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의 결혼을 지지해요: Chapter 131 - Chapter 140

152 Chapters

제131화

서현주는 잠시 멍하니 연지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정말 뜻밖이었다. 그녀는 연지훈이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는 어묵을 팔지 말라고 호통칠 줄 알았다. 아니면 혐오스럽다는 듯 그녀와 연씨 가문은 아무 상관없다고 단칼에 선을 그을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당장 꺼지라며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내쫓을 줄 알았다.그런데 서현주의 예상은 죄다 빗나갔다.연지훈은 오히려 학교 근처의 고급 아파트를 내주며 거기서 살라고 했고 부족하면 돈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학교 근처 집값은 말도 안 되게 비쌌다. 서현주가 그 근처에서 겨우 얻은 집은 낡고 좁은 반지하였는데, 그래도 그녀는 그게 마음이 편했다.‘하지만 지금 이건...’너무 이상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완전히 독립하지 못했을 때는 연씨 가문과 철저히 선을 긋겠다고 결심했었다.그래서 지금 연지훈이 보여주는 이런 ‘배려’는 그녀의 눈엔 그저 달콤하게 포장된 함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마련해준 집에 들어가는 순간, 또다시 뭔가에 묶이게 될 것만 같았다.그렇게 되면 서현주가 연씨 가문에 ‘입양’되던 그 시절과 같게 된다.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했고 엄진경조차 그녀를 타일렀다.“현주야, 넌 정말 복받은 거야. 연씨 가문과 잘 지내. 그런 기회 흔치 않아.”하지만 서현주는 안다. 그 ‘입양’이란 게 결국 어떤 결과로 끝났는지를. 그건 그녀를 산산이 부숴버린, 겉만 반짝이는 ‘폭탄’이었다.서현주는 이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연지훈이 마지막으로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다시는 강혜인이랑 길거리에서 어묵 파는 짓 하지 마. 연씨 가문이 널 굶기기라도 했어?”서현주는 곧바로 대꾸했다.“싫어요.”그 말을 듣자 연지훈의 관자놀이 핏줄이 불끈 뛰었고 그는 이마를 짚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연지훈은 요즘 회사의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고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는데 그 와중에 이 여자까지 말썽이라니.서현주가 끝도 없이 반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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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이어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연지훈은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으로 차 문을 밀치고 나왔다. 그는 유이영과 통화 중이라는 사실은 아예 잊은 듯 성큼성큼 서현주를 쫓았다.서현주는 뒤에서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연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며 몸을 홱 돌렸다.“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짙은 어둠 속에서 연지훈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하지만 서현주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그의 다른 손에 여전히 휴대폰이 들려 있었고 그 너머로 유이영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훈 씨, 무슨 일이에요? 거기 누구 있어요?”그리고 거의 비명 같은 외침이 이어졌다.“설마... 현주 씨예요?”그 절박한 음색에 서현주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응, 현주야.”연지훈이 짧게 대답하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이윽고 유이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는데 이번엔 한층 힘이 빠져 있었다.“아, 현주 씨랑 같이 있었군요. 그럼 나 대신 안부 좀 전해줘요.”그리고 떨리는 숨소리가 이어졌다.“지훈 씨, 얼른 와줘요. 나 좀... 힘들어요.”그 말에 연지훈의 미간이 좁혀졌다.“왜 그래? 어디 아파?”“입덧 때문에 좀 힘들어요... 속이 울렁거려요.”유이영이 훌쩍이며 말했다.“현주 씨한테 잠깐 전화 바꿔줘요. 내가 직접 말할게요. 현주 씨도 이해할 거예요.”서현주는 손목을 잡혔지만 오히려 여유롭게 연지훈을 바라봤다.연지훈은 잠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손목을 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됐어.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자 서현주는 한 걸음 물러나 그와 거리를 두며 미소를 지었다.연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집은 3동...”“말하지 마요.”서현주가 단호히 그의 말을 끊었다.“알고 싶지 않아요.”그녀는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나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돌아가요. 아내분이랑 아이가 지훈 씨를 기다리잖아요.”연지훈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집은 이미 다 준비돼 있어. 오늘부터 들어가면 돼.”“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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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서현주는 다시 휴대폰을 켰고 화면에 연지훈이 보낸 두 개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그녀는 손끝으로 천천히 화면을 밀며 자신과 연지훈 사이의 대화 기록들을 하나하나 내려보았다.처음 연지훈과 연락처를 주고받은 건 그녀가 연씨 가문에 막 들어왔을 때였다. 그때의 서현주는 모든 게 낯설고 자신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감히 그들 곁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눈치만 보던 시절이었다.그런데 그때 그런 그녀에게 먼저 다가온 사람이 연지훈이었다.“이름이 서현주 맞지?”낡고 빛바랜 가방을 꼭 끌어안고 서 있던 서현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안녕하세요...”그녀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만큼 작았다.연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앞으로 나는 네 오빠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그 말에 서현주는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다가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오빠...”낯선 세상 속에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 사람이 바로 연지훈이었다.그때부터였다. 서현주가 그에게 끌리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처음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연지훈의 존재가 고맙고 든든해서, 용기 내어 그에게 보낸 메시지도 고작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같은 인사뿐이었다.그 후엔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그의 답장을 기다리곤 했다.연지훈에게서 답장이 오면 서현주는 짧은 문장 하나에도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는 언제든 답장을 줬다. 늦게든, 일찍이든. 그게 서현주에게는 전부였고 문자 한 줄만으로도 그녀는 하루 종일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그러다가 그녀의 메시지는 점점 길어졌다. 서현주는 조심스레 연지훈이 허용하는 선을 탐색하면서 그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연지훈도 그 시절에는 그녀를 동생으로 생각하며 무던히 받아주었다.서현주는 그의 말 한마디, 미소 하나에 마음이 풀리고 위로받았다. 연지훈은 바쁜 와중에도 그녀의 메시지에 대답해 주었고 그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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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서현주는 무심코 손가락을 움직여 유이영의 SNS를 눌렀고 순간 수많은 사진과 글이 그녀의 눈앞에 쏟아졌다.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천천히 내렸다. 계속, 아주 오래.유이영의 게시물 중 일부는 일상적인 내용이었지만 대부분은 연지훈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그리고 그중 한 장은 초음파 사진이었는데 그걸 보자 순간 서현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더 아래로 내리자 몇 년 전 게시물들이 나타났고 두 사람이 고등학교 시절에 찍은 사진도 있었다. 하늘은 석양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두 사람은 흰색 교복을 입은 채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등지고 있었다.둘이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손등이 살짝 맞닿아 있었다. 그 거리감마저 애틋해 보였고 그 어색함마저 풋풋했다. 누가 봐도 첫사랑의 분위기였다.서현주는 그 사진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카카오톡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연지훈의 프로필 페이지로 들어가 손가락을 ‘삭제’ 버튼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지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연지훈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그와의 대화 기록을 지우기가 너무 아쉬웠다.그때 침대 맞은편에서 강혜인이 몸을 뒤척이며 ‘으음’ 하고 잠결에 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서현주는 자신이 또 그녀를 깨운 건 아닌가 하고 움찔했고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이 움직였다.[삭제되었습니다.]그렇게 연지훈의 이름이 사라졌다.그녀는 멍하니 화면을 보다가 이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그래, 이게 맞아.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화면을 꺼버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수업이 끝나자 서현주는 강혜인과 함께 학교 정문 앞에 작은 어묵꼬치 노점을 열었다.그런데 상황은 놀랍게도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줄은 여전히 길었고 장사는 여전히 잘됐다.둘은 정신없이 손이 오갈 만큼 바빴고 밤늦게 장사를 마치고 온몸이 녹초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다.그때 서현주의 휴대폰이 울렸고 ‘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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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연지훈은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눈매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기운이 맴돌았다. 그가 서현주가 어려서 그런 짓을 한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라는 뜻으로 말하자 유이영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말했다.“지훈 씨, 난 그 별칭이 좀 싫어요. 딴 거로 바꾸면 안 돼요?”그때 연지훈은 곧바로 ‘그래’ 하고 대답했고 그 한마디에 그녀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런데 지금까지도 그 별칭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연지훈의 휴대폰 속 서현주의 이름 옆에는 아직도 ‘꼬맹이’ 라는 단어가 남아 있었다.다정하면서도 은근한 애정이 묻어나는 그 호칭은 두 사람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분명히 보여줬다.유이영은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지훈 씨, 나...”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연지훈이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 순간, 유이영은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으며 자신도 모르게 손이 살짝 떨렸다.잠시 후, 딱딱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지금 거신 번호는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연지훈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고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들려온 건 똑같은 기계음이었다.‘분명 차단당한 거야.’그는 단박에 눈치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반면 유이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현주 씨가 그래도 눈치는 있는 편이네.’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연지훈의 손에서 휴대폰을 부드럽게 빼앗았다.“지훈 씨, 전화도 안 받는데 그만해요. 그런 사람한테 신경 쓰지 말고 본인 건강부터 챙겨요.”유이영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은 안도와 쾌감이 뒤섞여 있었다.연지훈은 의미심장한 톤으로 말했다.“현주가 감히 날 차단했다고?”그 말에 유이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달래듯 말했다.“괜찮아요, 지훈 씨. 현주 씨가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요. 지훈 씨 같은 사람의 가치를 몰라서 그런 거라고요.”그녀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더니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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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서현주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꿈도 꾸지 않은 채 푹 자고 나니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강혜인이 그녀를 깨웠다.“오늘 주말 아니야? 학교 안 가잖아.”서현주는 잠결에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그러나 강혜인은 단호했다. 그녀는 서현주의 손에 펜을 억지로 쥐어주고 문제집과 모의고사지들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자자,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서 공부 좀 해. 빨리!”서현주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 속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뜨자마자 하얗게 비어 있는 문제집 수십 페이지가 눈앞에 펼쳐지다니.“요 며칠 너 나 때문에 정신없었잖아.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다음 주가 월말고사인데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강혜인의 말에 서현주는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그런데 의외로 며칠이 지나도 연지훈이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자기 카카오톡과 전화번호를 삭제하고 차단까지 한 걸 알고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서현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그래야 월말고사와 코앞으로 다가온 수능의 준비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며칠 뒤 월말고사 성적을 발표하는 날,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낮인데도 어둑했고 굵은 비가 창문을 두드렸다.서현주는 조용히 자리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는데 그때 교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학생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숨이 차서 헐떡이며 외쳤다.“야야야! 월말고사 성적 나왔어! 그런데 전교 1등이 누군지 알아? 너희 진짜 상상도 못 할 걸?”교실 안은 순식간에 술렁거렸고 서현주의 옆자리인 강혜인도 고개를 들었다.남학생은 성적표를 흔들며 반 전체를 둘러보다가 서현주를 향해 시선을 멈췄다.순간 교실 안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쏠렸고 서현주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왜 그래? 다들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그녀가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남학생이 소리쳤다.“서현주, 네가 1등이야! 전교 1등! 게다가 특별반의 1등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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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서현주가 교무실의 문을 밀고 들어서며 싱긋 웃었다.“와, 분위기 정말 뜨겁네요. 제가 딱 좋은 타이밍에 왔나 보네요?”순간, 교무실 안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했다. 누군가는 놀란 듯했고 누군가는 민망한 듯 눈을 피했으며 또 누군가는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야말로 볼거리가 풍성했다.서현주는 그런 시선들을 느긋하게 훑어보다가 마침 눈앞의 한 남학생이 울먹이며 자신을 노려보는 걸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어? 너 왜 울어? 무슨 일 있었어? 얘기 좀 해봐. 나도 좀 듣자.”그 말에 교감의 미간이 즉시 구겨졌다.“서현주,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연채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서현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를 기어들어와?”“기어들어오다니?”서현주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너 같은 사람도 여기에 버젓이 있는데 나도 당당히 걸어 들어와야지.”그 말에 연채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너 진짜 뻔뻔하다. 남의 답안 훔쳐서 1등한 게 그렇게 좋아? 지금 학교 전체가 네가 부정행위한 거 알아. 이제 넌 도망도 못 가고 발뺌도 못 해.”이때 교감이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현주야, 너의 부정행위 문제로 인해 학교에서는 이번 시험 성적을 취소하고 중징계를 내릴 예정이야. 이의 있니?”서현주는 멍하니 그 말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와, 무슨 대본도 없는 막장 드라마 같네요.”그녀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입만 열면 내가 부정행위했다는 얘기뿐이네요. 그런데 증거 있어요?”“증거?”연채린이 버럭 소리쳤다.“너 전에 이런 점수 받아본 적 있어? 이번에 갑자기 1등이라니, 누가 봐도 부정행위한 거지!”“그래서 증거는?”서현주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증거 없으면 말 좀 아껴. 나는 정정당당하게 시험 쳤어. 그런데 그게 왜 너희 눈에는 부정행위로 보이는 거야?”교감은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 영상을 확인해 봤는데 네가 시험 중에 부정행위를 한 장면은 확실히 없었어.”그러더니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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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서현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펜을 들어 올렸다.눈앞의 수학 문제는 확실히 어려웠다. 그녀 역시 문제를 몇 분 정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겨우 풀이의 실마리를 잡았다.그 짧은 몇 분 동안 교감과 선생님들, 그리고 연채린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듯한 표정이었다.“서현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교감이 마치 대단히 관대한 척하며 말했다.“이렇게 하자. 중징계는 없던 걸로 해줄게. 대신 성적은 그래도 취소할 거야.”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현주의 펜촉이 종이 위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교감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속으로는 이미 서현주의 행동을 ‘관종 짓’이라고 단정 내렸다.이 문제들은 학교의 수학 교사들조차 손도 못 댔는데 학생이 풀 수 있을 리가 없었다.‘도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쓸 셈이지? 저걸 기다리다간 하루가 다 가겠는데.’결국 참지 못한 교감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그만해. 이런 식으로 쇼하지 말고 이번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자. 결과는 변하지 않아. 곧 전교생이 볼 수 있게 공지를 내릴 거고 네 성적도 취소할 거야.”하지만 서현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저 펜을 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숫자와 기호, 수식으로 종이를 가득 채워나갔다.교감은 인내심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걸음을 내디뎠고 손을 뻗어 서현주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시선이 우연히 서현주의 시험지로 스쳤고 그는 말을 잃었다.교감은 원래 수학 교사 출신이었는데 며칠 전에 이 문제를 풀어보려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 서현주의 풀이를 보는 순간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서현주의 손은 믿기 힘들 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답안지의 절반은 어느새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녀의 풀이 과정은 명료하고 간결했으며 논리의 흐름이 완벽했다. 심지어 모범 답안보다도 더 정제되어 있었다.교감이 처음 봤던 모범 답안은 솔직히 조금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서현주의 풀이를 보는 순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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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결국 이번 월말고사 결과가 발표되던 날, 전교 게시판 맨 위에 큼지막하게 [1등, 서현주]라는 이름이 붙었다.그날 이후로 반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까지 어깨가 절로 펴졌다.예전에는 서현주를 두고 ‘집안 문제로 밀려났다’, ‘이번엔 완전히 끝났다’라며 비아냥거리던 애들도 이제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가기 바빴다.그날 오후, 담임이 서현주를 교무실로 불렀다. 처음에는 단순히 칭찬이라도 하려나 했는데 담임의 표정이 묘하게 진지했다.“현주야, 연 대표님이 네 일에 많이 신경 쓰고 계시대. 그래서 특별반 선생님을 이번에 너희 반으로 겸임시킨 거야. 원래 특별반 선생님은 거기 애들만 맡는데 이번엔 너희까지 지도하시게 됐지.”담임은 마치 큰 배려라도 받은 것처럼 말했다.“네가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내니까 아마 연 대표님도 무척 기뻐하실 거야. 집에 가면 꼭 말씀드려. 너 다시 원래 반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솔직히 네 수준에 이런 애들이랑 같은 반은 좀... 시간 낭비잖아.”서현주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순순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지훈 씨가 날 걱정했다고? 말도 안 돼.’그럴 리가 없었다. 전생에서 그는 그녀를 짐짝처럼 싸서 외국으로 보내버리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그러나 이번 생에서도 똑같다. 연지훈은 유이영이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들까지 두둔했다.그런 그가 자신을 챙긴다니? 서현주는 우습지도 않았다.“알겠어요, 선생님.”그녀는 짧게 대답하고 억지로 웃으며 자리를 뜨려 했다.그런데 그때 문 밖에서 묵직한 실루엣이 하나 보였는데 순간 서현주는 본능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정돈된 머리, 단정하게 잠긴 셔츠 단추, 무표정한 얼굴.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존재감 하나로 주위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서현주는 숨을 삼켰다.연지훈은 무심하게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스치듯 바라봤다.그의 눈빛만으로도 압도당한 서현주는 아무 말 없이 옆으로 비켜가려 했지만 연지훈은 손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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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수행비서가 어느새 서현주의 앞에 다가와 연지훈 쪽을 가리키며 공손히 말했다.“서현주 씨,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서현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저 지금 밥 먹으러 가야 해요.”비서는 여유 있게 미소를 지었다.“대표님께서 이미 근처 레스토랑에 자리를 예약해 두셨습니다. 서현주 씨가 도착하시면 바로 식사가 준비될 겁니다.”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 안, 서현주는 조용히 식기를 정리하고 따뜻한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그녀가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은 연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휴대폰 줘.”“뭐 하게요?”서현주는 경계하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연지훈은 검은 눈동자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번호를 차단한 거 풀어.”서현주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연락할 일 없잖아요.”그러자 연지훈은 눈매가 서서히 좁혀지며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서현주.”서현주는 못 들은 척 젓가락을 들어 닭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꼭꼭 씹으면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퇴근 시간대답게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네온사인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대형 전광판에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4년에 한 번 열리는 ‘루체 피아노 콩쿠르’, 그 광고를 보는 순간 서현주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건 전국 최고 수준의 피아니스트들이 모이는 대회였다.심사위원단은 국내외 명망 있는 피아니스트들이었고 매번 철저하게 공정하게 심사하기로 유명했다. 그 어떤 로비도, 후원자 개입도 통하지 않는 대회였다. 지금까지 13회가 열렸지만 단 한 번도 ‘비리’나 ‘특혜’ 같은 말이 나온 적 없었다.그래서 이 대회에서 1등을 거머쥐는 것은 곧 세계 무대에 입성하는 것과 같았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라면 대부분이 한 번쯤 루체 피아노 콩쿠르를 거쳤다.그녀의 스승 고지현은 평생 루체 피아노 콩쿠르에 나갈 수 있기를 꿈꿨지만 대회는 4년에 한 번 열렸고 고지현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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