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551 - Chapter 560

642 Chapters

제551화

성유준이라고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다만 이제 막 관계를 확정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을 뿐이다.제대로 연애를 즐긴 것도 고작 며칠뿐인데 벌써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온채아 입장에서는 연애의 재미가 너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성유준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기회를 봐서 슬쩍 물어볼게요.” 온채아가 결혼을 원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원치 않는다면 2년 정도 오붓하게 연애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이미숙도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꼭 신경 써야 해.”워낙 잘난 아이라 밖에서 노리는 승냥이 떼가 한둘이 아니니 말이다.성유준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그는 2층으로 올라가 온채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도 기척이 없었다.‘벌써 자나?'문틈 사이로 분명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보아하니 심술이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성유준은 입가에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문 너머로 말했다. “문 안 열어주면 그냥 들어간다?”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성유준이 문고리를 잡고 돌려보았지만 안에서 잠겨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듯 미간을 짚었다.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렸다.한편,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보던 온채아의 곁눈질은 온통 방문 쪽을 향해 있었다.문밖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책에 집중하려 애썼다.하지만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부모로서 당연히 임신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그녀는 성유준에게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오히려 성유준 같은 성격이라면 딸바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 그가 조금이라도 남성 우월 사상에 얽매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온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화내지 마, 아가. 아빠가 정말 딸 싫어하면 엄마는 너 하나면 돼.”정다슬이 남성 우월주의 속에서 겪었던 그 서러움을
Read more

제552화

성유준은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이 아이를 친자식처럼 아끼겠노라고. 제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로 소홀히 대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었다.온채아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준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끈질기게 붙들었다. 성유준은 목울대를 크게 한 번 들썩이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유도 심문을 시작했다. “이런 옷은 언제 몰래 산 거야? 나 깜짝 놀래켜 주려고?”얼굴이 홍당무가 된 온채아가 힘껏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성유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뜨거운 시선에 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던 온채아는 그를 흘기며 쏘아붙였다.“내가 산 거 아니거든! 그리고 오빠를 기쁘게 해주려고 입은 것도 아니야!”원래는 그럴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정말이지 벗는 걸 깜박 잊었을 뿐이었다!“정말?”성유준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받치더니 다짜고짜 깊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살짝 떨어져 숨결이 엉키는 거리에서 속삭였다.“나 기쁘게 해주려는 게 아니면 대체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나 고작 며칠 외국 나가 있는 사이에 딴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성유준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누가 딴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래?”온채아가 눈을 부라리며 반박하려던 찰나 성유준은 핵심을 낚아챘다.그는 목적을 달성한 여우처럼 즐거운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면 여전히 나만 사랑한다는 뜻이네. 맞지?”은은한 황색 불빛 아래, 성유준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깊게 도드라졌다. 그렇게 웃는 모습에는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사람을 홀리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집이라 편하게 입은 잠옷 깃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탄탄하고 단단한 근육 라인이 언뜻언뜻 비쳤다. 공기 중에는 강렬한 호르몬 향이 짙게 떠다니고 있었다.그의 말에 온채아의 심장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런 감정 문제에서만큼은 고집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맑고 촉촉한 눈으로 그의
Read more

제553화

성유준의 시선이 붉게 달아오른 온채아의 귓가에 머물렀다. 그는 다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온채아는 대꾸할 힘도 없어 외면해 버렸다. 당장이라도 이불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매일 아침 유경애가 올라와 방안을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하는데 어젯밤의 그 난잡하고 황당한 흔적들을 유경애가 보게 된다면 앞으로 평생 얼굴을 들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온채아가 서둘러 일어나 치우려던 찰나, 성유준이 먼저 여유롭게 침대에서 내려와 홈웨어를 주워 입었다. 그러고는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수치심에 죽고 싶게 만든 스타킹, 애초에 천 조각도 얼마 없었는데 갈가리 찢겨 누더기가 된 그 속옷까지... 지금 그 모든 것이 성유준의 손가락 사이에 들려 있었다.온채아는 그 손이 어제 제 몸 위를 떠돌던 감각을 떠올렸다. 또한, 서로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갈망했던 가장 격정적인 그 순간 성유준이 그녀를 부서질 듯 껴안고 코끝을 맞댄 채 애틋하게 사랑을 고백하던 모습도 떠올랐다.“사랑해, 온채아. 영원히 사랑할 거고 영원히 너에게만 반응할 거야.”성유준은 곁눈질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는 온채아를 발견하고 짓궂게 놀렸다. “아침부터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그냥...”성유준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온채아에게 준 안정감이 워낙 컸기에 그녀는 그 앞에서 내숭을 떨거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나도 사랑해.”그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얇은 담요를 몸에 두르고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도망치듯 달려갔다.옷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성유준은 이미 침구 세트까지 말끔하게 갈아치운 상태였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밤새 고여있던 은밀한 공기를 흩뜨려 놓았다.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세면대 앞에 섰다. 온채아가 클렌징폼을 짜서 세수를 하는 동안 성유준은 느긋하게 칫솔에 치약을 짜
Read more

제554화

현재의 관계를 생각하면 온채아의 신분이나 내력에 대해 성유준은 알 권리가 있었다. 비록 온채아도 친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정확히 모르는 상태일지라도 말이다.그녀의 짤막한 고백에 성유준은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던졌다.“그러니까 만약 네 출생 비밀이 정말로 내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나랑 그대로 끝낼 생각이었다는 거야?”“...” 성유준의 날카로운 시선에 온채아는 정곡이 찔렸는지 슬쩍 눈길을 피했다. 그러고는 엉뚱한 화제를 꺼내며 말을 돌렸다.“저번에 내가 부탁했던 서강진 씨 기억나? 서강진 씨가 내 친부모님에 대해 알아낸 것 같아.”온채아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녀의 친부모는 결코 마약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성유준은 조심스럽게 변명하는 온채아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차마 웃지 못했다.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온채아는 그를 잘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말투가 평온할수록 속은 더 뒤틀려 있다는 것을.그녀는 입술을 축이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시 성유준을 바라보았다.“지난번에 해성에 갔을 때 고모가 그러셨어. 아빠랑 엄마가 작전 수행 중에 날 발견했다고. 마약 거래소였대.”“내 친부모가 만약 마약범이라면 내가 오빠를 망가뜨릴지도 몰라. 오빠가 수년 동안 공들여 쌓아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어.”성유준이 목숨을 걸고 바꿔온 모든 것을 남의 손에 넘겨줘야 할지도 모른다.온채아는 자신이 성유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견딜 수 있어도 짐이 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성유준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기에 제 손으로 그를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끌어 내릴 순 없었다.성유준은 온채아의 투명한 눈망울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무언가에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큰 충격을 느꼈다.그랬다.해성에서 돌아왔을 때 온채아가 왜 그렇게 무력하고 막막해 보였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품에 안겨 자신이 누구냐고 묻
Read more

제555화

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내가 같이 갈게.”성유준이 말하며 서강진에 대해 덧붙였다.“앞으로 며칠 동안 그 사람을 또 만날 일이 생기면 나한테 꼭 말하고 같이 가.”성유준은 왠지 모르게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불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온채아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기에 자신의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었다.온채아는 흔쾌히 대답했다. “알았어.”아침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지만 마당에서 각자의 길로 갈라졌다. 성유준은 한빛 그룹으로, 온채아는 진료를 보러 한의원으로 향했다.모처럼 늦잠을 잔 탓에 진료 시작 시간 직전에 한의원에 도착했다.온채아가 서둘러 진료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단골 환자 한 명이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온 선생님, 천천히 하세요. 저희는 조금 늦어도 괜찮아요.”예전의 온채아라면 늘 30분 일찍, 혹은 그보다 더 일찍 진료를 시작하곤 했다. 이제 그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환자들은 그녀의 노고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온채아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하지만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진료실로 성큼성큼 들어가 능숙하게 코트를 벗고 하얀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곧바로 환자를 호출하기 시작했다.임지연의 할머니도 오늘 진료를 받으러 오셨다. 임지연이 동행하지는 않았지만 온채아는 한눈에 할머니를 알아봤다.정성껏 맥을 짚고 문진을 마친 뒤 처방전을 바꾼 온채아는 할머니의 얼굴에 서린 수심을 읽고는 생긋 웃으며 안심시켜 드렸다. “할머니, 치료에 잘 협조해 주시면 몸은 점점 더 좋아질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한의원에 있는 동안 온채아는 이런 환자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몸이 아프면 마음부터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방전뿐만 아니라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에도 익숙했다. 때로는 의사의 말 한마디가 가족의 천 마디 말보다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임지
Read more

제556화

말을 마친 강태무는 여승운 댁에서 나눈 수확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가 환자가 없었기에 온채아도 한의원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차를 몰아 그린 빌라로 향했다.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대문을 나서는 하도연과 마주쳤다. 온채아가 강미진을 치료하러 오는 날은 대개 정해져 있었기에 하도연도 온채아를 보고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하도연의 표정은 눈에 띄게 변했다. 평소의 냉담함 대신 막냇동생을 보는 듯한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채아 씨 왔어요?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요?”“네!”심서정 일행과 마주칠까 걱정했던 온채아는 하도연을 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늘부터 외래 환자를 좀 줄이기로 했거든요. 앞으로는 계속 일찍 올 것 같아요.”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하도연은 집안일로 쌓여있던 울화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럼 앞으로 점심은 우리 집에서 같이 먹어요.”“아니에요.”심서정과 마주칠 확률을 조금이라도 낮추고 싶었던 온채아는 완곡히 거절했다. “점심 먹고 오는 게 편해요.”“알겠어요.”하도연은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기에 억지로 권하지 않았다. 심서정의 일은 늦어도 며칠 안에 하씨 가문에서 깔끔하게 매듭지을 예정이다. 그때 가서 불러도 늦지 않았다.하도연은 옆에서 대기 중인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켰다. “난 해성에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다녀와야 해요.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희민이나 지훈이한테 연락하고요.”왠지 모르게 온채아가 자꾸 눈에 밟혔다. 성유준이 곁에서 지켜주고 있으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말이다.“네.”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의식적으로 덧붙였다. “언니, 기사님께 천천히 운전해달라고 하세요. 안전이 제일이니까요.”하도연의 정확한 직급은 몰랐지만 그 나이에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경만큼이나 뒤에서 그녀를 노리는 눈길도 많을
Read more

제557화

하도연은 자신이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지 늘 명확히 알고 있었다. 비슷한 집안 배경, 명확한 사리분별, 그리고 그녀에 대한 존중이었다.그런데 구정훈은 그중 두 번째 조건에서 문제가 생긴 듯했다.그와 황아림의 관계에 대해 하도연은 사실 자세히 알지 못했고 굳이 에너지를 써서 파헤치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 일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피곤했기에 사생활에서만큼은 명료하고 단순하게 처신하고 싶었다. 그녀가 경솔하게 추문을 일으킬 사람이 아니듯 배우자도 깨끗하게 살기를 바랐다. 각자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이 결혼 생활을 품위 있게 유지하는 것, 사생활이 어떻든 서로 과도하게 간섭하지 말자는 뜻을 혼전에도 완곡히 내비친 바 있었다.하지만 구정훈과 황아림의 관계는 그녀가 보기에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하도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인생을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큰 그림으로 여기며 조금씩 그려왔다. 만약 결함의 조짐이 보인다면 즉시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설령 그것이 결혼일지라도.그래서 두 사람이 아직 이혼 도장을 찍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도연은 이혼 소식을 이미 밖으로 흘려두었다. 구정훈이 무슨 사고를 치든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도록. 무엇보다 하씨 가문과 상관없는 일이 되도록 말이다.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는 하도연에게 큰 기대를 거셨다.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기에 그녀는 오로지 하씨 가문의 번영에 기여할 뿐 가문에 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서진이 백미러로 그녀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구 대표님과 이혼하는 거 정말 신중하게 결정하신 거예요? 혹시라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구 대표님과 진지하게 대화를 먼저...”서진의 부모님은 하씨 가문 본가에서 일하셨고 서진 역시 하도연과 함께 자라 대학 졸업 후 줄곧 그녀의 곁을 지켰다. 하도연이 언제나 가문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면서도 진심으로 그녀가 자신만을 위한 선택도 해보길 바랐다. 가끔은 하도연이
Read more

제558화

그의 말에 수화기 너머 하도연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하긴, 황아림과 관련된 일이라면 일단 상대방부터 의심하고 보는 것, 그것이 구정훈의 한결같은 방식이었다. 비서에 대한 그의 신뢰는 아내인 하도연에 대한 신뢰를 진작에 넘어섰다.하도연은 더 이상 말다툼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아 그저 결과만을 물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올 수 있어?”하도연은 이 이혼 서류를 받아내는 일이 유독 절박해 보였다.구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다음 정략결혼 상대가 벌써 밖에서 기다리고 있나 보군.”평소 구정훈의 성격답지 않은 가시 돋친 말이었다. 내뱉는 순간 그 자신도 놀랄 만큼 비뚤어진 말이었다.아마 하도연이 언제나 지나치게 평온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할 때도, 결혼 생활 중에도, 심지어 황아림이 대놓고 그와 각별한 사이임을 내비칠 때조차 그녀는 평온했다. 이제 이혼마저 이렇게 담담하니 구정훈은 그 평정심을 견디지 못하고 기어이 그녀를 찔러보고 싶어진 것이다.구정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큰 다툼 한번 없이 무난했던 이 결혼을 하도연이 왜 이토록 단호하게 끝내려 하는지.하지만 하도연은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난 혼인 기간에 이성과 애매모호한 관계를 즐기는 취미 같은 건 없어서 말이야.”그 말에 구정훈은 묘하게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누군가를 겨냥한 듯한 뉘앙스에 기분이 묘해졌다. 무언가 대꾸하려던 찰나, 황아림이 다가와 회의를 독촉했다.마음을 가다듬고 하도연에게 제대로 설명하려 했을 땐 이미 전화가 끊긴 뒤였다.회의실로 다시 들어가기 전, 구정훈은 반걸음 뒤에 서 있던 황아림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진 씨랑 약속을 왜 오늘 세 시로 잡은 거지? 내가 분명히 거절하라고 했을 텐데.”구정훈은 이 결혼이 끝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잠시 시간을 두면 하도연의 마음도 가라앉을 거라 믿었다.황아림은 흠칫 놀라더니 당황한 듯 휴대전화를 뒤적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서진 씨한테 분명히
Read more

제559화

하도연의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곧바로 캐물었다. “어디서 난 거예요?”“아래층요!”아들의 앞날이 걸린 문제라 집사는 평정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저는 줄곧 3층 셋째 아가씨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셋째 아가씨가 아래층 연회장에서 올라왔을 때 손에는 이미 제가 바꿔치기해야 할 머리카락이 들려 있었어요.”하도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기억 확실해요?”“절대 틀리지 않습니다!”확실한 답변을 듣자 하도연은 막내를 찾는 길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음을 느꼈다.그녀는 어렴풋이 기억했다. 그날 구정훈이 머리카락을 가지러 온 뒤 하예원이 핑계를 대고 먼저 방으로 돌아갔던 것을. 그리고 그 틈을 타 자신은 샘플을 장 집사에게 전달했었다.장 집사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채팅 기록을 찾아냈다. “보세요. 셋째 아가씨가 제게 샘플을 주기 전에 보낸 메시지입니다. 메시지를 받고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가씨가 계단 쪽에서 급하게 올라왔어요.”[방에서 기다리지 말고 바로 나와요.]채팅 기록을 훑어본 하도연은 문득 더 정확한 방향을 잡았다. 그녀는 녹음기를 켜서 내밀었다. “방금 한 말과 사건의 전말을 전부 상세히 다시 말해요.”그 후, 하도연은 서진에게 이곳에서 녹음기를 챙기라고 지시한 뒤 위층 서재로 향했다.하도연의 서재는 단독 공간으로 그녀를 제외하면 서진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서재에 들어간 그녀는 다시 어르신의 생신 잔칫날 밤의 CCTV 영상을 찾아 하예원이 자리를 뜨는 부분으로 타임라인을 당겼다.화면 오른쪽 아래의 시간: 19:39.하지만 하예원이 장 집사에게 메시지를 보낸 시간은 밤 8시 정각이었다.연회장에서 3층까지 올라가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리 없었다. 20여 분 동안 하예원은 대체 어디에 갔던 걸까?안타깝게도 본가에는 연회장 근처 접대실에만 CCTV가 있을 뿐 다른 생활 구역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CCTV를 통해 더 깊이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했
Read more

제560화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어요.” 하희민은 온채아의 옆자리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집사가 새로 챙겨준 수저를 들었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우리 어머니를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방법이 뭔지 알아요?”하희민이 온채아 곁에 앉아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본 강미진의 마음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설마 채아 씨한테 마음이 있는 건가?'지금껏 그 어떤 이성 곁에도 가까이 가지 않던 하희민이었다. 강미진은 한때 그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닌지 의심한 적도 있었다.정작 온채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심코 되물었다. “뭔데요?”하희민은 강미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채아 씨를 한 번 보고 나면 이틀 동안 기분이 좋으시고 같이 밥 한 끼 먹고 나면 사흘 내내 행복해하세요.”강미진은 쑥스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턱을 치켜세웠다. “그럼, 당연하지. 채아 씨는 너나 사고뭉치처럼 나를 화나게 하지는 않거든.”“사고뭉치요?”“하지훈.”하희민은 단호하게 온채아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온채아는 멍해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하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 집 안에서는 이런 애칭으로 불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웃음도 잠시, 하희민의 돌발 질문에 온채아의 미소는 금세 잦아들었다.“사고뭉치가 채아 씨 친구 쫓아다니는 건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온채아는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온채아는 하씨 가문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어떤 태도인지 알지 못했기에 혹여나 말을 잘못했다가 정다슬에게 피해가 갈까 조심스러웠다.온채아의 세심함을 눈치챈 하희민이 설명을 덧붙였다. “큰누나가 이미 지훈이랑 이야기를 나눴어요. 집안에서 둘의 관계를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몇 가지 문제는 본인이 직접 생각해서 정리해야겠죠.”그 말에 온채아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반대 안 하신다고요?”“네.”하희민이 이해하기로 하
Read more
PREV
1
...
5455565758
...
65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