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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첫사랑만 구한 남자: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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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변도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가슴속에 억눌러둔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그는 간신히 그것을 눌러 삼켰다.“신지아,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신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리고 제 말이 틀리지도 않았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었다.변도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좋아. 그 말, 후회하지 마.”그는 말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변도영은 알고 있었다.지금 신지아가 하는 말은 그저 분노 속의 허세일 뿐이라고.예전에도 그랬다.신지아는 그와 결혼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썼고 변도영의 아이를 품고 평생 곁에 머물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그런 그녀가 지금 와서 다신 낳지 않겠다니?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변도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아주 천천히 옮겼다.그녀에게 반성의 시간, 말을 거둘 기회를 주듯이.신지아는 그 의도를 읽었다.그가 지금 그녀에게 내려올 사다리를 던져주고 있다는 것을.전에도 그랬다.변도영과 다투거나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면 그는 언제나 이렇게 잠시 멈춰 섰다.신지아가 다가와 미안하다고 말하면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곤 했다.그녀는 그걸 가정의 평화라 믿었다.조금만 허리를 낮추고 그저 고개를 숙이면 모두가 평온할 수 있다고.하지만 지금은 알았다.그건 사랑이 아니라 변도영에게서 얻은 불쌍한 동정이었음을.그리고 언젠가는 그마저도 더는 얻지 못할 날이 온다는 걸.마치 어린아이처럼 신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는 걸 바라봤다.변도영은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조용히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잠시 망설이던 변도영은 다시 몸을 돌려 신지아를 바라봤다.그래도 오늘은 아이의 묘비를 봤고 신지아가 그 상실로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마음을 봐서라도 이번 한 번은 먼저 손을 내밀어주자고 다짐했다.그런 생각이 들자 변도영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신지아, 마지막으로 묻겠어. 너 다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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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변도영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아내가 자기 눈앞에서 다른 남자와 은근히 눈빛을 주고받는다니.변도영은 분노에 치를 떨다가 비웃듯 물었다.“신지아, 너 아직 자기 신분이 뭔지 기억은 나?”신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잊을 리 없죠.”“그래?”변도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 앞에서 다른 남자랑 놀아나는 거야? 날 죽은 사람 취급하는 거고?”신지아가 다른 남자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몇 번이고 짓밟는다는 생각에 오늘따라 그는 유독 기분이 나빴다.그의 화난 얼굴을 바라보던 신지아는 문득 마음이 이상해졌다.변도영의 시선이 자신과 고우빈 사이를 계속 오가는 걸 보고서야 지금 그가 왜 분노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는 자신과 고우빈이 너무 가까워진 걸 불쾌해하고 있었다.하지만 변도영이 예전에 이나은을 위해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감정은 너무나 사소했다.신지아는 늘 그가 이성 간의 경계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다.그런데 막상 자신이 다른 남자와 있는 장면을 보자 변도영도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그 사실은 신지아로 하여금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곧,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며 변도영이 예전에 말하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냈다.“선배는 남이 아니라 제 친구예요.”고우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지아가 결혼하기 전부터 저흰 꽤 오래된 친구였죠.”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전 지아의 남편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그 말속에는 분명한 의미심장한 뉘앙스가 숨어 있었다.변도영의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끝내 그는 휘두르지 않았다.한 여자를 위해 자신의 체면을 깎을 필요는 없었다.신지아는 여전히 똑같았다.말을 듣지 않는 여자.“좋아. 잘하고 있네, 신지아.”그는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문을 나서자 속에 맺힌 분노가 들끓었다.변도영은 핸드폰을 꺼내 양준명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분 뒤, 양준명이 차를 몰고 도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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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변도영이 떠난 뒤, 고우빈은 조심스레 그녀를 훑어보았다.“괜찮아?”그는 오기 전 방 안에서 들려오는 다툼 소리를 들었다.아마 변도영이 찾아왔던 모양이었다.신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괜찮아요.”고우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변 대표님이 여기엔 왜 온 거야?”신지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담담히 입을 뗐다.“별일 아니에요. 사소한 일이죠.”그녀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어차피 고우빈과의 협력 관계는 언젠가 변도영이 알게 될 일이었다.하지만 고우빈은 이제 막 귀국해 기반을 다지는 중이었다.신지아와 변도영 사이의 복잡한 일에 그를 엮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변도영에게 있어 아이의 일 따위는 정말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유산이라 해도 그에게는 잠시의 동요일 뿐, 언젠가 또 다른 아이가 생기면 그는 금세 아이를 잊어버릴 것이다.신지아가 일부러 말을 아끼자 고우빈도 더는 묻지 않았다.며칠 동안 신지아는 새 제품 개발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작업대 위에는 기계 팔 실험용으로 쓰는 여러 도구와 부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그녀는 알고리즘과 코드를 입력한 뒤 기계 팔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지시한 물건을 집어 올릴 수 있는지 테스트했다.수십 번의 실험 끝에 대부분의 물건은 잘 인식했지만 몇 가지 비슷한 형태의 물건은 여전히 구분하지 못했다.예를 들어 둥근 유리 재질의 컵과 같은 모양의 유리 꽃병.로봇은 그것이 물을 마시는 용도인지, 꽃을 꽂는 용도인지 판단하지 못했다.그 작은 구분 하나가 인공지능의 똑똑함을 가르는 ‘벽’이었다.결국, 신지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실험실에서 나와 복도로 걸었다.피곤함에 터벅터벅 걸어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와, 이거 주리 씨 남자 친구가 준 거야? 완전 로맨틱하다!”“이 팔찌 신상이라서 꽤 비싸다고 하던데? 작년 발렌타인 때도 멋진 거 받았다며?”김주리는 칭찬 세례에 입가의 미소를 숨기지 못했고 손목을 들어 반짝이는 팔찌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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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김주리는 말문이 막혔는지 표정이 잔뜩 굳어버렸고 눈가에 불쾌한 기색이 번졌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죠. 신 팀장님이 결혼하셨다는 걸 들었는데 이상하게 남편 얘기는 한 번도 안 하시더라고요?”신지아는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굳이 할 얘기가 아니니까요.”그 말투엔 단호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그런데도 김주리는 물러서지 않았다.“그래도 가끔 사적인 얘기 조금씩 하다 보면 사이도 더 돈독해지고 좋잖아요.”그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띠어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뱀처럼 교묘하고 사나워 보였다.“신 팀장님 정도로 예쁜 분이라면 남편분이 정말 사랑하시겠어요?”그 말에 주변 직원들의 귀가 쫑긋 섰다.“그러게요, 신 팀장님 남편은 뭐 하시는 분이에요?”“얼굴은요? 멋있어요?”순식간에 호기심 섞인 질문이 쏟아졌고 신지아는 머리가 아득해졌다.지독한 웅성거림 속에서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결국 짧게 잘라 말했다.“평범해요. 그리고 곧 이혼할 거예요.”그 한마디에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아까까지 떠들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고 몇몇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하지만 김주리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신 팀장님, 그런 말은 좀 신중해야죠.”그녀는 마치 충고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사람이 살다 보면 싸울 수도 있죠. 저도 남자 친구랑 가끔 싸워요. 그렇다고 헤어진다느니, 이혼한다느니 하는 말은 하면 안 돼요.”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게다가 이미 결혼까지 하셨잖아요. 진짜 이혼하면 다음에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죠.”입으로는 신지아를 걱정한다고 했지만 눈빛엔 노골적인 조롱이 섞여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지아는 살짝 웃어 보였다.“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결혼했다고 해서 좋은 사람을 못 만나는 건 아니니까요.”그녀의 눈동자가 차가운 유리처럼 반짝였다.“저 조건 나쁘지 않아요. 그런 문제로 고민 안 해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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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김주리의 손이 어색하게 허공에 멈췄고 주변 사람들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가 물었다.“뭐라고요? 누구라고요?”택배기사는 다시 또렷하게 이름을 불렀다.“신지아 씨요.”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신지아에게로 쏠렸고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혹시 잘못 배달된 거 아닌가요?”택배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전화번호도 맞습니다. 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발신자에게 다시 확인했거든요. 이름도 틀림없어요. 분명 신지아 씨께 드리는 겁니다.”“누가 보낸 거죠?”신지아가 물었다.“그건 저도 모릅니다. 보내신 분이 성함을 밝히지 않으셨어요. 받으시는 분이 아실 거라고만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자 신지아의 머리에 몇 개의 얼굴이 스쳤다.그리고 금세 누군지 짐작이 갔다.“감사합니다.”신지아가 짧게 인사한 뒤 꽃을 건네받자 주위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신 팀장님, 누가 보낸 거예요? 이런 꽃이면 보통 사이가 아닌데요?”“설마 남편분?”“아니면 혹시... 신 팀장님을 짝사랑하는 사람?”질문이 쏟아졌다.한쪽에서 김주리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곧, 그녀 곁에 있던 친한 동료가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저 꽃, 진짜는 아닐 수도 있잖아? 비슷하게 만든 가짜를 샀을 수도 있어. 주리 씨한테 온 것만 못하잖아.”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지아 곁에서 누군가 놀라서 외쳤다.“어? 이건 뭐예요?”김주리가 고개를 돌리자 한 여직원이 꽃다발 사이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있었다.“명품 풀세트 주얼리예요!”“그거 한정판이라던데요? 전 세계 백 세트밖에 없고 가격은 억 단위부터 시작한대요.”“남편이든, 아니면 누구든... 완전 재력가 같은데요.”여자들의 탄성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그 소리를 듣자 김주리 옆의 동료도 참다못해 고개를 빼서 구경하기 시작했다.김주리의 얼굴빛은 점점 빨개지더니 입술을 깨물며 낮게 중얼거렸다.“시끄러워 죽겠네.”그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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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신지아는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진 뒤, 책상 위의 꽃과 주얼리를 정리해 사진 한 장을 찍었다.그리고 그 사진을 윤형우에게 보냈다.[이거 윤형우 씨가 보낸 거예요?]잠시 후, 답장이 왔다.[역시 신지아 씨는 눈치가 빠르네요. 제가 보낸 거 바로 알아볼 줄 알았어요. 역시 ㅈ[ 마음속엔 신지아 씨밖에 없다는 걸 느꼈죠?]신지아는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그런데도 윤형우는 멈추지 않았다.[요즘 실험실에서 밤낮없이 연구만 한다고 들었어요. 밥도 잘 안 드시고 살도 빠졌다던데 오늘 같은 날엔 기분 전환이 좀 필요하잖아요.][고마워요. 하지만 너무 비싼 선물이에요. 저는 이걸 받을 이유가 없어요.][그럼 저 한 번만 도와줘요.][무슨 일인데요?]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 분 뒤 짧은 한마디가 화면에 표시됐다.[퇴근하시면 제가 데리러 갈게요.]신지아가 거절할까 생각하던 찰나 다시 한 통이 도착했다.[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잠시 망설이던 신지아는 결국 허락했다.로봇 프로젝트가 막혀 있던 참이었다.윤형우도 로봇 분야에 관심이 있다 했으니 혹시나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퇴근 무렵, 윤형우는 이미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옅은 회색 조끼에 금테 안경, 그 안경엔 얇은 체인이 달려 있었다.그가 미소 지을 때마다 체인은 흔들렸고 부드러운 눈매는 유난히 빛났다.신지아는 문득 생각했다.윤형우의 인상이 예전보다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어디가 다르냐 묻는다면 딱히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더 위험하게 매력적이었다.서양식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점원은 메뉴를 내밀면서 윤형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상대의 눈빛에는 호감이 잔뜩 섞여 있었지만 신지아를 보는 눈빛은 어딘가 날카로웠다.그런 시선은 신지아에겐 익숙했다.예전에 변도영에 있을 때도 늘 주변엔 그런 시선이 있었다.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얼마 후, 프라이빗 룸에 들어가서야 신지아는 본론을 꺼냈다.“이제 말씀하시죠. 어떤 부탁이죠?”“일단 주문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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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윤형우는 신지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살짝 웃으며 셔츠 소매를 내려 손목을 가렸다.“곧 올 거예요. 잠시 후에 연기할 때 표정 잘 관리해야 해요.”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신지아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연기요?”신지아는 눈을 깜빡였다.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그 시각, 레스토랑 바깥.김주리와 몇몇 동료들이 차에서 내렸고 그중 한 명이 주위를 살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주리 씨, 우리 이러는 거 좀 그렇지 않아? 도둑이라도 된 기분이야.”“무슨 소리야? 그냥 확인만 하는 거잖아. 신 팀장님한테 선물 보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김주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계속 말했다.“그렇게 대단한 남자라면 전부터 우리한테 소개했겠지.”그녀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신지아는 퇴근 후 값비싼 차에 올라타고는 이곳, 레스토랑으로 향했다.‘남자 얼굴이 보잘것없으니까 숨기는 거야. 오늘은 내가 꼭 진짜 모습을 보여주겠어.”김주리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는데 그건 질투와 자존심이 뒤엉킨 눈빛이었다.결국 동료들도 그녀의 말에 이끌려 몰래 몸을 낮춘 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왔네요.”윤형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신지아가 고개를 들자 문 쪽에서 가방을 든 여자가 굽 높은 힐을 울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그 발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바로 너지? 이 여우 같은 년아! 우리 형우를 꼬드긴 게 너 맞아?”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의 손이 번개처럼 날아왔지만 신지아는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몸을 살짝 틀자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고 의자에 세게 부딪혔다.“악!”여자가 손을 움켜쥐었다.통증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감히 피했어? 나쁜 년, 내가 너 가만 안 둬!”그녀가 다시 손을 들려던 순간 신지아는 차분하게 그 손목을 붙잡았다.“말로 하시죠. 손부터 드는 건 아닌 것 같네요.”“말? 네가 우리 사이를 망쳐놓고 무슨 말이 필요하다고 그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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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이래도 남자 친구가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윤형우는 애초에 그녀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그저 돈을 주고 고용한 질투에 눈먼 여자 친구 역할이었다.윤형우의 지시에 따라 질투하고 화를 내며 신지아를 공격하는 연기를 하면 됐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여자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막 다시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신지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저희는 밖에서 얘기 좀 해요.”그녀는 여자의 팔을 붙잡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몇 분 뒤, 신지아가 돌아왔을 때 여자는 울먹이며 가방을 들고 뛰쳐나갔지만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그러자 윤형우가 잔을 흔들며 물었다.“해결됐어요?”“네, 이제 다시는 윤형우 씨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예요.”신지아의 말투는 담담했고 윤형우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일 처리 능력이 꽤 좋네요.”신지아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이런 일은 많이 겪었으니까요.”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감정 조절 잘하는 아내가 되라던 고미애의 말이 떠올라서.하지만 변도영과의 결혼 생활 5년은 그 어떤 사람도 감정이 무뎌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고 그녀는 결국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수없이 다스려야 했다.그래서 이제는 이런 일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이제 다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신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맞은편 룸의 문이 급히 닫히는 걸 발견했다.이내 안에서는 숨죽인 속삭임이 들렸다.김주리와 동료들이 살짝 문틈을 열어 그 장면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가 뛰쳐나온 장면과 ‘싸움’의 기류는 고스란히 그들의 눈에 담겼다.게다가 불륜이라는 단어까지 들렸으니 그들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김주리가 혀를 끌끌 찼다.“역시나... 그래서 신 팀장님이 남자를 숨겼던 거구나. 사생활이 아주 복잡하시네.”“그런데 신 팀장님은 그런 사람 아니지 않아요?”한 동료가 조심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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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물건은 비슷한 것끼리 모이기 마련이다.텅 빈 꽃병과 물컵은 결코 같은 식탁 위에 함께 놓이지 않는다.신지아는 이 단순한 원리를 새로운 알고리즘에 녹여냈다.기존의 코드에 분류 영역의 개념을 추가한 것이다.시간은 흘러 어느덧 밤이 깊었다.두 번의 시뮬레이션을 마친 후, 결과는 분명 개선됐다.기계 팔이 물건을 집어 드는 정확도가 확실히 높아진 것이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한 번에 완성되는 건 없어.’신지아는 어깨를 주무르며 피로를 풀었고 실험실의 전원을 정리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윤형우가 보낸 꽃은 직원들에게 조금씩 나눠줬고 남은 몇 송이는 창고에서 꺼낸 꽃병에 꽂았다.곧이어 은은한 향이 퍼졌다.신지아는 잠시 그 향기에 스며드는 듯 미소를 지었다.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아직 안 갔어?”고우빈이었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놀란 듯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아직 회사에 계세요?”그는 대답 대신 신지아의 손에 들려있는 꽃병을 바라봤다.거기엔 푸른 장미가 촉촉하게 빛났다.“꽃이 예쁘네.”“아, 누가 선물해 준 거예요.”신지아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고우빈의 표정은 조금 굳어버렸다.오늘 하루 종일 회사 안은 그 소문으로 떠들썩했다.신지아의 남자 친구가 보낸 꽃과 명품 세트, 그 얘기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우빈은 믿지 않았다.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하지만 지금, 그 꽃을 꽂으며 평온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왠지 불안감이 밀려왔다.“정리 끝났는데 같이 갈래요?”신지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그녀의 눈빛엔 아무 망설임도 없었다.그저 자연스럽게 고우빈은 퇴근길 동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듯이.“그래, 같이 가자.”그는 애써 담담하게 웃었다.차 안에서 두 사람은 일 얘기를 나눴다.서로의 목소리가 고요한 밤에 잔잔히 흘렀다.하지만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하자 어둠 속에서 신지아를 부르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신지아!”신지아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저 멀리 서 있는 검은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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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변도영이 아무 말 없이 운전석으로 들어갔다.신지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뒷좌석 문을 열고 앉았다.그녀가 그의 차를 타는 일은 흔치 않았다.딱 한 번, 부주의하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가 본 적이 있다.그 자리에는 작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이나은 전용석, 타인 착석 금지.]그게 변도영이 붙인 건지, 이나은이 붙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대로 붙어 있다는 건 그가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아내인 나는 타인이라 이건가.’신지아는 씁쓸하게 웃었다.그녀가 뒷좌석에 앉자 변도영이 룸미러로 짧게 시선을 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전벨트 매.”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창밖의 불빛들이 스쳐 지나가고 차 안엔 숨소리마저 조용했다.십여 분쯤 흘렀을까, 차는 뜻밖의 곳에 멈춰 섰다.커다란 관람차가 밤하늘 아래 빛나고 있었다.아이들의 웃음 대신 바람 소리와 조명이 어우러진 공허한 소리만 들려왔다.신지아는 눈을 깜박였다.“여긴 놀이공원이잖아요. 왜 여길 온 거예요?”“놀러 왔지.”변도영의 목소리는 낮지만 차가웠다.“네?”“전에 말했잖아. 밤의 놀이공원을 한 번쯤 경험해 보고 싶다고. 오늘은 내가 같이 있어 줄게. 마음껏 놀아.”그제야 신지아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움직이는 대형 관람차를 바라봤다.이미 운영을 마쳤을 시간인데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그때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네.’그녀는 문득 떠올랐다.고이진과 함께 이곳에 왔던 날, 줄만 세 시간 서고 결국 한 번밖에 타지 못했던 관람차.그리고 생일날, 초를 켜며 빌었던 소원.그때 무심코 말했던 바로 그것이었다.변도영은 그때도 듣고 있었던 걸까?그렇다면 신지아가 전에 말했던 다른 소원들도 듣고서 모른 척했던 걸까?신지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 소원들 중, 이나은과 관계없는 건 오직 이 하나뿐이었다.스물넷의 신지아는 이제 변도영을 사랑하지 않았다.하지만 스물아홉의 그녀 마음속엔 여전히 열아홉 살의 신지아가 살고 있었다.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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