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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1화

연유준이 고개를 푹 숙이고 왼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연채린의 말에 떠밀려 할아버지에게 사과했다. 그런데 사과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할아버지한테 맞은 손이 아직도 아파. 절대 보여주지 않을 거야. 혹시라도 또 때리면 어떡해? 게다가 할아버지의 화가 풀렸다고 해서 내 마음이 풀린 건 아닌데. 난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병실로 돌아온 연유준은 자신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동욱의 말에 속지 않고 손바닥을 내주지 않은 게 너무나 뿌듯했다.연유준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연채린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배고파? 아침 가져왔으니까 좀 먹어.”연유준의 관심이 순식간에 손바닥에서 아침 식사로 옮겨갔다. 아이가 배를 문지르면서 반짝이는 두 눈으로 물었다.“메뉴가 뭐예요?”연채린이 턱을 까딱하며 침대 옆 탁자를 가리켰다. 탁자 위에 이미 여러 개의 도시락이 놓여 있었는데 주로 담백한 음식들이었다.아이는 바로 달려가 냄새부터 맡았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참지 못하고 도시락 뚜껑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연채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할아버지 아직 안 드셨어. 먼저 할아버지께 가져다드려.”연유준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싫은 티를 냈다.“저 방금 사과하고 왔잖아요. 또 가야 돼요?”그녀가 인내심을 갖고 설명했다.“사과에는 성의가 필요하단다. 넌 지금 사과만 했지, 성의를 보여주진 않았어.”연유준이 입술을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연채린이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빨리 아침 갖다 드리고 할아버지 기분도 좋게 해드려.”연유준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도시락을 몇 개 집어 들었다.작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아이는 발걸음을 아주 천천히 옮기며 연동욱의 병실로 걸어갔다.어떻게든 늦게 도착하려 했지만 두 병실이 워낙 가까워 금세 연동욱의 병실 문 앞에 섰다.연유준이 도시락을 든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할아버지, 아침 드셨어요?”막 배달된 신문을 들여다보던 연동욱이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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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2화

연동욱의 눈빛이 미세하게 어두워졌다.“괜찮아. 할아버지는 신경 안 써. 안아줄 테니까 이리 와.”연유준이 계속 거절했다.“아니에요. 얼른 식사하세요, 할아버지. 저도 아직 안 먹어서 가서 먹어야 해요.”연동욱이 단호하게 말했다.“네 밥을 가지고 와. 할아버지랑 같이 먹자.”“아니에요.”연유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할아버지 혼자 드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연동욱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유준아, 너무 무서워하지 마. 다시는...”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유준이 후다닥 도망치고 말았다.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연동욱이 무시무시한 맹수라도 되는 것처럼 빠르게 도망가 문을 쾅 닫았다.사실 연유준은 연동욱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본 순간 겁이 덜컥 났다. 더 있다간 또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도망친 것이었다.병실 안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연동욱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연유준이 그를 무서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조금만 억울한 일이 있어도 품을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리던 아이, 밖에서는 기세등등하다가도 할아버지 앞에선 영락없는 응석받이였던 그 아이는 이제 없었다.연동욱이 입술을 깨물고 복잡한 눈길로 도시락을 내려다봤다.연유준이 그를 두려워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다.며칠 사이 아이가 흘린 눈물이 태어난 이후 흘린 눈물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을 것이다. 퉁퉁 부어오른 눈만 봐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하지만 이 상황은 그가 초래한 것이었다. 의도치 않았으나 어쨌거나 연동욱 때문인 건 사실이었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들었다.연동욱이 도시락을 집어 들고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왁스를 씹는 것처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연동욱의 병실에서 뛰쳐나온 연유준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침대로 달려가 도시락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었다.연채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벌써 왔어?”아이가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배고파서요...”연채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많이 먹어.”연유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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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3화

옆 병실.연동욱은 식사를 마친 후 스스로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며칠간 이어진 소란 탓에 머리가 지끈거려 병실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그가 벽을 짚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연유준과의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했기에 연유준의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자초한 일이니 뒷감당 또한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연동욱이 문을 열고 연유준의 병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병실 문 유리창 너머로 연유준이 보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침을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입가에 기름을 잔뜩 묻힌 채 TV를 보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다행히 타격이 크지는 않은 듯했다.안도의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노크 소리에 연유준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 각도에서는 문밖의 연동욱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힐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식사에 열중했다.문과 가까웠던 연채린이 가서 문을 열었다.“할아버지, 웬일이세요?”문밖의 사람을 확인한 연채린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가가 연동욱을 부축했다.연동욱이 말했다.“유준이를 보러 왔지.”연채린이 연유준에게 말했다.“유준아, 할아버지가 너 보러 오셨대.”연동욱은 연채린의 부축을 받으면서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연유준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인 걸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얼굴에 감돌던 해맑은 웃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연동욱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아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걸 연동욱은 똑똑히 봤다.‘날 벌써 이렇게까지 밀어내는 거야?’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그 사이 연승재가 다가와 연채린과 함께 연동욱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연채린이 재촉했다.“연유준, 멍하니 있지 말고 얼른 할아버지께 인사드려.”연유준이 망설이자 연동욱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날 또 혼내러 오셨나? 이번에는 뭘 잘못했지?’연유준이 꿈쩍도 하지 않자 연채린이 의아해하며 다그쳤다.“유준아, 이리 와.”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침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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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4화

‘할아버지는 날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속상해하고 아파하는데도 작은 부탁조차 들어주지 않으시니까.’연유준은 정말로 화가 났다.아이들은 대부분 이러했다. 세상이 본인 위주로 돌기를 바라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자신만 바라봐주길 원했다.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거절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고 계속 달래주고 양보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좋은 건 모두 자신의 것이어야 하고 남에게 나눠 주는 건 절대 안 되었다.어릴 적부터 떠받들며 자란 연유준도 그러했다.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마음에 담아두고 속으로 불평을 잔뜩 늘어놓곤 했다.하여 연동욱이 어떻게 대했는지 절대 잊을 리 없었다.하지만 연동욱이 예전에는 무척 잘해줬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나긴 해도 애니메이션을 못 보게 했을 때 느끼는 분노 정도였다.감히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연유준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요.”그러고는 다시 강조했다.“할아버지한테 화 안 났어요.”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심지어 말할 때 연동욱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이건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연동욱이 포기하지 않고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알아. 할아버지한테 화가 났다는 거. 그날 할아버지가 너무 세게 때려서 그런 거지?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사과하러 왔어. 미안하구나. 할아버지가 그러면 안 됐었는데. 할아버지를 용서해주면 안 될까?”연유준은 또다시 생각과 다른 말을 내뱉었다.“저 화 안 났어요.”연동욱이 두 손을 벌리며 다정하게 말했다.“화난 게 아니라면 할아버지 한 번만 안아줄래?”연유준이 연동욱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연동욱이 안아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해서 화가 난 거라고 생각했다.하여 서둘러 다가가 연동욱을 껴안았다. 하지만 안기자마자 다시 품에서 빠져나왔다. 연동욱에게 안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연유준이 힘주어 말했다.“이제 됐죠?”‘날 피하기에 급급하구나...’연채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유준이 너...”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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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5화

연동욱이 눈을 감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나가봐.”연채린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잠시 문 앞에 서 있던 그녀가 뒤를 돌아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연동욱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지금 이 모습은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늙고 힘없는 쇠약한 노인 그 자체였다.연채린이 시선을 거두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눈빛에 찰나의 빛이 스쳤다.그녀가 다시 연유준의 병실로 돌아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던 연유준이 배가 불렀는지 아니면 연동욱 때문인지 숟가락을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죽을 깨작거리고 있었다.연채린이 들어오자 연유준이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려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불쌍한 눈으로 물었다.“고모, 할아버지 저한테 화나셨어요? 저 뭐 또 잘못했나요?”옆에 있던 연승재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연채린이 가볍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아니야, 넌 잘못한 거 없어. 아주 잘했어.”단순히 잘한 정도가 아니었다. 예상 밖의 효과까지 거두었으니까.연유준이 그 말을 듣고 긴장이 조금 풀린 듯 보였으나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또다시 캐물었다.“정말요?”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그럼. 고모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마음 편히 아침 먹어.”연유준이 방방 뛰며 말했다.“안 먹을래요. 배불러요, 이제.”그녀가 가볍게 말했다.“그래. 그럼 의사 선생님 불러서 상태 좀 보자.”연채린이 연유준에게 수면제를 먹일 때 양을 적절히 조절했었고 병원에도 신속하게 데려왔던 터라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다. 추가 검사에서도 이상이 없으면 퇴원해도 되었다.의사가 다녀간 후 연유준의 퇴원이 결정되었다.연동욱은 아직 병원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했다. 원래는 연유준과 함께 연동욱에게 가서 인사하고 가는 게 도리였지만 연채린은 연유준더러 기다리라 하고는 연승재만 데리고 연동욱을 찾아갔다.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연승재가 연채린을 잡아끌며 연유준을 힐끗 쳐다봤다.“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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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6화

연동욱이 다시 신문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딴 곳에 머물러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연채린이 그 모습을 포착하고 웃으면서 병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옆 병실로 가서 연유준과 함께 나왔다.연유준은 손에 나중에 먹을 슈크림 빵을 들고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고모, 뭘 그렇게 웃어요?”아이의 왼쪽에서 걷던 연승재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연채린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고 눈과 미간에 우쭐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곧 알게 될 거야.”일이 거의 성사된 것 같았다.연유준이 눈을 깜빡였다.“뭐예요.”연채린이 아이의 뒷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그러고 보니 고모가 아직 고맙단 말을 안 했구나.”연유준과 연승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이후 거듭 캐물어도 연채린이 말하지 않자 두 사람도 점점 흥미를 잃었다.연씨 가문 본가로 돌아가는 길, 연채린이 백미경의 메시지를 받았다.[채린아, 지금 상황이 어때?][자꾸 메시지 보내서 미안해. 아줌마가 마음이 급해서, 이영이 걱정돼서 이러는 거니까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예전이었더라면 어떻게 답할지 망설였겠지만 지금은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줌마.]백미경이 곧바로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연채린이 입꼬리를 올리며 휴대폰을 거두었다.밤, 연채린은 연유준의 방에서 나오고서야 연동욱이 걸어온 영상 통화를 받았다.연동욱이 아직 병원에 있었다. 한 시간 전 연동욱이 연채린에게 연유준과 영상 통화를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연채린이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연유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몇 분 뒤 연유준이 노느라 정신이 없어 영상 통화를 원치 않으니 나중에 다시 하라는 답장을 보냈다.연동욱은 별말 없이 기다렸다.30분 뒤 메시지 대신 영상 통화가 바로 걸려왔다.연채린은 연유준이 없는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연동욱이 그녀의 주변을 훑었다.“유준이는?”그녀가 망설이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할아버지, 유준이 아직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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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7화

연동욱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유준이가 제 입으로 괜찮다고 했어?”연채린이 별일 아니라는 듯 TV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말했잖아요. 애들은 금방 잊어버린다고.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연동욱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왜 내가 전화하면 안 받는 거지?”연채린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연씨 가문에서 연유준에게 기능이 많고 비싼 키즈 스마트워치를 사줬다. 인터넷만 안 될 뿐 위치 추적을 비롯한 온갖 기능이 다 있었고 가족들은 연유준과 연락할 일이 생기면 보통 스마트워치로 연락했다.어젯밤부터 연채린이 연유준의 스마트워치를 압수해둔 상태였다.어젯밤에 연동욱이 연유준에게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연채린에게 전화했던 것이었다.오늘 아침에도 연유준의 스마트워치에 연동욱의 번호가 뜬 걸 보고는 어젯밤처럼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연채린이 친절하게 ‘변명’했다.“못 봤나 보죠, 뭐. 유준이 오면 오후에 다시 천천히 얘기해 보세요.”연동욱이 무릎을 탁 쳤다.“아직도 나한테 화가 나서 용서하기 싫은 모양이구나.”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놀란 척했다.“설마요. 유준이 어젯밤엔 멀쩡했어요. 화내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 유준이 하원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실래요?”연동욱이 한숨을 내쉬었다.“어떤 일은 나만 알아.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나 보구나. 전화조차 피하는 걸 보면.”연채린은 얇은 니트 카디건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 연유준의 키즈 스마트워치를 꽉 쥐고 입술을 달싹였다.“정말 그럴까요?”연동욱이 시선을 떨구고 덤덤하게 말했다.“아직 어린앤데. 내가 잘못한 걸까?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됐었나?”연채린이 멈칫하더니 연동욱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착각인가?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어제보다 더 하얘진 것 같아.’그녀가 시선을 늘어뜨리고 다정하게 말했다.“할아버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예전엔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하셨잖아요.”연동욱이 피곤한 듯 눈을 깜빡였다.‘없었나? 있었는데.’유이영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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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8화

연유준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저 할아버지한테 화 안 났어요.”연유준은 귀하게만 자란 아이였다. 태어나서 겪은 고생이라곤 연동욱에게 손바닥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맞은 게 전부였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연동욱이 다정하게 말했다.“화 안 났다면 할아버지한테 손 좀 보여주렴.”연유준이 고개를 들고 머뭇거리다가 왼손을 내밀었다.연동욱이 아이의 손을 잡고 찬찬히 살펴보았다.이틀이 지나서인지 손바닥의 상처가 많이 좋아졌다. 첫날처럼 퉁퉁 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맞은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연동욱이 물었다.“아직도 아파?”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낮게 대답했다.“아니요.”“거짓말. 예전엔 조금만 다쳐도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던 너인데 안 아프다고? 할아버지한테 거짓말 말고 솔직하게 말해.”연유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조금... 조금 아파요.”연동욱이 고개를 끄덕였다.“유준아, 네가 화가 많이 났다는 거 알아. 그래서 유준이한테 사과하려고 그래. 그날 널 그렇게 때려선 안 됐었는데 정말 미안해. 할아버지가 잘못했어. 할아버지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연유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할아버지...”연씨 가문에서 나고 자란 연유준은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뼛속 깊이 새기며 살았다. 할아버지가 어린 연유준에게 이렇게 사과할 거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연동욱이 말했다.“서두를 거 없어. 할아버지를 용서할지는 천천히 생각해도 돼. 할아버지가 일단 약부터 발라줄게, 응?”그가 가방을 벗겨주자 연유준은 얼떨결에 그의 옆에 앉았다.연동욱이 도우미에게서 연고를 받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약을 듬뿍 떠서 아이의 손바닥에 얹고는 조심스럽게 펴 발랐다.그 모습을 보던 연유준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오른손으로 소파의 천을 꽉 움켜쥐었다.아이는 마음도, 울음도 감추지 못했다. 미세한 흐느낌 소리에 연동욱이 고개를 들더니 한숨을 쉬었다.“왜 울어? 할아버지가 약을 너무 세게 발랐어?”연유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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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9화

연유준이 흥분하며 연동욱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를 냈다.“할아버지는 대단하신 분이라 분명 엄마를 데려올 수 있을 거예요.”연동욱이 껄껄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제 기분이 좋아졌어? 화 풀렸어?”연유준이 능청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히죽 웃었다.“네. 다 풀렸어요. 평생 할아버지랑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낼 거예요.”연동욱이 환하게 웃자 눈가의 주름이 짙어졌다.계단을 내려오던 연채린의 눈에 기쁨과 놀라움이 서렸다.‘드디어 성공했어.’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돌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다.‘이영 언니 이제 살았어.’연채린이 연동욱과 연유준의 옆으로 다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자, 됐어. 유준이 배고프지? 밥 금방 다 될 거야.”연유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배고파요. 밥 먹을래요.”도우미가 주방에서 음식을 내왔다.“작은 도련님,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팔을 번쩍 들고 신난 얼굴로 달려가는 연유준을 본 연채린이 웃으며 말했다.“못 말려, 정말.”그때 연동욱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눈빛에 지금껏 본 적 없는 서늘한 기운과 상대를 떠보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그 눈빛에 연채린이 흠칫했다.“할아버지, 왜 그러세요?”연동욱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이제 만족해? 며칠 전부터 내가 유이영을 돕게 하려고 수작을 부렸지?”연채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고 손가락을 파르르 떨었다.“저야 당연히 할아버지가 이영 언니를 돕길 바라죠. 그런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연동욱이 소파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요 며칠 공교로운 일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유준이는 자살할 애가 아니야.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겠지.”그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누가 그런 걸 시켜요? 그럴 리가 없어요.”연동욱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럴 리가 없다고? 공교롭게도 그 수면제가 네 것이잖아.”앉아 있는 게 연동욱이고 서 있는 게 연채린이었지만 그녀는 죄인석에 앉아 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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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0화

연동욱의 노련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연채린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할아버지가 다 아셨어.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아셨지? 어디서부터 들통난 거지?’연채린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 다 유준이 생각이라고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제가 시킨 게 아니에요. 정말로 유도한 적이 없어요...”연동욱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말이 통하지 않는구나.”연동욱이 휴대폰을 꺼내 연유준의 키즈 스마트워치의 위치 추적 앱을 켰다.“유준이가 유치원에 있을 때 이미 그 스마트워치의 위치를 확인했어.”연채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그가 싸늘하게 쳐다보며 쏘아붙였다.“유준이는 분명 유치원에 있는데 왜 스마트워치의 위치는 이곳으로 찍히는 거지?”연채린의 머릿속이 백지장이 돼버렸다. 말을 잇지 못하고 주먹만 꽉 쥐었다.연동욱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힘겹게 말했다.“유준이가 일부러 집에 두고 갔나 보죠.”그의 두 눈에 실망감이 번지더니 휴대폰을 내려놓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혼나야 정신을 차리지? 사당으로 따라와.”연채린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할아버지!”연동욱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현관을 나가 사당 쪽으로 걸어갔다.사당이 본채 뒤편의 작은 건물에 있었고 매일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연채린도 몇 번 가본 적이 없었고 제삿날이나 명절에만 찾아가곤 했다.그리고 그 외에 이곳을 찾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벌을 받아야 했다.연지훈도 어릴 적부터 몇 번이나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벌을 받았었다.본가에서 중시하는 자제일수록 벌은 더욱 혹독했다. 매번 도우미들의 부축을 받아야만 나올 수 있었고 며칠을 앓아누워야 했을 정도였다.연채린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녀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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