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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981 - 챕터 990

1016 챕터

제981화

그리고 또 하나는 가문이나 배경이 좋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만약 소년이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다면 성은 그룹 대표인 하정훈의 존재감에 완전히 묻혔을 테지만, 권우빈에게는 불우한 출생의 비밀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대기업 대표와 비교 선상에 올려놓지 않을 터였다.어찌 보면 약점이라 여겨졌던 두 가지 단점이 모두 자연스럽게 극복된 셈이었다.하정훈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가슴 한구석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쓸쓸한 한기가 연신 파고들었다.사실 오늘 오지훈이 성은 그룹 본사에 있던 자신을 이 예술 전시관으로 이끌기 위해 아주 대단한 감언이설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었다.그저 송남지의 다음 연인이 대체 어떤 자격의 소유자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의 입을 거쳐 비참한 소문으로 전해 듣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았으니까.“멍하니 서서 뭐 해? 이 먼 길까지 왔는데 재스민 부스에 가서 힘이라도 실어줘야지.”오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일행을 앞장서 이끌었다.하정훈은 인파의 걸음에 휩쓸려 재스민 전시 구역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멍해진 찰나, 그는 이미 재스민 부스 정면에 우뚝 서 있었다.황우정이 슬쩍 하정훈의 눈치를 살폈는데, 힐끗 본 그의 눈빛은 한창 뜨겁게 연애 중인 여느 연인들보다도 더 깊은 미련과 애틋함으로 일렁이고 있었다.“쯧쯧쯧...”혼자 이 상황을 유심히 관전하던 황우정이 입안으로 혀를 찼다.혀를 차는 소리가 옆에 있던 유경태의 주의를 끌었는지, 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황우정을 돌아보았다.“왜 그래?”황우정은 눈썹을 으쓱이며 둘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아무래도 기다림의 기회가 오기도 전에 실연부터 당하시겠어요.”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하정훈이 발산하는 저토록 절박하고 갈구하는 눈빛에는 여전히 매듭짓지 못한 절절한 정념이 박혀 있었기에, 유경태 따위가 저 철옹성을 뚫고 송남지를 차지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해 보였다.하지만 유경태의 귀에는 이 말이 황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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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2화

하지만 하정훈의 곁을 지키던 오지훈과 유경태는 이때다 싶어 깐족대기 바빴다.“크으, 역시 하 대표는 스케일이 달라.”황우정은 하정훈이 평소에 이 비글 같은 두 남자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건지 내심 가엾은 생각마저 들었다.전시관 매니저는 곧바로 이 소식을 송남지에게 전달했다.소식을 전해 들은 송남지는 순간 멍해졌고 얼굴에는 복잡미묘한 기색이 서렸다.권우빈이 다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보며 물었다.“누나, 무슨 일 있어요?”송남지는 복잡한 감정을 가다듬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권우빈을 안심시켰다.“아냐, 별일 없어. 하 대표님이 네 재능을 높이 사서 원래 가격의 무려 열 배나 주고 네 작품을 구매하겠다고 하시네.”권우빈의 맑고 깨끗한 눈동자에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 찼다. 그는 그동안 재스민과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자신 때문에 그녀가 큰 손해를 입었다고 줄곧 생각해 왔다. 제 불우한 처지를 앞세워 과분한 이득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 소식이 마침내 그의 오랜 죄책감을 씻어주기에 충분했다.“누나, 저 하 대표님께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말을 마친 권우빈의 시선이 재스민 전시관 내부를 분주히 헤맸다.“응, 전시회가 끝나면 두 사람이 인사 나눌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줄게.”송남지는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이미 하정훈의 뒷모습에 가닿아 있었다.그녀는 오지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와줘서 고마워요. 정훈 씨한테도 통 크게 지갑 열어줘서 고맙다고 대신 좀 전해 주시고. 전시회 끝나고 저녁에 다 같이 밥 한 끼 먹었으면 하는데 정훈 씨 시간 되는지 좀 물어봐 줄래요?”전시 구역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인파가 북적이는 전시관 한편에서 오지훈은 송남지를 향해 오케이 손짓을 해 보인 뒤, 전화를 끊고 하정훈을 바라보았다.“남지 씨가 이따 끝나고 다 같이 저녁 먹자는데, 너 시간 되는지 물어봐 달래.”하정훈은 괜히 바쁜 척 폼을 잡으며 김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비서한테 물어봐야겠어.”수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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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3화

유경태는 황우정을 힐끗 쳐다보며 쏘아붙였다.“내가 일 말고는 사생활도 없는 사람으로 보여?”황우정은 머쓱해 하며 중얼거렸다.“전 이런 자리가 유 선생님의 사생활 전부인 줄 알았죠.”문득 유경태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황우정은 이 저녁 자리에 꼭 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정훈과 사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는 셈이니까.‘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나?'그런 생각이 들자 유경태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어, 황 선생 말이 맞아. 이런 자리가 내 사생활이긴 하지.”오지훈은 슬슬 참을성에 한계가 왔는지 짜증스럽게 끼어들었다.“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안 갈 거면 남지 씨한테 미리 말해둬야지. 예약 인원 다시 맞춰야 하니까.”유경태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툴툴댔다.“가야지, 당연히.”황우정은 그런 유경태의 변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여 그곳에 가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라도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려운 걸까? 하지만 지금 하정훈과 송남지의 관계가 이토록 냉랭한 것을 보면, 그가 걱정하는 그런 어색한 장면이 연출될 확률은 희박했다.그렇다면 설마, 송남지와 그 어린 화가 사이의 다정한 기류를 마주 하고 싶지 않은 걸까.황우정은 유경태를 은근히 놀렸다.“아까는 쿨하게 대처할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지금은 전혀 쿨해 보이지 않으시네요?”유경태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더 이상 말을 섞을 힘조차 나지 않았다.전시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송남지는 권우빈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떴고 남은 뒷정리는 임시로 민지현이 맡기로 했다. 민지현은 기분 좋게 배웅했다.“관장님, 이 녀석 데리고 가서 세상 구경도 좀 시켜주고 미리 단련 좀 시켜놓으세요. 그래야 나중에 큰 손들 만날 때 쫄지 않죠.”송남지는 사실 그 정도까지 깊이 생각하지는 못했다.오히려 자신보다 민지현이 훨씬 더 집안의 든든한 가장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짧은 대화가 오간 뒤 민지현이 송남지의 등을 떠밀었다.“얼른 가보세요. 관장님 주변 사람들은 다들 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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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화

송남지는 짧은 침묵 끝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며 평온한 미소로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 시선이 내게 몇 번이나 머물렀단 말이지? 그분이 바로 하정훈 하 대표님이야. 아마 나한테 따로 할 얘기가 있었나 보지.”권우빈은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분이 하 대표님이라고요?”소년이 무척이나 놀라워하자, 송남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물었다.“왜, 네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많이 달라?”권우빈은 순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하 대표님이 무척 까다롭고 무서운 분이라는 소문은 들었거든요. 그런데 제 그림을 사 주신 것도 그렇고, 직접 뵈니 소문과는 전혀 다른 분 같아요.”적어도 풍문 속의 하정훈은 관우처럼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대장부일 거라 상상했으나, 실제로 대면한 그는 고급스러운 귀족적 분위기와 완벽한 젠틀함이 내재된 신사였다. 그에게선 말로 형용하기 힘든 야성적인 기운이 풍겼지만 동시에 그 기운을 기품 있고 이지적인 태도가 완벽하게 중화시키고 있었다.사람을 두고 옥같다고 하는 말은 꼭 하정훈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차는 서서히 예약한 식당에 다다랐고 송남지는 오지훈 일행의 차가 이미 도착해 주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마 간발의 차로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차에서 내리기 전, 송남지는 권우빈에게 당부했다.“네가 내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저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권우빈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갔으나 그 어떤 말도 선뜻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송남지는 소년의 무거운 속내를 쉽게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넌 이제 재스민의 계약 작가야. 난 세상 사람들이 네 불우한 가정사 대신 오직 네 예술적 재능에만 집중해 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저 사람들에게 네가 왜 내 집에 머물게 되었는지 속사정을 말하지 않았단다. 그들이 멋대로 추측하게 그냥 내버려 두자.”송남지가 그 속사정을 모를 리 만무했다. 만약 사람들이 권우빈이 처한 가여운 상황을 세세하게 알게 된다면, 그들의 가시 돋친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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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5화

송남지가 담배를 피운 것도 예전 윤양에 있을 때 스트레스가 극심해서였을 뿐, 재스민으로 돌아온 후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배 속에 아이까지 가졌으니 더더욱 입에 댈 일이 없었다.“참 잘됐네요.”권우빈의 눈가에 기쁜 기색이 어렸다.그녀가 향주머니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기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예약한 룸은 2층 창가 쪽 VIP실이었다. 창문을 열자 싱그러운 녹나무 숲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붉은 석양이 하늘 끝자락까지 기어올라 황혼을 온통 선홍빛으로 물들이는 시간이었다.하정훈은 햇살을 등진 역광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뺨을 비추는 붉은 저녁노을 덕에,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평소보다는 한결 유해 보였다.송남지와 권우빈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차례로 룸에 들어섰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두 개의 빈자리는 온전히 송남지와 권우빈의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맞닿은 옆자리였다.하정훈이 유경태에게 눈짓을 보내자 눈치 빠른 유경태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권우빈에게 권했다.“여기 자리가 더 넓으니까 우리 꼬마 화가는 이쪽에 앉아.”권우빈은 다소 위축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유경태의 자리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송남지가 그의 옷소매를 부드럽게 붙잡았다.“우빈아, 넓은 자리는 손님께 양보하고 넌 그냥 내 옆에 앉아.”하정훈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아주 태연해 보이는 송남지를 힐끗 훔쳐보았다. 그녀는 남들 앞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이토록 다정하게 제 옆자리에 앉힌 적이 없었다.아주 사소한 좌석 배치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하정훈은 송남지의 확고부동한 결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문득 하정훈은 코끝이 찡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곁에 있던 유경태가 미안한 기색으로 하정훈을 슬쩍 쳐다보았다. ‘친구야, 난 최선을 다했다'는 무언의 눈빛이었다.하정훈의 얇은 입술은 칼날처럼 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그사이 송남지는 주스 석 잔을 정갈하게 따랐다. 그녀는 먼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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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6화

분위기가 극도로 무거워졌다.권우빈은 서둘러 술병을 잡고 말을 건네며 잔을 바꾸어 자신에게 술을 따랐다.“괜찮습니다. 저 술 마실 수 있어요.”인생의 쓴맛이란 쓴맛은 다 보고 산 권우빈이었다. 술맛이 좀 쓰다고 해서 못 마신다면, 그동안 견뎌온 세월이 억울할 터였다.그러나 그가 잔을 채우려는 찰나, 송남지가 손으로 잔 입구를 손으로 막았다.“난 재스민의 사장이고 넌 재스민 소속 작가야. 그러니 술자리에선 내가 너 대신 마셔줄 의무가 있어.”송남지는 얼떨결에 잔을 가로챘지만, 이내 자신이 지금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마시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사실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녀의 동작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방금 전 조급한 마음에 말이 너무 앞섰던 탓에, 순식간에 어색해진 이 판국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던 것이다.다행히 권우빈이 다시 잔을 잽싸게 낚아채 갔고 송남지가 멍하니 굳어 있는 사이 두 사람이 어설프게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정훈은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그만하지. 두 사람 다 내게 잔을 권할 필요 없어. 동정심으로 그림을 산 게 아니니, 굳이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으니까.”하정훈은 말을 마치며 룸을 나섰다. 유경태는 난처해졌다. 당장이라도 쫓아나가고 싶었지만, 황우정을 홀로 남겨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은근히 오지훈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송남지 역시 나설 생각이 없어 보이자 결국 오지훈이 몸을 일으키며 분위기를 환기했다.“먼저들 먹고 있어. 내가 가서 달래 올게. 술 마시는 사람 구경하고 싶다는데 내가 또 한 술하잖아.”말을 마친 오지훈은 급히 룸을 빠져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질 뻔한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며, 그는 간신히 하정훈의 뒤를 쫓아갔다. 하정훈이 막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오지훈은 그를 붙잡아 세우고는 한숨을 내쉬며 난감한 기색으로 물었다.“하 대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애 앞에서 웬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야?”하정훈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둡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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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7화

하정훈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몇 초 뒤, 마침내 힘을 푼 그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말없이 차 문을 열어 밖으로 발을 디뎠다.오지훈은 그를 반쯤 잡아끌다시피 차 밖으로 인도했다.“우선 밥부터 먹자. 너도 배고플 거 아냐.”다시 룸으로 돌아왔을 때, 권우빈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하 대표님, 오늘 저녁 식사 자리가 불쾌하셨다면 부디 관장님을 탓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자리에 앉은 하정훈은 비굴할 정도로 정중한 권우빈을 올려다보며 얇은 입술 끝으로 싸늘한 비소를 흘렸다.‘당연히 널 탓하지, 설마 송남지를 탓하겠냐? 웃기는 소리 하고 있어.’송남지는 하정훈을 묵묵히 바라보았지만,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오직 황우정만이 이들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지독한 애증의 치정극은 그녀가 꽤나 좋아하는 구경거리였다.다만 동료인 유경태가 조금 안쓰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을 들였건만, 정작 이 흥미진진한 드라마에서 그의 비중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 말이다.식사 시간 내내 모두가 저마다의 딴생각을 품고 있었다.송남지는 문득 최보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맨날 영양가 없는 소리만 해대긴 해도, 적어도 이런 무거운 침묵을 깨고 분위기를 띄워줄 수 있었을 테니까.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 앞에서 헤어질 무렵이었다.하정훈은 권우빈을 한번 힐끗 보고는 송남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오지훈 편에 쟤 보내.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송남지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하정훈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그녀가 오지훈을 돌아보며 부탁했다.“지훈 씨, 번거롭겠지만 우빈이 좀 집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오지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정훈을 바라보았으나, 다 큰 어른인 그가 설마 무슨 엉뚱한 짓을 하겠냐 싶어 애써 마음을 놓기로 했다.유경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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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8화

송남지는 작게 한숨을 쉬며 운전 중인 하정훈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걱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합병증이 많이 심해요?”수술 후 뒤따르는 합병증이 으레 극심한 통증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그녀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밤새 하정훈이 고통 속에서 홀로 몸부림쳤을 광경이 머릿속을 송남지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그러나 하정훈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채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 뿐이었다.붉은 노을이 서경 거리를 덮치며 도로는 금빛 서리를 얹은 듯 물들었으나, 이내 내려앉은 어둠이 그 빛을 휩쓸고 지나가며 자취를 감추었다.송남지의 눈빛에 서린 애틋함 또한 어둠 속으로 속절없이 묻혔다.그녀는 하정훈에게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조심스레 당부할 뿐이었다.“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치료 적극적으로 받으세요. 정 참기 힘들 정도로 아프면 억지로 버티지 마시고요.”하정훈은 매일 밤 뼈저리게 겪었던 외로움과 고통을 목구멍 뒤로 꾹꾹 집어삼키며, 겨우 한 글자를 뱉었다.“어.”순종적인 아이처럼 고분고분하고 나직한 대답이었다.타인에게는 단 한 번도 내비친 적 없는 하정훈의 이면이었다.차는 아주 느리게 굴러갔다. 마치 운전자가 동승자와의 시간을 찰나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어 하는 것처럼, 쓸쓸한 미련이 차의 발목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이상함을 감지한 송남지가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불편해요?”송남지는 차가 유난히 서행하자 하정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라 짐작하며 물었다.하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답했다.“어.”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다만 아픈 것은 육신이 아니라 마음이었다.구체적으로 왜 이렇게 속이 사나운지는 너무 막연하여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들었다.“갓길에 차 세우세요, 내가 운전할게요.”송남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하지만 하정훈은 차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괜찮아,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니까.”그는 정처 없이 시선을 흩뜨렸다. 송남지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이 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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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9화

송남지가 차에서 내리려 하고 있었다.머리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정훈의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오늘 밤이 지나고 난 뒤엔 영영 늦어버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 마주할 사람이 권우빈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하정훈은 숨이 턱 막히는 고통을 느꼈다.이제 막 성인을 앞둔 소년 권우빈, 그는 비록 처지는 곤궁할지언정 캔버스 앞에서는 독보적인 재능을 빛내는 존재였다. 재스민의 계약 화가로서 송남지와 예술이라는 언어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온전한 교감을 나누는 특별한 파트너이기도 했다.소년은 가난했지만, 그에겐 튼튼한 육신이 있었다. 자신처럼 매일 밤을 갉아 먹는 고통스러운 합병증 따위도 앓지 않았다.어쩌면 그 소년이야말로 송남지의 곁을 가장 오래, 그리고 평온하게 지켜줄 적임자일지도 몰랐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정훈이 하려던 모든 말들이 목구멍 속으로 꽉 막혀 버려 그저 목덜미를 긁어대는 쓰라린 미련으로 화해 흩어질 뿐이었다.송남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힘을 주어 문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돌연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하정훈을 바라보았다.사실 그녀 역시 오늘 밤 하정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고마워요.”뜬금없이 건네진 감사 인사에 하정훈은 굳어버렸다. ‘어째서 고맙다는 거지? 혹시 내가 제 발로 물러나 준 덕에 권우빈을 만날 수 있게 되어 고맙다는, 그 잔인한 뜻인가?’순간 콧날이 시큰해지며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구쳤지만 그는 억지로 담담한 척 대꾸했다.“별말을 다 하네.”송남지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내가 뭘 고마워하는지 알고 대답하시는 거예요? 성급하게 별말 아니라고 하고...”하정훈은 찌푸려진 눈썹을 잔뜩 굳히며 나지막이 물었다.“뭐가 고마운데?”그저 형식적인 질문이었지만, 의연한 척하는 그의 내면에서는 은근한 기대감이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부디 송남지의 그 고마움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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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화

멀어질수록 점점 작아지는 송남지의 뒷모습을 보며 하정훈은 입술을 달싹였다.어떤 말은 충동적인 그 순간에 뱉지 못하면, 영영 닫힌 문 뒤로 사라지게 되는 법이다.마침내 송남지의 그림자가 건물 안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목덜미를 조여오던 그 뜨거운 이름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안개처럼 허망하게 스러졌다.고요한 달빛이 그의 옆얼굴로 창백하게 내려앉았다.달빛이 시린 탓인지 지금 그의 눈빛에는 서늘한 한기만이 가득 고여 있었다.하정훈은 생각했다. 오늘 밤이 아마도 모든 것의 종착역일 것이라고. 서로의 마음에 남아있는 미련조차 완전히 끊어내는 밤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송남지가 재스민으로 복귀한 후 거둔 가장 눈부신 성과는 단연 이번 전시회였다.엄청난 화제성과 흥행을 동시에 거머쥔 것은 물론, 이름조차 없던 무명 화가를 단숨에 화려한 스타덤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이제 미술계 사람들은 송남지를 두고 더 이상 재스민을 처음 맡았을 때의 그저 그림만 그릴 줄 알던 어설픈 아가씨라거나 과거 반달 동물원 벽에 유화를 칠하던 그 풋풋한 소녀라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갤러리 재스민의 대표이자, 차세대 유망주를 발굴해 키워낼 안목을 지닌 거물급 자본가로 통했다.기내에서 이런 언론의 평가를 읽으며 송남지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으나, 이내 기사의 과장된 어조가 실소를 자아내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진짜 자본가들을 숱하게 대면해 본 그녀로서는 언론이 자신에게 씌운 자본가라는 프레임은 그저 과장된 수사에 불과했다. 자신이 어찌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그들의 잔혹한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는 스스로가 그들과는 아직 한참이나 동떨어진 부류임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었다.잡지를 덮은 송남지가 뻐근한 눈을 가만히 비벼댔다.임신한 이후로는 눈이 유독 쉽게 피로해지는 듯했다.곁에 있던 권우빈이 아이패치를 내밀었다.“눈 좀 붙이세요. 목적지까지 아직 네다섯 시간은 더 남았으니까요.”송남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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