섭의 아버지는 상태가 더 나빠져 일주일에 네 번씩 투석을 받아야 할 정도라고 했다.이제 정말 삶의 끝자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민하윤은 원래 호텔로 돌아와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편안히 몸을 담갔다.지난 2주 동안 부족했던 잠을 모조리 보충할 생각이었다.그런데 아랫배가 묵직하게 아파져 오기 시작하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생리가 시작된 것이다.하필 크리스마스라 호텔에 남아 있는 직원도 많지 않았고 여자 동료들은 모두 저녁 모임에 나가 있었다.결국 민하윤은 다시 옷을 챙겨 입고 거리의 편의점으로 생리대와 캔디를 사러 나왔다.거리에는 눈이 끝도 없이 쏟아졌고 민하윤은 찬바람 속을 홀로 걸었다.멀리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고 신도들이 함께 부르는 성가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누군가는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었고 곳곳에는 화려한 조명이 반짝였다.뚱뚱한 산타클로스가 길가의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 주기도 했다.그 광경을 볼수록 민하윤의 마음은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두껍게 쌓인 눈을 헤치며 계속 걷다 보니 신발과 양말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민하윤의 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Read more

제760화

‘뭐가 저렇게 좋아서 실실 웃는 건지...’하도진은 문득 아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조금씩 나사가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백누리가 겨우 한 소절을 불렀을 때, 옆에 있던 매니저가 잽싸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언니, 지금 보는 눈이 몇 개인데요. 이렇게 대놓고 대표님의 비위 맞추면 안 돼요! 괜히 다른 사람들 눈 밖에 나서 뒤에서 견제당한다니까요.”백누리는 태연하게 검지 하나를 들어 매니저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네가 아직 뭘 모르네. 우리 하 대표님이 이 노래 정말 좋아하시거든. SNS에 직접 공유까지 하셨어.”“정말요?”옆에서 젊은 여자 몇 명이 동시에 물었다.보아하니 아까부터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매니저와 백누리가 동시에 옆을 돌아보니 얼마 전 회사에 들어온 신인 걸 그룹 멤버들이었다.젊고 예쁜 외모를 앞세워 빠르게 팀을 꾸렸고 유명 작곡가와 작사가를 붙여 앨범을 내자마자 팬이 크게 늘었다.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며 연예계에서도 제법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예능에서는 멤버끼리 얼마나 사이좋은지 서로를 챙겨 주고 아끼는 모습을 경쟁하듯 보여 줬다.팬들까지 그런 장면을 모아 연예계 찐친 우정 같은 영상을 만들어 퍼뜨리니 겉으로만 보면 정말 친자매처럼 보일 정도였다.백누리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하지만 조금 전에 무대에서 직접 보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멤버들은 노출 수위 높은 안무를 서로 더 돋보이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고 무대 중앙 자리를 빼앗으려 경쟁하고 후렴 파트까지 서로 더 많이 부르려고 신경전을 벌였다.그걸 다 보고 나니 이런 허울뿐인 연예계에서 진짜 우정이 있다는 말을 믿는 게 더 우스웠다.백누리가 빙긋 웃었다.“맞아. 난 하 대표님의 카톡 친구거든.”그중 흰색 튜브톱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순간 표정이 굳었다.“어떻게 하 대표님의 카톡이 있어요? 대표님은 아무나 친구 추가 안 해 주시잖아요. 저번에 저도...”그러자 백누리의 눈이 반짝였고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며 흥미
Read more
PREV
1
...
7475767778
...
8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