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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 Chapters

제501화

주변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변도영이 다가오는 걸 보고서야 신지아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연기 그만해요...”“나은이 임신한 거 아닙니다.”신지아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변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가 이내 발칵 뒤집혔다.“임신한 거 아니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그럼 저 피는 뭔데?”영문을 모르는 기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반면 내막을 아는 이들의 안색이 하나같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하민재는 제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고 이나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변도영의 표정이 전보다 훨씬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신지아만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변도영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폭로할 줄은 정말 몰랐다.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신지아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과거 변도영이 그녀를 싫어했을 때도 사람들 앞에서 이처럼 면박을 주곤 했으니 말이다.다만 이토록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태도는 처음 봤다. 아마 사랑이 깊었던 만큼 배신감도 커서 이토록 화가 난 것이라고 신지아는 짐작했다.기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의심 섞인 목소리가 나오자 신지아가 휴대폰에 저장해뒀던 이나은의 검진 결과서를 카메라 앞에 몇 초간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이나은에게 다가가 차분하게 말했다.“그러니까 순순히 사과하겠다고 나선 건 사실 내게 아이를 죽였다는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였네요. 맞죠?”이나은이 창백한 얼굴로 뭔가 말하려 했으나 신지아가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때 정민수가 도영 씨더러 우리 중 한 명만 살려주겠다고 했을 때 살기 위해서 임신했다고 거짓말했죠? 그래서 도영 씨가 어쩔 수 없이 나은 씨를 구했던 거고요.”신지아가 변도영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녀를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며 말을 이어갔다.“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이미 뱉어놓은 거짓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겠죠. 새로 아이를 갖기엔 시기가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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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이나은은 계속 부인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변도영이 이토록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할 정도라면 이미 그녀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이나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필 지금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그녀를 폭로하는 것인지.예전의 변도영은 항상 이나은을 지켜주었고 단 한 번도 상처를 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변도영이 방금 막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뒷일은 생각지도 못한 채 폭로해버린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러나 그런 실낱같은 희망조차 변도영의 실망 가득한 눈빛에 산산조각이 났다.“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병원에 있을 때부터. 난 네가 먼저 털어놓길 기다렸어.”그 말을 들은 순간 이나은은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제 느꼈던 그 불안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이나은이 줄지어 선 카메라들과 고소해하면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녀가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왜 하필 지금이야?”‘폭로할 거였다면 차라리 둘만 있을 때 할 것이지, 왜 하필 지금인 건데? 왜 이토록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사람들한테 보여주게 하는 거냐고!’“더는 네가 잘못된 길을 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으니까.”변도영의 목소리가 낮고 무거웠다.이나은의 거짓 임신을 알게 된 후 변도영은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단순히 속았다는 사실보다 그가 믿었던 이나은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착하고 여리기만 했던 이나은의 내면은 어느샌가 광기 어린 집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지아를 해치려 했다.교통사고로 신지아의 아이를 죽게 했고 신지아가 절벽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걱정은커녕 윤재혁과 손잡고 몰래 신지아를 죽이려 했다.변도영이 번번이 이나은을 위해 변명을 찾아내며 감싸왔지만 이나은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빠져들었다.이나은이 통곡하며 소리쳤다.“널 사랑해서 그랬어.”“사랑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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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화

이나은은 머리가 빙빙 돌았다. 지금 가슴 속에 이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변도영이 사람들 앞에서 신지아의 편을 들어주었다. 단순히 신지아에게 해명하는 것을 넘어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녀를 지켜줬다.이나은과 신지아 사이에서 변도영은 또다시 신지아를 선택했다. 그것도 이런 순간에 말이다. 그 선택이 가져올 파장이 어떨지 뻔히 알면서도.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변도영 대표가 신지아 씨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왜 저렇게까지 감싸는 거죠?”“전 신지아 씨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변도영 대표의 냉대 속에서도 5년이나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면 멘탈이 보통이 아닌 거죠.”“이나은 씨가 했던 짓들은 정말 도를 넘었네요. 이렇게 무서운 여자인 줄은 몰랐어요.”“설마 두 사람 재결합하려는 거 아니겠죠?”“그럴 확률이 높죠.”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쏟아졌다.이나은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으나 그녀를 향한 경멸 어린 시선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신지아 역시 정확한 내용을 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그날부터 신지아에게 변도영은 완전히 타인이었다. 변도영은 변도영이고 신지아는 신지아였다.처음에는 일이 복잡하게 꼬일까 봐 걱정했지만 변도영이 직접 나선 덕에 아주 쉽게 해결되었다.통쾌하진 않았으나 가짜 임신 사실이 폭로된 이상 변씨 가문이 이나은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변도영이 신지아의 편에 선 게 변씨 가문의 명예를 깎아 먹을 만큼 리스크가 큰 행동이라는 것을 신지아는 잘 알고 있었다.이 기자회견의 효과가 신지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침묵이 흐르던 그때 신지아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임신이 거짓이었으니 더 이상 쉴 필요도 없겠네요. 나머지는 변호사와 얘기 나누세요, 이나은 씨.”신지아가 자리를 뜨려던 그때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이나은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어쨌든 오늘 이 모든 사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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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4화

양준명의 대처는 빨랐다. 사고가 나자마자 그는 경호원들을 시켜 기자들을 대피시키고 카메라 파손에 대한 보상까지 마친 뒤 현장을 정리했다.이내 현장에는 신지아와 변도영, 그리고 몇몇 경호원만이 남았다.신지아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기에 그녀의 말투는 이전보다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나를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본인 몸이나 잘 챙기세요. 그리고 다음부턴 이러지 마요. 윤형우에게 호신술을 배워서 이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으니까 굳이 몸 던져서 막아줄 필요 없어요. 당신한테 신세 지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니까.”변도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절벽 아래서 며칠을 함께 지내며 그는 신지아가 예전의 연약한 모습이 아니란 점을 실감했다.설령 자신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신지아는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정작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녀를 앞질러 막아섰는지. 머리가 채 판단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대답 없이 난감한 표정만 짓는 그를 보며 신지아는 그가 이나은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이런 행동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방금 자신이 보였던 짧은 연민이 참으로 우습게 느껴졌다.“방 구조가 그대로라면 구급상자는 침실 협탁 안에 있을 거예요. 갈색 병에 든 약을 상처 부위에 바르면 소독도 되고 멍도 빨리 빠질 거고요.”신지아는 덤덤하게 덧붙였다.도움을 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가볼게요.”변도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들은 당부를 곱씹었다.찰나의 순간, 그는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만약 이혼 전이였다면 그녀는 지금처럼 이렇게 차갑고 사무적인 말투가 아니라 분명 안절부절못하며 직접 약을 발라주거나 병원에 가자고 재촉했을 것이다.이미 익숙해진 일임에도 마음 한구석에 밀려드는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그는 그녀를 불러 세우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때, 저택에서 박수미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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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5화

박수미는 늘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타박했다.“지아처럼 좋은 아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너한테 시집온 귀한 사람이니 부디 잘해라. 혹여라도 지아를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당시 그는 그 말을 무시했다. 그에게 신지아의 영특함은 잔머리였고 속 깊음은 가식적인 환심 사기였으며 예쁜 외모는... 외모는 딱히 부정할 수 없었다.하지만 예쁜 여자라면 지겹도록 봐온 그였고 신지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탓에 그녀의 미모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늘 나른하게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양준명에게 전화를 걸게 해 핑계를 대고는 그 자리를 벗어나기 일쑤였다.그러나 지금, 예전 같으면 질색했을 그 상황이 간절히 그리워졌다. 박수미가 다시 한번 그 말을 해주신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진심을 다해 대답하리라. 꼭 소중히 아끼겠노라고.한편, 기자회견장에 온 기자들을 모두 배웅하고 지시 사항을 마친 양준명은 다급히 돌아왔다.제자리에 서 있는 변도영을 발견한 그는 서둘러 다가가며 말했다.“대표님, 회장님께서 거실로 오라고 하십니다.”양준명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조금 전 변승주와 통화했을 때, 그의 목소리와 말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변승주와 고미애는 평소 아들을 끔찍이 아꼈고 변도영을 변씨 가문의 후계자로 키우며 그가 내리는 결정이 아무리 파격적이어도 늘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었다.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변도영의 판단이 늘 냉철하고 결단력 있었다는 사실에 기반한 신뢰였다. 두 사람은 변도영이 결코 변 씨 가문의 대의를 저해하거나 명예를 실추시킬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오늘 변도영이 보인 행보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이성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멀었다.이나은의 임신을 진작 알고도 침묵했던 그가, 하필이면 논란의 중심에 선 전처 앞에서 보란 듯이 그 사실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이는 단순히 이나은에게 수치를 준 것을 넘어, 변씨 가문의 위신을 땅바닥으로 내팽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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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6화

양준명은 변도영을 따라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고미애는 애초에 이번 사죄 발표회 따위엔 관심조차 없었으나, 이나은의 실책이 자칫 변씨 가문의 명성에 흠집을 낼까 우려되어 사람을 시켜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게 했다.덕분에 이나은이 신지아를 모함하려던 그 한심한 소동도 역시, 고미애는 시작과 동시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이나은이 떠난 직후, 그녀는 사람을 풀어 기자들의 입부터 단속했다.그러나 라이브 방송까지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업계 일부 사람들은 이 해프닝을 목격했고 안부를 묻는 사모님들의 전화가 빗발쳤다.말로는 걱정이라지만, 실상은 구경거리가 생겨 신이 난 이들의 가식적인 확인 전화일 뿐이었다.변승주의 인맥은 고미애의 사교계처럼 가십이 주를 이루지는 않았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훨씬 치명적이었다.성사 직전의 계약들이 줄줄이 파기되었고 부성 그룹의 주가도 미세하게 출렁였다.다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변승주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지난 반년간 변도영은 사사건건 이나은의 편에 서서 신지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겨왔고 이나은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자 변씨 가문도 아이를 지키겠다며 고우빈과 여론에 정면으로 대항했었다.하지만 배 속의 아이가 가짜임이 드러나자 변도영은 기다렸다는 듯 태도를 바꿨다.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이나은을 보며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오늘의 타깃은 이나은이었지만, 내일의 표적이 자신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설상가상으로 변도영은 앞서 신지아 문제로 이미 많은 이들의 이익을 건드려 놓은 상태였으니 기회를 엿보던 이들에게 이번 사태는 그를 몰아세우기에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되었다.변하늘 역시 친구들에게서 온 연락에 시달렸으나 그녀는 안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아예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멍하니 자리에 앉은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있었다.어제 변도영에게 들은 정보조차 다 소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 이나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방 안에 숨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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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변하늘에게 이나은은 늘 세상에서 가장 온화하고 완벽하며 내면의 힘이 강한 여성으로 비쳐 왔다.그런데 그녀가 왜 이렇게 된 걸까.곁에서 전화를 마친 고미애도 휴대폰을 아예 꺼버리고 물었다.“그렇다 해도 미리 우리한테 알렸어야지. 제멋대로 일을 벌여서 이런 사달을 내면 어떡하니.”“미리 말해서 나은의 거짓말을 계속 덮어주게 하라고요? 아니면 나은이를 도와서, 신지아가 걔를 밀쳐서 유산했다는 거짓 뉴스라도 터뜨리게요?”정보력 하나는 확실한 고미애였기에, 이나은이 그동안 벌여온 일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하지만 그가 절벽 아래 갇혀 있던 동안 고우빈이 소송을 걸었을 때도, 고미애는 여전히 이나은을 감싸고 보호하는 쪽을 택했었다.고미애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이건 변씨 가문의 명예가 걸린 문제야. 대국적으로 생각해야지.”“대국이요?”변도영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그럼 신지아는요? 그 사람은 억울한 누명을 써도 마땅한가요?”고미애는 아들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신지아와 함께한 세월이 길어 미련이 남은 건 알겠다만, 현실을 직시해라. 너희는 이미 이혼한 사이야. 그 여자에겐 그 여자의 입장이 있겠지만, 너에겐 네가 걸어가야 할 앞날이 있어. 그 사람 때문에 계속해서 네 입지를 좁히는 짓은 그만둬.”마지막 말을 맺을 때 고미애의 말투는 단호했다.더 이상 권고가 아닌, 경고이자 엄명이었다.하지만 잠시 침묵하던 변도영은 좌중을 얼어붙게 만드는 폭탄선언을 던졌다.“만약 제가 그 사람과 재결합하겠다면요.”“뭐라고?”고미애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눈을 치켜떴다.변도영의 눈빛에서 일말의 장난기도, 홧김에 던진 말도 아니라는 확신이 읽히자 고미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미 서로에게 상처를 줄 대로 준 사이인데 재결합이라니?”변도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고미애는 손가락으로 변도영을 가리켰고 충격과 분노로 입술까지 가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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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8화

“오늘 일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시간이 좀 지나면 이나은의 유산 건에 대해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이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해라. 이나은과 파혼하는 건 상관없지만, 신지아와의 재결합만은 절대 안 된다.”변승주는 차가운 얼굴로 못을 박았다.감정을 가라앉힌 고미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결정에 동의했다.지금 신지아의 마음은 온통 UME와 윤형우에게 가 있으니 설령 결혼한다 해도 그녀는 변씨 가문을 이용할 생각만 할 터였다. 그러니 고미애로서는 가문에 이토록 커다란 불씨를 들이는 일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의 그녀에게는 차라리 이나은이 나았다.이나은과 신지아 사이의 원한이나 갈등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이나은이 신지아를 얼마나 괴롭히던 상관없었다.적어도 이나은은 변씨 가문과 운명을 함께할 사람이었으니까.게다가 지금 당장 아이가 없다고 해서 영원히 임신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두 사람의 단호한 태도는 변도영이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는 짤막한 실소를 터뜨렸을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여기서 더 설득해 봐야 입만 아픈 헛수고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5년 전, 변씨 가문이 신지아 어머니의 유언을 빌미로 그에게 결혼을 강요했을 때, 그는 이미 이 가문이 자신의 결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그들이 그를 사랑하는 건 진실이었으나, 아들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변씨 가문의 이익이었다.변도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두 분 뜻대로 하죠. 그럼 제 아내의 자리는 당분간 비워두도록 하겠습니다. 용무가 있어 저는 먼저 가볼게요.”변승주와 고미애는 그가 홧김에 하는 소리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변도영은 본래 그렇게 반항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니 제 부모를 등지고 평생 혼자 살 위인도 못 되었고 몰래 신지아와 재결합을 할 만큼 무모한 짓을 저지를 애도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변도영이 떠나자 변하늘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런데 신지아 쪽은 어떡하죠? 이나은이 임신한 게 아니라는 게 밝혀졌으니,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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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9화

생각할수록 속상했다.결국 변하늘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방금 들었는데, 신지아가 할머니께 갔대요. 평소 할머니 말씀을 제일 잘 듣는 사람이니까, 할머니께서 신지아를 설득해서 이나은과 그만 싸우라고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변도영이 정원으로 걸어 나오자 양준명도 그 뒤를 따랐다.“하민재는 어디 있지?”변도영이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며 물었다.양준명이 저 멀리 있는 창고를 가리켰다.“경호원 몇 명을 붙여 저기에 가둬두었습니다.”변도영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며 양준명은 속으로 하민재를 위해 짧게 묵념했다.올 것이 드디어 온 것이다.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 안에서 하민재의 비명 소리가 돼지 잡는 소리처럼 터져 나왔다.비명이 한참 이어지고 나서야 변도영이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따라 나오는 하민재의 얼굴은 온통 멍투성이였고 그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삼키며 연신 쩔쩔맸다.“하씨 가문에 전해. 얘가 병원에 처박혀 청춘이나 낭비하느니 제 의술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한다고. 그래서 내일부터 아프리카 공익 의사로 자원했다고 말이야.”변도영의 어조는 소름 끼칠 만큼 서늘했다.공익 의사로 ‘자원’한 하민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덧붙였다.“형,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고작 평소에 신지아를 긁고 말이 좀 험했던 게 다잖아. 사진 몇 장 찍어서 보낸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나은 부탁으로 가짜 임신 진단서 좀 끊어주고 같이 신지아를 함정에 빠뜨릴 궁리를 좀 한 것뿐인데...’하민재는 생각할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자신도 변도영과 이나은의 사랑을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게 아닌가.“가혹한지 아닌지는 네 남은 인생을 걸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말을 마친 변도영은 그를 뒤로한 채 정원으로 걸어가 화단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정원을 손질하던 정원사에게 담배 한 갑을 산 변도영은 한 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그는 본래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없었다.평소 회사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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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0화

“망할 녀석, 다 그놈이 자초한 화근이야.”박수미가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화제는 자연스럽게 변도영에게로 흘러갔다.다른 사람 앞이었다면 신지아는 의도적으로 이 주제를 피했겠지만 상대는 변도영의 할머니인 데다 눈에 띄게 정말 격분한 상태였다.박수미의 호흡이 가빠지자 신지아는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오히려 변도영을 두둔했다.“그때 그 사람도 최선을 다했어요. 고생도 많이 했고요.”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우미도 한마디 거들었다.“듣기로는 도련님이 신지아 씨를 찾으려다 실수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셨다더라고요.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웠고 구조대마저 철수한 상황이었는데, 다들 돌아가자고 말려도 도련님은 신지아 씨를 찾아야 한다며 끝까지 고집을 피우셨대요. 도련님은 정말로 신지아 씨에게 큰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나셨던 거예요.”도우미의 마지막 말은 신지아를 향해 있었다.이 일에 대해서 신지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나중에 변도영이 절벽에서 떨어진 이유를 물었을 때 그가 입을 굳게 다물었기에, 그저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게 창피해서 말을 아끼는 줄로만 알았다.그런데 이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그놈이 저지른 난장판이니 당연히 본인이 해결해야지.”박수미가 차갑게 덧붙였다.“그렇게 행동한 건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는 증거일 뿐, 그놈이 쓰레기였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어.”마침 방 안으로 들어서려던 변도영의 발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박수미는 한담을 나누듯 말을 이어갔다.“지아야, 사실 할머니는 네가 왜 그런 녀석을 좋아했는지 늘 궁금했단다. 사실 네 엄마가 조건을 내걸기 훨씬 전부터 난 네 마음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중에 네 엄마가 그놈이랑 결혼시켜 달라는 조건을 냈을 때도 망설임 없이 허락했던 거야. 참, 네 엄마도 네가 도영이를 좋아한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단다.”박수미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꽤나 비밀스러운 어조였다.신지아는 놀라움에 작게 탄성을 질렀다.“네?”이미 변도영과의 일은 아득한 과거가 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신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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