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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481 - 챕터 490

580 챕터

제481화

박재용은 캐리어를 들고 송남지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사무실까지 배웅했다.갤러리 자체는 웅장했지만 대부분이 전시 공간이라 사무실 면적은 그리 넓지 않았다.박재용은 사무실 문가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말을 건넸다.“송 여사님, 여기가 사람이 먹고 자기에 적당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송남지는 자신의 사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주 좁은 건 아니었지만 작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커다란 책상에 인체공학용 의자까지 자리 잡고 있어 여유 공간이 별로 없었다.침대 하나를 더 들여놓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송남지는 박재용의 농담을 무시한 채 소파의 길이를 눈대중으로 가늠해 보았다.아무리 봐도 좀 작았지만, 그런대로 하룻밤 때우기엔 나쁠 것 같지 않았다.그녀는 박재용의 손에서 캐리어를 건네받아 사무실 안으로 들여놓으며 말했다.“정 안 되면 언니한테 가서 자면 돼요.”박재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강조했다.“말했잖아요. 내 별장 빌려줄 수 있다고. 지인 특별가로 싸게 줄 테니까 생각 있으면 말해요.”송남지는 박재용이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그저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소리임을 눈치챘다.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꾸하지 않았다.박재용도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민 실장님이 이따가 회의 있다고 하던데. 화장실 좀 들렀다가 회의실로 갈게요. 그럼 나중에 봐요.”박재용이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송남지가 작게 투덜거렸다.“진짜 예의 없네. 민지현은 민 실장이라고 부르면서 나한테는 송 여사가 뭐야.”그런데 십여 미터나 걸어갔던 박재용이 갑자기 뒤를 돌아 송남지를 빤히 쳐다보았다.“송 여사님, 뒤에서 남 욕하면 벌 받아요.”송남지는 기가 막혀서 소리를 질렀다.“아니, 그렇게 멀리서 그게 들려요?”박재용이 씩 웃었다.“신은 공평하시거든요. 한쪽 창문을 닫으시면 다른 쪽 문은 열어주시는 법이죠. 난 어릴 때부터 청력이 유독 좋았으니까 내 흉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송남지는 입술을 지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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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2화

민지현의 말을 듣고 나니 송남지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 입은 정말이지 못 하는 말이 없었다.박재용이 지금 그녀의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 무슨 미약이라도 먹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송남지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우리 사이를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다만, 민 실장님이 말한 그 문제, 방법은 한번 찾아볼게요.”사실 박재용을 영입하려 할 때 이미 비장의 카드 한 장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바로 엄가을이었다.이 카드를 이제 꺼내 써볼 때가 된 것 같았다.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송남지의 사무실 앞까지 왔고 민지현은 차 한잔하며 쉬어갈 생각이었으나 송남지가 그녀를 가로막았다.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민지현이 꼬치꼬치 캐물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 지금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차는 다음에 마셔요.”민지현은 의아해하면서도 깊이 파고들지 않고 흔쾌히 수긍했다.“그래요, 저도 마침 할 일이 좀 남았거든요.”송남지는 늦은 밤까지 업무에 매달렸다.달이 높게 뜬 시각, 송남지는 달빛을 등진 채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갤러리를 운영하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했지만, 이런 피로감이야말로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일을 마치고 나니 그저 따뜻한 물에 씻고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송남지는 좁은 소파와 사무실 안을 훑어보았다.샤워 시설도 없는 데다 저 작은 소파에서 잠을 청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에서 속옷과 옷가지를 꺼내 검은색 가방에 옮겨 담았다.채비를 마친 그녀는 곧장 택시를 호출했고 차는 시간에 맞춰 갤러리 밖으로 도착했다.멈춰 선 차의 전조등이 그녀를 비췄고 번호를 확인한 송남지는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목적지는 최보라가 미리 알려주었던 시내 중심가의 고급 아파트였다.사무실 소파에서 고생하느니 언니네 집에서 쉬는 게 훨씬 나을 터였다.밤늦도록 업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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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3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송남지는 아차 싶었다. ‘보라 언니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둘 걸 그랬나?’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워낙 허물없는 사이였기에, 하룻밤 묵어가는 일로 미리 생색을 냈다간 되레 최보라의 요란한 잔소리만 들을 게 뻔했다.결국 그녀는 연락 없이 그냥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이 아파트는 아직 입주율이 낮아서인지 한 층에 두 가구뿐인 복도가 한산했다.송남지는 최보라의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른 뒤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나야, 집 앞이야.”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들려오자 송남지는 최보라가 집에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런데 30초가 지나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휴대폰에도 답장이 없었다. 송남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그렇게 1분 가까이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분명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지는데도 말이다.“TV 소리에 묻혔나? 뭘 보길래 인기척도 못 들어?”송남지는 작게 투덜거리며 대화창을 뒤져 예전에 최보라가 알려주었던 비밀번호를 찾았다.역시나 최보라의 생일이었다.그 시각 침실, 오지훈은 최보라의 매끄러운 실크 잠옷을 움켜쥐고 막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흐름이 끊기자 오지훈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배달시켰어?”최보라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서경에 연고도 거의 없었기에 오지훈은 당연히 배달 음식일 거라 짐작했다.최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오지훈을 쳐다봤다.“밥 먹을 시간도 안 주고 달려드는데, 배달이라도 안 시켰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 거야.”오지훈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삼키듯 속삭였다.“배고프면 진작 말을 하지. 내가 진작 배불려 줬을 텐데.”오지훈의 손길이 거칠어지자 최보라가 다급히 그를 말렸다.“이러지 마! 배달 왔다니까! 내가 나가서 가져올게.”오지훈은 최보라의 두 손을 단단히 억누르며 낮게 읊조렸다.“그냥 문 앞에 두고 가라고 해. 지금 이 순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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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4화

한편 송남지는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로 집 안 전체를 훑어보았다.분명 안에서 무슨 기척을 들었는데,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보니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분명 들어올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선명했다.송남지는 텅 빈 거실을 바라보며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집에 도둑이 든 건 아닐까?’이런 생각이 들자 송남지의 마음속에는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차라리 금품만 노리는 도둑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자신이 도둑의 일을 방해해서 그가 딴마음을 품기라도 한다면...생각이 깊어질수록 송남지는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했다.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문득 최보라가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혹시 최보라가 도둑과 맞닥뜨려 변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송남지는 눈을 질끈 감고 결단을 내렸다.‘안 돼,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어. 언니부터 확인해야 돼.’송남지는 숨을 죽인 채 침실 쪽으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릴 정도로 요동쳤다.문가에 다다르자 머릿속에는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도둑이 이미 최보라에게 손을 댔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이 떠오르자, 송남지는 설령 자신이 위험에 처하더라도 언니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도둑과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문고리를 잡으려 뻗은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가느다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고 송남지는 이내 문을 홱 밀어젖혔다.“악!”안에서 최보라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최보라의 날카로운 비명에 송남지는 역시 안 가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만약 그냥 가버렸다면 평생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하지만 안심도 잠시, 송남지는 다음 순간 아연실색했다.베개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든 채, 마치 무기처럼 쥐고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지훈이었던 것이다.심지어 오지훈은 속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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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5화

최보라는 송남지의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 혹시 갈 데 없어서 그래? 가지 마, 오늘 밤 나랑 같이 자면 되잖아.”하지만 송남지는 도저히 여기 남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 눈치 없는 불청객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아니야, 아니야. 나 가야 해. 그냥 길 좀 익혀두려고 들른 거야. 다음에 기회 되면 그때 올게.”송남지가 서둘러 몸을 돌리자 최보라는 끈질기게 그녀를 붙잡았다.“가지 말라니까! 이왕 왔는데 저 사람 보내면 되지.”오지훈도 눈치껏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주워들고 옷을 챙겨 입으며 거들었다.“남지 씨가 여기 있어요. 저 바로 갈게요.”송남지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래요. 먼저 갈게요!”실랑이가 이어지던 찰나, 초인종이 기묘한 타이밍에 울려 퍼졌다.오지훈이 옷 입는 걸 지켜보고 있기가 민망했던 송남지는 빛의 속도로 현관으로 달려갔다.“내가 열게!”송남지가 현관문 외시경으로 밖을 살피니 배달원이 서 있었다.그녀가 문을 열자 배달원이 쇼핑백을 건넸다.“안녕하세요, 주문하신 팝핑 캔디 배달 왔습니다.”옷을 다 챙겨 입은 오지훈과 최보라가 거실로 나왔을 때, 분위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색해졌다.송남지의 손에는 팝핑 캔디가 든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이 사탕이 이 야심한 시각에 대체 어떤 용도로 쓰일지는 이미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최보라가 쇼핑백과 오지훈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너야? 네가 시킨 거야?”오지훈은 생전 처음 겪는 역대급 망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답했다.배달원이 웃으며 말했다.“물건이 잘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괜찮으시다면 좋은 평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송남지는 손에 든 쇼핑백이 마치 뜨거운 감자라도 되는 양 최보라에게 급히 떠넘겼다.“저기, 나... 다시 갤러리로 가볼게!”송남지가 바람처럼 사라진 뒤 남겨진 오지훈과 최보라는 한동안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최보라는 깊은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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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6화

하정훈은 송남지에 관한 일이라면 단 1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뜸 들이지 말고 당장 말해.”오지훈도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 깊은 밤에 송남지 혼자 밖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오지훈은 방금 일어난 소동을 하정훈에게 빠르게 설명했다.이야기를 들을수록 하정훈의 미간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그는 몸에 묻은 물기를 채 닦지도 못한 채 서둘러 탈의실로 향했다.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옷을 챙겨 입으며 하정훈이 외쳤다.“빌어먹을! 여자 혼자 이 시간에 밖에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데!”하정훈의 서슬 퍼런 반응에 오지훈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베개로 송남지를 내리쳐 기절시킬 뻔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만약 그 사실을 들켰다면 오지훈 역시 오늘 밤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통화를 마친 오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아 있는 최보라에게 다가갔다.그는 최보라의 몸 위로 몸을 숙이며 귓가에 매혹적인 목소리를 흘렸다.“이제 방해꾼은 사라졌어. 남지도 참 센스 있다니까...”하지만 흥이 다 깨져버린 최보라는 오지훈을 밀쳐냈다.“그만 가. 나 이제 그럴 기분 아니야.”잔뜩 달아오른 오지훈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처음에는 농담조로 칭얼거렸다.“나 지금 이런 상태인데 어떻게 가라는 거야?”최보라는 방금 전의 소동이 떠올라 여전히 민망했고 혼자 나간 송남지가 걱정되어 도저히 오지훈과 사랑을 나눌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어떻게 가긴, 운전 못 하겠으면 내가 택시 불러줄게.”최보라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자 오지훈도 더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그는 축 늘어진 어깨로 최보라의 집을 나서며 속으로 울화를 삼켰다.최보라를 만나기 전까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쫓아낸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한편, 송남지는 혼자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새벽의 칼바람이 그녀를 덮쳤다.한기는 생각보다 매서웠다.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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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7화

그녀의 손바닥은 무척 차가웠는데, 이런 깊은 밤중에 찬 바람을 맞은 탓인 듯했다.송남지가 하정훈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묻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온기가 가득한 슈퍼카 안으로 밀려 들어가듯 태워졌다.송남지는 최근 서로 연락도 없이 지내지 못했던 시간 동안 하정훈의 성정이 예전과 달라진 건 아닌지 생각했다.평소라면 벤틀리나 롤스로이스만 고집하던 그가 코닉세그 같은 화려한 스포츠카를 몰고 나타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하정훈은 차 주위를 돌아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히터의 온도를 더욱 높였다.송남지는 감각이 없어진 손바닥을 비볐다. 차 안의 훈훈한 히터 바람이 얼굴로 확 쏟아지자, 그녀는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고 찬 바람 속을 걸으며 굳어 있던 몸이 나른하고 아늑한 상태로 이완되었다.조금 기운을 차린 송남지가 곁눈질로 하정훈을 살피니, 그는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송남지가 입을 열었다. 예의를 차린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예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묘한 거리감이 섞여 있었다.“여긴 웬일이에요? 이렇게 마주치다니 정말 우연이네요.”하정훈은 목적지를 정한 듯 가속 페달을 살짝 밟았고 값비싼 엔진음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외계인’이라 불리는 이 슈퍼카는 굉음을 내며 하씨 저택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우연 아니야. 지훈이한테 전화 받고 걱정돼서 달려왔어.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하정훈은 오지훈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그의 말을 들은 송남지는 가슴 한구석이 철렁했다.걱정했다는 그 말이 지금 그녀에겐 너무나 가식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정말 걱정했다면 대체 왜...”‘왜 양나정과 단둘이 출장을 가고 의미심장한 하룻밤을 보냈던 걸까. 정말로 나를 걱정했다면 왜 내가 입원해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양나정과의 일에 대해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던 걸까. 그리고 정말로 나를 걱정했다면 왜 퇴원하던 날에도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던 걸까.’묻고 싶은 것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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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8화

방금 전 짐을 챙겨 하씨 저택을 떠나온 송남지로서는 당일 밤에 바로 초라하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정훈 씨,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갤러리에 내려주세요.”그녀는 갤러리에 일이 남았다는 핑계를 댔다.하지만 하정훈은 이미 어떤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지금 서경 시간으로 새벽 두 시야. 재스민 갤러리에 이 시간에 무슨 일이 있겠어?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있다면 말해봐. 내가 해결 못 하는 일이라면 내 성을 갈지.”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렸다.하정훈이 이토록 단호하게 나오면 송남지로서는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그녀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마지못해 물러날 구실을 찾았다.“하긴, 이 시간이면 담당자들도 다 잠들었겠네요.”하정훈은 송남지를 묘한 눈길로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에 집중했다.운전이라기보다 송남지가 느끼기에는 거의 폭주에 가까웠다.송남지는 불안한 듯 안전벨트를 꼭 쥔 채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정훈 씨, 과속하는 거 아니에요?”하정훈은 계기판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괜찮아, 벌금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으니까.”무엇보다 그가 송남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하정훈은 지금 당장 송남지를 태우고 하씨 저택으로 돌아가 모든 사실을 명확히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듣고 싶어 하든 아니든, 그는 기어이 입을 열 참이었다.하정훈은 이미 그런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송남지가 너무 겁을 먹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하정훈은 아주 조금 속도를 줄이며 그녀를 달랬다.“걱정 마, 별일 없을 테니까.”하정훈에게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그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송남지는 그제야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겨우 내려놓았다.서경 중심가에서 하씨 저택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애초에 공기가 맑고 한적하다는 이유로 골랐던 집이었다.송남지는 도착하기까지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줄 알았지만, 슈퍼카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저택 차고로 미끄러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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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9화

어둠이 내려앉은 침실에는 커튼 사이로 스며든 정원의 미세한 불빛만이 감돌았다.이런 어둠은 곁에 있는 사람의 숨결과 심장 소리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의 가슴에 안긴 송남지는 하정훈의 심장 박동이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미친 듯이 빨라지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송남지는 그저 자신을 안고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찬 것이라고 짐작했다.하지만 그의 심장이 왜 이토록 요동치는지, 그 진짜 이유는 오직 하정훈만이 알고 있었다.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살내음만으로도 하정훈은 그리움이 어느새 억누를 수 없는 욕망으로 변해버렸음을 깨달았다.치솟는 갈증을 누르기 위해 하정훈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끊임없이 가다듬으며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아무것도 모르는 송남지는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서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하정훈을 빤히 응시했다.“집에 왔는데, 이제 그만 내려주면 안 돼요?”그녀의 입술 사이로 달콤한 숨결과 함께 은은한 치자꽃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하정훈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듯 대꾸했다.“남지야,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이것은 협박도, 경고도 아니었다.하정훈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의의 조언이었다.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하지만 마냥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그의 심장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나를 안고 있느라 힘든 건가?’몸무게가 꽤 나가는 성인을 계속 안고 있는 건 분명 고역일 터였다.걱정스러운 마음에 송남지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그만 내려줘요. 그러다 내일 팔에 근육통 생기겠어요.”“움직이지 마!”어둠 속에서 하정훈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것은 지독히도 섹시하고 위험한 음성이었다.송남지는 그제야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며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하정훈은 마치 부서지기 쉬운 보석을 다루듯 그녀를 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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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0화

송남지는 그의 격정적인 고백에 말문이 막혔다.하정훈의 긴장과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져 숨을 내쉴 때마다 느껴지는 압박감이 대단했다.뜨거운 감정은 이내 송남지에게도 전염되어 가빠진 호흡 사이로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긴장 탓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다.깊은 밤의 정적은 두 사람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송남지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하정훈의 얇은 입술이 자신의 귓바퀴를 타고 귓불까지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도톰한 그녀의 귓불은 형언할 수 없는 관능미를 풍겼다.오랫동안 쌓여온 그리움이 그 순간 한꺼번에 폭발했다.폭풍우처럼 거칠고 밀도 높은 입술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하정훈은 송남지의 몸 어느 한 곳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탐닉했다.송남지는 그의 뜨거운 입맞춤에 정신이 아득해졌고 온몸은 봄날의 눈 녹은 물처럼 속절없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하정훈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머물며 낮게 읊조렸다.“나, 해도 돼?”송남지는 이미 말문이 막혔으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애틋한 연정이 담긴 눈빛은 하정훈이 원하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그 순간 격정적인 정사가 휘몰아쳤다.오늘 밤은 평소보다 훨씬 길고도 깊었다.하정훈은 마치 이성이 끊어진 사람처럼 몰아붙였고 평소의 신사다운 면모 대신, 켜켜이 쌓인 그리움이 빚어낸 거친 갈증만이 가득했다.송남지는 그 모든 열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그러나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견디지 못하고 하정훈의 귀에 입술을 붙인 채 여린 목소리로 애원했다.“정훈 씨, 제발... 이제 해줘요...”그녀의 애처로운 갈망을 들은 하정훈도 그 순간 모든 것을 쏟아냈다.눅눅한 속삭임과 거친 숨소리가 침실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적이 찾아왔다.평소 하정훈의 습관대로라면 분명 지금쯤 씻으러 갔을 것이다.그는 가벼운 결벽증이 있었으니까.하지만 그의 결벽증은 오직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송남지는 하정훈이 같이 씻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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