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11 - Chapter 20

100 Chapters

제11화

온채아는 숨이 턱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하지만 반항할 수가 없었다. 이혼하려면 주율천과 등을 돌려선 안 되니까.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리면서 주율천을 쳐다봤다.“내가 어떻게 해명해요? 사진까지 찍혔는데.”주율천도 심서정과 다퉜는지 다소 지쳐 보였다.“다행히 서정의 얼굴이 찍히지 않았어.”온채아는 물에 젖은 스펀지가 숨구멍을 막아버린 것 같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사진 속 여자가 나라고 네티즌들한테 거짓말하라는 거예요?”아주 간단하고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주율천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거라 예상하지 못해서 이렇게 물었을 수도 있다.사실 기껏해야 이 모든 게 오해라고, 사진 속 여성은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해명해달라는 정도일 줄 알았다.주율천이 입술을 씹으면서 이성적으로 말했다.“더 나은 방법이 없어서 그래. 이렇게 해명하면 여론도 빨리 가라앉을 거고 은성 그룹과 모두한테도 좋아.”‘모두한테라...’온채아가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다.‘심서정한테 좋은 거겠지.’주율천은 어떤 상황에서도 심서정을 완벽히 지켜주었다. 하지만 대신 망설임 없이 아내를 여론의 한가운데로 내밀었다.온채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약간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주율천이 이렇게까지 얘기한 이상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억울하다는 거 알아. 대신 보상은 제대로 해줄게. 내일 다슬 씨랑 쇼핑하면서 사고 싶은 거 마음껏 사.”그러고는 수표 한 장을 건넸다.온채아가 꿈쩍도 하지 않자 수표를 그녀의 베개 위에 올려놓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곳에 1초라도 더 머물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명하기 어려울까 봐 그러나?그가 나간 후 온채아는 수표를 집어 들었다.무려 40억 원이었다. 이 정도면 땡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다.주율천에게도 아주 합리적이었다. 40억 원으로 아무런 위험 부담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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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많은 사람들이 한의학을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 온채아는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았다.벽을 가득 채운 책들을 버리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창고에서 박스를 꺼내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정다슬의 집에 놓기로 했다.어차피 주율천의 마음이 온채아에게 없었기에 그녀의 방에서 뭔가가 없어져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한창 정리하던 중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영감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바로 온채아의 스승이었다.4년 전 온채아는 전국 최고의 한방 병원인 경성 한방 병원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20대 초반에 그런 병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 봐도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과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또 앞으로 어느 정도로 성장할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소원희가 힘도 들이지 않고 그녀의 앞길을 막은 바람에 아무도 그녀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그때 스승이 말했었다. 괜찮으니 낙심하지 말라고. 그러고는 모두에게 비밀로 한 채 온채아를 선배 강태무의 한의원에 보냈다.전화를 받자마자 여승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채아야, 요즘 바빠?”“안 바빠요.”온채아가 가볍게 웃었다.“선생님, 사모님이랑 휴가라도 가시게요? 저더러 집의 꽃 좀 케어해달라고 전화하신 거 맞죠?”“얘는. 내가 일이 없으면 연락 안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여승운이 어색하게 헛기침했다.“전에 한의원에 침술 배우러 왔던 그 사람들 기억하지? 그 사람들의 한의학 연구소가 개업한다는데 너랑 태무가 나 대신 개업식에 좀 다녀올래?”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기억나요. 외국 사람들을 그러죠?”“벨린 사람들이야.”여승운이 활짝 웃었다.“마침 네가 벨린어를 배운 게 기억나더라고. 네가 딱이야, 아주.”온채아가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말했다.“언제 출발이에요?”“일주일 뒤.”여승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떠올랐다.“31일이야...”31일은 주율천의 생일이었다.지난 몇 년간 주율천의 생일마다 온채아는 일을 잡지 않았다. 정성스레 집을 꾸미고 저녁 식사와 선물을 준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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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정다슬은 온채아의 생각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왜? 지금 이혼하면 은성 그룹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텐데.”상장회사의 대표가 이혼하면 외부에서는 지분 변동이나 여러 가능성을 추측하기 마련이기에 주가가 무조건 흔들릴 것이다.온채아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때 가보면 알 거야.”“알았어. 너한테 다 생각이 있으면 됐어. 주율천이랑 등 돌리기 힘들면 내가 대신 나설게.”정다슬의 말에 온채아는 덤덤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걱정하지 마. 주율천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진 않을 거야.”만약 스캔들이 터지지 않았다면 온채아는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그녀였다.주율천은 심서정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혼에 동의할 것이고 등을 돌릴 정도까지 심하게 굴진 않을 것이다.의뢰인을 만나러 가야 했던 정다슬은 간단히 몇 마디 당부한 뒤 차를 몰고 가려 했다.그러다 가기 전 뭔가 생각나 조수석에서 선물을 꺼내 온채아에게 건넸다.“메리 크리스마스! 나 먼저 갈게.”온채아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응. 메리 크리스마스. 운전 조심해.”정다슬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선물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저녁을 차리고 있던 오경애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작은 사모님, 식사하세요.”“네.”온채아가 대답하자마자 주시윤을 데리고 내려오는 심서정과 마주쳤다.모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 정성껏 꾸몄는데 태도는 여전히 오만했다. 그녀를 볼 때 마치 패배자를 보는 듯했다.주시윤이 심서정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 내려오더니 온채아의 앞에서 턱을 치켜들었다.“메롱. 삼촌이 나랑 엄마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했어. 너 같은 고아는 집에 혼자 있어야겠네. 쯧쯧, 불쌍하기도 해라.”그러고는 기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정원 쪽을 쳐다보더니 심서정을 끌며 밖으로 뛰쳐나갔다.“엄마, 빨리 가요. 삼촌이 데리러 왔어요.”“채아 씨, 미안해요.”심서정이 입으로는 사과했지만 누가 봐도 주인 행세를 했다.“시윤이가 율천이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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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온채아는 그들 세 식구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정원에서 산타클로스를 만들었다. 손이 새빨갛게 얼어붙은 뒤에야 방으로 돌아와 샤워했다.눈이 내리는 걸 보고 오경애가 난방을 세게 틀었는지 집 안이 후끈했다.머리를 말리기도 귀찮았던 온채아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책을 읽다가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다.다음 날 온채아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아래층인지 밖인지 귀청을 째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주시윤이 또 집안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잠이 깬 그녀는 세수하고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계단 입구에 다다른 그때 주시윤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허리에 손을 얹고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나쁜 여자, 죽어버려!”온채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뭐라 말하기도 전에 주시윤이 갑자기 힘을 모아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재빨리 피했지만 뭔가가 허리를 세게 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중심을 잃고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듯이 아팠고 돌계단에 이마를 부딪친 바람에 손바닥만 한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온채아는 초라한 모습으로 바닥에 엎드린 채 통증을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심서정이 계단 위에 서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낮게 말했다.“나 안 나갈 거니까 꿈 깨요.”그녀를 뒤에서 밀어버린 건 다름 아닌 심서정이었다.소란을 듣고 달려온 오경애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넋이 나갔다. 온채아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며 말했다.“구급차 불러요.”“네, 네.”오경애가 허둥지둥 119에 전화했고 정확한 위치를 말할 때쯤 온채아는 의식을 잃었다.정말 온몸의 뼈가 다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온채아가 다시 의식을 찾았을 때 차가운 수액이 몸으로 들어오는 감각만 느껴졌고 병실엔 아무도 없었다.그런데 그때 베란다에서 격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주율천의 목소리가 무겁기 그지없었고 처음 보는 분노였다.“너 미쳤어? 어젯밤에 분명히 말했잖아. 채아랑 아무 상관 없다고. 우린 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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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수액 병이 아주 정확히 심서정의 이마로 날아갔다.피가 흘러나오는 속도가 온채아가 오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보다 훨씬 빨랐다.주율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치더니 머리보다 몸이 더 빨리 반응했다. 버럭 화를 내면서 온채아를 밀치고는 차갑고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뭐 하는 거야? 온채아, 지금까지 보여준 얌전하고 착한 모습이 다 연기였어?”온채아는 바닥에 넘어진 채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그래. 다 연기였어. 이젠 더 이상 연기하고 싶지 않아.’주율천은 온채아가 이 정도 힘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질 정도로 심하게 다쳤을 줄은 생각지 못해 순간 멍해졌다.심서정이 이마를 부여잡고 울먹였다.“율천아, 너무 아파. 피가 엄청 나...”더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주율천은 심서정을 안아 들고 성큼성큼 병실을 나갔다.나가기 전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단 한 번의 눈길에 주율천은 누군가 심장을 쿡 찌른 것처럼 아팠다.한때 그와 결혼하겠다는 소원을 빌던 소녀의 맑은 두 눈에 이젠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고 낯선 사람을 보는 것보다 더 차가웠다....수액 병을 던지면서 바늘도 함께 뽑혀 나갔다. 핏줄기가 온채아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등을 타고 끊임없이 흘렀다.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난간을 잡고 통증을 참으면서 겨우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이 흔들렸고 난간을 하도 세게 잡아 손가락 마디가 다 하얘졌지만 여전히 놓을 생각이 없었다.마침 병실에 도착한 정다슬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재빨리 다가가 온채아의 손등을 누르고 부축했다.“어떻게 된 거야? 피가 이렇게 많이 났는데 왜 간호사를 안 불러? 무슨 생각을 한 거야?”‘무슨 생각?’온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가치 없는 생각을 했지, 뭐.’지난 3년간 그녀의 진심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정다슬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대체 무슨 일이야? 경애 아주머니가 전화 왔는데 누가 널 계단에서 밀었다고 하더라고.”온채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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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다른 여자를 걱정하느라,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느라 아주 바빴다.이틀 전 정다슬이 디저트와 마실 것을 가져다주러 왔을 때 병실 문을 열자마자 주율천을 보고는 한바탕 욕했었다.이유는 간단했다. 주율천이 VIP 병실에서 심서정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아침 온채아는 순조롭게 퇴원 절차를 마쳤다.그녀의 건강이 걱정됐던 강태무가 문자를 보냈다.[병원에 데리러 갈까?][괜찮아요. 다슬이가 공항까지 데려다주기로 했어요.]온채아는 문자를 보내며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그때 비상 계단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주율천이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내가 아직도 걔를 모르는 걸까? 서정이한테 손을 댈 줄은 정말 몰랐어.”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주율천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설명했다.“채아가 일방적으로 손해 보게 할 생각은 없었어. 이혼할 생각도 없고.”그 말에 상대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대박. 웬일이래? 온채아가 네 첫사랑을 머리 깨지게 때렸는데도 이혼할 생각이 없다니.”상대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낄낄거리며 말했다.“너 설마 온채아한테 흔들렸어?”“헛소리 좀 하지 마.”주율천은 무슨 말을 할지 고뇌하는 듯했다.“지금 이혼하면 모든 화살이 서정이한테 쏠릴 거야. 게다가 전에 스캔들까지 터져서 이혼하면 우리 집에서 절대 서정이를 가만 안 둬.”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우회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듯한 그의 말에 온채아가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그녀는 줄곧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주율천이 말했다.“나 서정이랑 약속했어. 평생 지켜주겠다고.”“고작 어릴 때 철없이 한 그 약속 때문에?”상대가 눈을 흘겼다.“두 사람 어릴 때 딱 한 번 만났잖아. 사람을 잘못 봤을지도 모르고. 됐어. 그만 얘기하자. 저녁에 늘 보던 곳에서 한잔할래?”주율천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니. 오늘 밤은 너희들 안 만날 거야.”“심서정이랑 생일 보내려고?”“채아랑.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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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온채아는 탑승구에 도착하자마자 강태무를 만났다. 깔끔한 캐주얼 룩을 입고 있었고 늘씬한 키와 준수한 외모가 돋보였다.그도 온채아를 찾고 있었는지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오랜 세월을 알았음에도 맨얼굴의 온채아를 본 순간 그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바로 몇 걸음 다가가 그녀의 백팩을 받아 들었다.손바닥만 한 온채아의 얼굴을 훑어보던 강태무는 또다시 직업병이 도졌다.“요 이틀 병원에서 제대로 못 잤지?”“조금요.”이틀 전 병실에 한 아주머니가 새로 입원했는데 사람은 정말 좋았지만 코 고는 소리가 엄청났다.비행기에 오르고서야 온채아는 좌석이 퍼스트 클래스로 바뀐 걸 알아챘다. 그녀의 의아한 눈빛을 알아챈 강태무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푹 자라고 바꿨어. 이번 출장이 무급이잖아. 최소한 편히 쉬게는 해줘야지.”그러고는 마음의 안정에 효과가 있는 향낭을 건넸다. 온채아가 향낭을 받고 웃으며 물었다.“선생님이 비용 청구해주신대요?”“걱정하지 마. 이 정도 돈은 나한테도 있어.”“고마워요, 오빠.”온채아는 사양하지 않았다.강태무는 사실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명한 제약 그룹의 아들이었고 한의원을 운영하는 건 순전히 취미였다.그런데 온채아와 함께 개발한 약이 한의원의 명성을 크게 높여 환자들이 끊이지 않을 줄은 몰랐다.경성과 벨린의 시차가 6시간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벨린은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낮이었다.연구소에서 전용 차량을 보내 그들을 호텔로 안내했다.강태무는 온채아를 방 문 앞까지 데려다주다가 약지에 아무것도 없는 걸 발견했다.“평소 결혼반지를 엄청 아끼지 않았어? 이번엔 왜 안 꼈어?”“잃어버렸어요.”온채아가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나 이혼하려고요.”강태무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기뻐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선생님 말씀이 맞았네. 주율천 그놈 너랑 안 어울려.”온채아가 그의 눈꼬리와 미간에 어린 웃음을 보며 말했다.“지금 내 불행을 고소해하고 있는 거 맞죠?”“어떻게 내 마음을 몰라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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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강태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능숙했다.이 식사 자리에서 온채아는 그저 맛있게 밥만 먹으면 되었다.그는 이따금 온채아가 좋아할 만한 반찬을 보면 집어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두부조림 같은 것.주율천이 두부로 만든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기에 주씨 가문의 식탁엔 두부 요리가 올라오는 법이 없었다.하지만 온채아는 두부를 참 좋아했다.그녀는 강태무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강태무는 그녀의 고마움이 담긴 눈빛을 알아채고는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따뜻할 때 먹어. 선생님이 나한테 너 꼭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그때 맞은편의 VIP 룸 문이 열렸다.가장 먼저 나온 이는 쉰에 가까운 외국인 남성이었다. 정장 차림의 부하 직원 몇 명을 이끌며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한눈에 봐도 상장 기업의 고위 임원 같았다.그는 몸을 살짝 돌려 길을 비켜주면서 환하게 웃으며 유창한 벨린어를 구사했다.“대표님, 그럼 협력 건 이렇게 하도록 하죠. 내일 제가 직접 계약서를 들고 호텔로 찾아가겠습니다.”“네.”젊은 남자가 무심하게 대답하며 문을 나섰다. 수제 맞춤 검정 셔츠와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고 겉옷은 팔꿈치에 느슨하게 걸치고 있었다. 정교한 이목구비는 타고난 권위자의 아우라를 뿜어냈다.옆에 있던 비서가 적절한 타이밍에 말을 꺼냈다.“대표님, 안양 바이오의 대표가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말에 외국인 남자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제가 모셔다드릴게요.”그때 마침 웨이터가 요리를 올리려고 문을 열었다. 젊은 남자는 지나가다 무심코 룸 안을 들여다봤다.한 여자가 핑크 니트와 청바지 차림으로 앉아 있었는데 완벽한 허리와 힙 라인이 돋보였다. 옆에 있던 남자가 머리를 살짝 쳤는데도 전혀 거부감 없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참으로 순한 모습이었다.그의 발걸음이 멈춘 걸 본 비서가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대표님, 아가씨가 왜 벨린에 왔죠?”그러고는 강태무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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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몇 년 사이 남자는 많이 변한 모습이었다.이목구비가 날카로웠고 키도 훤칠했다. 수제 맞춤 검은 정장에 손목엔 나무 소재의 팔찌를 차고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분위기는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이건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의 압도적인 기운이었다.그는 더 이상 그녀가 오빠라 부르며 쫓아다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많은 이들이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주율천의 예의 바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남들이 아첨하든 환심을 사려 시도하든 그저 싸늘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 말 한마디조차 아꼈다. 깊고 검은 눈동자로 온채아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채아야.”그때 강태무가 다가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었다.“가자. 테이프 커팅식 준비해야지.”“네.”온채아는 얼른 대답하고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그 시선을 무시했다.‘그때 미안한 짓을 한 게 나도 아닌데 내가 왜 긴장을 해?’테이프 커팅식은 연구소 정문 앞에서 진행되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스태프들이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초대받은 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온채아와 강태무는 여승운을 대표해서 왔기에 중앙에 가까운 자리에 배치되었다.찬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온채아의 마음도 점차 가라앉았다. 그녀는 스태프가 건넨 가위를 받아 들고 진행자의 말에 집중했다.가위질 한 번이면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제가 직접 공항까지 마중 나갔을 텐데 접대가 소홀했습니다.”연구소장이 성유준을 가운데 자리로 안내했다.“이쪽으로 오시죠.”성유준은 성씨 가문을 이끌기 시작한 후 과감히 의료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젠 고급 개인 병원뿐 아니라 세계 최정상급 연구소와 실험실을 소유하고 있었다. 누군들 이런 거물에게 잘 보이고 싶지 않겠는가?성유준에게 초대장을 보냈을 때 연구소장은 그가 정말로 올 거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온채아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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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밥 먹으러 가자.”성유준의 덤덤한 한마디에 온채아는 화가 치밀었다.“차 세워요.”성일은 차를 세우지 않고 백미러로 성유준의 눈치를 살폈다.성유준이 허락하지 않자 온채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냅다 문을 열어젖히면서 날카롭게 말했다.“제가 대표님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거 알잖아요. 3년 전에 차에서 뛰어내렸고 지금도 뛰어내릴 수 있어요.”성일은 거의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3년 전 그 일은 지금도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성유준은 이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몸을 숙여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누구 말을 듣겠다는 거지? 주율천?”“다른 사람 말은 다 들어도 대표님 말은 절대 안 들을 겁니다.”온채아는 잔뜩 흥분한 어린 표범처럼 그의 손을 뿌리치려 발버둥 쳤다. 그러자 성유준이 차갑게 웃었다.“예전에 누가 나한테 매달리면서 절대 버리지 말라고, 내 말이라면 뭐든 듣겠다고 했더라?”“대표님도 방금 말했잖아요. 예전이라고.”온채아는 처음으로 이렇게 이성을 잃었다. 핏발이 선 두 눈으로 성유준을 무섭게 노려봤다.“대표님, 저 이제 스물네 살이에요. 일곱 살이 아니라. 대표님이 손가락만 까딱하면 제가 아무 방비 없이 따라갈 거라 생각했어요?”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힘이 풀리자 재빨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택시도 부르지 않고 인도로 걸어갔다. 찬바람이 그녀의 온몸을 덮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머릿속에서 요동치는 지난 기억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온채아가 성씨 가문에서 보낸 세월 중 가장 자유로웠던 때는 성유준의 옆에 있던 9년이었다.그녀에겐 가족이 없었고 성유준이 그녀의 가족이 되어주었다.성유준은 온채아를 세심하게 보살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를 어른으로 키워냈다.친구들이 종종 그에게 물었었다. 어디서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 동생을 주웠냐고.그때마다 성유준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줍지 마. 집에서는 엄청 장난꾸러기야.”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온채아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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