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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991 - 챕터 1000

1016 챕터

제991화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지나갔다. 할머니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챙에는 분홍색 비단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그 옆으로는 젊은 여자애 몇몇이 캐리어가 산더미처럼 쌓인 카트를 밀며, 이따가 무엇을 먹을지, 숙소 인테리어는 어떨지 흥겹게 떠들어대고 있었다.문득 송남지는 이 공항이 도시 자체와 무척 닮았다고 느꼈다. 어디서 왔는지 묻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 재촉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바닷가에 나른하게 앉아 사람들이 찾아오길 기다려 주는 그런 기분 좋은 정취 말이다.시력이 좋은 권우빈은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위로 굴러 나오는 검은색 대형 캐리어 두 개를 단번에 알아챘다.그 커다란 짐들은 모두 송남지의 것이었다. 이번 출장에서 권우빈이 챙겨온 짐이라곤 리넨색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송남지는 그에게 세상을 유랑하는 나그네처럼 짐이 단출하다고 농담을 건넸고 권우빈은 고작 나흘짜리 출장을 가면서 무슨 이삿짐을 싸 왔냐며 장난스레 맞받아쳤다.하지만 권우빈이 농담이 끝나자마자 송남지는 묘하게 침묵했다.그 짧은 정적 속에서 권우빈은 미세한 이질감을 느꼈으나, 그 근원이 어디인지까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여성들의 품위 유지가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며, 저 거대한 가방 두 개를 가득 채워야 비로소 완성되는 성질의 것인가 보다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그는 송남지가 고생스러워 보였고 그녀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무거운 두 개의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사실 송남지는 엄살을 부리거나 약한 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다만 지금은 임신 초기라 무엇보다 몸을 아끼고 무거운 짐을 피해야 했을 뿐이다.“내가 커피라도 사다 줄까?”권우빈이 묵묵히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자, 송남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미안해져 넌지시 물었다. 하지만 그동안 함께 지내오면서 권우빈은 그녀의 이런 배려 섞인 태도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 진작에 꿰뚫고 있었다.권우빈은 싱긋 웃어 보였다. “누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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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화

앞장서 걷던 권우빈이 고개를 돌려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보았다.“누나, 왜 그래요?”그의 눈에 비친 송남지의 모습이 어딘가 조금 낯설고 신비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송남지는 황급히 아랫배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직 임신 사실을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코다르의 시월이 너무 포근해서. 바람에서조차 은은하고 고요한 향이 나잖아.”코다르에 도착한 첫날, 두 사람은 전시회 본부에서 예약해 준 나란히 붙은 호텔 룸에 체크인했다. 송남지는 방에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곧바로 부동산 어플을 켜고 지낼 만한 집을 본격적으로 물색하기 시작했다.임신 사실을 숨긴 만큼, 이곳에 남아 아이를 낳겠다는 계획 또한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그렇기에 출산 준비에 필요한 모든 과정은, 앞으로 그녀가 온전히 혼자서 묵묵히 짊어지고 해결해 나가야 할 몫이었다.다행히 이번 출장에서는 골치 아픈 비즈니스 업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권우빈의 일 처리 능력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제 붓만 쥘 줄 알던 순진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재스민의 실무 디렉터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굵직한 업무부터 세밀한 행정 처리까지 척척 해냈다.이번 코다르 행 출장에서도 권우빈은 크고 작은 행정 처리를 완벽하게 책임져 주었다.덕분에 한결 홀가분해진 송남지는 비밀스럽게 산부인과 예약과 출산에 필요한 제반 수속을 완벽하게 마칠 수 있었다.귀국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로 한 날, 송남지는 권우빈에게 특별히 신신당부했다.“내 표는 예매할 필요 없어. 이번에 먼 곳까지 나온 김에 당분간 여기서 푹 쉬면서 머리도 좀 식히고 가려고.”권우빈 역시 평소에 송남지를 몹시 안타깝게 여기던 차였다. 갤러리 재스민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느라 쉴 틈 없이 달려온 그녀였으니, 이번 기회에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마음을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알겠어요. 그럼 저 먼저 귀국할게요. 그런데 누나...”그는 말끝을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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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화

송남지는 눈을 떴지만 찰나의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잠시 잊었다.하얗고 높은 천장에는 빈티지한 실링팬이 매달려 느릿느릿 돌고 있었고 그 움직임에 따라 공기 중에 감도는 은은한 인동초 향기가 공기 중으로 고요히 흩어졌다.창밖에서 쏟아진 아침 햇살은 하얀 커튼을 타고 실내로 스며들어 방안을 부드러운 꿀 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샴페인 가득한 잔 속에 몸을 푹 담근 듯 아늑한 아침이었다.그제야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냈다. 코다르의 르파티오, 출산을 앞두고 그녀가 온전히 자신을 위해 마련한 새로운 거처였다.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블라인드 너머 테라스의 철제 난간에는 부겐빌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시월의 꽃들은 한여름처럼 뜨겁게 피어오르지는 않았지만, 진한 보랏빛에서 한결 부드러워진 벽돌색 옷으로 갈아입은 채 송이송이 아래로 처진 채 아침 바람에 가볍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송남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자 그 기척에 배 속의 아기가 가볍게 툭 움직였다.요즘 들어 태동이 부쩍 자주 느껴졌는데, 마치 바깥세상이 무척이나 넓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어서 나가서 구경하고 싶어 서두르는 모양새였다.30주에 접어들며 그녀는 배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의 형체를 제법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날은 발뒤꿈치로 갈비뼈를 꾹 누르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온몸을 뒤집어 마치 몸속에 사는 작은 고래 한 마리가 깊은 바다에서 몸을 한 바퀴 굴리는 듯한 기분을 안겨주기도 했다.송남지는 배 위에 가만히 손을 얹고 조용히 기다렸다.“좋은 아침이야.”그녀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비밀을 나누는 친구에게 건네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했다.아기가 대답이라도 하듯 다시 한번 툭 하고 가볍게 움직였다.그녀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걷어내고 맨발로 바닥을 디뎠다. 강렬한 햇살을 수없이 머금어서인지, 연한 오크 원목 바닥은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온화하고 느긋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그녀는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시월의 코다르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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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백발의 호텔 주인 할머니 클로딘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정원 쪽을 가리키며 프랑코니아어로 말했다.“난 마당에 올리브나무 물 주러 갈게.”송남지는 우유를 한 모금 머금고 미소를 지으며 제 전화를 들어 보였다.“전 전화 좀 받고 올게요.”클로딘은 우리 말을 할 줄 몰랐고 송남지 역시 프랑코니아어에 서툴렀다. 그래서 대화의 태반은 손짓과 표정으로 갈음되었으나 소통에 막힘은 없었다.이국땅에서 출산을 앞둔 임산부와 홀로 살아가는 노인이 만들어내는, 기묘하면서도 따스한 풍경이었다.요즈음 송남지는 프랑코니아어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는데 바짝 벼락치기를 한 덕에 이제는 외계어를 듣는 것 같던 수준에서는 벗어났다.임신은 그녀에게 이전보다 더 큰 인내를 선사했고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겪게 되는 필연적인 서툴고 어색한 과정조차 한결 의연하게 견뎌내게 했다.전화는 최보라에게서 온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무슨 출장을 한 달이 넘도록 가 있어? 아직도 안 올 생각이야? 설날이나 되어야 돌아올래?”사실 송남지는 설날이 되어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송남지는 차마 최보라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성격이 불같은 언니였기에 진실을 알면 대번에 꼬치꼬치 캐물을 터였고 그렇게 되면 그녀 역시 해줄 말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여기 공기가 정말 좋아서 그래. 어차피 돌아가도 별일 없는데, 여기서 좀 더 놀다 가면 안 돼?”송남지의 말에 최보라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답했다.“보고 싶단 말이야.”송남지의 입가에 미소가 부드럽게 번졌다.“보고 싶다면서 말투는 왜 그렇게 퉁명스러워?”“서운하니까 그렇지. 내 생일이 코앞인데 오지도 않고, 세상에 너 같은 동생이 어디 있어?”송남지는 우유를 마시며 농담을 던졌다.“언니 옆엔 오지훈이 든든하게 있는데 뭐. 나까지 굳이 갈 필요 있겠어?”그러자 최보라가 엉뚱한 제안을 툭 던졌다.“그럼 차라리 내가 코다르로 가서 생일을 보낼까? 남프랑코니아 남자들의 낭만이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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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화

송남지는 화병에 피어난 꽃잎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너무 나쁘게 말하진 마. 그 사람도 나를 진심으로 열렬히 좋아해 줬던 시절이 있었잖아. 그때 내 나이도 십 대 후반은 훌쩍 넘었는걸. 나이는 아무런 장벽이 될 수 없고 편견을 가질 필요도 없어. 서로에게 진정으로 맞는 사람이라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최보라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너야 이제 완전히 미련을 털어내서 그렇게 속 편히 말하는 거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던 우리는 아직 아쉬움이 남아서 그래, 에휴.”송남지는 더는 수다를 이어갈 기분이 아니었다.“언니, 미안해. 처리해야 할 업무가 좀 있어서 이만 전화를 끊어야겠어.”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씻는 데만 무척 오랜 시간을 보냈다.본래 손이 느려서가 아니라, 지금은 배 속의 아이를 위해 매사에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몸이었기에, 모든 행동이 한결 신중하고 굼떠진 탓이었다.배 속의 아기는 그녀의 전신을 가장 조심스레 떠받들어야 할 성스러운 도자기 그릇으로 바꾸어 놓았기에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돌리거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때조차 관절과 근육이 천천히 적응할 수 있도록 매 순간 템포를 한 단계 늦춰야만 했다.씻고 나온 그녀는 낙낙한 크림색 리넨 원피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호텔 부근 도키오 출신 주인이 운영하는 조그만 셀렉숍에서 구한 옷이었는데 조그만 셀렉숍에서 구한 옷이었는데, 수만 번 정성 들여 빤 포근한 가제 손수건처럼 살결에 부드럽게 감겼다.원피스 위에는 세이지 그린 컬러의 얇은 니트 가디건을 걸쳤는데, 테라스에 활짝 피어난 진분홍빛 부겐빌레아 꽃과 부드러운 대비를 이루었다.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가만히 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아랫배는 이제 제법 완연하게 부풀어 올라 리넨 원피스 자락을 둥그스름하게 밀어내고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억지로 숨기려 하지도, 그렇다고 유난스럽게 드러내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같았다. 그곳에 온전히 존재하기에, 그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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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화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그림을 결코 그려낼 수 없는 법이었다.송남지는 조용히 수첩을 덮었다.그러고는 불쑥 솟구친 쓸쓸한 기억들을 애써 등 뒤로 지워내며 다시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새삼스레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참 맑고 아름다운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앞만 보고 묵묵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올바른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송남지가 오늘 목적지는 코다르 구시가지에 위치한 솔라야 거리였다.비록 재스민의 경영은 믿음직한 민지현에게 일임하여 한시름 놓았지만 이번 코다르 행은 태교와 출산 준비 말고도 중요한 글로벌 파트너십을 위한 비즈니스가 얽혀 있었다.코다르의 아에로포르 엑스포 센터가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내며 ‘코다르의 빛’을 주제로 한 현대 미술전을 함께 기획하자고 제안한 것이다.센터 측 큐레이터들은 재스민이 그간 견고하게 구축해 온 아시아 아티스트 네트워크에 주목했고 아시아 현대 미술가들이 지중해의 찬란한 빛을 어떻게 재해석해 내는지 보여주는 컬래버레이션 전시를 구상 중이었다.이 프로젝트는 송남지 개인은 물론 재스민의 성장에 있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마음 편히 태교에만 전념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보류할 수밖에 없을 만큼 도저히 놓치기 아까운 제안이었던 셈이다.재스민이 국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해외 무대로 진출할 최고의 찬스였으니까.아에로포르 엑스포 센터는 코다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현대 미술 허브 중 하나로 매년 최고 수준의 기획전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간 이곳과 파트너십을 맺었던 갤러리들 역시 화이트 큐브, 상타 화랑, SCAI THE BATHHOUSE 등 세계적으로 쟁쟁한 곳들이었다.만약 재스민이 이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갤러리가 진정한 국제 미술계의 주류로 진입했음을 의미했다.재스민을 품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이 매혹적인 발걸음을 그녀는 결코 멈추고 싶지 않았다.어릴 때 그저 낙서나 끄적이며 조그만 재능을 보였던 소녀가 어느덧 자라 자신의 갤러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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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화

“감사합니다.”송남지는 입안에 빵을 가득 문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요즘 들어 이런 작고 미세한 선의에도 쉽게 감동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임신은 그녀의 감정을 예전보다 예민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세상을 이전보다 한층 더 따스하고 다정하게 느끼도록 이끌고 있었다.빵을 다 먹은 송남지는 인공 하천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천 양옆에 늘어선 건물 외벽들은 저마다 다채로운 색깔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져 있었다.오렌지와 밝은 노랑, 하늘빛과 초록이 뒤섞인 외벽들은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코다르 풍의 색채였다. 열정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그 풍경은, 마치 엄격한 규칙을 깨부순 거장 화가의 팔레트를 들여다보는 듯했다.그녀는 길을 걸으며 이 예쁜 색감들을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기록해 두었다. 나중에 돌아가서 전시회의 비주얼 디자인에 참고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아에로포르 엑스포 센터는 아젤 강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 근처에 있었는데 코다르 구항구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사실 처음 아에로포르라는 명칭을 들었을 때 송남지는 조금 의아했었다.나중에 자료를 찾아보고 나서야 이 건물이 1950년대에 실제로 소형 공항의 터미널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공항이 해변의 새 부지로 이전하면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금의 현대 미술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었다.건물의 외관은 1950년대 모더니즘 스타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간결하게 뻗은 선과 드넓은 유리 커튼월, 그리고 단단한 콘크리트 골조가 돋보였다.하지만 코다르 사람들은 여기에 그들만의 로컬 감성을 한 스푼 더했다. 입구 양옆으로는 커다란 야자나무 두 줄이 늘어서 있었고, 문 위에 설치된 포치에는 코다르 현지 작가가 작업한 화려한 채색 도자 벽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천사만 전경을 묘사한 그 벽화는 푸른 바다와 주황색 지붕, 초록색 야자수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오가며 방금 튜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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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8화

소피는 부드러운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잘되었네요. 이 세상에 또 한 명의 아름답고 품격 있는 숙녀가 찾아오겠군요.”그녀는 송남지에게 자리를 권한 뒤, 레아에게 커피와 따뜻한 허브티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송남지는 따끈한 민트 캐모마일 블렌딩 허브티를 청하고는 열기가 기분 좋게 배어 나오는 찻잔을 조심스레 보듬었다. 시월의 코다르는 완연한 가을날처럼 포근했지만,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는 약간의 차가운 서늘함이 감돌았다.소피가 서류철을 넘기며 일정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부스 설치 작업이 진행되는데, 재스민 기획팀은 언제쯤 도착하나요?”“재스민의 기획팀은 열흘 뒤에 도착할 거예요. 세 명으로 구성된 팀이고 현장 디스플레이와 조명 조정을 전담할 거예요. 다만 저는...”송남지는 잠시 말을 고르며 뜸을 들였다.“준비 기간 내내 이곳 코다르를 지키겠지만, 임신 중이라 무거운 짐을 옮기는 육체적인 노동은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기 힘들 것 같아요.”소피가 송남지에게 다정한 미소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훌륭한 아티스트들을 소개해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가장 큰 역할을 해내신 거예요. 단언컨대 권우빈의 신작 컬렉션만으로도 이 전시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보장받은 셈이니까요.”권우빈은 현재 미술계에 혜성처럼 떠오른 신성과 같았고 그의 무궁무진한 예술적 잠재력이 바야흐로 만개하는 중이었다.소피가 권우빈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자, 송남지는 무의식중에 권우빈이 궁박한 처지로 재스민에 침입하듯 뛰어들었던 해묵은 첫 만남을 회상했다. 동생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눈물겨운 발버둥을 치며,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던 척박한 땅에서 필사적으로 동아줄을 찾던 애달픈 미성년자 소년을 말이다.그 가련했던 소년이 이토록 눈 깜짝할 사이에 화려하게 날개를 펼치고 비상할 줄을 대체 누가 예견했으랴.송남지는 새삼 벅찬 감상에 젖어 들었다. 사람들의 운명이란 어쩌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이미 제 자리를 찾아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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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9화

송남지는 슬며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랫배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너도 나중에 저렇게 될 거야.”그녀는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이곳 코다르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유모차를 타고 신나게 산책을 즐기게 되겠지.”그 순간 배 속의 조그만 생명이 또다시 꼼지락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침보다 훨씬 더 힘찬 태동이었는데, 마치 그녀의 말에 응답하듯 발길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송남지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호텔로 돌아오니 어느덧 오후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구시가지의 아담한 식당에 들러 신선한 코다르식 샐러드로 가벼운 점심을 해결했다. 삶은 달걀, 참치, 짭조름한 엔초비, 올리브, 토마토, 로메인 상추에 올리브유와 상큼한 레몬즙을 곁들인 샐러드는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면서도 기분 좋은 포만감을 안겨주었다.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편안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책 한 권을 쥔 채 안마당 정원으로 나갔다.오래된 올리브 나무가 아늑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정원 한편에는 라탄 의자 몇 개와 아담한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집주인인 클로딘 할머니는 테이블 위에 향긋한 민트 티 한 주전자와 조그만 칼리송 한 접시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이 지역의 전통 과자인 칼리송은 아몬드 가루를 뭉쳐 만든 나뭇잎 모양의 달콤한 디저트였다. 하얀 슈가 아이싱이 부드럽게 덮인 칼리송을 한 입 베어 물자 쫀득하고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고소한 아몬드 향이 입안에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그녀는 자리에 앉아 탁자 위에 책을 올려두었지만, 책장을 들추지는 않았다.그저 가만히 앉아 올리브나무 이파리 틈새로 쏟아지는 햇살이 바닥 위에 일렁이며 움직이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모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뭇잎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바스락거리며 건조했고 마치 오래된 옛 서적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공기 중에는 은은한 로즈메리 향이 떠돌았는데, 이는 클로딘 할머니가 아침 일찍 정원의 가지를 다듬은 뒤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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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0화

소피가 레아를 통해 전해온 메모였다. 전시 준비를 위한 구체적인 일정표가 적혀 있었고, 맨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추신이 덧붙여 있었다.[P.S. 코다르의 10월 저녁노을은 무척이나 아름답답니다. 시간이 난다면 꼭 캐슬힐에 올라가 일몰을 감상해 보세요.]그녀는 쪽지를 예쁘게 접어 에코백 안에 넣으며, 내일 저녁에는 한번 가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방 문 앞에 서서 그녀는 정원을 한 번 뒤돌아보았다.오래된 올리브나무가 노을빛 속에서 짙푸른 검은 실루엣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하늘은 연한 파란색에서 분홍빛이 감도는 주황색으로 번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한 번, 또 한 번, 묵직하고도 아스라하게 퍼져 나가는 소리였다.그녀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배 속의 아기가 다시 한번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마치 내일을 함께 기대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이윽고 밤이 찾아왔고 송남지는 최보라에게서 또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최보라의 목소리에는 시어머니가 될 사람의 까다로운 간섭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송남지는 그녀의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까지 자처하진 않았겠지만, 최보라에게 워낙 큰 비밀을 숨기고 있는 탓에 마음이 쓰여 이렇게라도 미안함을 씻어내려 애쓰는 중이었다.“지훈이 어머니가 엄격한 채식주의자라, 나까지 그분 앞에서는 강제로 풀만 뜯어야 한다니까. 게다가 화장 진하게 하는 여자를 제일 싫어하셔. 마음에 들려고 자연스러운 톤업 크림 고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넌 모를 거야.”송남지가 피식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언니는 원래 화장 안 해도 예쁘니까, 다음부턴 쓸데없이 톤업 크림 고르느라 힘 빼지 마.”웬일로 최보라는 그 말에 기분이 풀렸는지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너 은근히 말솜씨가 늘었다? 근데 나 요즘은 입에 발린 꿀 같은 소리 하는 사람들 별로 안 좋아해.”송남지가 최보라의 말을 맞받아 물었다.“어라? 그럼 언니는 독설하는 사람을 더 좋아해?”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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