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의 모든 챕터: 챕터 161 - 챕터 170

504 챕터

제161화

한마디 말이 온전히 온채아의 자존심을 짓밟았다.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돌아서서 주율천이나 민은하에게 기대어 다시 손을 뻗을 수도 있었고 모든 걸 걸어서라도 정다슬을 지켜낼 방법 또한 분명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성유준의 깊고도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한 그녀는 또다시 고집을 부렸다.무슨 일이 있어도 지고 싶지 않았다.“주율천일 수도 있고, 성윤혁일지도 모르죠. 아니면 나이 좀 있는 어떤 아저씨라도 내가 마음에 든다면 그 사람이라도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쾅!화장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에 세차게 부딪혔다. 그 소리에 그녀의 말은 그대로 끊겨버렸다.성유준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거실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가 나온 손에는 뽀송하고 따뜻한 수건이 들려 있었다.그의 눈빛은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몸에서 풍기는 날 선 기운만으로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불쾌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온채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잠시 후, 성유준이 그녀 앞에 조용히 앉았다.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더니, 수건으로 천천히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마디마디 뚜렷한 손가락이 발끝을 스칠 때마다, 이상하게 간지럽고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어렸을 적, 그가 종종 그렇게 해주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온채아는 신기하게도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닦아주고는 수건을 옆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생리 끝났어?”순간, 온채아의 몸이 바짝 굳었다.이렇게 곧장 본론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던 터라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요...”말이 끝나자마자, 성유준은 조용히 진통제를 뜯어 유리잔에 담긴 따뜻한 물 속에 퐁당 떨어뜨렸다.그리고 그 잔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온채아는 순간 멍해졌다.무엇을 오해했는지 이제야 깨달은 그녀는, 조용히 잔을 받아서 들며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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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비록 임지연이 성유준의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해도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어젯밤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그때였다. 인기척이 나자 성유준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긋 바라보았다.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이제 정신 좀 들었냐?”목소리는 어젯밤과 달리 평온했다.온채아는 잠시 멈칫했다.그 말은 어젯밤 일을 돌이켜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성유준에게 여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자, 갑자기 입을 열기가 망설여졌다.‘정다슬 일은, 아마 이미 해결됐겠지...’‘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도 없고...’혹여 성유준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하면, 정다슬 일까지 복잡해질지도 모른다.‘그래도 여자친구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그녀가 조용히 침묵에 잠겨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성유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을 건넸다.“언제까지 너를 나한테 팔 생각인데?”“저...”온채아는 망설이다가,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았다.“여자친구 있잖아요...”그 순간, 성유준이 멈칫했다.지하 주차장에서 대충 던졌던 말을 그녀가 그걸 기억해 낸 것이다.그는 피식 웃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헤어졌어.”그 말을 듣고 안도하려던 찰나, 성유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설령 안 헤어졌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데?”그의 눈빛엔 장난기와 동시에 묘한 비아냥이 서려 있었다.“난 여자친구 있고 넌 이미 결혼했잖아. 나도 기꺼이 내연남 되어주겠다는데 뭘 그리 신경 써?”온채아는 그 말에 움찔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성유준은, 그녀가 이미 이혼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그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 비밀스러운 관계를 감쪽같이 숨겨줄 테니까.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낮게 물었다.“그럼 기간을 얼마 동안으로 하실 건데요?”성유준은 여유롭게 답했다.“내 기분에 따라.”역시, 늘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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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성유준은 은빛이 살짝 반사된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아직 절차 밟는 중이야. 네가 밥 다 먹고 가면 딱 맞을 거다.”“오늘 데리고 나올 수 있어요?”어젯밤의 어지러웠던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온채아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눈으로 성유준을 바라봤다. 그가 결국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고 확실하게 움직일 줄은 예상 못 했다.성유준은 조용히 의자를 당겨 앉으며 그녀 앞에 죽 한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일단 아침부터 먹어.”“네...”온채아는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고소한 죽은 속을 따뜻하게 덥혔고 두툼한 계란말이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같은 지붕 아래 살지 않은 8년. 그 사이 두 사람은 참 많이도 변했다.‘성유준이 요리를 할 줄 안다니...’차마 상상도 못 했던 모습이었다.식사를 마치고 온채아는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성유준은 이미 모든 걸 정리해 두고 있었고 그녀가 도착했을 땐 마침 한빛 그룹의 수석 변호사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리고 이내, 경찰 쪽에서 정다슬을 데리고 나왔다.잡혀 나온 정다슬의 모습은 낯설 만큼 초라했다. 평소 또렷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유지하던 그녀는 화장도 다 지워져 얼룩졌고 윤기 흐르던 웨이브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으며 당당하던 눈빛마저 지쳐 흐릿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온채아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숨 돌릴 틈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가 안기며 연신 말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슬아...”“왜 이래. 나 멀쩡하잖아?”정다슬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를 살짝 떼어내며 손을 잡았다.“얼른 집에 가자. 나 지금 씻고 싶어서 미치겠어.”그녀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해할수록, 온채아는 더더욱 미안함에 가슴이 죄어왔다.돌아가는 길에 온채아가 자꾸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는지 정다슬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렇게까지 미안하면, 이참에 나한테 한 이억쯤 송금해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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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아니야.”온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성유준이 자신에게 느끼는 그 잠깐의 열정이 과연 얼마나 갈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어쩌면 며칠 안 가 손 털고 등을 돌릴지도 몰랐고 그런 불확실한 마음을 굳이 말로 꺼내 정다슬까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이번 일 때문에 너 일에 지장은 없을까?”“없어.”정다슬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근데 말이야, 성 대표, 보기엔 좀 비정한 사람 같아도 일 하나는 정말 철두철미하게 처리하더라.”“한빛 그룹 쪽 변호사한테 우리 상사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했대. 이번 일은 자기 사촌 동생이 멋대로 벌인 거고 나랑은 무관하다고.”사업 판에서 오래 굴러온 사람들이란 대개 말 한마디에도 수가 숨어 있다. 성유준이 보낸 그 연락 한 통은 단순한 해명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그건 정다슬을 억울함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동시에 그녀가 성씨 가문과 어느 정도 연이 있다는 인상까지 심어준 것이다.조금 전, 경찰에게서 핸드폰을 돌려받자마자 로펌에서는 안부와 함께 걱정을 쏟아냈고 말끝마다 성유준과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두 사람은 집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예상치 못하게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하지훈이었다.방금 성유준의 집에서 나온 듯했고 코끝에 걸친 금테 안경은 그의 날카로운 눈매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괜찮아요?”그 말은 분명 온채아에게 한 게 아니었다.온채아는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정다슬과 하지훈이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괜찮아요.”정다슬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한 뒤, 온채아의 팔을 살짝 끌며 집 안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지나치려던 찰나, 하지훈이 갑작스레 팔을 들어 올리더니 정다슬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차가운 손끝이 이마에 닿자 그녀의 걸음도 멈췄다.하지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온채아에게 말했다.“최소 38도는 넘겠네요.”“네. 맞아요...”온채아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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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정다슬은 시선을 살짝 떨구더니 입꼬리에 쓸쓸한 미소를 얹었다.“보세요. 우리는 애초에 같은 세상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건 당신도 알고 있고 나도...”“시간을 좀 줘.”그녀의 말을 끊은 건 하지훈이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정다슬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실내.문을 열고 들어선 온채아는 가장 먼저 신발을 벗은 뒤, 거실 안쪽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슬이 일, 정말 고마워요.”성유준은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맙긴 뭐가.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건데.”그 말에 온채아는 어쩐지 민망해져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가 말하는 ‘당연히’라는 말의 의미를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이건 철저히 자신의 몸을 대가로 한 거래였다.그녀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성유준은 식탁 위로 서류 하나를 툭 올려두었다.“사인해.”온채아는 조심스레 다가가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눈에 띈 다섯 글자가 그녀의 심장을 찌르듯 파고들었다.‘매매 계약서’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나도 내 권리는 보장받아야 할 거 아냐?”“알았어요.”그녀는 잊지 않았다. 이 남자는 언제나 철저한 계산 속에서만 움직이는 사업가였다.계약서를 대충 훑어본 온채아는 이름 석 자를 빠르게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성유준은 인주를 꺼내 식탁 한쪽에 툭 놓으며 말했다.“지장도 찍어.”그 철두철미함에 온채아는 작게 투덜거렸다.“도망갈 것도 아닌데...”그러자 성유준은 조롱 섞인 눈빛을 담은 채 그녀를 바라보며 대꾸했다.“언제 또 홧김에 좋아하는 남자 생겼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릴지 내가 어떻게 알아?”그 말에, 온채아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그가 말하는 건, 3년 전 주율천과 결혼하겠다며 모든 걸 버리고 떠났던, 그때의 일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변명하지 않았다.무슨 말을 해도, 이 남자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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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남자의 손에 잡혀 장난치듯 이리저리 굴려지는 가느다란 허리에서 올라오는 느낌은 온채아에게 있어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낯선 감각이었다.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성유준을 바라봤다.“네?”맑고 투명한 눈동자에는 얼떨떨한 기색이 감돌았고 그 촉촉한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의식의 욕망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성유준은 장난스럽게 그녀의 엉덩이를 툭 치더니,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키스해 봐.”이번엔 확실히 들렸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익힌 새우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외모는 언제나 금욕적이고 냉담해 보였지만 그 손끝에서 묻어나는 장난기 어린 동작은 그와는 전혀 다른 온도를 품고 있었다.온채아는 어젯밤 그와 어떤 식으로 합의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제 와 새삼 부끄러워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심호흡을 한번 하며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린 뒤 살며시 그의 얇은 입술에 입을 맞추려 다가갔다.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귀 끝은 화끈하게 달아올랐고 숨결은 점점 가빠졌다.성유준은 마치 명령을 내리는 권력자처럼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가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입술이 닿기 직전,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끌어당겼고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지닌 그는 몸을 살짝 숙여 그녀의 턱끝에 절제된 입맞춤을 살며시 남겼다.키스를 하려는 용기와 실제로 키스를 받는 감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그의 입술이 닿은 그 순간, 전류처럼 짜릿한 감각이 그녀의 온몸을 타고 퍼졌고 온채아는 본능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그런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성유준은 그녀의 턱을 살짝 깨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이윽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고 저음의 거칠고도 절제된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어젯밤 나한테 애원할 땐, 이런 태도 아니었잖아.”이 집은 방음이 잘 되어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공간을 가득 채운 건 오직 온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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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아픈 정다슬을 혼자 두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온채아는 하루 종일 실험실엔 가지 않고 집에서 일했다.그리고 다음 날 정오쯤, 정다슬의 열이 말끔히 가라앉자 비로소 외출 준비를 마쳤다.현관문을 열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성유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키가 크고 곧게 뻗은 그의 실루엣 위로 유리창 너머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늘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조금은 덜어내고 있었다.문 여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끗 바라봤다.“한의원 가는 길이야?”“실험실이요.”온채아은 짧게 대답하며 문을 닫았다.설 명절을 앞두고 한의원은 이미 휴무에 들어간 상태였고 이제 그녀는 약물 개발 프로젝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성유준과 나란히 걷는 이 시간이 이렇게 긴장되는 순간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들은 명목상 오누이였고 얼굴만 마주쳐도 시비가 붙기 일쑤였던 사이였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의 연인이었다.그 변화는 정말이지 믿기 힘들 정도로 극단적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녀는 살짝 안도하며 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그런데 막 타려던 순간, 오른쪽 뒷바퀴가 완전히 펑크 나 있는 걸 발견했다.시계를 본 그녀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오후에 예정된 연구부 회의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고 아무리 사소한 이유라도 빠질 수 없는 일정이었다.그때, 검은 벤틀리 한 대가 그녀 앞에 조용히 멈춰 섰고 뒷좌석 창이 내려가며 성유준의 얼굴이 드러났다.“타.”온채아은 잠시 주춤했다.‘지금 택시를 불러도 시간엔 맞을 텐데...’하지만 그의 시선이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우린 계약서에 사인했잖아.”계약서 조항 중 하나, ‘항시 호출에 응할 것’ 이라는 그 조건이 떠올랐다.결국 그녀는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알아요. 그냥 아직 익숙해지는 중이라서요.”오빠에서 연인, 그 간극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성유준은 그녀가 자신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듯한 모습에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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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온채아의 한 손은 그의 손에 붙잡혀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어느새 그의 다리 위에 얹혀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비로소 둘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예전처럼 대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제 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단연코 성유준이었다.“알겠어요.”온채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대답을 마칠 즈음, 차는 천천히 한빛 그룹 본사 건물 앞에 도착해 멈췄다.바로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임지연이었다.비록 창문은 짙게 선팅 처리되어 있었지만, 온채아는 본능적으로 그의 품에서 몸을 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그리고 그가 뿜어내는 짙은 불쾌감이 담긴 시선을 마주하며 얌전하게 한마디 덧붙였다.“지금은 근무 중이니까요.”성유준은 그녀의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시선을 거두고는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고 그와 함께 뿜어져 나온 기품과 냉랭한 분위기는 아까까지의 친밀했던 장면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느껴질 만큼 극명하게 달라져 있었다.임지연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열려 있던 차 문 너머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온채아의 모습이 보였고 그녀는 의외라는 듯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채아야, 연구소 가는 길이야?”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임지연은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성유준에게 옮겼다.“오전엔 어디 다녀오셨어요? 주주총회가 갑자기 연기돼서요...”그 말에 온채아는 묘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느꼈다.분명 뭔가 이상했지만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말로 설명하긴 애매했다.‘보통의 비서라면 상사에게 저런 식으로 행선지를 따지진 않을 텐데...’성유준은 시큰둥한 눈빛으로 임지연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마디 던졌다.“대표는 나인 것 같은데?”정 없고 매몰찬 말투였지만 그게 바로 성유준의 스타일이기도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연은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은 듯, 오히려 익숙하다는 얼굴로 온채아를 향해 농담처럼 말을 이어갔다.“네 오빠 일하는 태도 너라면 어떻게 생각해?”지금 그녀는 성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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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온채아는 임지연과 굳이 가까이 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아마 그녀가 거절을 지나치게 단호하게 해서였을까, 평소라면 인간관계 하나쯤은 가볍게 주무르던 임지연조차 그 순간만큼은 표정이 굳고 말았다.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쏠리기 시작했고 임지연은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짧게 인사했다.“그럼, 다음에 봐.”“네.”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지연은 곧장 자리를 떴다.그 순간, 공용 휴게실 쪽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임 비서 체면도 안 봐주고 말이야.”“그러게 말이야.”익숙한 목소리로 보아 같은 연구팀의 팀원 중 하나였다.“임 비서가 어떤 사람인데. 한빛 그룹 차기 사모님 될 사람이잖아?”온채아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멈췄고 그 뒤로도 조용할 틈 없이 험담이 이어졌다.“내 보기엔 너희들도 슬슬 발 빼는 게 좋을걸? 저런 여자 하나 있다고 팀이 언제 해체될지 누가 알아...”그녀는 말없이 표정을 굳혔고 다음 순간 조용히 몸을 돌려 그들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책상 위에 ‘쾅’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단호히 말했다.“만약 여러분이 연구를 하는 데 있어 줄 잘 서고 아부 떠는 게 전부라면...”그녀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선언하듯 덧붙였다.“당신들 쪽이야말로 지금 당장 해체돼도 괜찮겠네요.”상대는 모두 체격 좋은 남자들이었지만 온채아의 냉정하고 날카로운 말에 그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해갔다.누구도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들 뒤로, 온채아는 이미 실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잠시 후, 장현택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뭐, 틀린 말은 아니지.”“아직도 멍하니 뭐해? 어서 일 안 하고. 사내들이 여자애 하나한테 계속 밀리고 부끄럽지도 않아?”온채아는 그들 뒤에서 무슨 말이 오가든 개의치 않았다.지금 그녀가 신경 쓸 건 오직 하나, 연구뿐이었다.하루라도 빨리 약을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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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정다슬은 소속 로펌에서 일주일간 유급 병가를 받았다.덕분에 오랜만에 야근 없는 저녁, 소파에 푹 파묻혀 게임에 몰두하던 그녀는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온채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정다슬은 그녀 손에 들린 쓰레기봉투를 힐끗 보더니 게임 속에서 한창 공격을 펼치며 무심히 물었다.“쓰레기 버리러 나간 거 아니었어? 안 버렸어?”“갑자기 너무 피곤해서 나가기 싫어졌어.”온채아는 봉투를 신발장 옆에 내려두고 롱패딩을 벗은 뒤 그대로 소파에 몸을 눕혔다.지금은 이대로 임지연을 또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물론 성유준은 임지연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하지만, 누가 봐도 그녀는 특별했다. 어딜 가도 시선을 받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은 늘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기 마련이었다.온채아는 그런 기분을 털어내려 태블릿을 집어 들고 예능 프로그램을 뒤적였다.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너 설 연휴에 뭐 할 거야?”“내일 집에 내려가서 이틀쯤 있을까 해.”정다슬은 그렇게 말하며 게임을 마친 뒤 쪼르르 다가와 온채아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그러곤 투덜거리듯 말했다.“하, 네 생일이 설날쯤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 핑계로 집 안 가도 되잖아.”온채아의 생일은 한 달 뒤인 음력 2월 9일이었다.그녀는 정다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괜찮아. 가서 재미없으면 빨리 와. 나랑 같이 있자.”맞은편 2202호.서재에서 무언가 낌새를 느낀 성유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그리고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그림자를 본 순간,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이제는 기본적인 매너도 없는 거야?”그의 차가운 한마디에 임지연은 억울하다는 듯 가볍게 입술을 내밀었다.“비밀번호를 그렇게 단순하게 해 놓은 사람이 누군데요?”그의 현관 비밀번호는 참 단순했다.‘0209’.임지연은 그 숫자가 자주 쓰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알지 못했다.그의 생일도 아니었고 눈에 띄는 기념일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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