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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971 - 챕터 980

1016 챕터

제971화

지금 하정훈의 머릿속은 온통 송남지의 목소리로 뒤엉켜 있었다.가정부나 요리사를 보내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혼자 집에 있는 게 좋고,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집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서 편하다고.그런데 이제 와서 연하남을 집으로 들이겠다니, 그 의도는 너무나 명백했다.오지훈은 방금 한 헛기침이 허사였다는 것을 깨달았고 최보라는 완전히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난 듯한 얼굴이었다.하정훈이 그 말에 사레가 들려 쩔쩔매는 사이, 비서 김서윤이 타이밍 좋게 등장해 구원 투수가 되어 주었다.“계약서 준비해 왔습니다.”김서윤은 공손한 태도로 계약서를 하정훈과 오지훈 앞에 펼쳐 놓았다.그러자 하정훈이 지긋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갑자기 생각났는데, 지난번 funAI 기획안에 미흡한 부분이 있지 않았어? 그걸 보완한 후에 계약을 맺는 게 어때?”오지훈은 사색이 되어 최보라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최보라는 깔끔하게 무시했다.결국 오지훈은 하는 수 없이 직접 하정훈에게 머리를 숙였다.“하 대표, 늘 대범하신 분이 오늘따라 왜 이래? 저녁에 계약 축하 파티까지 다 준비해 두었는데, 이러면...”하지만 온갖 회유에도 하정훈의 굳어 있는 안색은 도무지 펴질 줄 몰랐다.오지훈이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내가 이렇게 빌게, 어?”그제야 하정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그는 사소한 일에도 뒤끝이 있는 편이었지만, 여자를 곤란하게 몰아세우는 졸렬한 부류는 아니었다. 마침 매를 대신 맞아줄 이가 나타났으니, 하정훈은 못 이기는 척 그 자리를 물러서기로 했다.“그렇게까지 싹싹 비는 정성을 봐서, 내키진 않지만 사인해줄게.”오지훈의 시선이 최보라에게 닿았다. 억울함이 가득 고인 그 눈동자는 말하고 있었다.‘자기야, 다음부턴 제발 네 편한테 총부리 겨누지 말자.’하지만 최보라는 딴청을 피우며 눈알만 굴릴 뿐, 오지훈의 애원 섞인 시선을 가뿐히 무시했다.계약서 사인을 마치고서야 오지훈은 겨우 시름을 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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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2화

한편, 권우빈은 잔뜩 위축된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초라하고 꾀죄죄한 행색은 이곳의 깔끔하고 정돈된 분위기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관장님... 진짜 저를 집에 두고 가셔도 마음이 놓이세요?”송남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안심이 안 될게 뭐 있어? 설마 네가 집을 통째로 들고 가기라도 하겠니? 그리고 사석에서는 관장님 말고 그냥 누나라고 불러.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우리도 형편이 닿는 선에서 돕는 것뿐이니까. 나중에 본인이 능력도 생기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되니까 지금은 그냥 편히 생각해.”권우빈은 찰나의 순간, 자신이 서경에서 천사를 마주친 듯한 착각에 빠졌다.송남지가 집을 나선 지 20분쯤 지났을 무렵, 최보라가 보내준 위치에 도착했다.종업원의 안내로 VIP 룸에 들어선 그녀는 들어가자마자 속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얼굴과 마주했다.무표정한 하정훈의 얼굴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우러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마치 그 누구도 녹일 수 없는 만년 빙산 같았다.송남지는 의아한 마음에 하정훈의 모습을 몇 초간 가만히 응시했다.하정훈 역시 그녀를 마주 보고 있는 듯했으나 왠지 그 눈빛에서 왠지 모를... 매서움이 느껴졌다.이 어휘가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송남지는 시선을 피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최보라를 보았다.최보라가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연하남은 집에 잘 모셔두고 온 거야? 얼른 앉아. 음식은 미리 주문해 뒀으니까 더 시키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편인 데다 이 집 퓨전 요리가 입에 잘 맞았던 송남지는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해.”대화를 나누는 내내 송남지는 누군가의 시선이 계속 닿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고개를 들어 보면 아무도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한편 하정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송남지와 최보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틈틈이 그녀를 훔쳐보다가 송남지가 고개를 들면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그런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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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3화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오래전 불임에 가까워 임신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던 그녀였다.하지만 황우정의 말대로, 의학적 진단이 백 퍼센트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늘 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 가능성이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그러니 이미 찾아온 생명인 만큼 편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송남지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다시 하정훈을 향했다.하정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중요한 업무 메시지라도 온 것인지 그의 짙은 눈썹은 시종일관 찌푸려져 있었다.오지훈이 하정훈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퇴근한 거 아니었어? 아직도 처리할 일이 남은 거야? 네가 환자인 걸 모른대? 왜 이렇게 일을 많이 시켜?”하정훈은 오지훈에게 보이기라도 할까 봐 급히 휴대폰 화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 행동이 워낙 눈에 띄게 수상쩍었던 터라,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정훈에게 향했다.오지훈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어라? 너 연애하냐? 뭘 그렇게 숨기면서 봐?”하정훈은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집었다.“밥이나 먹어. 쓸데없이 말이 많아.”하정훈의 맞은편에 있던 송남지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정훈 씨가 연애를 한다고? 사실이 아니라면 저렇게 묵인할 리가 없는데, 왜 오지훈의 장난을 부정하지 않은 걸까?’송남지의 눈썹 끝이 살짝 처지며 미간에 그늘이 드리웠다.그 뒤로는 거의 최보라 혼자서 종알종알 수다를 떨며 식사 분위기를 주도했다. 예비 시어머니가 온갖 말로 자신을 긁어댄 이야기부터 예비 시어머니가 마음속으로 점찍어둔 이상적인 며느릿감이 얼마나 진상을 부렸는지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듣고 있자니 꽤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덕분에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어 갔지만, 자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송남지에게 권우빈의 전화가 걸려왔다.“누나...”수화기 너머 권우빈의 목소리에 난처함이 묻어나자 송남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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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4화

최보라는 말을 마치고 일부러 송남지의 눈치를 살폈다.“진짜 의외네. 난 둘이 미련 철철 넘쳐서 은근히 밀당할 줄 알았거든? 근데 생각보다 엄청 쿨하게 정리했나 봐. 벌써 둘 다 다음 사람을 찾고 말이야!”송남지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최보라의 이런 장난 섞인 부추김에는 이미 익숙해진 터였다. 변명할수록 꼬투리를 잡고 신나 할 게 뻔했기에,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한편, 룸 밖으로 나온 하정훈은 임소훈의 전화를 받았다.임소훈은 송남지의 대학 선배이자, 재스민 측과도 연이 깊은 인물이었다.특히 재스민의 아트 디렉터인 민지현과도 꽤 가깝게 지내는 터라, 하정훈이 메시지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마자 그가 곧바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진짜 오랜만이네? 나한테 연락을 다 하고. 지금 텍스트 치기가 조금 귀찮은 상황이라 그냥 전화 걸었어.”하정훈은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 휴식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사방이 우람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덕에 야외인데도 제법 시원했고 밤이 깊어 낮 동안의 무더위는 가셨지만 하정훈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답답함은 여전히 가시질 않았다.그는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임소훈의 전화를 받았다.“오랜만이야. 다름이 아니라 재스민과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임소훈은 왜 하정훈이 송남지에게 직접 묻지 않고 자신을 찾았는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송남지에게 물을 수 있는 사이였다면, 하정훈이 번거롭게 자신에게 전화를 걸 일도 없었을 테니까.“물어봐. 아는 건 전부 다 말해 줄 테니까.”하정훈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재스민에서 이번에 새로 계약한 어린 화가가 있다던데.”임소훈은 방금 호언장담했던 대로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어, 맞아. 나도 저녁에서야 소식을 들었는데, 곧 성인이 되는 어린 친구와 새로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고. 이번에 인수한 작품들은 조만간 미술 전시회에도 출품될 예정이래.”하정훈은 숨을 가볍게 들이쉬며 말했다.“그 성인을 앞두고 있다는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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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5화

그 말을 들은 최보라가 한술 더 떠 몹시 흥분한 기색으로 물었다.“대박, 미성년자를 아주 보쌈해 버린 거야?”송남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언니, 며칠 있으면 바로 성인이야.”최보라는 재빨리 핵심을 포착했다.“성인식은 어떻게 해줄 건데? 선물은 뭐 준비했어? 설마 어른들의 화끈한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려는 건 아니겠지?”하정훈의 낯빛이 완전히 어둡게 내려앉았다.송남지는 최보라를 매섭게 흘겨보았다.“언니는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평소 둘이서만 있을 때 장난치는 거라면 모를까, 지금은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였다.최보라는 꼬리를 내리는 것도 빨라 얼른 두 손을 들어 보였다.“알았어, 알았어. 이제 진짜 입 다물게, 됐지? 가자, 나 너랑 같이 가서 그 연하남이 대체 어떤 애인지 구경 좀 해볼래.”송남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지훈 씨, 언니 좀 안 말릴 거예요?”오지훈이 난처한 듯 웃으며 거들었다.“남들 한창 연애하는 데 네가 껴서 웬 훼방이냐?”최보라는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맞다, 한창 깨가 쏟아질 때인데 내가 가면 민폐지. 나 안 갈게!”최보라의 눈빛에 쓸데없이 비장한 결의가 서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비장해진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레스토랑 문을 나서자 하정훈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오지훈을 힐끗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먼저 최보라 데리고 가. 나 송남지랑 따로 할 얘기가 있어.”오지훈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 송남지와 이야기 중이던 최보라를 잡아끌었다.“가자. 아까 그 유명한 디저트 가게 가고 싶다며? 지금 안 가면 영업 끝날지도 몰라.”최보라는 단순하게도 순순히 오지훈을 따라 서둘러 차에 올랐다.그들의 차가 출발하는 것을 본 송남지는 하정훈에게 눈인사로 작별을 고한 뒤 차에 타려 했다. 하지만 하정훈의 손이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잠깐.”송남지가 뜬금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왜 그래요?”하정훈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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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6화

하정훈은 유경태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때까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두 사람은 서경 시내의 한 한적한 라운지 바에서 만나기로 했다.오늘 밤의 만남은 하정훈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하지만 창가 자리에 앉아 서경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는 하정훈은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유경태가 핀잔을 주듯 한마디 했다.“너 참 희한하다. 네가 먼저 불러내 놓고는 여기 앉아서 한참을 입 꾹 닫고 있네. 아니면 내가 독심술이라도 써서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맞춰주길 바라는 거야?”유경태는 입술을 삐쭉이며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됐다, 내가 맞춰볼게. 너 송남지가 우리 병원 찾아온 일 물어보려던 거 맞지?”하정훈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유경태의 짐작이 맞았다. 원래는 송남지가 오늘 병원에서 무슨 검사를 받았는지 물어볼 참이었지만 막상 마주 앉고 보니, 이제 와서 그런 걸 묻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하정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적당히 선은 지켜야지. 이제 그 사람 일은 더 이상 캐묻지 않는 게 맞을 것 같아.”유경태는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뜨며 하정훈을 찬찬히 뜯어보았다.“오라, 송남지한테 한 소리 들었냐? 어울리지 않게 웬 우는 소리야?”하정훈은 매번 송남지와 거리를 두려는 척했지만, 하정훈의 진짜 속마음이 어떤지는 친구로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송남지에게 큰 실망감을 맛본 게 아니라면, 하정훈이 제 입으로 ‘선’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꺼낼 리 만무했다.하정훈은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했지만, 얼굴에 스친 씁쓸함까지 숨기지는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나직이 말했다.“상처 같은 거 안 받았어. 그냥 연애 중이라기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어른으로서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을 뿐이지.”유경태는 소스라치게 놀라 되물었다.“뭐? 송남지가 연애를 한다고? 누구랑? 언제부터?”그의 반응은 당사자인 하정훈보다 훨씬 격렬했다.하정훈이 한심하다는 듯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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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7화

유경태는 굳은 표정의 하정훈을 힐끗 보며 툴툴거렸다.“에휴, 고집불통 녀석.”그는 초대장을 다시 챙겨 넣으며 깐족거렸다.“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라도 다른 사람 데리고 가서 송남지 새 남친이 어떤 놈인지 똑똑히 지켜보는 수밖에.”그 소리에 하정훈은 속이 점점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셔츠 매무새를 정리했다.“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간다. 천천히 마시고 계산은 내 비서한테 달아둬.”유경태는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병원 동료들에게 바 위치와 함께 단체 메시지를 돌렸다.[오늘 술값 전액 무료! 인생 즐길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즐겨봅시다!]마침 야간 근무를 마친 황우정을 동료 의사들이 불러 세웠다.“황 선생님, 오늘 가볍게 한잔하고 들어갈래요?”황우정은 원래 병원 친목 모임에 그리 흥미가 없는 편이었다. 적당히 둘러대며 거절하려던 찰나, 동료가 말을 이었다.“유 선생님이 오늘 모처럼 거하게 쏜다던데요?”황우정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렸다.“그래요? 그럼 가야죠. 안 그래도 다 같이 모인 지 꽤 오래됐잖아요.”바에 도착하자, 유경태는 동료들과 함께 들어서는 황우정을 보고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황 선생이 오늘 웬일로 이런 자리에 다 오셨대?”황우정은 자리를 잡고 유경태의 오른편에 앉았다.“왜요? 유 선생님, 제가 오면 술값 아까우세요? 그럼 저 그냥 갈까요?”그녀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유경태가 황우정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그럴 리가 없지. 가긴 어딜 가. 안 그래도 줄 게 있었어.”말을 마친 유경태는 미술 전시회 초대장을 꺼내 보였다.“같이 보러 갈래?”황우정은 그것이 재스민 전용 초대장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그녀는 초대장을 받아 들며 속으로 생각했다. ‘짝사랑하는 여자는 보고 싶고 그렇다고 본심을 대놓고 드러내기는 민망하니 나를 방패막이 삼아 데려가겠다 이거지?’황우정이 낮게 읊조렸다.“하여간 겁쟁이라니까.”동료들과 한창 술잔을 부딪치고 있던 유경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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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8화

송남지는 걱정스럽던 마음이 이내 따스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손을 뻗어 권우빈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바보야, 앞으로 네 삶에는 너를 아끼고 사랑해 줄 사람들이 가득할 거야.”권우빈은 슬픔에 겨워 송남지의 어깨에 기댄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작은 울음소리 하나하나가 지난날 겪어온 삶의 고단함을 대변하는 듯했다.“과분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가질 필요 없어. 너는 내 눈에 더할 나위 없는 천재고, 이 세상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충분해.”송남지는 제 어깨에 묻혀 흐느끼며 떨고 있는 소년을 나직이 다독였다. 그녀는 고통의 늪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기꺼이 우산이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마침 서경 백화점 1층은 오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고요했다.그렇기에 하정훈은 한눈에 그 익숙한 뒷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자, 뒤를 쫓던 김서윤이 기민하게 상황을 눈치챘다. 하정훈의 시선 끝을 좇아가던 김서윤의 눈동자 역시 크게 흔들렸다.그곳에는 송남지가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다정한 태도로 몸을 밀착하고 있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김서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은 비록 이혼한 사이였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여전히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송남지의 곁에 저토록 친밀해 보이는 이성이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미 완전히 마침표를 찍은 것일지도 몰랐다.김서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하 대표님, 저쪽으로 가보시겠습니까?”하정훈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차에 올라탈 때까지 하정훈의 얼굴은 내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김서윤 역시 감히 말을 얹지 못했다. 원래는 다음 일정을 안내하려 했으나, 백미러로 흘깃 본 하정훈의 안색이 워낙 어두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그는 굳이 벌집을 건드리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분위기를 살폈다.하정훈의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 같자, 김서윤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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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9화

예술 전시관 행사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흘간 진행되며, 오늘이 첫째 날이자 가장 열기가 뜨거운 날이었다.전시관 입구.유경태가 오지훈을 흘끗 보며 말했다.“아직 안 들어가고 뭐 해? 진짜 정훈이 기다리는 거야? 내가 안 온다고 몇 번을 말해.”오지훈은 전혀 급할 게 없다는 듯 입구 주변을 여유롭게 서성이며 이따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성은 본사에서 여기 예술 전시관까지 대략 25분, 전시장 앞 막히는 것까지 한 5분 쳐서 딱 1분만 더 있어 봐. 하정훈 무조건 나타날 테니까. 내기할래?”유경태가 곁에 서 있는 황우정을 슬쩍 바라보며 핑계를 대듯 말했다.“황 선생,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친구들이 대개 저렇게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풀려 있거든.”황우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딱 봐도 오지훈 씨는 꽤 치밀하고 철두철미한 분 같아요.”유경태가 콧방귀를 뀌었다.“치밀하긴 개뿔. 방금 지훈이 녀석이 한 말, 엄청 잘난 척하는 것처럼 안 보여? 게다가 내가 전에 정훈이한테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분명히 절대 안 오겠다고 딱 잘라 말했단 말이지.”오지훈은 유경태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약을 올렸다.“네가 오라고 하면 당연히 안 오지. 나한테는 아주 특별한 방법이 있거든. 그 비법이 뭔지 배우려면 넌 아직 한참 멀었어.”유경태도 약이 바짝 올랐다.“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정 못 믿겠으면 내기라도 할래? 난 하정훈 안 온다에 건다.”오지훈은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대답했다.“마침 우리 자기가 찜해 둔 가방이 있거든. 링크 보내줄 테니까 네가 결제해라. 이걸로 내기하는 거야.”오지훈은 지체 없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최보라가 보내왔던 쇼핑 링크를 유경태에게 전송했다.메시지 알림음이 울리자 유경태는 울화통이 터졌다.“야, 그럼 네가 지면? 넌 나한테 뭐 줄 건데?”그가 미처 화를 다 내기도 전에 오지훈은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응? 내가 왜 지냐?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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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0화

황우정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하정훈 역시 젠틀한 면모를 보이며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다.“안녕하세요.”유경태가 먼저 황우정을 소개했다.“이쪽은 우리 병원 황우정 선생님. 지난번에 남지 씨 검사해 주신 분이야.”송남지의 이름이 나오자, 하정훈은 황우정을 유심히 한 번 더 쳐다보았다.한편 오지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유경태의 염장을 질렀다.“이래도 인정 안 할래? 깔끔하게 승복하시지?”일행이 나란히 예술 전시관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유경태는 심통이 난 얼굴로 하정훈을 다그쳤다.“야, 내가 초대장까지 쥐여 주면서 사정할 땐 콧방귀도 안 뀌던 놈이, 오지훈 저 자식이 대체 뭐라고 꼬드겼길래 군말 없이 따라온 거냐?”하정훈이 침묵하니 오지훈 역시 입을 다물었다. 유경태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해 봐도 대체 오지훈이 무슨 수로 하정훈을 불러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묘한 공기를 감지한 황우정이 유경태를 유독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알고 보니 친구분들 사이에서 서열이 제일 낮으시네요...”유경태는 낯빛을 굳히며 대꾸했다.“오해하지 마. 나 원래는 대접받고 살았어.”황우정은 풋 하고 웃었다. 지금 유경태를 다시 보니, 평소 소문으로 듣던 전형적인 한량 도련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어쩐지 좀 귀여운 구석이 있어 보였다.하정훈은 황우정의 미묘한 시선을 단숨에 알아채고는 걷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운을 뗐다.“경태야, 너도 연애 안 한 지 꽤 되지 않았냐?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유경태의 얼굴에 속내를 들킨 듯한 당혹감이 스쳤고 그 찰나의 흔들림을 황우정 역시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황우정이 보기에 유경태의 당혹감은 하정훈에게 송남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켰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하정훈이 대뜸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까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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