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의 모든 챕터: 챕터 171 - 챕터 180

504 챕터

제171화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괜찮아...’임지연은 그의 곁에 여자가 없는 한, 언젠가는 그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그렇게 믿는 게, 그나마 자신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감정이었다.약기운에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하던 정다슬은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거실은 조용했고 텅 빈 공기엔 묘한 적막이 감돌았다.온채아는 소파에 두었던 태블릿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 예능이나 틀어놓을 참이었다.아무 생각 없이 웃기라도 하면 이 뒤틀린 감정이 조금은 풀릴지도 몰랐다.그때,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 화면이 반짝이며 문자를 알렸다.발신자는 ‘오빠’였다.[밥 먹으러 와.]아직 그와 연인 사이가 되기 전, 온채아는 성유준의 번호를 ‘오빠’라고 저장해 두었고 차단을 해제한 뒤에도 연락처는 그대로였다.온채아는 시계를 흘깃 봤다.임지연이 그의 집에 들어간 지, 고작 5분 남짓했다.‘그 시간에 내가 거기에 가서 뭐 해...’온채아는 곧장 답장을 보냈다.[먹었어요.]아픈 정다슬과 같이 역시 소금기 하나 없는 죽을 몇 숟갈 떠먹은 게 전부였다.그러나 성유준의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내가 데리러 가야겠어?]화면만 보고 있는데도 그 차갑고 명령조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았다.정말로 그가 오는 건 아닐까, 순간 겁이 덜컥 난 온채아는 허둥지둥 태블릿을 내려두고 급히 문을 나섰다.그리고 그의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또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902079, 직접 열고 들어와.]집 비밀번호였다.그 순간, 온채아는 잠시 멍해졌다.‘성유준은 대체 어떤 상황에서 임지연한테 이 번호를 알려줬을까...’아무리 생각해 봐도 명확한 답은 없었다.어쩌면, 자신은 그저 그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여자들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몰랐다.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곧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비밀번호를 눌렀다.익숙하게 슬리퍼를 꺼내 신고 안으로 들어서니 식탁 위에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 가지런히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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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웬일인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더니 눈가가 시큰해졌다.온채아는 말없이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유준의 집을 나섰다.그녀가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본 성유준은 마음속 깊은 어딘가가 거칠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현관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는 참지 못한 듯 긴 다리를 뻗어 식탁 의자 하나를 세차게 걷어찼다.의자는 힘없이 쓰러져 바닥을 굴렀다.음력 12월 29일.정다슬은 설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갔고 온채아는 그녀를 배웅한 뒤 다시 조용한 집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 몸을 묻었다.반쯤 깨어 있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문득 떠올랐다.오늘은 김현우 일행이 성유준의 집에 들러 집들이를 하기로 한 날이었고 그녀도 그 자리에 함께 가기로 했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가짜 남편’과 이혼한 상태였고 성유준에게 있어서 친구들 앞에 애매한 관계인 자신이 끼는 게 불편할 수도 있었다.‘굳이 가서 눈치 볼 필요 있을까...’그녀는 베개를 끌어안고 이불을 더 깊이 덮으며 잠에 빠져들었다.오랜만에 편한 숨이 나왔다.정오쯤, 겨우 눈을 뜬 온채아는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마쳤다.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그녀는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려두고 급히 문 앞으로 달려갔다.“성...”문을 열자, 그녀는 말끝을 흐리고 멈칫했다.가슴 어딘가가 텅 비어버린 듯한 기분이 스쳤지만 얼굴엔 미소를 지웠다.“할머니? 어쩐 일이세요! 어서 들어오세요.”이미숙은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날이잖니. 괜히 손이 근질근질해서 전 몇 개 부쳐왔어.”온채아의 마음에 따뜻한 바람이 스며들었다.“전, 할머니께서 손주랑 바쁘실까 봐 며칠 뒤에 찾아뵐 생각이었어요.”“아이고, 말도 마라.”이미숙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음식을 냉장고에 넣었다.“그 녀석, 아주 바빠. 나한테 신경 쓸 겨를도 없지 뭐야. 내일 저녁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그렇게까지 바쁘신가요?”“그 녀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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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요 며칠, 온채아는 매일 아침 스승한테 전화를 걸어 사모님의 상태를 확인했다.다행히 회복이 무척 순조롭다는 말에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딩동.냉장고 문을 막 닫은 순간,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온채아는 이미숙이 무언가를 두고 갔나 싶어 서둘러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이 반쯤 열리자마자 코코가 번개처럼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어머, 너!”그녀는 코코를 번쩍 안아 들며 문밖을 힐끗 바라보았다.그러나 복도엔 아무도 없었고 맞은편 성유준의 집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성유준이 너 밖에 두고 들어갔어?”“멍!”코코는 짧게 짖으며 반가움을 표시하더니 갑자기 그녀의 치맛자락을 물고 바깥으로 끌어당겼다.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한 움직임이었다.“어디 가자는 거야, 응?”온채아는 어이없어 웃으며 외투를 걸치고 휴대폰을 챙겨 조심스럽게 코코를 따라나섰다.그런데 코코는 복도 끝까지 가는 대신, 현관 앞에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문 쪽을 바라봤다.“너 원래 초인종 누를 줄 알잖아?”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코코는 작정한 듯 두 발로 껑충 뛰었지만 초인종에는 닿지 못했다.그 순간, 온채아는 숨을 삼킨 듯 얼어붙었다.‘그럼 아까 우리 집 초인종은...’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고 잠시 후 성유준이 문을 열었다.남자는 문손잡이에 한 손을 얹은 채 느긋하게 서 있었고 늘 그렇듯 담담하고도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비밀번호 몰라서 못 들어왔어?”“내가 임 비서도 아니고.”온채아는 무심코 그렇게 말해버렸다.순간, 성유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몸을 기울여 긴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문 뒤로 눌리듯 기대어진 채, 그의 손에 허리가 들어 올려지고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어젯밤 화난 거, 혹시 임지연이 우리 집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온 거 때문이야?”속내를 정확히 짚어낸 그의 말에 온채아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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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다행히도 그녀의 허리를 감싼 성유준의 팔은 놀라울 만큼 단단하고 안정감 있었다.그는 마치 세상 모든 소리를 차단한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탐하듯 집요하게 맞물며 키스에 몰두했고 계속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조차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문밖에서는 초인종이 끊임없이 울려댔다.결국 그녀는 숨이 막힐 듯한 순간,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겨우 숨을 돌렸다.“누구 온 것 같아요...”하지만 성유준의 눈은 이미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춤을 부드럽게 감싸 올라가며 키스는 다시 이어졌다.“신경 쓰지 마.”쉬어 있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유혹적이었다.한참 동안 문을 열지 않자, 문밖 사람은 결국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그 두드림엔 어딘가 낯선 당혹이 묻어 있었다.“뭐지, 오늘 우리가 오기로 한 거 잊은 건가?”“설마.”익숙한 목소리에 온채아의 온몸이 얼어붙었다.당황한 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성유준을 바라봤다.“주율천이에요. 그 사람들이 온 것...”“그래서?”그는 짧게 입술을 다시 훑더니, 차가운 미소와 함께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그렇게까지 들킬까 봐 무서운 거야?”“그게 아니고...”민망해서 그랬다.바로 저 문 너머에선 ‘남편’이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데 그녀는 지금 ‘오빠’의 품에 안겨 있었으니까.하지만 성유준의 눈엔 그녀가 주율천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걸로만 보이는 듯했다.그는 한 걸음 다가와 그녀를 완전히 품 안에 가두고 차가운 냉소를 머금은 채 묻는다.“누구 키스가 더 좋아?”온채아는 그 말도 안 되는 논리에 황당함이 치밀어 올랐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거랑은 전혀 상관없는 얘기잖아요...”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갑자기 문 쪽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숫자를 눌렀고 마지막 한자리만 남은 상황에 온채아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발을 뗐지만 성유준이 그녀를 순식간에 끌어당겼다.그의 눈동자가 꿰뚫듯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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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어, 형수님 진짜 있었네?”김현우 일행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쪽을 바라봤다.그곳에 온몸이 굳은 채 서 있는 온채아가 있었다.그녀를 본 순간, 셋의 얼굴엔 어쩐지 실망이 스치는 기색이 어렴풋이 번졌다.온채아는 숨이 턱 막힐 만큼 긴장한 얼굴로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현우 오빠.”“어이, 우리 채아.”김현우는 그녀가 성유준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오히려 반가운 듯한 눈빛이었다.“드디어 오빠랑 화해했구나?”온채아는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미친 듯이 변명 중이었지만 그 질문에 당황해 고개부터 끄덕이고 말았다.“네. 맞아요.”“채아야, 벌써 왔어?”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주율천이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고 그 옆엔 낯익은 얼굴의 심서정이 서 있었다.주율천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녀를 모임에 데려온 건 처음이었다.하지만 온채아는 이젠 전혀 개의치 않았다.두 사람의 이혼도 이제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바로 맞은편에 살고 해서 그냥 오빠 집들이 겸 들른 거예요. 괜찮죠?”오랜만에 그녀의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나오자, 성유준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그 옆에서 상황을 눈치챈 하지훈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그럼, 당연히 괜찮지.”“맞아, 맞아!”김현우는 예전부터 두 사람이 다시 잘 지내길 바라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훈훈해지는 게 기뻤다.그러다 무심한 듯 물었다.“근데 너희 새언니는 어디 있어? 방에 있어? 얼른 불러서 같이 놀자.”그 말에 온채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렸다.‘새언니 같은 건 애초에 없잖아. 립스틱 자국도 내 건데...’얼떨결에 성유준을 바라봤지만 그는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오히려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이 상황에서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자, 온채아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씩 웃고 대충 둘러댔다.“새언니는 없어요. 오빠가 방금 차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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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온채아의 등줄기가 싸늘하게 굳어버렸고 마치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만약 그녀와 성유준이 정식으로 연애를 하고 있는 사이였다면 들켰다 한들 그저 공개하면 될 일이었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들은 ‘연인’이라는 이름조차 내세울 수 없는, 세상에 알려지면 모두가 경멸할 관계였다.게다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손가락질당할 건 성유준이 아니라 그녀였다.‘십여 년 전, 의붓남매라는 인연으로 그 집안의 비호를 받던 여자가 이제는 그 남자의 품에 안긴 불륜녀로 살고 있다고 그렇게 비웃겠지.’“심서정!”주율천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그의 얼굴에선 서늘한 빛이 번뜩였고 그는 바로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대체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 거야? 두 사람은 남매잖아.”그 말에 온채아의 숨이 턱 막혔다.주율천은 의심하지 않는다.그녀가 과거, 성유준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주율천을 선택했던 그날 이후, 그는 결코 그녀와 성유준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그만큼 그녀의 선택이 확고하다고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옆에서 지켜보던 김현우가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그냥... 심서정 먼저 데려다줘. 지금 분위기 다 망치잖아.”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성유준과 온채아의 관계를 모를 리 없었다.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입 밖에 내며 시비를 거는 건, 이 무리에서 유일하게 ‘외부인’인 심서정뿐이었다.“응.”주율천은 시계를 힐끗 확인하고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자.”그의 말에 심서정은 순간 멈칫했지만 주율천은 단호했다.예전처럼 그녀를 감싸거나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다.팔을 잡아끌며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그의 태도엔 더 이상 연인이 아닌 타인에 대한 냉랭함만이 묻어나 있었다.심서정의 얼굴은 분노와 당혹이 뒤섞여 하얗게 질려갔다.“내가... 내가 틀린 말한 거 있어? 봐봐! 온채아 입술 색이랑 성 대표 입술에 묻은 색이 똑같잖아! 그걸 못 봐?!”하지만 립스틱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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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주율천은 심서정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말해 봐. 어떻게 해야 네가 더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을까? 지하실에 덩치 큰 늑대개 몇 마리 풀어놓는 건 어때?”“안 돼!”심서정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눈동자는 공포로 이글거렸다.“나, 나 말할게. 말할게. 그러니까 제발 날 놓아줘. 제발...”주율천은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였다.“그럼. 물론이지.”“정말이지? 진짜로?”그는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심서정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이미 극한의 공포가 몸속에 뿌리내렸고 이대로라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그때 걔를 데려간 사람은, 경성에서 왔어...”주율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경성? 확실해?”“확실해! 진짜야!”심서정은 살고 싶었다.아무리 비열한 방법이라도 좋았다.이 순간만 넘길 수 있다면 다시 숨 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그러면서도 그녀는 이제서야 진심으로 깨달았다.지금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해온 건지, 어떤 존재에게 집착해 왔는지를.이 남자는 겉으론 말끔하고 다정해 보여도 본성은 지옥보다도 더 잔혹했다.“그래?”주율천은 짧게 대답한 뒤, 뒷좌석 문을 쿵 소리 나게 닫았다.그리고는 운전석 창문을 툭툭 두드리며 낮게 말했다.“담 비서한테 연락해서 늑대개 한 마리 데려오라고 해요. 성질 더러운 놈으로.”그 말이 끝났을 무렵, 주율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아까까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잔혹한 기운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그는 단정하게 정장을 여미며 재킷 단추를 하나하나 잠갔다.지금 그의 모습은 오직 우아하고 완벽히 통제된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그는 고요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에서 들려오는 심서정의 절규는 철저히 외면한 채였다.위층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현관문에 이르자 안에서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주율천은 신발을 벗으며 자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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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온채아는 더는 대꾸할 마음조차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주율천은 언제나 자기 생각만 중요했다.그녀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 없었다.식사를 마친 그녀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갔을 무렵 주율천이 곧장 그녀를 따라 나왔다.온채아는 발걸음을 멈추고 짜증 섞인 숨을 내쉰 뒤 말했다.“당신이 심서정이랑 어떻게 되든, 나랑은 이제 아무 상관도 없어요. 어쨌든 난 절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생각 없으니까.”“아직도 화난 거야?”주율천은 깊게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다가왔다.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변명처럼 말을 잇는다.“위장이혼 건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아니요.”온채아는 그의 말을 끊었다.그를 조용히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당신은 우리가 멀어진 게 그거 하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눈앞의 이 반듯하고 점잖은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문득 허탈해졌다.그는 언제나 그랬다.과거의 모든 일들을 본인의 입맛에 맞게 덮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만을 기준으로 삼는다.그들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었지만 그는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주율천은 그제야 멈칫하며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럼, 넌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어떻게 하길 바라냐고?’만약 며칠 전이었다면 그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가 정다슬을 위해 힘을 써준다면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때, 그가 던진 말은‘이혼’이었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었다.온채아는 그에게서 희미하게 풍기는 술 냄새를 맡고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그리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뭘 어떻게 하라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 상태로만 지내도 충분해요.”주율천의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졌다.“이 상태로? 그게 이혼이랑 뭐가 달라?”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그 안에서 예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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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주율천은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채아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서 그런 건데...”그러자 성유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얘가, 따라가겠다고 했어?”공적으로 은성 그룹과 한빛 그룹은 오랜 파트너 관계였고 사적으로도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며 형제처럼 지낸 사이다.지금은 성유준과 온채아가 다시 가까워진 상황이라 따지고 보면 그에게 처남이나 다름없었다.주율천도 그런 관계를 의식한 듯, 감정을 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잖아. 싸우고도 하루 만에 다시 화해하는 게 보통이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진 않아.”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온채아는 본능적으로 성유준을 올려다봤다.그의 눈동자 속에서 스치듯 지나간 싸늘한 빛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그러자 성유준이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그리고는 웃었다.“부부싸움 후 화해든, 오늘 싸우고 내일 이혼이든 상관없어.”그의 눈매는 가늘게 휘어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태연함과 단호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어쨌든 내 기준은 하나야. 채아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얘를 데려갈 수 없어.”순간, 복도의 공기가 미묘하게 얼어붙었다.이내 안에서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감지하고 하나둘 모여들었다.하지훈이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눈치채고 주율천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애가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다잖아. 그냥 여기서 쉬게 해. 마음이 풀리면, 알아서 돌아가겠지.”“맞아.”김현우도 거들었다.그는 주율천의 오랜 친구였지만 그가 과거 온채아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동안 얼어붙은 마음이 하루아침에 풀리겠냐? 진짜 채아를 데려가고 싶으면 애가 스스로 원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리고 여기 성유준이 있는데 감히 어느 남자가 접근하겠어?”주율천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멀찍이 서 있는 온채아를 바라보며 묵묵히 숨을 삼켰다.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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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온채아는 비록 한의학을 전공했지만 피임 도구 같은 건 의사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다루는 물건이었다.그리고 지금 이들의 관계를 감안하면 성유준이 ‘씻고 오라’고 했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당연히 그것이었다.어차피 먼저 다가간 건 그녀였다.‘연인’이 되자고 제안한 것도 그녀였고 이 상황에서 새삼 내숭을 떨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빨리 관계를 맺어서 그가 어느 날 지겨워질 때가 오면 그녀도 미련 없이 빠져나오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성유준은 갑자기 피식 웃더니, 그녀를 안아 욕실 세면대 위에 앉히고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다리 옆을 짚으며 장난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댄 채, 일부러 놀리는 듯한 말투로 속삭였다.“연인이라며? 연인끼리도 그런 거 써야 돼?”목소리는 무책임할 만큼 가벼웠고 말투는 한없이 건들거렸다.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냈다고 생각했던 온채아였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 그래도 안전조치는 해야 하니까요.”그러자 성유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무슨 안전? 나 병도 없는데?”당황한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성유준 씨, 그건 병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그가 끼어들었다.“‘오빠’라고 불러.”그 말에 온채아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그랬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오빠’라는 호칭에 집착했고 그녀가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사람처럼 굴곤 했다.마치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대하듯 감정을 꾹 눌러 담은 채,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다.“오빠.”하지만 성유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차갑게 불만을 드러냈다.“온채아, 너 예전엔 이 정도로 가식적이진 않았는데. 예전처럼 부르라고. 말도 놓고.”그 말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온채아는 버럭 외쳤다.“오빠! 됐죠? 아니, 됐지?”이번엔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마음에 든 눈치였다.온채아는 그 틈을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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