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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1화

최보라는 입술을 비죽이며 냉소했다.“아무것도 아냐. 그냥 이 세상에 좋은 남자는 없구나 싶어서.”동료가 묘한 눈길을 보내며 최보라의 팔꿈치를 툭 쳤다.“저기 좀 봐. 저 정도면 괜찮은 남자 아냐? 우리가 출장 온 곳에서 이렇게 딱 마주치다니, 이거 일부러 우연을 가장해서 나타난 거 같은데?”최보라가 고개를 들자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오지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녀는 깜짝 놀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오지훈?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하정훈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의 친구인 오지훈에게도 짜증이 섞여 나왔다.오지훈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굳어 있는 최보라의 표정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오지훈은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싶어 얼른 입을 열었다.“최보라? 마침 이 근처에 회의가 있어서 왔는데 여기서 다 보네.”최보라는 헛웃음을 치며 대꾸했다.“스토커면 곤란한 거 알지?”그러고는 동료의 손을 잡고 로비로 홱 들어 가버렸다.동료가 귓속말로 속사포처럼 내뱉었다.“야, 저 남자 너한테 꽃도 보냈던 사람 아냐? 얼굴도 잘생겼는데 왜 그래?”최보라는 코웃음을 쳤다.“잘생기면 뭐 해? 내 동생 남편은 훨씬 잘생겼는데도 동생이 아플 때 첫사랑이랑 출장이나 가더라. 남자 얼굴 다 소용없어!”그녀가 송남지와 하정훈의 결혼을 그나마 묵인하는 이유는 단 하나, 송남지가 최소한 경제적인 대가는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사랑도 중요하고 돈도 중요했다. 하지만 잘생긴 외모? 그게 밥 먹여주나?사랑이 있으면 물만 마셔도 배부르다지만, 얼굴 잘생긴 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호텔 밖에서 오지훈은 최보라의 돌아보지도 않는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그의 비서가 민망한 기색으로 물었다.“대표님, 그냥 지금 바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할까요?”오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비서를 돌아보며 농담조로 대꾸했다.“뭐야, 너까지 나 퇴짜 맞은 거 같냐?”비서가 아주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봐도 잘될 가능성은 제로였으니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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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2화

송남지는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전혀 넘어오지 않던 사람이 고작 남자들의 유치한 자존심 싸움 때문에 계약을 하겠다니.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박재용을 쏘아보며 물었다.“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죠?”박재용은 하정훈을 비웃듯 바라보며 반항기 어린 눈썹을 쓱 올렸다.“장난 아니라니까요. 지금 당장 저놈 쫓아내고 비서한테 계약서 가져오라고 해요. 바로 사인할 테니까.”송남지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패였다.솔직히 마음이 흔들렸다. 박재용이 워낙 다루기 힘든 상대였기 때문이다.이대로 그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겨울 전시회도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을 터였다.하지만...송남지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반대편에 있는 하정훈을 보았다.하정훈은 박재용과 눈을 맞부딪치고 있었다.그는 박재용이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었다.송남지가 고작 계약서 한 장 때문에 이 마당에 자기를 내쫓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하정훈은 심지어 가소롭다는 듯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하지만 다음 순간, 송남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정훈 씨, 미안한데 먼저 가줄래요?”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하정훈이 고개를 홱 돌려 송남지의 눈을 쏘아보았다.송남지는 미안해하면서도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했다.“나 정말 괜찮아요. 돌봐줄 사람도 딱히 필요 없고요.”사실 송남지도 처음에는 갈등했었다. 하지만 양나정과의 출장 소동 이후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며칠간 종적을 감췄던 하정훈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생각했다. 하정훈의 보살핌 따위는 필요 없다고,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말이다.하정훈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송남지를 보았다.“나보고 가라고? 진심이야?”송남지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네, 진심이에요.”박재용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하정훈을 향해 눈썹을 까닥거리고는 송남지를 바라보았다.“성의 표시 확실하네요. 지금 당장 비서 시켜서 계약서 가져오라고 해요. 처음 제안했던 조건 그대로 계약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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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3화

“왜요? 남편을 쫓아내고 나니 마음이 쓰라린가 보죠?”송남지는 하얀 이불을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쓰라릴 것 없어요. 박재용 씨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요. 어쩌면 오늘 밤 그를 쫓아낸 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을지도 몰라요.”온전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적어도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반쪽짜리 마음을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하정훈의 마음 중 절반이 양나정에게 가 있다면 남은 절반 따위 그녀도 필요 없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재스민을 빨리 수익 궤도에 올려놓아 갤러리를 인수할 때 하씨 가문에서 빌린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그래야만 비로소 그들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민지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송남지의 병실에 도착했다.박재용이 병실에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그녀는 이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지 못했다.박재용을 마주하자마자 민지현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펄쩍 뛰며 그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박재용 씨! 이제 우리 동료네요. 재스민 갤러리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해요!”송남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주의를 주었다.“민 실장님, 박재용 씨는 오늘 오후에 응급실까지 다녀오신 분이에요. 좀 살살해요.”그제야 정신이 든 민지현은 박재용을 무슨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박재용은 눈앞에 놓인 계약서를 내려다보며 잠시 미간을 꽉 좁혔다. 순간적으로 망설임과 후회가 스치는 듯했다.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송남지와 민지현은 그가 단순히 내용을 검토하는 중이라고만 생각했다.송남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였다. “박재용 씨, 혹시 계약 내용 중에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다시 이야기해도 돼요.”박재용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표정을 풀며 대답했다.“아니요. 사인하기로 했으면 해야죠. 전 말 바꾸는 사람이 아니거든요.”민지현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송남지의 말투를 흉내 내어 그를 불렀다.“박재용 씨,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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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4화

‘주차장에서 하정훈의 차를 봤다고?’송남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의 차가 주차장에 있을 리 없었다.“잘못 본 거 아니에요?”송남지는 민지현의 착각일 것이라 단정 지었다.민지현이 금세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우리 서경에 벤틀리가 적진 않지만, 111서 7777 번호판은 하 대표님 차뿐이잖아요?]송남지는 민지현이 보낸 사진을 확대해 자세히 살폈다.정말 하정훈의 차가 맞았다.‘한 시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안 가고 있었던 걸까?’병원 지하 주차장 안, 하정훈은 시트에 몸을 기댄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오지훈에게 전화를 걸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한잔할래?”평소라면 오지훈을 불러내는 게 어렵지 않았겠지만, 아쉽게도 오지훈은 서경에 없었다.“나 현남으로 출장 왔어. 같이 못 마셔.”하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짐작했다.“최보라를 쫓아갔냐?”오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예리해.”“네 얼굴에 다 적혀 있거든.”속내를 들키고도 오지훈은 개의치 않았다. 여자를 쫓아다니는 거야 흔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이 늦은 시간에 한잔하자고 전화한 하정훈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다.“너 송남지 얼굴도 못 보겠다더니, 며칠 못 봤다고 그새 보고 싶어 죽겠나 보지?”하정훈이 솔직하게 털어놨다.“봤어. 방금 병원에서 봤는데, 쫓겨났다.”오지훈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 년간 하정훈을 내쫓을 배짱이 있는 사람은 송남지뿐이었으니까.그가 물었다.“지난번이랑 똑같아? 말하기 싫다니까 그냥 그렇게 나온 거야?”바로 그 점이 하정훈을 괴롭게 했다.만약 지난번과 상황이 같았다면 굳이 오지훈을 붙잡고 술을 마시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중요한 건 이번에는 달랐다는 사실이다.“아니, 남지가 계약하려는 화가가 그러더라. 나를 내쫓으면 사인을 하겠다고.”“뭐라고?”오지훈이 경악하며 되물었다.“화가? 대체 누구길래? 지가 건드리는 사람이 누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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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5화

지금의 그는 입을 열 기운조차 없었다.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듯 무력한데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그리고 지난번에 양나정이랑 있었던 일 말이야. 아직 마음의 응어리가 덜 풀렸을 수도 있어. 그 일 때문에 앙금이 남아서 일부러 그런 걸지도 모르지.”양나정의 이름이 나오자 하정훈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패였다.“양나정이랑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절대로 아무 일 없을 거야.”“알아, 정훈아. 네가 정말 양나정과 잘해볼 생각이었다면 진작 그랬겠지. 너희 사이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냐.”하정훈은 카시트에 기댄 채 앞을 멍하니 응시하며 나직이 읊조렸다.“이게 다 그때 내 저지른 짓에 대한 벌일까?”그는 눈을 감았다. 살짝 힘을 준 탓에 눈꺼풀 아래로 안구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남지가 윤해진이랑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떻게든 해방되고 싶었어. 마침 남지랑 닮은 양나정이 나타났고 그 여자로 남지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벌이라니, 무슨 그런 소릴 해. 그때 너랑 양나정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잖아, 안 그래?”“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었었잖아...”하정훈의 목소리엔 깊은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오지훈은 더 이상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사랑이 너무 넘치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결국 서글퍼지는 법이니까.하정훈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답을 오지훈이 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짧은 침묵 끝에 전화를 끊었다.그러고는 유경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유경태는 수술실에 들어갔는지 연결되지 않았다.하정훈은 몇 안 되는 연락처 목록을 훑어보다가 곽지민이라는 이름에서 시선을 멈췄다.“곽지민이라...”하정훈은 헛웃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술 한잔할 사람이 없어서 곽지민을 찾게 되다니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전화를 받은 곽지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 대표? 법무팀이라도 바꾸시게?”곽지민은 당연히 업무 때문일 거라 짐작했지만 하정훈은 단호하게 부정했다.“일 때문 아니야. 그냥 너랑 술 한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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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6화

송남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있었다.그러다 문득 스스로가 한심해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자존심은 다 어디로 간 거야? 하정훈의 차가 주차장에 있다는 말 한마디에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전동 휠체어까지 빌려달라고 부탁하며 그 사람을 보러 내려오다니.’송남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저었다.‘지금 뭐 하는 거지?’연락이 끊겼던 그 시간 동안 충분히 마음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미련이 남은 모양이었다.옅은 허탈감을 안은 채 그녀는 전동 휠체어의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향해 멀어졌다.주차장 출구로 이어지는 긴 오르막길 위로 하정훈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는 엔진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지면을 긁는 타이어 소리가 고막을 찌를 듯 날카로웠다.서경 시내의 한 술집 안에서 젊은 남녀들이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노출이 심한 옷차림의 여인들 사이로 지금이 겨울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할 만큼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발레파킹 직원이 하정훈의 차 키를 건네받았고 차에서 내린 하정훈은 단숨에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유행을 따르는 화려한 차림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하정훈의 스타일은 단연 독보적이었다.정교하게 테일러링된 맞춤 슈트는 구김 하나 없었고 정갈하게 맨 넥타이는 흐트러짐이 없었다.심지어 정돈된 헤어스타일에서는 특유의 금욕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방종이 허락된 이 밤, 그는 그곳에서 가장 강렬한 유혹을 내뿜는 풍경이 되었다.여자들은 설렘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를 화제로 삼았다.하정훈은 곽지민이 보낸 VIP 테이블 번호를 확인했다.2층 3번.지배인이 극진히 예우하며 하정훈을 맞이하러 나왔다.곽지민에게 답장을 보내는 하정훈의 옆얼굴에는 귀티와 오만함이 서려 있었고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무심함이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몽환적인 조명과 소란스러운 음악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2층 VIP석에는 곽지민이 미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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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7화

특히 송남지와의 일이라면 더더욱 철벽을 치던 사람이었다.사실 곽지민이 어릴 때 송남지에게 뽀뽀를 했던 일로 하정훈은 줄곧 그를 경계해 왔다.그런 하정훈이 이토록 속내를 털어놓자 곽지민은 내심 뭉클하기까지 했다.“아니면 내가 남지 설득해볼까?”예전 같았으면 하정훈은 곽지민이 송남지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몹시 절박한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걸었다.“만약 남지 마음을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내년 성은 그룹의 법무 자문은 너한테 맡길게.”성은 그룹은 업계 최고 수준의 자체 법무팀을 보유하고 있었다.하정훈의 이런 제안은 사실상 곽지민에게 돈다발을 통째로 안겨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제 발로 굴러들어온 이 엄청난 제안을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곽지민은 단숨에 승낙했다.술이 몇 차례나 돌았음에도 하정훈은 취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마실수록 정신이 더 또렷해질 뿐이었다.그는 데려다주겠다는 곽지민의 제안을 거절하고 집안 기사를 불렀다.곽지민 앞에서는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했지만, 차에 오르자마자 그가 내뱉은 행선지는 송남지가 있는 병원이었다.차는 어둠을 뚫고 달려 30분도 채 되지 않아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아까와 같은 주차 자리였다.하지만 하정훈은 차에서 내리려다 한참을 망설였다.평생 받아온 철저한 신사 교육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깊이 배어든 교양에 짓눌려 주저하던 그는, 이미 15분이나 흘렀다는 기사의 조심스러운 말에 그제야 결단을 내린 듯 차 문을 열었다. 딱 한 번만 보고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송남지의 병실 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깊은 밤 적막만이 흐르는 텅 빈 복도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하정훈은 곧장 병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그는 먼저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문자를 보내 송남지가 잠들었는지 확인했고 잠들었다는 확답을 받은 후에야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병실 문 앞에서 간병인이 낮게 속삭였다.“하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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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8화

한파가 몰아치면서 서경의 겨울도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했다.병실 창밖의 나무들은 마치 중년 남성의 머리마냥 잎 하나 없이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처지고 마음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풍경이었다.간병인 아주머니가 정성껏 끓인 죽에서 구수한 향기와 은은한 단내가 코끝을 자극했다.입맛이 좀 돌아온 송남지는 창가 테이블에 앉아 갓 끓여낸 뜨거운 죽이 식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그 사이 송남지의 휴대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최보라가 보내온 메시지였다.요즘 현남으로 출장을 가 있는 최보라는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자 부쩍 수다가 많아졌다.평소라면 회사의 이상한 사람들이나 까다로운 갑질 고객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당연히 누군가를 신나게 욕하는 내용일 거라 생각하며 메시지를 확인한 송남지는 뜻밖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그것은 법조계의 거물 곽지민이 클럽에서 여러 여자에게 둘러싸여 밤을 즐기고 있다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스캔들이었다.‘곽지민이라고?’송남지는 전송된 스캔들 기사를 클릭했다.한동안 소식이 없던 이름이라 그런지 다시 마주한 그 석 자가 생경하게 느껴졌다.최보라가 이렇게나 한가해진 걸까?곽지민의 염문설까지 챙길 줄이야.하지만 사진 속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인 곽지민의 모습을 본 순간, 송남지는 최보라가 왜 이 기사를 공유했는지 단박에 이해했다.그 사진 속에 하정훈도 있었기 때문이다.하정훈의 곁에도 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었다. 클럽의 조명은 어두웠지만 여자의 싱그러운 젊음은 감춰지지 않았다.그녀는 하정훈의 옆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때맞춰 술을 따랐고 그 모습은 차분하고도 고분고분해 보였다.송남지는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결국 죽이 나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손가락이 그만 뜨거운 그릇 가장자리에 닿고 말았다.따끔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려 보니 새끼손가락 옆에 금세 물집이 잡혀 있었다.깜짝 놀란 간병인 아주머니가 외쳤다.“사모님! 괜찮으세요?”송남지는 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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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9화

최보라의 회사 동료들은 그녀의 서슬 퍼런 태도에 가슴을 졸이며 안절부절못했다.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오지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최보라를 응시했다.“회의 중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저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보라 씨의 업무 능력을 판단하지도 않고요. 다만 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만약 지금 대화 중인 상대가 남자친구라면 제 입장에서는 실연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그게 좀 걱정될 뿐입니다.”공적인 비즈니스 현장에서 이토록 저돌적이고 직접적으로 애정을 드러낼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당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최보라조차 그의 거침없는 ‘돌직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최보라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오지훈은 회의실 밖을 가리키며 여유롭게 대꾸했다.“편하게 다녀오시죠.”최보라는 거의 뛰다시피 회의실을 탈출했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화장실을 옆에 두고도 한참을 지나쳐 걸어갔다.순간 회의실 분위기는 싸해졌지만 감히 누구도 수군거리지 못했다. FunAI 쪽은 사장님 눈치를 보느라, 보라네 쪽은 귀한 갑님 비위 맞추느라 바빴으니까.화장실 세면대 앞에 선 최보라는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현남에 온 뒤로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곳의 습윤한 기후 덕분인지 피부 상태는 평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거울 속의 여자는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채 촉촉한 물기까지 머금고 있었다.사실 최보라는 자신이 전형적인 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송남지 같은 사촌 동생을 곁에 두고 자랐으니, 진짜 예쁜 여자란 어떤 모습인지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섹시한 스타일도 아니었고 온화하고 조신한 성격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그저 앞뒤 안 가리고 직진하는 성격에 남한테 아쉬운 소리 못 하는 자존심 강한 여자, 그게 최보라였다.‘이런 내가 오지훈의 눈에 어떻게 들었을까? 오지훈 정도의 배경이라면 주변에 쟁쟁한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최보라는 도무지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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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0화

어스름한 조명 아래, 최보라는 진지한 표정의 오지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절의 말이 입술 끝까지 차올랐지만 도무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오지훈의 눈을 피하지 못한 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그 긍정의 몸짓은 오지훈조차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오지훈은 10초간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벅차오르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최보라를 번쩍 안아 올렸다.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최보라가 비명을 질렀으나, 이내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틀어막았다.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오지훈을 노려보며 낮게 속삭였다.“미쳤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하지만 흥분한 오지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최보라가 싫어할까 봐 꾹 참았을 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오지훈에게 안겨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아간 최보라는 정신이 아찔해졌다.그러다 오지훈이 그녀를 회의실 쪽으로 돌려세운 순간, 최보라는 화장실 쪽으로 걸어오는 자기 회사 동료들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게다가 그들 역시 분명히 그녀를 본 듯했다.그제야 최보라는 다급하게 오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려줘! 빨리 내려주라고!”오지훈이 미처 그녀를 내려놓기도 전에 동료들이 다가왔고 공기 중에는 견디기 힘든 어색함이 감돌았다.평소 대담하기로 소문난 최보라조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동료들이 먼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어머, 보라 씨. 오 대표님도 여기 계셨네요...”오지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최보라를 내려놓았지만 방해받은 것이 못마땅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한 동료가 변명하듯 덧붙였다.“회의 중간 휴식 시간이라 회의실 화장실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보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괜찮아요! 회의실 안보다 바깥 화장실이 훨씬 쓰기 편하잖아요. 얼른 가보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오지훈의 손을 붙잡고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비상구 복도로 피할 생각이었다.하지만 회백색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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