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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1001 - 챕터 1010

1012 챕터

제1001화

송남지가 그 바다를 처음 마주한 곳은 캐슬힐의 돌계단 위였다.광활한 코다르 만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천사만이 그리는 곡선은 다정한 팔처럼 캐슬힐에서부터 저 멀리 공항까지 부드럽게 이어졌고 바다는 수심에 따라 층층이 다른 푸른빛을 띠었다. 발치에 닿을 듯 가까운 곳은 투명한 민트빛, 중간은 선명한 군청색, 그리고 아득히 먼 곳의 짙은 남색은 하늘과 맞닿아 경계마저 흐릿했다.석양의 여운이 바다를 녹아내린 호박색으로 물들였고 금가루를 흩뿌린 듯 일렁이는 물결은 마치 심해의 보물 상자가 엎질러진 것만 같았다.구시가지에서부터 이어진 돌계단을 오르는 송남지의 걸음은 한없이 더뎠다.한 손으로는 난간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심스레 배를 감싼 채, 열 계단쯤 오를 때마다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31주 차에 접어든 배는 넉넉한 린넨 원피스 아래로 둥근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오르막을 오르는 매 걸음은 그녀에게 몸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계단 위로 오가는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성수기가 지난 10월의 코다르는 한결 여유로웠고 캐슬힐에는 인파 대신 한적한 풍경만이 남았다. 그저 돌담에 삼삼오오 앉아 사진을 찍는 연인들과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자, 그리고 만족스러운 각도를 찾으려 애쓰는 동양인 소녀가 눈에 띌 뿐이었다.마침내 정상의 전망대에 도착한 송남지는 한적한 곳을 골라 돌벽에 기대어 뺨에 닿는 서늘한 바람을 느꼈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코다르의 전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구시가지의 주황빛 지붕들이 층층이 겹쳐지며 바닷가로 이어지는 모습은 마치 햇살에 뜨겁게 달궈진 테라코타 같았다. 저 멀리 공항 활주로에선 비행기 한 대가 이륙하고 있었는데 은백색 기체가 역광을 받아 지평선을 박차고 오르는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그녀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보이니?”주변을 가득 채운 프랑코니아어, 영어, 인타리어의 소음 속에서 그녀의 언어는 유독 은밀하게 번져나갔다.“저게 바로 네가 앞으로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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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2화

너무도 돌연한 고동이었다. 마치 누군가 가슴팍을 주먹으로 거세게 내리친 것만 같았다.송남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고 움켜쥔 연필 끝이 종이 위를 거칠게 긁으며 날카로운 흔적을 남겼다.하정훈인가?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말도 안 돼, 그 사람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하정훈은 지금 서경에 있어야 했다. 최근 들어 업무의 거점을 남성으로 옮겼다지만, 뉴스에서는 연일 그가 고은비와 함께 서경으로 돌아갔다는 기사를 도배하듯 쏟아내고 있었으니까.심지어 두 사람이 나란히 하정훈의 부모님까지 찾아뵈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았던가?지금쯤 그는 성은 그룹 본사의 쉴 틈 없는 회의와 서류 더미에 파묻힌 자신의 사무실에 있어야 마땅했다.그러니 10월의 늦은 오후, 이국적인 코다르의 캐슬힐 석양 아래에서 낯선 다크 그레이 슈트를 입고 관광객들 틈에 섞여 통화를 하고 있는 그 남자는 하정훈일 리가 없었다.송남지는 눈을 몇 번이고 깜빡여 보았다. 어쩌면 빛 때문이거나, 임신 탓에 시력이 나빠진 탓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피곤한 나머지 뇌가 만들어낸 환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어쩌면 그저 옆모습이 닮은 행인일 수도 있었다. 프랑코니아 남부에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들이 지천이었고 길을 걷는 누구를 봐도 영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했으니, 그저 하정훈을 조금 닮은 사람을 우연히 본 것일 터였다.그녀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그 남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그때 그가 방향을 틀어 완전히 그녀 쪽을 마주 보았다. 뉘엿뉘엿 지는 노을빛이 그의 얼굴에 정면으로 쏟아지며 이목구비를 티 없이 선명하게 비추자 셀 수 없이 많은 밤 동안 그녀가 응시했던 그 눈동자와 그를 알게 된 첫날부터 시원하게 펴진 꼴을 본 적 없는 미간의 주름, 그리고 가장 살을 맞대고 있던 순간조차 일말의 거리감이 배어 있던 그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하정훈이었다.송남지는 자신의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가 다음 순간 심장으로 왈칵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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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3화

20미터 거리와 주변의 소음 탓에 하정훈이 하는 말은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송남지는 그 목소리의 질감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낮고 절제된, 거부할 수 없는 타고난 권위가 서린 그 목소리 말이다.꿈결에 들어도 즉각 반응할 만큼 지독하게 익숙한 그 음성에 송남지는 왈칵 눈시울이 시큰해졌다.슬픔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 오래 억눌러온 감정들이 그를 마주한 순간, 터진 풍선처럼 온몸의 빈틈을 비집고 쏟아져 내린 것뿐이었다.코다르의 햇살과 올리브 나무 아래서 전부 정리했다고 믿었던 감정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숨죽여 웅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송남지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도망치듯 점점 더 빨라졌다.오른손은 배를 보호하고 있었고 왼손으로는 가방끈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섬유 속으로 파고드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계단 가의 협죽도는 어둠 속에서 칙칙한 녹색으로, 바다는 로즈 골드에서 보랏빛으로, 하늘은 주황에서 남색으로 빠르게 물들며 점차 선명했던 색들을 잃어갔다.산허리에 이르자 기어이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몸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무거운 임산부의 몸으로 이토록 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건 무리였기에, 온몸이 한계에 부딪혀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난간을 붙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달아오른 뺨을 스치는 선선한 저녁 바람 끝에는, 바다의 짠내와 아득히 먼 레스토랑에서 피어오른 고소한 올리브유 향이 야속하리만치 다정하게 배어 있었다.송남지는 눈을 감은 채 억지로 호흡과 심박수를 늦추며 머릿속에 엉켜드는 복잡한 생각들을 짓눌렀다.하정훈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넉넉한 옷차림에 머리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 서경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인 모습이었으니까.설령 그가 보았다 한들, 기껏해야 스쳐 지나가는 뒷모습이 전부였을 터였다.눈을 뜬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불룩한 배를 내려다보며 쇳소리 섞인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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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4화

송남지는 사탕 포장을 뜯었지만 서경에서 온 동양인 아가씨 따위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온통 캐슬힐에서 마주친 그 남자의 실루엣만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때, 입안 가득 찌르듯이 퍼지는 레몬 사탕의 지독한 신맛에 송남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의아한 얼굴로 클로딘을 쳐다보았다. 클로딘은 돋보기를 고쳐 쓰고 사탕 봉지를 요리조리 살피더니 이내 짓궂게 웃어 보였다.“미안해, 송. 이게 100퍼센트 레몬 맛인 줄은 몰랐네.”클로딘은 재빨리 달콤한 과일 주스를 내밀었다.송남지는 빨대를 물고, 혀끝을 마비시킬 듯한 강렬한 신맛을 지워내려는 듯 허겁지겁 주스를 빨아들였다.송남지가 진정하는 사이, 클로딘은 그 아시아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무심하게 이어갔다.“이름이 아주 예쁘더구나. 자기를 ‘은비’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프랑코니아어에는 없는 낯선 발음이라 내가 애를 먹으니까 그냥 ‘비’라고 부르라며 다정하게 웃더라고.”비.프랑코니아어로 요정이라는 뜻이었다.송남지는 아무 말 없이 주스 팩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리 없이 빨아들였다.은비.그 이름은 이미 불안하게 일렁이던 그녀의 마음속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같았다.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키며 무겁게 번져나갔다.클로딘은 은비를 처음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정말이지 요정이 강림한 줄 알았단다. 하얀 셀린느 백을 들고 서 있는 자태가 어찌나 섬세하고 우아하던지. 동양 여자들 특유의 그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가 뚝뚝 묻어나더라니까.”이방인 할머니마저 찬사를 아끼지 않을 만큼 완벽한 여자라니. 안 봐도 뻔했다. 하정훈의 가족들 역시 그녀를 퍽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남성의 명문가 자제에 흠잡을 데 없는 배경, 구김살 없이 완벽한 환경에서 자랐을 테고, 우아하게 테니스를 치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선 파티에서 품위 있게 미소 지을 줄 아는 그런 여자일 테니까.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뼛속 깊이 화실의 물감 냄새와 독한 테레핀유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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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5화

“괜찮니? 안색이 몹시 안 좋아 보이는데.”클로딘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서두름 없이 상대를 꿰뚫어 보는, 노인 특유의 깊은 통찰력이 담긴 시선이었다.“아까 말한 그 동양인 아가씨, 혹시 아는 사람이니?”송남지는 시선을 떨구며 걷잡을 수 없이 들끓어 오르는 감정들을 하나씩 무겁게 짓눌러 갈무리했다.속수무책으로 요동치는 마음과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을 분리하고, 내면과 외면을 철저하게 떼어놓는 법을 익히기까지 그녀는 꽤나 길고 고단한 시간을 건너와야만 했다.“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다시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늪처럼 어떠한 일렁임도 없었다.“단지 좀 피곤해서 그래요. 정말이에요.”클로딘은 몇 초간 송남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더 묻지 않고 그 대답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송남지가 프랑코니아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었다. 그들은 아멜국 사람들처럼 과장된 다정함을 앞세워 억지로 속내를 털어놓으라 다그치지도 않았고, 알비온 사람들처럼 싸늘한 침묵을 무기 삼아 상대의 무례를 지적하지도 않았다.프랑코니아 사람들에게 타인의 침묵이란, 그저 치즈 곁에 곁들여진 포도 한 송이와 같았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그들은 상대가 입을 닫는다고 해서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네 방 바로 위층인 2층에 묵는단다.”클로딘이 날씨라도 이야기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테라스가 딸린 방인데, 무슨 프로젝트 때문에 당분간 머물 거라고 하더구나. 어떤 남자랑 같이 온 모양인데... 확실하진 않아. 체크인할 때는 혼자였는데 짐은 두 사람 몫이었거든.”송남지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두 사람 몫의 짐.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하정훈과 고은비가 같은 호텔에 머문다는 사실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세미엘 언덕의 막다른 골목에 자리한, 객실이라곤 고작 열두 개뿐인 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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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6화

분명 아주 희미한 발소리였으나 송남지의 마음은 극도로 요동쳤다. 마치 용서받지 못 할 짓을 저지른 사람처럼 죄책감이 목을 조여왔다.하정훈이 이미 그녀를 밀어냈음에도, 남들 몰래 이곳 코다르로 도망쳐 숨어 지내며 아이를 낳으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만약 고은비와 하정훈의 결합이 가문의 축복을 받고 세상의 부러움을 사는 완벽한 결혼이라면 어떡하지?그러면 자신이 몰래 하정훈의 아이를 낳는다는 건 비도덕적인 행위가 되는 게 아닐까?송남지는 도저히 자기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게 공감하는 그녀로서는, 만약 자신이 고은비의 입장이라면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려던 찰나에 자신과 일말의 연관도 없는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상상조차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고 불쾌한 일일 것 같았다.송남지는 등나무 의자에 파묻히듯 기대어 한참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만하자. 그 여자가 고은비라는 보장도 없잖아. 어떻게 이 넓은 코다르에서 똑같은 숙소에 머물겠어.”하지만 억누르려 할수록 불안감은 끈질기게 그녀의 마음을 잠식해 들어왔다.“만약 그들이 정말 여기 머물고 있다면 어떡하지?”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국내 시각 새벽 세 시에 난생처음으로 권우빈에게 전화를 걸었다.권우빈은 고요를 깨는 다급한 벨 소리에 눈을 떴다. 적막한 밤공기를 가르는 새벽 세 시의 벨 소리는 유난히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그는 전화를 집어 들고 발신인을 확인한 뒤, 잠기운 섞인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일부러 목청을 가다듬었다.“여보세요? 누나, 이 시간에 무슨 일 있어요?”권우빈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수화기 너머의 한마디는, 그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잠기운마저 단숨에 날려버렸다.“우빈아, 내 아이의 명의상 아빠가 되어줄 수 있겠니?”머리 위로 찬물을 통째로 뒤집어쓴 듯, 온몸의 감각이 거칠게 깨어나는 기분이었다.“아이요? 갑자기 무슨 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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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7화

내일도 해는 어김없이 떠오를 것이다. 세미엘의 올리브 숲을 달콤한 꿀빛으로, 구시가지의 지붕들을 붉은 테라코타 빛으로 물들이며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늘 조색하기 까다로웠던 그녀의 수첩 속 그 오묘한 색감으로 바꾸어 놓겠지.내일도 일상은 묵묵히 흘러갈 것이다.그리고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눈을 감고 수면이라는 파도가 밀려와 잠시나마 자신을 완전히 덮어버리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송남지는 정확히 시간에 맞춰 정원으로 향했다. 미색 리넨 원피스에 머리를 낮게 묶어 내린, 화장기 없는 수수한 차림이었다.임신 후기에 들어서며 화장을 멀리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피부는 코다르의 찬란한 햇살 아래 피부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윤기를 띠고 있었다.정원에서는 클로딘이 아침 식사를 분주히 준비하고 있었다.푸른 줄무늬 식탁보가 깔린 긴 테이블 위에는 갓 구운 크루아상, 무화과 잼, 버터,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초코, 그리고 정갈하게 손질된 과일들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올리브 나무 아래에는 이미 한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고은비였다.송남지는 복도 출구에 2초간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시간은 그녀를 또렷하게 관찰하기에 충분했다.사진과 실물은 확연히 달랐다.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필터로 덧칠된 '명문가 자제의 정석' 같은 이미지가 사진 속의 그녀라면, 지금 눈앞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이 여자는 아침 여덟 시의 자연광 아래서 아무런 꾸밈없이도 자꾸만 시선을 붙잡아 맬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그녀는 호텔 가운 대신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개나리색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원단은 아침 햇살을 받아 섬세한 결을 따라 고운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어깨 위로 흩어진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은 더할 나위 없이 고혹적이었다.그녀는 식사 대신 커피잔만 든 채 정원 구석의 라벤더 덤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고요하고 차분한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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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8화

송남지는 크루아상을 베어 물며 시선을 정원 한구석 라벤더 꽃 덤불에 두었다.시월의 라벤더는 이미 절정기가 지나 보랏빛 대신 잿빛 초록이 감돌았지만, 그 나름의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었다. 한여름의 맹렬함과는 사뭇 다른 차분하고 은근한 운치였다.그녀는 고은비를 쳐다보지 않았고 고은비 또한 마찬가지였다.정원에는 클로딘이 식기를 놓는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섞여 들 뿐이었다.두 여자가 같은 공간에 머물며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똑같은 올리브 나무의 그림자 아래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들은 같은 도시에서 팔천 킬로미터를 날아와 객실이 열두 개뿐인 호텔에 묵으며 같은 긴 탁자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5미터도 채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철저하게 서로를 외면했다.이것이 암묵적인 합의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인지 송남지는 알 길이 없었다.다만 그녀가 확신하는 단 하나는, 자신이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굳이 먼저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그저 코다르에 업무차 방문한 임산부였고, 이 조용한 호텔의 투숙객으로서 다른 손님과 얽힐 이유는 전무했다.저 여자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이곳에 머무는지 따위는 알 필요가 없었다. 그 무엇도 알고 싶지 않았다.이것이 송남지가 세운 전략이었다.모른다. 모르는 일이다. 관심 없다.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송남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클로딘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무화과 잼 맛이 정말 좋네요.”그녀는 고은비 쪽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곧장 정원을 빠져나왔다.에어로포르 전시 센터의 사원증을 목에 건 송남지는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바닥에 웅크려 앉아 권우빈의 그림을 마주 본 채, 노트에 조명 값을 꼼꼼히 기록하며 소피와 프랑코니아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전시 방안을 논의했다.그녀는 스스로를 업무의 리듬 속에 완전히 침전시켰다. 마치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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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9화

두 사람은 10분 동안 같은 공간에 공존했고 가장 가까울 때는 거리가 8미터도 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시선의 교차도, 대화도, 서로를 확인하려는 기색조차 없었다.고갯짓도, 미소도, ‘너를 안다’는 뉘앙스의 눈빛도 없었다.그저 완전한 타인일 뿐이었다.송남지는 고은비가 왜 아에로포르 전시 센터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코다르의 랜드마크인 이곳에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찾아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 단순한 우연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생각을 파고들지 않았고 굳이 캐물을 마음도 없었다.오후 세 시, 소피와 다음 날 일정을 조율하고 전시장을 나선 송남지의 시야에 검은색 차량 한 대가 들어왔다.택시나 호출 차량이 아닌, 방금 세차를 마친 듯 오후 햇살 아래 눈부신 광택을 뿜어내는 고급 벤츠였다. 열려 있는 뒷좌석 문으로 고은비가 막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허리를 굽혀 차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옆얼굴이 햇살을 받아 유난히 희고 투명하게 빛났다. 이내 문이 닫히고, 차는 미끄러지듯 도로의 흐름 속으로 녹아들어 아젤 강 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송남지는 전시 센터 계단에 선 채, 차가 교차로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때 문득 한 가지 사실이 스쳤다.고은비는 차를 대동하고 왔다. 택시도, 앱으로 부르는 공유 차량도 아닌 운전기사가 딸린 개인 승용차였다.그것도 호출 택시 같은 것이 아닌, 전속 기사가 딸린 개인 승용차로 말이다.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코다르에 독자적인 이동 수단이 있다는 뜻이고, 혼자 온 게 아니라는 뜻이며, 또...그녀는 더 이상 이어지려는 생각을 억지로 끊어내 버렸다.소피는 넋을 놓고 있는 송남지를 보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송? 어디 안 좋아요? 몸도 무거운데 굳이 직접 올 필요 없어요. 이런 건 온라인으로 논의해도 충분하잖아요.”소피의 눈빛에는 같은 여성으로서 건네는 따뜻한 배려와 걱정이 담겨 있었다.송남지는 입가에 옅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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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0화

권우빈이 코다르에 도착하는 오후, 지중해의 바람이 짠 내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송남지는 마중을 나가는 대신 르 파티오 정원의 오래된 올리브 나무 아래에 서서 화분 사이에서 낮잠을 자는 오렌지색 고양이를 지켜보며 무의식적으로 불룩해진 배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임신 31주 차의 배는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아무리 헐렁한 린넨 원피스를 입어도 그 둥근 곡선은 마치 작은 달 하나가 그녀 몸 한가운데 고요히 걸려 있는 듯했다.그때, 주방에서 민트 티 한 주전자를 들고나오던 클로딘이 나무 아래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프랑코니아어로 무어라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송남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아마 멍하니 있다고 놀리는 말 같았다.그녀는 정말 멍하니 있었으니까.캐슬힐에서 그 뒷모습을 본 이후로, 그녀의 마음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이 하정훈이 맞는지 다시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고 클로딘에게 위층 동양인 아가씨의 동반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묻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그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시간대를 피하려 애썼다. 그녀는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정원 구석, 전시 센터의 백스테이지, 방의 테라스 구석으로 자신을 웅크려 넣으며 먼저 움직이지도, 누구도 다가올 틈을 주지 않은 채 숨죽여 지내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정훈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더 깊은 층위에서 본능처럼 꿈틀대는 감각. 마치 첫 임신을 확인한 날, 제 몸속에서 낯선 심장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과 같았다.하정훈의 존재도 그랬다. 위층, 같은 지붕 아래, 같은 주소지 안에 그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마치 낮은 진동을 내는 소리굽쇠처럼 스물네 시간 내내 그녀의 내면에서 쉼 없이 공명하고 있었다.권우빈은 택시를 타고 도착했다.정원 너머로 캐리어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훤칠하고 마른 체격의 소년이 낡은 아마 색 책가방을 메고 나타났다. 손에는 공항 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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