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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만 구한 남자의 모든 챕터: 챕터 111 - 챕터 120

255 챕터

제111화

창밖에서 천둥소리가 크게 들리자 변도영은 저도 모르게 이나은의 얼굴을 떠올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신지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 빠르게 걸어 나갔다.“변도영 씨!”신지아는 떠나려는 그를 불러 세우고 딱 한 마디를 덧붙였다.“지금 나가면 위험해요. 한 번만 더 생각해요.”하지만 변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곧 비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신지아는 예전처럼 쫓아 나가지 않았다.쫓아가도,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변도영은 언제나 그랬다.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그런데도 이나은을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개의치 않는 그의 모습이 신지아의 심장을 멈추게 만드는 것 같았다.“사모님, 방 정리 다 됐습니다.”문 쪽에서 도우미가 우산을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거실에는 이제 신지아 혼자뿐이었기에 도우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물었다.“도련님은요?”“돌아갔어요.”“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죠?”그녀는 박수미 곁을 오래 모셔 온 사람이었다.그래서 변씨 집안의 일도, 변도영과 신지아의 관계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신지아의 표정에서 답을 읽은 도우미는 더 묻지 않았다.“그럼 사모님께서는 너무 걱정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 좀 쉬세요. 저는 어르신께 말씀드리겠습니다.”도우미는 그렇게 말한 뒤 급히 뛰어나갔고 신지아는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다 했고 할 수 있는 행동도 다 했다.그러니 이제 더 이상 말릴 수도, 말릴 이유도 없었다.곧 이혼할 사이라면 변도영의 생사까지 챙길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뒤, 신지아도 방으로 돌아갔다.한편, 거센 비를 뚫고 별장에 도착한 변도영은 불빛이 모두 켜져 있는 걸 보고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거실에는 수리공이 공구함을 정리하고 있었다.“방금 차단기 내려간 거예요. 별일 아닙니다.”“나은이는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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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그녀가 넘어졌던 건, 철저히 계획된 일이었다.이나은은 이미 예상했다.변도영이 분명 돌아올 거라는 걸.그래서 실크 잠옷도 그를 기다리며 미리 골라 입은 것이었다.변도영이 아무리 감정에 둔한 남자라 해도 그는 여전히 피가 끓는 남자였다.사실 이나은은 이런 저급한 수법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고미애가 말했다.“아이만 가지면 변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게 해줄게.”그녀는 알고 있었다.고미애가 진심으로 손주를 원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라는 걸.그 여자의 성격에 정말 손주가 급했다면 변도영과 신지아가 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지금쯤엔 이미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고미애는 단지 시험하고 싶었던 것이었다.이나은이 얼마나 자신에게 휘둘릴 수 있는지.예전의 이나은이라면 결코 그런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변도영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밤마다 그 생각에 몸부림치던 기억, 그리고 그동안 힘없다는 이유로 세상이 자신을 깔보고 비웃던 순간들.그 모든 걸 떠올리자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도영이의 아내는 꼭 나여야만 해.’그때 변도영이 약상자를 들고 들어오더니 익숙한 손길로 타박상 연고를 꺼내 이나은에게 내밀었다.그러나 이나은은 받지 않고 빨개진 눈가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아까 손도 다쳤어. 도영아, 네가 발라줄래?”그 말에 변도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아무 말 없이 그녀 곁에 앉았다.그는 연고를 손바닥에 짜내 천천히 비벼 열을 냈다.그리고 온기를 이나은의 발목 위에 살짝 얹었다.이윽고 따뜻한 열이 피부를 타고 번지며 이나은의 몸을 휘감았다.순간, 통증이 사라진 듯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이런 다정함, 변도영은 한 번도 자신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그는 너무 자연스러웠다.도대체 누구에게서 이런 걸 배웠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변도영은 그런 그녀의 생각 따위 알 리 없었기에 그저 묵묵히 조심스레 이나은의 발목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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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그들이 처음 사랑에 빠진 건 아주 오래전, 아직 사랑에 대해 서툴던 젊은 시절이었다.이나은은 그때부터 변도영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의 민감한 부분과 마음이 흔들리는 지점을.지금도 마찬가지였다.이나은이 다가올수록 변도영의 검은 눈동자는 점점 붉게 물들었고 거칠어진 호흡이 그의 내면을 무너뜨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멈췄다.무언가 잘못된 느낌이었다.지난 세월 동안 변도영은 신지아와 함께 있을 때마다 속으로 잔인하게 생각하곤 했다.‘이 얼굴이 나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이나은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밀어내고 있다.손을 뻗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욕망과 공허를 다 채울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전혀 따라주지 않았다.변도영은 느꼈다.지금 이 순간, 만약 자신이 욕망에 휘둘려 이나은을 받아들인다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그 예감이 변도영을 꽁꽁 묶는 듯 다음 행동을 막아냈다.결국 그가 거의 이성을 잃기 직전의 순간 변도영은 강제로 몸을 떼어냈다.이나은은 붉어진 눈으로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봤다.그녀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변도영이 낮게 말했다.“우리 사이의 일은 이미 끝났어. 이제는 네가 더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해. 나는 결혼한 사람이야. 네 인생을 내 잘못으로 더럽히게 할 순 없어.”이나은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고 이내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신지아 때문이야?”변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비에 젖어 창백했던 신지아의 얼굴이 스쳤다.그 침묵을 이나은은 곧 인정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녀의 눈빛은 급격히 흔들렸다.거절당한 수치, 그리고 패배감이 가슴 속을 뜨겁게 뒤틀었다.“도영아, 너 잊었어? 원래 네 아내 자리는 내 거였잖아.”이나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신지아만 없었어도 우리 지금 함께였을 거야.”변도영은 그 말을 들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렇다.처음엔 그랬다.그는 신지아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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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사실 처음부터 이나은의 목적은 신지아와 변도영의 아이를 없애는 것뿐이었다.하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그 사고 소식을 들은 변도영이 신지아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만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간 것이다.그제야 그녀는 확신했다.변도영이 신지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랑하지 않는 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눈앞의 아내가 다쳐도 한 번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그 사실을 떠올리자 이나은의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았다.‘그래, 어쩌면 내가 너무 조급했는지도 몰라.’변도영은 신지아와 5년을 부부로 지냈다.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모든 걸 버리고 ‘배신’이라 부를 행동을 하길 기대하는 건 과연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그렇게 마음을 다잡자 이나은은 조금씩 냉정함을 되찾았다.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변도영이 예전과 달라진 건 확실했다.그리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고미애의 압박도 있었고 무엇보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까 두려웠다.‘이제는 내가 움직여야 해.’이나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그 무렵, 변도영은 이미 방을 나와 있었다.방금 전의 일 때문에 가슴속이 여전히 답답하고 숨이 거칠었다.무엇보다 이상한 건 이나은이 방금 불러일으킨 그 열기로 인해 신지아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었다.결혼 후, 변도영은 신지아와의 관계에서 억지로 욕망을 눌러본 적이 거의 없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곁에 없자 묘한 허전함과 혼란이 그를 덮쳤다.변도영은 곧장 서재로 향해 찬물을 한 잔 들이키고 머릿속의 열기를 가라앉히려 했다.겨우 진정이 되고 씻으러 가려던 참에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박수미, 할머니였다.변도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할머니, 무슨 일이세요?”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날카롭고 비꼬는 듯한 한마디였다.“그래, 너 아직 살아 있구나?”그 말투에 변도영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고 박수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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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변도영은 할 말을 잃어버렸지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이건 신지아가 시켜서 물어보시는 건가요?”사실 질문이었지만 말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박수미가 괜히 이런 말을 할 리 없었다.분명 신지아가 또 자신을 고자질하듯 찾아가서 자기 입으로 묻긴 싫으니까 박수미를 내세워 대신 물어보게 한 게 틀림없었다.변도영은 이런 행동을 무척 싫어했다.그건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방식이었다.박수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일부러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었다.“그래요, 전 나은이가 좋습니다. 만약 신지아가 옆에 있다면 꼭 전해주세요. 다음에 이런 질문이 있으면 제 앞에서 직접 물어보라고요.”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박수미의 짧고 단호한 목소리가 끊었다.“좋아. 그럼 네 바람대로 해줄게.”뚝!그렇게 전화가 바로 끊겼다.‘뭐야, 이게 무슨 뜻이지?’변도영은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할머니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신지아의 편을 드는 일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또 신지아 편을 드는 건가?’변도영은 더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잠시 후, 밤에 신지아가 말했던 아이에 관한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그는 바로 양준명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아침 일찍 묘지에 들르자.”그 시각, 변씨 저택.박수미는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평소 온화하던 얼굴엔 걱정과 실망감이 교차했다.그러자 옆에 있던 가정부가 약과 물을 건네며 조심스레 물었다.“어르신, 왜 오늘은 도련님과 사모님의 방을 두 개로 준비하라 하셨어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솔직히 젊은 부부 사이에 감정이 없는 건 서로의 인연이 약한 탓 아닐까요? 그래도... 혹시 아이가 생기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그건 그녀가 오래전부터 계속 제안해 온 이야기였다.아이만 생기면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매번 박수미는 그저 미소만 지었을 뿐, 한 번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달랐다.박수미는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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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얼굴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신지아는 마음을 다잡고 방을 나서 거실로 향했다.이 오래된 저택은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다.그녀는 박수미에게 인사만 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문을 막 나서려는 순간 바깥에서 들어오는 변하늘과 마주쳤다.“좋은 아침이에요.”신지아가 무심결에 인사를 건넸다.변하늘과 부씨 부부는 언제나 이 저택에서 아침을 먹었다.그녀는 신지아가 어젯밤 이곳에서 잤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진 않았다.그래서 그저 시선만 살짝 신지아에게 줄 뿐이었지만 변하늘의 시선이 신지아의 목으로 내려가더니 표정이 잔뜩 굳어버렸다.“그 목걸이 어디서 난 거예요?”신지아는 고개를 숙여 자기 목을 쳐다봤다.지금 변하늘이 말하는 건 어제 고우빈이 잠시 빌려줬던 그 목걸이였다.“친구가 준 거예요.”신지아가 담담히 대답했다.“그럴 리가 없어요!”변하늘은 단칼에 부정했다.신지아에게 친구가 있을 리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저런 값비싼 목걸이를 줄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그건 윤씨 가문이 주최한 파티에서 경매의 마지막에 등장했던 보물이었고 마지막에 고우빈이 낙찰받은 물건이었다.변하늘은 신지아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이유를 밝힐 수도 없었다.변씨 가문은 윤씨 가문이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그날 변하늘이 몰래 간 것도 오로지 고우빈이 참석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이 사실은 가문의 그 누구도 몰랐고 신지아에게 들키는 건 더더욱 싫었다.곧, 그녀는 오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세웠다.“그거 벗어서 저한테 좀 보여줘요.”“싫어요.”신지아의 대답은 짧았다.“뭐라고요?”변하늘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섞였다.“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려면 최소한 고개는 숙이셔야죠.”신지아의 말에 변하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그리고 부탁한다는 한마디가 입안에서 맴돌 뿐 끝내 나오지 않았다.그 말 한마디가 너무 굴욕적으로 느껴졌다.신지아는 변하늘이 왜 아무 말도 못 하는지 이미 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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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그래도 5년 동안 전업주부였잖아. 그런데 UME 들어오자마자 고 대표님이 바로 팀장 자리를 줬다니까? 우린 이렇게 오래 일해도 그런 대우 한 번 못 받았는데.”신지아는 조용히 다가가며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말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신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김주리였다.김주리는 문을 등지고 있었기에 신지아가 들어온 줄은 꿈에도 몰라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그건 그렇고 이번 일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투자 건이 성사된 게 고 대표님 덕이라지만 사실 그 투자는 원래 부성 그룹에서 주기로 되어 있었잖아. 결국 신지아 씨는 그냥 예전 실수를 만회한 셈이지.”김주리 옆에는 다른 두 명의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그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 그렇지만 뭐 어쩌겠어. 예쁘잖아. 고 대표님이 특별히 챙겨주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예뻐? 난 그냥 평범하던데.”김주리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그러자 옆의 여직원이 그녀의 심리를 눈치채고는 부추기듯 말했다.“그러게, 주리 씨가 훨씬 예쁘지.”“정말?”김주리가 수줍게 볼을 만지작거렸다.그런데 여직원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팔로 한 명을 밀쳤다.“나 놀리는 거야?”둘은 깔깔거리며 장난을 주고받았다.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또 다른 여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런데 좀 이상한 게... 부성 그룹이 UME가 투자를 거절한 일로 화가 많이 났다고 들었어. 심지어 직접 나서서 견제하고 있다던데 그런 상황에서 신지아 씨는 어떻게 투자를 따낸 걸까?”김주리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투자한 건 윤씨 가문의 윤형우 씨잖아. 그 바람둥이 말이야. 신지아 씨가 쓸 수 있는 수단이 뭐겠어. 몸이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의 두 여직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그러고는 급히 눈짓으로 뭔가를 알렸지만 김주리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떠들었다.“진짜야. 내가 그날 봤거든. 어떤 남자랑 호텔로 들어가더라니까. 내가 장담하는데 절대 겉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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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여긴 왜 온 거예요?”신지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변하늘은 피아노 수업을 마치자마자 이곳으로 왔다.고우빈이 이 근처에 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런데 뜻밖에도 신지아가 차를 몰고 나타났다.놀라서 움찔했던 변하늘은 곧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아, 날 따라온 거네. 미안하다고 하려는 거야.’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신지아 씨나 잘하세요. 제가 뭘 하든 상관하지 마시고.”신지아는 그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아파트 단지는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변씨 가문 저택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이런 데서 어린애가 혼자 다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신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박수미의 손녀이자 자신에게 늘 따뜻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그 생각에 모르는 체하고 가버릴 수가 없었다.신지아는 변하늘이 살짝 발목을 비트는 걸 보았다.하이힐 때문이었다.“타요. 데려다줄 테니까.”신지아가 조용히 말했다.변하늘은 피곤했지만 바로 차에 오르지 않았다.“그럼 저를 위해 플랫슈즈 좀 사 오세요.”그 건방진 태도에도 신지아는 전처럼 물러서지 않았다.“지금 바로 집으로 가든가, 아니면 당신 엄마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시라 할게요. 선택하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 단호함에 변하늘은 순간 얼어붙었다.신지아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예전엔 자신이 조금만 고집을 부려도 금세 양보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단단해진 느낌이었다.그리고 또 하나, 오늘 신지아는 고미애를 ‘어머니’가 아닌 ‘당신 엄마’라고 불렀다.예전에는 그 다정한 호칭이 오히려 듣기 싫었다.아부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그런데 오늘은 이런 거리감이 이상하게 낯설고 불편했다.변하늘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신지아는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지금 연락할게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변하늘은 잽싸게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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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이나은은 다급하게 변하늘의 손을 붙잡았다.“하늘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 생긴 거야?”변하늘의 머릿속엔 방금 봤던 이나은의 그 실망스러운 눈빛만 가득했다.그리고 그 표정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입을 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얼마 후, 멍해있는 변하늘 대신 신지아가 조용히 나섰다.“별일 아니에요. 오늘 밤 여기서 묵기로 했어요.”“아, 그래?”이나은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자연스럽게 변하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그녀는 변하늘의 표정에서 묘한 서운함을 읽었다.그래서 부드럽게 설명했다.“도영이가 오늘 하루 종일 연락이 없었거든. 그런데 네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놀랐어.”그 말을 듣자 변하늘의 가슴에 막혀 있던 답답함이 조금 풀렸다.“그랬어요? 전 언니가 절 보고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변하늘이 입을 삐죽였다.“그럴 리가 있니?”이나은은 웃으며 그녀를 꼭 안았다.“하늘이 보니까 오히려 반가워서 깜짝 놀랐어. 그냥 도영이 걱정 때문에 그랬지.”그 말을 듣자 변하늘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금세 다시 기분을 되찾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빠는 밤새 안 들어오는 게 늘 있는 일이에요. 언니 때문 아니에요. 그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신지아 쪽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애써 못 본 척했다.그녀는 변하늘을 내려주자마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차를 돌리려 했다.“어? 어디 가세요?”변하늘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지만 신지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이나은이 나섰다.“신지아는 이제 이 집에서 나갔어.”그 말에 변하늘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는 그런 얘길 처음 들었다.“언제 나간 건데요? 그럼 지금 어디서 살아요? 혹시 신씨 저택으로 돌아간 거예요?”그녀는 곧 고개를 갸웃했다.신씨 저택 사람들은 신지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그 일로 거의 결렬 직전까지 갔다는 걸 변하늘은 잘 알고 있었다.이나은은 장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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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변도영은 놀라움과 혼란에 휩싸였다.‘어떻게 이렇게 담담할 수 있지?’가슴속의 불안이 다시금 부풀어 올랐다.그는 본래 남이 무너지는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신지아가 울부짖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원망하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고요했고 눈빛 속의 슬픔마저 옅어져 있었다.변도영의 가슴 한가운데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걸린 듯했다.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한 채 목이 타들어 갔다.한참의 침묵 끝에 변도영의 입에서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아이는 어떻게 죽은 거야?”“교통사고로 유산됐어요.”신지아의 말은 짧고 차가웠다.“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변도영의 눈가에 핏줄이 서며 붉게 물들었다.신지아는 잠시 멈칫했다.그의 눈빛에서 슬픔을 느꼈다.‘슬퍼하는구나,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희망이의 아버지니까.’하지만 그건 단지 사람으로서의 감정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그게 중요한가요?”신지아는 조용히 변도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아이는 이미 죽었어요. 이제 와서 그 이유를 따져서 뭐가 달라지겠어요?”그녀의 가볍고 담담한 말투가 변도영의 신경을 더욱 거칠게 긁었다.그녀는 그의 아이를 숨겼고 아이는 세상에 오기도 전에 사라졌다.그런데 변도영은 그 모든 걸 전혀 몰랐다.‘신지아는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참다못한 변도영은 성큼 다가가 두 손으로 신지아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신지아, 잊지 마. 나는 네 남편이었고 그 아이의 아버지야.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그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그제야 신지아는 변도영이 술을 마셨다는 걸 눈치챘다.그리고 자기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힘이 너무 세서 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신지아는 변도영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움직이자마자 오히려 더 세게 조여왔다.5년을 함께 살아오며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붙잡으면 버티고 밀치면 달려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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