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의 결혼을 지지해요: Chapter 141 - Chapter 150

152 Chapters

제141화

강혜인은 연지훈을 만나고 온 뒤로 서현주의 기분이 엉망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괜히 건드렸다가 불똥이 튈까 봐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밥은 먹었어?”“아니. 지훈 씨의 얼굴을 보고 나니까 입맛이 싹 사라지더라.”서현주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그 말을 듣자마자 강혜인은 옆에 있는 남학생의 등을 ‘탁’ 하고 한 대 쳤다.“야, 너 뭐 하냐. 먹을 거 있으면 얼른 꺼내. 현주가 밥도 못 먹었대.”“아! 혜인아, 왜 때려!”남학생이 비명을 질렀지만 주변의 학생들이 그 말에 호응하듯 우르르 움직였다. 각자 서랍에서 과자며 빵, 젤리, 초콜릿 같은 걸 꺼내서 죄다 서현주의 책상 위로 던졌다.“야야, 다들 잠깐만!”하지만 서현주는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빵 한 봉지를 정통으로 맞았다.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됐어, 됐어. 이제 그만 줘. 이 정도면 가게도 차리겠어.”강혜인은 빵 포장을 쓱 찢고 우유에 빨대를 꽂아 서현주에게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 또 무슨 일 있었어?”“지훈 씨 때문에 속이 뒤집혀서 그래.”서현주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강혜인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 인간은 그냥 멍청이라고 생각하고 신경 꺼.”‘그 멍청이가 매일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니까 문제지.’서현주는 힘없이 빵을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연지훈은 안 되겠어. 그쪽에 기대도 콩쿠르 출전권은 못 얻어.’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그날 밤, 자율학습이 끝난 뒤 서현주와 강혜인은 장사를 접고 병원으로 향했다. 외할머니를 보기 위해서였다.요즘 외할머니는 건강이 훨씬 좋아져서 두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웃었다.서현주는 가만히 듣기만 했지만 마음이 따뜻하고도 아릿했다.돌아오는 길에 강혜인이 서현주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너 요즘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서현주는 고개를 들었다.지난번에 멀리서 봤던 그 대형 스크린이 이번엔 바로 앞에 있었고 화면 속에 여전히 ‘루체 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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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화

그때 연지훈의 눈앞에서 과거의 잔상이 스르르 사라지고 현실의 장면이 덮쳐왔다.유이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지훈 씨, 방금 연주 어땠어요?”연지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너무 좋았어.”그 말에 유이영은 웃음을 터뜨렸다.“회사 직원들은 지훈 씨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는 거 한 번도 못 들었다던데, 왜 난 매번 칭찬을 받는 걸까요?”“늦었어. 이제 들어가서 쉬어.”연지훈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왠지 다정하게 들렸다.유이영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지금 자면 안 돼요. 루체 피아노 콩쿠르가 두 달밖에 안 남았잖아요. 더 연습해야 할 거 같아요.”연지훈은 걸음을 옮겨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창문 밖에서 부드럽게 스며드는 달빛이 그의 얼굴을 스쳤고 그 빛 아래에서 그는 유난히 온화하고 준수해 보였다.“내일 해도 늦지 않아.”유이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눈웃음을 지었다.“지훈 씨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연지훈이 옆으로 몸을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그러자 유이영은 순간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더니 곧 밝게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지훈 씨, 다정하네요. 이렇게 손까지 잡아주고.”연지훈은 문을 열면서 말했다.“가서 쉬어.”“네.”유이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그럼 잘 자요.”연지훈은 짧게 ‘응’ 하고 대답한 뒤 피아노실 안을 한 번 돌아봤다가 시선을 거뒀다.한편, 서현주와 강혜인은 두 시간을 달려 드디어 강혜인의 친구 집에 도착했고 이미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강혜인의 친구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여자였고 이름은 임주은, 말투도 행동도 다 털털했다. 그녀는 낯선 사람인 서현주를 봐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늦은 시간에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해요.”서현주는 준비해 온 과일과 닭고기를 꺼내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원래 읍내에서 숙소를 잡으려고 했는데 호텔이 전부 문을 닫았더라고요.”“아, 거기 호텔들 다 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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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화

다음 날 아침 일찍 서현주와 강혜인은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그들이 출발하기 전, 임주은이 신신당부했다.“그분은 조용한 걸 좋아하세요. 괜히 시끄럽게 굴면 안 돼요. 꼭 한가해지셨을 때 찾아가야 해요, 알겠죠?”“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서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이 만나러 가는 심사위원은 이름이 장미연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서른 즈음 되어 보이는 젊은 피아니스트로 국내외 유수의 대회에서 전부 우승을 휩쓴 전설 같은 인물이었다.장미연은 이번 루체 피아노 콩쿠르의 수석 심사위원으로 그녀가 매기는 점수 비중은 무려 총점의 20퍼센트를 차지한다.서현주가 이번에 장미연을 일부러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녀가 쥐고 있는 참가 자격 때문이었다.그들이 장미연이 머무는 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시간이었지만 서현주는 대문이 굳게 잠겨 있는 걸 발견했다.“나가신 모양이네.”“우리도 일찍 오느라 했는데 언제 나가셨대?”강혜인은 머리를 긁적였다.주변을 둘러보던 서현주는 시골 들판의 풍경을 바라봤다. 대문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논밭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서 허리를 굽혀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그녀는 입구 옆 돌 위에 털썩 앉더니 옆자리를 두드렸다.“일단 앉아서 기다리자. 괜히 조급해하지 말고.”두 사람은 그늘 아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이제 막 여름에 접어드는 시골의 공기는 약간 후끈했고 서현주는 손바람을 일으키며 졸린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낯선 번호였다.“여보세요, 누구세요?”“현주 씨, 나예요.”익숙한 목소리에 서현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조금 전까지의 여유로운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유이영 씨가 웬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하세요?”유이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나 다 알아요. 지난번 약 탄 사건 때문에 지훈 씨한테 화난 거죠?”서현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썹만 살짝 치켜올렸다.유이영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 일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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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화

“그런데 있잖아.”강혜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연씨 가문이 돈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복잡한 일이 많을 줄은 몰랐어. 진짜 재벌가의 세계는 우리 같은 사람은 이해도 못 하겠네.”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현주의 어깨를 툭 쳤다.“그래도 네가 도망쳐 나와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나 진짜 연지훈이 너를 내연녀로 만들어버릴까 봐 걱정했을 거야.”그 말에 서현주는 잠시 멍해졌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무슨 소리야.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물론 이전 생에서는 그랬다. 연지훈과 유이영이 다시 이어지기 전, 그녀는 한동안 그 남자의 숨겨진 연인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로 한 이후로 연지훈은 서현주를 완전히 끊어냈다.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볼까 말까였고 나중에는 그의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였다.게다가 지금은 연지훈과 유이영이 곧 약혼을 앞두고 있는데 그런 일이 다시 생길 리가 없었다.“넌 너무 생각이 많아. 그럴 일 없어.”“음, 난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강혜인이 검지를 들어 장난스럽게 흔들었다.“무슨 뜻이야? 네 생각은 어떤데?”“아무튼 네가 그 사람들한테 다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야.”서현주는 그들의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리기조차 싫었다.“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아주 열심히.”두 사람은 느긋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한참을 기다렸다.그러다가 어느새 오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서현주는 나무에 기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고 강혜인은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나를 찾는다는 사람들이 그쪽들이에요?”그때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서현주는 눈을 번쩍 뜨고 잠든 강혜인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곧장 일어나 옷깃을 정리하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번 넘긴 뒤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앞에 베이지색 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옷에 흙이 조금 묻어 있었고 발에 고무장화를 신었으며 손에는 흙 묻은 양동이와 괭이를 들고 있었다. 막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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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장 선생님, 왜 저 사람들은 들여보내지 않으세요?”장미연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 속의 온화함이 절반 이상 사라졌다.그녀는 천천히 다시 걸어와 문틀에 손을 얹고 말했다.“나는 원래 조용한 걸 좋아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이만 돌아가요.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요.”그러자 서현주가 급히 말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무례를 범하려던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지금 정말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장미연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느닷없이 도움을 청한다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없고 무례한 일이다.그럼에도 서현주의 절박한 표정을 보고 그녀는 살짝 흥미를 느꼈다.“그럼 한번 무슨 일인지 말해봐요.”서현주는 가슴속에 희망이 피어올라 눈을 반짝였다.“곧 열리는 루체 피아노 콩쿠르 말입니다...”그러나 그녀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장미연은 미간이 움찔하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눈빛 속 온기가 사라지고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루체 피아노 콩쿠르요? 두 사람, 참가자들이죠?”그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나는 절대 그런 편법 안 써요. 그러니까 그런 거 부탁할 거면 돌아가요.”서현주는 당황해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게 아니라...”하지만 장미연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끊었다.“나를 찾아온 게 그쪽들이 처음이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어요. 다들 똑같은 말만 했죠.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나한테 편법을 바라는 건 그만둬요.”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이만 돌아가요.”끼이익... 쾅.문이 굳게 닫히며 정적이 흘렀다.서현주는 좌절한 듯 얼굴을 감싸 쥐더니 손으로 자기 머리를 툭툭 쳤다.“아, 왜 이렇게 말을 못 해...”강혜인이 다가와 얼굴을 찡그렸다.“장 선생님이 정서아랑 아는 사이라니... 진짜 일 커졌다.”그들의 말처럼 멀리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정서아는 처음에는 그저 비웃음이 나왔다. 만약 장미연이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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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화

장미연의 물음에 정서아는 표정이 굳더니 곧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원래는 곧 약혼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한 여자 때문에 다 망가졌죠.”장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영이의 남자 친구가...”정서아가 급히 말을 이었다.“지훈 씨 잘못은 아니에요. 연씨 가문에서 키운 양녀가 하나 있는데 어릴 때부터 지훈 씨한테 들러붙었어요. 지훈 씨가 이미 약혼할 사람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붙어다니고 뻔뻔하게 굴었죠. 그리고 그 연씨 가문의 양녀가 이영이랑 지훈 씨가 약혼 발표하는 날에 그 자리에서 난동을 부려서 이영이가 크게 다칠 뻔했어요.”“연씨 가문의 양녀라...”장미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어렴풋이 기억나. 운전기사의 딸이었지, 아마?”이때 정서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녀는 약혼식 날의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다르게 알고 있었다. 다들 그 일의 배후가 서현주라고 믿었다.“맞아요. 선생님도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실 거예요.”장미연은 고개를 들었다.“누구야?”“아까 여기 왔던 두 여자 중 한 명이에요. 서현주.”그 말에 장미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그 시각, 담장 밖에 서 있던 서현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강혜인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일단 돌아가자. 저 선생님의 성격을 보니까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통할 거 같아.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서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이대로 버틴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무거운 짐을 한가득 들고 오는 게 보였다.손에도, 어깨에도, 팔에도 이것저것 걸려 있어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서현주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아저씨, 저희가 좀 도와드릴게요. 어디 사세요? 저랑 친구가 같이 옮겨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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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화

마을에서 튤립을 기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서현주는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이 바로 장미연이 기른 튤립밭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직 활짝 피지 않은 형형색색의 튤립들이 푸른 들판 위로 선명하게 돋보였다.서현주와 강혜인은 조심스럽게 좁은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 튤립 옆에 섰다.“여기 봐봐.”강혜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쥐가 갉아먹은 흔적이 많아.”서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봤는데 튤립뿐만 아니라 밭의 다른 작물들에도 여기저기 쥐가 물어뜯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근처 농민들에게 들으니 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소용이 없다고 했다. 겨우 잡았다 싶으면 또 어디선가 새 무리가 나타나서 끝이 없다고 한다.쥐를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놈들이 굴을 몇 개나 파놨는지도, 어디 숨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서현주는 밭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강혜인도 마찬가지였다.그래서 둘은 그냥 멍하니 튤립을 바라보기만 할 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둘은 결국 현장에서 휴대폰으로 검색까지 해봤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역시 아무리 우리가 머리를 굴려도 평생 밭을 지켜온 농부들만큼은 못 따라가겠지...’서현주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그때 강혜인이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우리 여기 있어 봐야 답 안 나와. 내 친구한테 물어볼 테니까 내일 다시 와서 생각해 보자.”“그래.”서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바로 임주은의 집으로 돌아가 자세히 물었는데 임주은도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쥐들은 번식력이 너무 세서 말이지, 한번 들면 진짜 답이 없어.”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서현주는 하루 종일 피곤했던 탓에 저녁을 먹자마자 잠들었다.그런데 이른 아침, 누군가가 임주은의 집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쿵쿵쿵.서현주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깨 비몽사몽한 채로 나갔다. 그러다가 복도에서 마찬가지로 부스스한 머리로 나온 임주은과 강혜인을 마주쳤다.세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가 문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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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화

유이영은 평소처럼 얌전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저는 괜찮아요, 선생님. 다만 선생님께서 그동안 정성껏 기르신 튤립이 이렇게 망가져서 속상하실까 봐 걱정돼요.”그녀는 한 박자 쉬고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만약 현주 씨가 정말 선생님께 불쾌감을 드린 거라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그 말에 겨우 누그러졌던 장미연은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유이영의 말 몇 마디가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장미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녀의 시선이 서현주를 향했고 상대방을 꿰뚫는 듯한 눈으로 거짓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듯했다.한편 서현주는 유이영의 눈가에 스친 짧은 미소를 놓치지 않았고 속으로 비웃음이 번졌다.‘유이영 씨는 일부러 튤립 이야기를 꺼낸 거야. 장미연 선생님을 다시 화나게 만들어서 자기 대신 나를 몰아세우게 하려는 계산이겠지.’“그쪽이 한 짓이죠?”장미연의 낮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서현주는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연지훈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무심한 표정이었고 시선은 허공에 던져져 있었지만 묘하게 유이영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역시 유이영 씨 때문에 같이 온 거겠지.’서현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장미연을 똑바로 마주했다.“그 사람들이 저를 언제 봤다고 하던가요?”“점심 1시쯤이었어요.”“제가 떠난 건 몇 시라고 했죠?”“두 시 정도랬어요.”서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그럼 선생님은 언제 튤립이 망가진 걸 아셨어요?”“아침 8시쯤 알았어요.”서현주는 쓰러진 튤립 한 다발을 집어 들며 천천히 말했다.“그럼 중간에 열여덟 시간이나 비어 있네요.”그녀는 고개를 들고 장미연을 바라봤다.“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 일을 했다고 확신하신 거죠?”그 말에 장미연의 안색이 서서히 돌아왔다.서현주 옆에 서 있던 임주은은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말했다. 평소의 명랑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저도 어제 오후 두세 시부터 계속 같이 있었는데 우리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는 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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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화

지금은 시골집 앞마당도 대부분 시멘트 바닥이라 흙 묻은 발로 밟으면 반드시 자국이 남는다.잠시 후, 서현주는 근처에서 그 자국을 발견했다. 작은 발자국 하나가 어른들의 발자국 사이에 섞여 있었지만 오히려 더 눈에 띄게 도드라져 있었다.그녀와 강혜인은 그 발자국을 따라 걸었고 이내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안에서 남자아이의 즐겁고 시끄러운 웃음소리, 그리고 엄마의 걱정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천천히 좀 뛰어. 넘어지겠다!”그 말에도 아이는 오히려 더 크게 소리치며 뛰어다녔다.그 집도 평범한 시골집이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일곱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옷은 온통 먼지와 흙투성이, 거기다 옷자락에는 시든 튤립 꽃잎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아이의 근처에 짓밟혀 짜부러진 튤립들이 넓게 퍼져 있었고 끈적한 꽃 꿀이 시멘트 위에 번져 있었다.서현주는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내 아이와 짓밟힌 튤립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다. 촬영을 마친 뒤, 그녀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그녀는 굳이 장미연을 위해 해명해 줄 의무도, 그런 마음도 없었다.물론 장미연이 사실을 몰라서 괜히 화를 낸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참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건 분명 억울한 일이었고 서현주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다.진실을 밝혀내는 건 사실 간단했지만 장미연은 애초에 알아볼 의지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진심으로 진상을 알고 싶어 하진 않았다. 그들이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그렇게 급하게 몰아세우며 서현주를 범인 취급하진 않았을 것이다.만약 이번에도 전생처럼 아무 말 없이 참고만 있었다면 그들은 그 틈을 타서 끝까지 그녀를 몰아붙였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고 서현주는 먼저 한 수를 되돌려줬다.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을 켜서 차단해 두었던 연지훈의 번호를 잠시 풀었다. 그리고 방금 찍은 사진과 영상을 그에게 보냈다. 전송이 완료되자 다시 그의 번호를 차단 목록에 넣어버렸다.숙소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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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화

장미연이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자 서현주는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평온한 표정으로 장미연을 바라보았다.“장 선생님, 선생님이 사실을 모르고 저한테 화내신 건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 이런 식으로 모욕당할 이유도 없고요.”장미연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알아요. 그래서... 그에 대해 보상하고 싶어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내가 루체 피아노 콩쿠르 출전권을 하나 갖고 있어요. 단 한 자리뿐인데 그걸 현주 씨에게 주고 싶어요. 받아줄래요?”그 말에 모든 시선이 한순간 서현주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유이영은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꽉 물었다.‘그걸 그냥 이렇게 준다고?’그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왜 서현주가 그 자격을 얻어? 대체 뭘 했다고? 지훈 씨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대회 자리까지 노리는 거야?’그때 유이영은 갑자기 몸을 바로 세우며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현주 씨, 조금만 더 생각해봐요. 아직 고3이잖아요.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장 선생님과의 오해는 내가 설명해 드릴게요. 괜히 이런 일로 서로 어색해질 필요는 없잖아요?”겉으로는 친절한 듯 들렸지만 말끝마다 ‘넌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어’라는 의도가 뻔히 묻어 있었다.서현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런 상황을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어. 주인공이 오해를 풀고 사과 선물을 받을 때 뭐라고 했더라?’“필요 없어요.”보통 주인공들은 그런 말 한마디를 툭 던지고 쿨하게 돌아선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다 놀라고 주인공은 더 빛났다.하지만 서현주는 고개를 살짝 들고 부드럽게 웃었다.“받을게요.”좋은 걸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건 그녀가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이었다.게다가 그 대회는 서현주가 정말 간절히 원하던 무대였는데 안 받을 이유가 없었다.그 말에 유이영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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