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31 - Chapter 40

100 Chapters

제31화

말하던 도중 손정원의 시선은 강태무를 스쳤다.사실 그녀는 항상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둘 다 착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니 하늘이 맺어준 운명의 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온채아는 날카롭고 조롱 섞인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느끼고선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선생님이 오해하셨어요. 안 그래도 오는 길에 다시 설명드렸는데 전 이혼할 생각이 없어요.”그 말을 끝내며 시선을 거두던 온채아는 우연히 한 쌍의 칠흑 같은 눈동자와 마주쳤고 남자의 깊은 눈매는 모든 걸 꿰뚫어 볼 듯한 예리함을 담고 있었다.그렇다. 사실 온채아는 성유준 앞에서 이혼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손정원은 화들짝 놀라며 여승운을 원망했다.“이런 큰일은 미리 얘기해줬어야죠. 이혼 축하하려고 케이크까지 주문했는데...”여승운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단지 온채아를 위해 맞장구를 쳤다.“이혼 안 해도 케이크 먹을 수 있지. 채아가 행복하게 지내는 게 축복이잖아. 안 그래?”손정원이 답했다.“그럼요. 그건 당연하죠.”온채아는 와인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한 후 한 모금 마셨다.그녀가 잔을 내려놓자 맞은편에서 남자의 차갑고 묵직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점점 성장하는 것 같네. 화를 꾹 참는 걸 보면.”이 말에 온채아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당시 성유준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성씨 가문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온채아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의 온채아는 정말 주율천이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했기에 성유준의 반대에도 고집부리며 끝내 결혼했다.그렇게 난리를 피우고 결혼했는데 돌아오는 건 남편의 배신뿐이니 성유준이 얼마나 비웃을지 눈에 뻔했다.온라인에 남긴 해명 글은 대중만 속일 수 있었을 뿐 주변인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얼굴 마주 보며 사는 사람끼리 어떻게 심서정의 옆모습과 구분하지 못하겠는가.“덕분에요.”한껏 비꼰 온채아는 그 말을 끝으로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손정원이 수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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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온채아는 차에 탄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좌석에 기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눈도 깜짝이지 않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강태무가 4년 넘게 알고 지낸 온채아는 이해심이 많고 사려가 깊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끈기도 지녔다. 마치 생명력이 강한 달맞이꽃처럼 비바람에도 꽃을 피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뭔가 달라 보였다.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강태무는 온채아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그는 신호등 앞에서 브레이크를 살짝 밟으며 물었다.“괜찮아?”솔직하게 말하면 전혀 괜찮지 않았다.마치 과거의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게 담담한 성유준을 보니 오히려 문제를 삼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마치 그녀가 마음이 좁고 쪼잔해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온채아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익숙지 않아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괜찮아요.”“무슨 일 있으면 꼭 얘기해.”강태무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다만 걱정되는 듯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채아야, 성 대표님이랑 맞서 싸우면 네가 손해야.”그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그럼에도 온채아는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여 마음이 복잡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알아요.”주율천이 바람피운 걸 알았을 때도 감정을 잘 컨트롤할 수 있었는데 이번 일은 마음대로 되기는커녕 와르르 무너졌다.집으로 돌아온 온채아는 정다슬과 이야기를 나눴다.그런데 정다슬은 전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말했다.“이유가 뭔지 알아?”그녀는 테이블 위 서류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모든 걸 꿰뚫어 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넌 성유준을 진심으로 믿었으니까. 무려 9년 동안.”“그런데 주율천은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믿어보려고 했을 뿐이잖아. 그래서 널 실망시켜도 아무렇지 않은 거지. 애초에 믿지 않았으니까 배신감이 덜 한 거야. ”정다슬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선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의미심장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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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주율천과 김현우 몇몇도 다소 의외였다.주율천과 온채아가 결혼한 이후로 성유준은 온채아와 사이가 틀어진 동시에 그들과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지만 카톡 단체방은 나가지 않았다.모임이 있을 때마다 다들 습관처럼 방에 공지를 올리곤 했는데 성유준이 오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그러니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나타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김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형이 올 줄은 몰랐어.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가는 길에 들렀어.”성유준은 김현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허리를 곧게 펴고 안으로 들어갔다.방금까지 카드 치던 사람은 연신 사과했다.“형, 제가 말실수했어요. 죄송해요.”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집안 배경이 탄탄하다는 이유 하나로 기세등등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은 성유준과 주율천이다.특히 성유준은 인정사정없는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존재라 경성에서 감히 그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성유준은 여유로운 자세로 소파에 앉아 한 손을 등받이에 걸쳤다.“농담이잖아. 왜 이렇게 긴장해?”“됐으니까 넌 가서 카드나 계속 쳐.”주율천이 대신해 상황을 수습하며 성유준에게 술잔을 들어 보였다.“다들 형 무서워하는 거 형도 알잖아요.”“그래?”성유준은 술잔을 들며 건성으로 답했고 주율천은 직접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다정한 처남 행세를 했다.“채아랑 요즘 연락해?”성유준은 느긋하고 무심하게 답했다.“우리 사이 틀어졌다고 너희들이 직접 얘기했잖아.”“말만 그런 거지.”주율천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형이 채아를 얼마나 아꼈는지 모르는 사람 있어?”그는 온채아와 성유준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성유준은 이 세상에서 온채아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왜?”성유준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주율천을 바라봤다.“채아랑 이혼하고 심서정이랑 결혼하면 내가 너 가만 안 둘까 봐 걱정돼?”물론 그런 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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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온채아는 벨린에서 저주를 받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몇 년 동안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사람을 요즘은 왜 이렇게 자주 보게 되는지...“채아야, 왔어?”김현우가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들어와.”주율천의 친구 몇 명도 인사를 건넸고 온채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안으로 들어가 한 사람씩 인사했다.“현우 오빠, 명호 오빠.”성유준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대표님.”그 호칭이 나오자 룸안은 몇 초간 정적이 흘렀고 김현우 일행은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하지만 성유준은 화내지 않았고 오히려 깊고 어두운 눈으로 온채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다 오빠라면서, 나만 아니야?”성유준을 마주할 때마다 말이 거칠어지는 온채아는 본능적으로 되물었다.“저랑 그쪽이 무슨 관계인데요?”그 말은 7년 전, 성유준이 사람을 시켜 온채아를 소원희의 집에 던져버렸던 날 그가 직접 했던 말이었다.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 말은 기억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당시 성유준은 건방진 태도로 내려다보며 비웃었다.“진짜 나를 친오빠라고 생각한 거야? 온채아, 너랑 내가 무슨 관계인데?”온채아는 곧장 시선을 피했고 잠든 주율천을 보고선 김현우에게 도움을 청했다.“오빠, 차까지 옮겨줄 수 있어요?”“당연하지.”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김현우는 주율천을 부축해 나가며 빠져나갈 기회를 엿봤다.주율천은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평소 침착하던 사람이 성유준과 말 몇 마디 나누고는 연거푸 술을 마셔댔다.김현우는 그를 뒷좌석에 태우며 온채아에게 물었다.“괜찮겠어? 아니면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온채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고마워요, 오빠.”“고맙긴 뭐가. 조심히 가.”김현우는 웃으며 말 한마디 덧붙였다.“참, 내 생일 때는 꼭 와야 돼.”온채아는 더 이상 주율천 무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때 가서 다시 얘기...”“다시 얘기하자고? 지난 달에 명호 생일엔 갔으면 내 생일은 안 올 거야?”“알겠어요.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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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주율천과 결혼하기 전에 온채아는 많은 사람에게 그가 진짜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물어봤다.하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다들 평소 온채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주율천의 친구들이었고 당연히 그를 배신할 사람은 없었다.하여 온채아는 어쩔 수 없이 성유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창문을 살짝 내리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쏟아져 들어온 동시에 그때 성유준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우리가 무슨 관계라도 되나? 내가 왜 네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는 건데?”온채아는 충격에 바로 전화를 끊었고 그날 이후로 성유준은 그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성유준은 그들이 더 이상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걸, 혹은 애초에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는 걸 수시로 강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은 차가운 바람이 가득 차 외부 온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기사님, 창문 닫아 주세요.”추워서 잠이 깬 주율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평소처럼 명령했다.그 말을 들은 온채아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버튼을 눌러 창문을 끝까지 내렸다.‘추워?’‘당연히 추워야지.’청연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3시 반이었다.온채아는 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한밤중에 울린 벨 소리 때문에 잠이 깬 심서정은 당연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저기요, 지금 몇 시인지 알긴 해요?”“내려와요.”“왜요?”온채아는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힐끗 보며 말했다.“그쪽 애인 데리러 내려오라고요.”“뭐라고요?”2층 침실에 불이 켜진 걸 보고 온채아가 말을 이었다.“주율천이요.”역시나 이름을 대자마자 2분도 안 돼 현관 불이 켜졌고 심서정은 문을 열며 나왔다.잠이 고팠던 온채아는 여전히 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재촉했다.“빨리 좀 데려가 주세요.”심서정은 곧바로 뒷좌석 문을 열었고 술에 잔뜩 취한 주율천이 온채아의 차에 있다는 게 기분이 나쁜 듯 얼굴을 찌푸렸다.“두 사람 도대체 뭐했어요?”온채아는 웃으며 답했다.“진짜 무슨 일 있었다면 그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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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온채아는 평소 레시피를 오경애에게만 주고 직접 요리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주율천이 위가 자주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회식 다음 날 아침마다 꼭 일찍 일어나서 보신탕을 끓였다.그래도 한 그릇 먹으면 그나마 위가 편안해졌다.오경애는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보신탕이요? 오늘은 없습니다. 그건 사모님이 매번 도련님의 맥을 짚고 당시 상황에 맞춰서 처방을 짰던 거라 저는 할 수 없어요...”그저 안 했다는 게 아니라 온채아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주율천은 미간을 문지르며 표정을 찌푸렸다.“최근에 이렇게까지 바빴나?”며칠 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한 상황에서 주율천의 몸 상태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예전에는 주율천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약을 지으며 그를 챙겼고 부엌과 서재를 오가며 정성껏 돌봤다.스스로를 주율천의 주치의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모두가 알고 있다.“음... 네... 그런 것 같네요.”오경애는 찔리는 게 있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그 와중에도 심서정은 주율천의 표정을 살피더니 미소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유천아, 나 한의학 전공인 거 알지? 요즘 하루 종일 시윤이만 돌봐서 그런지 몸이 근질거리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 일자리 좀 구해줄 수 있어?”주율천은 곰탕을 마시며 무심하게 답했다.“그럼 한방 병원에서 일해. 집이랑 가깝잖아.”“그건 싫어.”심서정은 겸손한 척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졸업 후 일도 없었고,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환자를 직접 다루는 건 조금 긴장돼. 우선 한의원에서 뭐라도 배울 수 있을까?”“받아줄 한의원이 있을까? 물론 명의가 직접 가르쳐준다면 제일 좋겠지.”한의학은 기본도 중요한데 운도 따라야 한다. 제자를 받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고 주율천이 사람을 억지로 밀어 넣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경성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명의는 여승운 뿐이다.하지만 주율천은 거절하지 않았다.“알았어.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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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가을과 겨울은 병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시기다. 그래도 온채아가 3일 연속으로 진료한 덕분에 한의원 예약 환자들이 조금은 줄어들었다.“선생님, 고맙습니다. 다음에도 꼭 선생님한테 진료받고 싶네요.”오후 진료가 없었던 온채아는 진료실에서 침을 놓고 있었고 환자는 진료 침대에 누워 감사의 말을 전했다.환자는 50대 초반의 여성으로 심각한 신장 질환을 앓고 있었다.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중년기에 자식을 잃었고 남편이란 인간은 쓰레기만도 못했다.한의원에 올 때는 새벽에 집을 나서서 교외에서 버스 두 번을 갈아타고 지하철을 세 번이나 환승해야 도착할 정도로 길이 험하다.의사로서의 사명감도 있지만 사적인 감정이 일부 섞여 온채아는 더욱 부드럽게 웃으며 진찰했다“감사하긴요. 환자분도 돈 내고 병원 오시는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의사로서 환자분을 치료할 의무가 있을 뿐이에요.”“접수 창구에 계신 분이 다 얘기해주셨어요.”아주머니는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매번 제 약값을 할인해 주시고 침 치료비는 한 번도 받지 않으셨다고요.”온채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침 놓는 손은 여전히 정확하게 움직였다.십여 개의 침이 경혈에 꽂히고 나서야 온채아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아마도 아주머니와 비슷한 나이였을 거예요.”말을 마친 후, 온채아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침을 뺄 시간을 알리며 말했다.“필요한 게 있으면 여기 있는 벨을 눌러주세요. 침은 30분 후에 뺄게요.”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일이 끝난 온채아는 배가 고파 근처 음식점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으며 정다슬에게 전화를 걸었다.정다슬이 바쁘다는 얘기를 듣고는 일찍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과일을 사서 손정원을 보러 갔다. 마침 여승운도 집에 있었다.두 사람은 온채아를 보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진료 다 끝났어? 간호사들이 엄청 바쁘다고 하던데 여긴 왜 왔어. 안 힘들어? 설마 우리를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사모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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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매번 그 끔찍한 냄새 나는 마스크를 하고 날 때마다 손정원은 피부가 눈에 띄게 섬세하고 빛나 보인다고 느꼈다. 게다가 한 번이라도 하고 나면 그 효과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재벌가 사모님들마저 물광 주사를 맞는 게 지겹다며 어떤 제품을 쓰는지 물어볼 정도였다.손정원은 주요 성분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안다 한들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그 시각 검은 마이바흐가 도로 위를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었다.뒷좌석에 앉은 심서정은 긴장한 듯 손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율천아, 이따가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너무 긴장하지 마. 선생님은 친절하신 분이야. 게다가 넌 재능이 뛰어나서 말이 잘 통할 거야.”주율천이 부드럽게 말했다.“몇 년 전에 은퇴하셔서 다시 제자를 받을지 모르겠네. 오늘은 일단 인사하러 간다고 생각해. 상황 봐가면서 안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채아 씨도 받았는데 날 안 받을 이유는 없지. 똑같은 경성대 졸업생인데.”얘기를 하던 심서정은 발끈했다. 사실 그녀는 온채아보다 한 학번 위였고 늘 여승운 밑에서 배우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그해에 제자를 받지 않는다고 발표했다.그때 주석현이 나서서 도와주려고 노력했지만 여승운은 그저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그런데 온채아가 입학하자마자 다시 제자를 받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녀를 마지막으로 하고 은퇴를 선언했다.‘온채아 이 X은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야.’주율천이 말했다.“일단 가서 상황 좀 보자.”“응.”심서정은 주율천에게 의지했다.“뭐가 됐든 선생님도 네 체면은 봐주실 거야. 율천아, 나는 널 믿어.”확신이라도 한 듯 심서정의 말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여승운이 아무리 대단한들 주율천이 돈을 쥐어 주면 고개를 숙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물론 심서정도 실력이 다분했고 대학 시절에는 교수님들의 칭찬을 독차지했다.온채아는 저녁을 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손정원은 그녀를 문 앞까지 배웅하며 어린 시절처럼 신신당부했다.“조심해서 가.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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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질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온채아는 주율천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늘 겉치레식으로 물어보는 게 일상인 주율천은 결과가 어떤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다.그의 관심은 마치 저녁 먹고 산책하다가 이웃을 만났을 때 던지는 ‘식사하셨어요?’에 불과했다.상대가 뭐라고 답하든 그게 중요할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온채아는 가끔 주율천이 3년의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무심함이라고 생각했다.생리 중 일때는 따뜻한 물을 마시라는 한마디, 비를 맞았을 때는 따뜻한 물로 샤워하라는 한마디, 넘어졌을 때는 길 좀 잘 보고 다니라는 한마디, 이게 전부다.주율천은 단 한 번도 직접 물을 챙겨준 적 없었고 우산을 건네주지도 않았으며 병원에 데려다 줄 필요가 있는지 묻지도 않았다.그가 온채아에게 보여주는 모든 친절과 관심은 전부 겉치레에 불과하다.아니나 다를까 주율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밥 먹고 일찍 들어와.”온채아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집에 들어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거면서 말은 잘하네.’주율천과 함께 문 앞에 도착한 심서정은 뭔가 생각난 듯 아차 싶어 말을 꺼냈다.“율천아, 너 먼저 들어가. 휴대폰을 차에 두고 왔나 봐. 금방 챙겨서 올게.”“응.”주율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온채아는 나이가 어리지만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편이라 또래보다 훨씬 성숙했고 이런 잔실수를 하지 않아 신경을 거슬리게 한 적이 없었다.집을 나서던 온채아는 정다슬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지금 가는 길이야.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전화를 끊자마자 누군가가 온채아를 불렀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심서정이 있었다.“채아 씨, 율천이가 오늘 뭐 하러 온 건지 알아요?”“몰라요.”사실 관심도 없다.“저도 곧 여승운 선생님의 제자가 될 거예요.”심서정은 온채아가 언제나 이렇게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채아 씨는 선생님이 경성대에서 가르쳤던 학생 중 하나일 뿐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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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얘기를 하던 여승운은 정원을 힐끗 보더니 분노가 치밀어 올라 수염을 붙잡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당장 네 애인 데리고 나가. 이것들 싹 다 챙겨서.”“들어줄 생각 없으니 다시는 이런 일로 찾아오지 말거라.”온채아에게 유승운은 스승을 넘어선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유승운에게 온채아는 그의 딸이나 마찬가지였다.생각 없이 주율천의 제안을 수락했다가 온채아는 말할 것도 없고 손정원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선생님, 원하시는 조건은 무엇이든 다 맞춰드리겠습니다.”마침 타이밍 좋게 들어온 심서정은 그 말을 듣고 주율천 옆으로 다가가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상냥하게 말했다.“이 선물들은 제 마음이에요.”할 말을 잃은 여승운은 그들이 떠난 후 어떤 약재로 더러워진 눈을 씻을지 고민 중이었다.주율천은 여승운을 바라보며 말했다.“선생님, 서정이 말대로 저희는 충분히 진심을 표했습니다.”예의 차리고 공손하게 말하는 주율천을 보니 여승운은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들끓었다.온채아를 위해서도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조건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거냐?”“물론입니다.”심서정이 빠르게 답했다.대업을 이룬 주씨 가문과 늘 자신을 챙겨주는 주율천이 있으니 심서정은 자신감이 넘쳤고 여승운이 어떤 조건을 제안하든 들어줄 수 있을 거라 자부했다.여승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깃을 정리했다.“그럼 채아한테 무릎 꿇고 사과해.”“채아가 너희들을 용서해 준다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와도 좋다.”“네? 뭐라고요?”심서정은 마음이 조급해지고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동시에 방금 온채아가 문 앞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여승운을 바라봤다.“혹시 온채아 씨가 선생님께 저에 대해 뭐라고 말하던가요? 채아 씨가 하는 말을 믿으시면 안 돼요.”“서정아, 그만해.”주율천이 그녀의 말을 끊더니 침착함을 유지하며 여승운에게 말했다.“죄송해요. 괜히 폐만 끼쳤네요.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마지못해 주율천을 따라나선 심서정은 차에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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