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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신지아는 아직 퇴원 허락을 받지 못했다.답답한 병실 안에서 하루가 1년 같이 느껴지던 그때, 그녀는 고우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업무용 노트북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잠시 후 병실 문이 열리고 고우빈이 들어섰다.그런데 그의 광대뼈 근처가 살짝 붉게 부어 있었다.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상처였지만 신지아는 곧 떠올랐다.변도영의 얼굴에도 똑같은 자국이 있었다는 걸.“혹시 변도영 씨랑 싸운 거예요?”고우빈은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왜요?”신지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둘의 성격이 맞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주먹을 주고받을 사람들은 아니었다.더구나 싸움의 이유가 자기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그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본 고우빈이 잠시 시선을 피하며 짧게 말했다.“남자들 사이의 일이라 생각해. 너무 신경 쓰지 마.”그 말투는 평소보다 무심했지만 의도는 너무나 분명했다.신지아는 더 묻지 않았다.그러나 고우빈이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 사실이 복잡한 감정을 불러왔다.한편으론 마음이 뭉클했다.이토록 단단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하지만 동시에 걱정스러웠다.변도영을 자극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이미 일이 벌어졌다면 더는 탓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이제 다섯 날.다섯 날 뒤면 UME의 신제품 발표회가 열리고 그날 신지아와 변도영은 함께 이혼 신고서에 도장을 찍을 예정이다.그때면 두 사람은 완전히 끝난다.신지아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하지만 몸이 회복되지 않아 그런지 머릿속이 자꾸 희미하게 흐려졌다.생각이 떠오르다가도 이내 흩어져 버리고 그럴수록 조급해졌다.이러다간 발표회 준비를 제때 끝내지 못할지도 몰랐다.그렇게 혼자 끙끙대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는 윤형우.유민 그룹, UME의 최대 투자처이자 지금 신지아가 절대 실망시켜선 안 되는 상대였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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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사실 아니었다.신지아는 윤형우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있다.겉으론 부드럽고 세련된 미소 뒤에,그의 뼛속에는 어딘가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그건 아마도 윤씨 가문이라는 이름 아래 자란 탓일 것이다.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따뜻함 따위는 가장 먼저 버려야 했을 테니까.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 윤형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아쉽네요. 집안일 때문에 손을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아 씨를 못 챙기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제가 두 군데 다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늘 그랬듯, 완벽하게 계산된 온도의 말.신지아는 습관처럼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말은 흘려들었고 마음은 이미 딴 데로 가 있었다.“그럼... 기념품 뭐 갖고 싶습니까? 돌아오면 사다 드릴게요.”윤형우가 갑자기 물었다.“괜찮아요.”신지아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몸조심하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끊었다.그 순간, 한 줄기 번개처럼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지금까지 그녀의 시야는 너무 좁았다.로봇의 기능을 넓히는 것만 생각했지 사람이 로봇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윤형우의 말, ‘돌봐준다’는 게 바로 힌트였다.‘그래. 그 자체를 강화하면 돼.’신지아는 곧장 노트북을 켜고 설계안을 열었다.보조 기능이 아닌 케어형 로봇.정확히 사람을 돌보고 손끝의 힘, 움직임의 온도까지 계산하는 로봇.그녀는 몰입한 채로 구상도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그리고 초안이 완성되자마자 서인호에게 파일을 보냈다.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지만 이런 로봇은 섬세한 조정이 필요합니다. 노인이나 환자를 부축할 때의 압력, 마사지 시 손의 움직임 같은 세밀한 데이터 말이죠. 전문가의 도움과 장기간의 샘플 조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마 시간이 안 될 거예요.]단 한 문장으로 찬물을 끼얹은 셈이었다.신지아는 곧장 짧게 답장을 보냈다.[아니요. 시간은 충분해요.]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 힘의 세기, 손의 각도, 사람의 반응.그건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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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서인호는 잠시 신지아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충고할게요.”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지금 포기한다면 부성 그룹에 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체면은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발표회가 망하면 UME의 이름은 다시는 회복 못 할 겁니다.”서인호는 잠시 멈칫했다가 조용히 이런 말을 덧붙였다.“부성 그룹 쪽이 이번에 성공하면 그 차이는 더 크게 드러납니다. 비교 대상이 생기면 사람들은 UME를 더 심하게 욕하겠죠. 그래도 계속하겠다는 거예요?”신지아는 짧게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그 대답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 서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말했다.“좋아요. 그럼 병원에서 조사하는 건 제가 따로 사람 붙일게요. 신 팀장님은 세부 설계랑 데이터 정리만 완벽하게 마무리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맡겠습니다.”뜻밖의 말에 신지아는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시선을 느꼈는지 서인호는 시선을 피하며 이런 말을 툭 내뱉었다.“착각하지 마세요. 이건 신 팀장님이 마음에 들어서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전 아직도 신 팀장님을 못 믿겠거든요. 하지만 이건 UME가 앞으로 국내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한 가지 때문에라도 실수는 절대 없어야 하죠.”신지아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그래도 고마워요.”서인호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병실 문을 닫고 나갔다.그날 저녁, 서인호가 보낸 팀이 곧바로 병원으로 도착했다.그들은 빠른 속도로 조사를 시작했고 하루 만에 첫 보고서를 신지아의 손에 건넸다.지난번 기술 유출 사건 이후 서인호는 기술팀 내부를 더 이상 믿지 않았다.이번엔 전혀 다른 부서 사람들로 구성된 비밀 팀이었다.신지아에게는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의 집중력과 속도는 놀라웠다.보고서를 받은 그녀는 밤새 자료를 검토했고 결국 이틀 만에 최종 데이터를 완성했다.이틀 동안 겨우 두 시간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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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두 남자의 수다가 이어졌지만 신지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은 오직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카메라가 잠깐 흔들리더니 렌즈가 천천히 객석을 비췄다.사람이 가득한 홀, 단 몇 초 남짓한 짧은 순간이었지만 신지아는 단번에 알아봤다.가운데 자리,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있는 변도영.그는 편안한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었고 손에는 이나은을 응원하는 형광 패널을 들고 있었다.그리고 시선은 무대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변도영의 검은 눈동자 안에는 이나은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이 드러나 있었다.결혼한 지 5년, 신지아는 그런 눈빛을 처음 봤다.그 눈빛은 한 번도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건 늘 불만, 귀찮음, 혐오, 그리고 냉담함이었다.이미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고 마음이 다 닳아 없어졌다고 믿었다.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억눌린 듯 아팠다.변도영이 보여주는 눈빛, 그토록 원했고 그토록 바라던 그 따뜻함이 이제는 자신이 아닌 이나은을 향하고 있었다.정말 우스운 일이었다.자신이 지난 5년 동안 어떻게든 얻으려 애쓴 그 마음을 이나은은 단 한 번 손을 흔드는 걸로 가볍게 가져갔다.더 비참한 건 이나은이 지금 그 무대 위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 모두의 박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리고 변도영은 그 사실을 모른 채 그녀를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신지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은 비웃음이었고 또 동시에 체념이었다.‘참 우습고도 슬프네.’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자 옆에 있던 남자들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신지아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표정을 정리했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출구 쪽으로 걸어가 퇴원 절차를 밟았다.그 소식은 금세 고우빈에게도 전해졌고 그는 병원 앞으로 달려왔다.“의사 말 들어야지.”고우빈은 급히 차 문을 열며 계속 말했다.“조금만 더 쉬었다 나와도 되잖아.”신지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옅은 미소를 지었다.“요 며칠은 정말 잘 쉬었어요. 간호사들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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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신지아가 곧 UME에서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자 김주리는 다시 느긋하게 손을 놓았다.그 사이, 신하나는 다른 생각으로 분주했다.그녀는 고우빈을 다시 한번 만나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UME에 들어온 이후, 고우빈은 마치 신하나의 존재를 잊은 듯 했다.그녀가 먼저 찾아가 선물까지 건네도 그는 늘 냉정하고 딱딱한 태도였다.거절하되 무례하지 않게 관심도, 온기도 없는 반응이었다.심지어 신하나는 인터넷에서 연애 공략을 찾아봤다.여자가 남자를 쫓는 건 한 겹의 비단일 뿐이지만 너무 들이대면 그 얇은 막도 찢어진다는 말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그래서 신하나는 한동안 고우빈을 일부러 피하기로 했다.너무 자주 나타나면 질린다지만 사라지면 그제야 허전함을 느낀다는 게 바로 ‘공략의 핵심’이었다.계획을 세운 지 거의 일주일, 신하나는 손가락으로 달력을 튕기며 생각했다.‘아직은 때가 아니야. 이틀만 더 기다리자.’신하나의 머릿속은 이미 완벽한 시나리오로 채워져 있었다.‘신지아가 고 대표님 앞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고 대표님을 도와주게 만들면 돼. 그러면 나한테 너무 감사할 거고 그 고마움은 사랑으로 바뀌겠지?’그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신하나는 스스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역시 난 똑똑해.’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고우빈과의 데이트 장면, 그리고 프러포즈를 받는 장면까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재생되고 있었다.고우빈은 변도영처럼 화려한 배경은 없지만 그렇다고 신지아처럼 비참한 결혼을 하게 될 일도 없을 것이다.‘그래, 나 정도면 훨씬 현명한 여자지.’한편, 연구실.신지아는 컴퓨터 앞에서 프로그램을 정리하던 중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그러자 서인호가 고개를 들었다.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나머지는 내일 하자고요.”그제야 신지아도 시계를 봤다.밤 11시.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린 줄도 몰랐다.그녀는 미련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몸이 좋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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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고우빈이 이끄는 길이라면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상일 거야. 난 믿어. 고우빈은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잖아.][그거 들었어? 이번 디자인은 어떤 여자 신입한테 맡겼다던데? 심지어 원래는 평범한 전업주부였대.][뭐라고? 고우빈이 그렇게 판단력이 흐릴 리가 있나? 이런 중요한 일을 어떻게 여자인 데다 신입한테 맡겨?][부성 그룹 프로젝트 담당자도 여자잖아.][그건 다르지! 그 사람은 해외에서 돌아온 엘리트잖아.]그 아래로 이어진 수많은 댓글은 모두 신지아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결국 그 해시태그는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많은 사람들이 고우빈의 SNS로 몰려가 그에게 디자이너를 교체하라고 요구했다.이런 반응은 신지아가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물론 압박감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프로젝트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신지아는 논쟁하지 않기로 했다.다만 이번 일은 그녀에게 분명한 경고로 다가왔다.그녀는 생각 끝에 발표회 프레젠테이션은 서인호에게 맡기기로 했다.결과물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로 판단한다.신지아가 믿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5년간 전업주부였기 때문이었다.‘서 상무님이 무대에 서면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몰라.’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물론 그것이 도피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과거가 UME의 미래에 그늘을 드리우게 할 순 없었다.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신지아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그러나 그녀는 몰랐다.화면이 꺼진 직후, 고우빈이 개인 계정으로 조용히 글 하나를 올렸다는 걸.[저는 제가 선택한 디자이너를 믿습니다. 전문성은 성별로 판단할 수 없고 과거의 경력은 미래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모두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그 한 문장으로 그는 신지아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고 댓글 창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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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그 시각, 변씨 저택.급히 돌아온 변도영은 문을 열자마자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이나은을 발견했다.두꺼운 담요에 몸을 감싼 채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었고 얼굴은 처연할 만큼 초라했다.“무슨 일이야?”변도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이나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그저 눈가에 맺힌 서러운 기운만이 그녀의 답이었다.대신 옆에 있던 오영희가 먼저 나섰다.“아까 나은 씨랑 마트에 갔다가 계산대 앞에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나은 씨한테 물 한 양동이를 부었어요! 게다가 욕까지 하더라니까요. 남의 케이크를 뺏었다나 뭐라나...”오영희는 분노와 놀라움이 뒤섞인 얼굴로 가슴을 두드렸다.“세상에, 다행히 물이라 다친 데는 없어요. 만약 다른 걸 부었다면 어쩔 뻔했어요.”변도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범인은 잡았습니까?”오영희가 고개를 저었다.“그 깡패 같은 애들이 너무 빨리 도망쳤어요. 제가 따라가 보려고 했는데 나은 씨가 또 다칠까 봐 그냥 바로 돌아왔죠.”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변도영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CCTV 돌려보게 하겠습니다.”그때 이나은이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도영아, 괜찮아.”그녀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정말 괜찮아. 별일 아니야.”이나은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심스레 오영희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오영희는 곧 눈치를 채고 말을 이었다.“그냥 동네 불량배들이에요. 누가 돈 주고 시킨 걸지도 모르죠. 잡아도 별 소용없을 거예요.”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아마 나은 씨가 의지할 데 없는 걸 아는 사람, 혹은 부성 그룹에서 좋은 성과를 낸 걸 시기한 사람이겠죠. 그래서 저런 짓을 한 거예요.”그 말에 변도영의 머릿속을 스쳐 간 얼굴이 있었다.신지아.‘여자가 질투에 사로잡히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지.’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곧, 오영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런 일일수록 다른 사람들 눈에 확실히 보여줘야 해요. 이나은 씨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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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하지만 세상은 늘 이나은의 계산대로 흘러가진 않았다.솔직히 속으로는 오영희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욕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어르신 생신은 큰 행사잖아요. 도영이도 쉽게 결정은 못 할 거예요. 기회야 앞으로도 많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봐요. 이제 늦었으니 들어가요.”이나은의 말에도 오영희는 바로 나가지 않고 그저 얄밉게 웃으며 손을 비볐다.곧, 그녀는 의미를 곧 알아채고는 휴대폰을 들어 송금 화면을 열고 오영희에게 돈을 보냈다.“고마워요, 나은 씨. 푹 쉬어요.”그제야 오영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꼭 쥔 채 나갔다.문이 닫히자마자 이나은의 얼굴에서 웃음이 싸늘하게 사라졌다.“하, 귀찮게 굴긴.”그녀는 짜증 섞인 숨을 내쉬며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인터넷엔 온통 이나은에 대한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었다.[이나은, 아름다움과 재능을 겸비한 천재 디자이너.][변도영과 과거의 인연, 다시 피어난 사랑]그제야 불안했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무엇보다 변도영이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그건 곧 자신에게 아직 충분한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나처럼 완벽한 여자를 신지아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기겠어.’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틀 후. 신지아는 여전히 실험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모든 걸 발표회를 위해 쏟아부었다.그날 오후, 변도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언제 퇴원한 거야?!”들려온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그제야 신지아는 깜빡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아, 내가 퇴원한 걸 말도 안 했구나.’그녀는 변명하듯 급히 대답했다.“혹시 의상 때문에요? 정확한 치수는 이미 양 비서님에게 보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전달하겠다고 했고요.”신지아는 변도영의 목적은 단순히 의상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냉담했다.“그 얘길 하려는 게 아니야.”“그럼 뭐가 문제인데요?”신지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할머니 생신날에는 참석할 거예요.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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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발표회 무대에 서서 이름을 알리는 건 수많은 디자이너의 꿈이다.하지만 그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그러니 주어진다면 대부분은 그 어떤 이유로도 거절하지 않는다.그런데 신지아는 그 흔치 않은 기회를 스스로 내놓았다.서인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왜요?”신지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며칠 전 인터넷을 뒤덮었던 논란을 조용히 이야기했다.그리고 자신이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이유를 덧붙였다.“이번 프로젝트는 UME의 명예가 걸린 일이에요. 저 때문에 괜한 선입견이 생기면 그건 저 혼자 감당할 일이 아니니까요.”그 말에 서인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의 눈에 비친 신지아는 불과 몇 주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서인호는 한때 신지아를 그저 전업주부 출신의 초보로 여겼다.하지만 함께 일하며 알게 됐다.그녀가 누구보다 꼼꼼하고 집요하며 작은 성공에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이라는 걸.그런데 지금 신지아의 눈빛 속엔 여전히 자신감이 아닌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아직 완전히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구나.’서인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전 내일 시간 없습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무엇보다 남의 공을 가로채는 건 싫어서요.”신지아가 급히 말했다.“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서 상무님. 이번 프로젝트엔 상무님도 전 과정 참여하셨잖아요. 그건 공을 나누는 거지 뺏는 게 아니에요.”“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서인호는 단호했다.“이 프로젝트의 전체 구조를 아는 사람은 지금 서 팀장님하고 저뿐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이 나가든가... 아니면 발표회는 취소하는 수밖에 없겠네요.”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발표 원고를 신지아 손에 쥐여주었다.“결정은 당신이 하세요.”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서인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신지아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숨을 고르며 작게 중얼거렸다.“그래도... 전 이런 자리는 아직 두렵다고요.”무대 위 수많은 카메라, 그중 단 하나의 실수라도 사람들은 놓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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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차 안은 고요했다.변도영은 눈을 살짝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양준명은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할 수 없이 그는 다시 창문을 열었다.‘이러다 들키면 큰일인데.’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속도를 높여 신지아 옆을 빠르게 지나가려는 순간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그리고 고개를 들어 정확히 그들의 차를 바라봤다.양준명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그는 반사적으로 액셀을 밟았다.브레이크 대신, 더 세게.차는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신지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찰나의 순간. 신지아는 눈앞에서 스쳐 가는 풍경 속에서 이나은이 변도영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어제까지만 해도 신지아는 자신의 아내라며 못을 박던 남자는 오늘 다른 여자를 품에 안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 앞을 지나갔다.신지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차가 멀어지는 소리 속에서 그 웃음은 쓸쓸하게 흩어졌다.‘다행이야. 이제는 뒤를 돌아볼 이유가 없잖아.’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자취방에 도착했을 때 신지아는 달력에 시선을 돌렸다.하루, 단 하루만 더 지나면 변도영과의 이혼 숙려 기간은 끝난다.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내일은 UME의 신제품 발표회, 신지아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었으니까....한편, 차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갑작스러운 가속에 이나은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변도영의 품에 안겼다.“죄송합니다, 변 대표님!”양준명이 당황해 급히 사과했다.“운전 조심해.”변도영은 짧게 나무라며 이나은을 부드럽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했다.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안전벨트를 직접 채워주었다.그 순간,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짙은 코트 차림의 여인, 흔들리는 머리카락.익숙했다.너무 익숙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신지아?’그렇지만 차는 이미 속도를 높인 뒤였다.그 실루엣은 금세 멀어져 창문 저편의 작은 점으로 흩어졌다.변도영은 신지아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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