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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471 - Chapter 480

580 Chapters

제471화

최보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이번 전시가 몇 달이나 유지된다고?”“누가 이 전시 하나만 한대? FunAI 하반기 핵심 사업이 전시거든. 브랜드 밸류 좀 키워야지. 그래서 앞으로 모든 프로젝트는 너희 회사랑만 진행할 생각이야.”최보라는 사장님이 이 소식을 들으면 입이 귀에 걸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오지훈이 대놓고 회사에 돈을 퍼부어주는 격이었으니까.하지만 이 돈이 최보라의 주머니로 직접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그녀의 처세술은 군더더기 없이 명확했다.“오지훈, 만약 나 꼬시려고 이러는 거면 그냥 그 돈 나한테 바로 쏴주는 건 어때?”하지만 최보라의 예상을 깨고 오지훈이 즉각 대답했다.“그래, 그럼 나도 굳이 출장 다닐 필요 없어서 좋지.”오지훈의 쿨한 승낙에 최보라는 오히려 얼떨떨해졌다.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보통 이럴 땐 남자들은 내가 돈 밝히는 속물이라고 욕해야 하는 거 아니야?”오지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너보고 속물이라는 놈들은 속이 빤히 보이는데 돈 쓰긴 아까워하는 부류야. 그런 놈들 근처엔 가지도 말고 나처럼 돌직구 날리는 남자랑 가까이 지내.”최보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과연 오 대표답네. 염문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제 알겠다. 돈 잘 쓰고 화끈한데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대화가 이어지는 도중 최보라의 카톡에 4천만이 송금되었다.오지훈이 보낸 것이었다.그는 한창 투덜거리고 있었다.“무슨 놈의 카드가 1회 한도가 고작 4천만밖에 안 돼.”말을 하는 그 짧은 순간에 오지훈은 동일한 금액을 네 번 더 연달아 보냈고 총액은 2억이 되었다.송금을 마친 오지훈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방금 나보고 오 대표라고 하는데 나 그거 딱 질색이야. 이 2억은 호칭 바꾸는 비용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는 그냥 내 이름 불러. 아니면 여보라고 부르든가. 근데 너무 쉽게 부르는 여보는 별로니까 그건 나중에 천천히 하고. 돈 받았으니까 내 제안 수락한 걸로 알게.”최보라는 빛의 속도로 송금 확인 버튼을 눌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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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2화

오지훈은 화상 치료 전문의를 알고 있다는 핑계로 최보라에게 송남지의 화상 사진을 받아냈다.사진을 전송받은 오지훈은 곧장 하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나쁜 소식이 하나 있는데.”오지훈이 뜸을 들이며 말했다.하정훈은 성은 그룹 본사 꼭대기 층에서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가장 번화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짐작했다.“곽지민 스캔들 사진에 나도 찍힌 거?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야.”하정훈은 이미 홍보팀을 시켜 수습에 들어간 상태였다.오지훈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니. 그거 아니야.”“그럼 또 무슨 나쁜 소식이 있다는 거야?”하정훈이 물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자욱한 담배 연기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마치 옅은 안개에 휩싸인 듯 몽환적이었다.“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인데 사모님 손에 화상을 입었대. 물집이 아주 크게 잡혔더라고.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야.”하정훈은 막 불을 붙인 담배를 황급히 비벼 껐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히 물었다.“물집이 얼마나 큰데?”오지훈은 수화기 너머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하 대표, 나한테 사진이 있거든. 보고 싶으면 싸게 넘길게. 2억 어때?”“너 요즘 살기 힘드냐?”하정훈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오지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에이, 요즘 여자 꼬시느라 지출이 좀 많아. 그래서, 이 사진 살 거야 말 거야?”하정훈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비서 시켜서 입금할게.”“오케이! 바로 보내줄게, 하 대표. 즐거운 거래였어.”전화가 끊겼다. 하정훈은 이미 오지훈과의 채팅창을 열어둔 채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사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단 몇 초 후, 사진이 전송되었다.하정훈은 사진을 보면 볼수록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정적이 감도는 휴게실 안, 하정훈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맴돌았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데었지?”그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통유리창 너머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은 뒤에야 유경태에게 전화를 걸었다.화상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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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3화

하정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패기 넘치게 대꾸했다.“그게 뭐 어때서?”유경태는 기가 막혔지만 결국 꼬리를 내렸다.“안 될 것도 없지. 네가 하정훈인데 누가 토를 달겠냐.”...송남지는 며칠째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요즘 부쩍 병원 신세만 지는 것 같아 답답했고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최보라는 출장 중이었고 민지현도 재스민의 겨울 전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대화 상대조차 없었다.그나마 다행인 건 박재용이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점이었다.송남지는 가끔 박재용의 병실을 찾아 적막함을 달래곤 했다. 그녀는 박재용이 그저 하루 정도 관찰만 하면 퇴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상태인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박재용의 곁에는 자신보다 훨씬 많은 의사가 몰려 있었다.송남지는 참다못해 농담을 던졌다.“재용 씨, 혹시 어디 많이 아픈 거 아니에요?”박재용의 안색이 잠깐 어두워지더니 이내 콧방귀를 뀌며 웃어넘겼다.“그렇게 저주하는 거 보니 겨울 화전은 포기했나 봐요?”박재용의 얼굴색이 워낙 좋아 보이자 송남지도 아차 싶었다. 그런 농담은 꺼내지도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덤덤하게 사과했다.“미안해요.”박재용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젓더니 이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송남지를 보았다.“그때 쫓겨난 그 남자, 그 뒤로 한 번도 안 왔어요?”하정훈의 이름이 나오자 송남지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혔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안 왔어요.”박재용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서경 하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면서요?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렇게 기세등등한지 모르겠네. 나도 라인국에선 내로라하는 집안 아들이거든요.”하정훈과 굳이 승부를 겨루려는 박재용의 모습에 송남지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두 사람은 아예 결이 다른데 왜 비교를 하려고 그래요?”송남지가 보기에 박재용은 감정이 투명하고 가끔 고집을 부릴지언정 말귀도 잘 통하는, 제멋대로인 듯해도 솔직한 부류였다.반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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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4화

문밖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자 송남지는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일 이야기는 이따가 다시 해요.”박재용은 송남지가 병실을 나설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그의 표정은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순식간에 수척해졌다.억지로 참아왔던 기침과 심장 두근거림이 그제야 여실히 드러났다. 그때 문밖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조금 전까지 옆으로 누워 있던 박재용은 송남지인 줄 알고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아까와 같은 멀쩡한 자세를 유지했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송남지가 아닌 박명규였다.칼같이 다려진 양복에 금테 안경을 쓴 박명규는 전형적인 엘리트 신사 차림이었다.박재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농담을 던졌다.“삼촌, 우리 집에서 삼촌만 유일하게 은행 임원 포스네요.”조카의 농담에 익숙한 박명규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병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답답한 듯 넥타이를 살짝 늦췄다. 서경에서의 일정을 막 마친 박명규는 박재용의 베리히 치료 일정에 대해 의논하러 온 참이었다.“생각은 좀 해봤어?”박명규에게 시간은 곧 돈이었고 박재용과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일 여유 따윈 없었다. 3시간 뒤면 라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박재용은 여유가 넘치는 태도로 박명규와 말장난을 이어갔다.“생각이라니, 무슨 생각요? 저녁 메뉴요? 서경 음식이 워낙 입에 안 붙어서 아직 고민 중이에요. 내일 당장 본가 요리사 좀 보내주면 안 돼요? 이러다 나 굶어 죽을 거 같아요.”박명규는 박재용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물었다.“정말로 베리히에서 치료받을 생각도, 라인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는 거냐?”박재용이 고개를 끄덕였다.“없어요. 이미 업무 계약도 다 마쳤는데, 설마 나더러 그 엄청난 위약금을 다 물어내라는 건 아니죠?”박명규가 미간을 찌푸리자 유한 얼굴 너머로 숨겨둔 노련함이 비쳤다.“위약금이 얼마든 우리 라인국 박씨 가문에게 무슨 대수겠니. 게다가 우리에겐 유능한 변호사팀이 있으니 설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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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5화

박명규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내 말이 통할 녀석이었으면 애초에 여기 있지도 않았겠지.”병실을 나온 박명규는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에는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려 있었다.“재용이가 철없이 구는 것도 모자라 너까지 장단을 맞춰? 서경에서 일을 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처음부터 서경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 녀석이 혹시라도 서경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건 전적으로 네 책임인 줄 알아!”박명규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형, 만약 재용이가 베리히에서 죽는다면 그건 누구 잘못이야? 베리히에 간다고 해서 살아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재용이 성격상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형, 재용이가 아픈 건 우리 모두 원치 않았던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재용이의 뜻을 존중해 줘야 해. 적어도 서경에 남으면 재용이는 형이 무시하던 그 작품들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삶의 의지를 다질 거라고.”병세가 이 지경에 이르면 세계 최고의 의료진과 장비로도 생존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환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박명규는 더 이상 논쟁하지 않았다.“형과 형수님이 기어이 재용이의 안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면 내가 다 감당할게. 서경에서 재용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부 내 탓으로 돌려.”더 이상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박명규는 전화를 끊고 병실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는 문가에 멈춰 서서 짧게 말을 전했다.“네 아버지와는 얘기 다 끝났다. 서경에서 건강 잘 챙기고 있어라. 나도 가끔 출장 올 때마다 들르마. 이제 비행기 시간이 다 돼서 가봐야겠다.”박재용은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집안 식구들과 몇 판 크게 싸울 각오까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리만치 쉽게 허락이 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한편 아래층 병실에서 송남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제 손을 헤집고 있는 의사의 손길을 직접 보는 게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의사는 아주 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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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6화

송남지는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으며 머물렀다.퇴원하는 날은 마침 최보라가 현남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과 겹쳤다.최보라는 타오르는 듯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송남지를 마중 나왔다. 포르쉐 창문을 내린 그녀가 송남지에게 손을 흔들었다.“남지야, 여기야! 얼른 타.”송남지가 차에 타려던 찰나, 뒤에서 간호사가 다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그녀의 손에는 우아한 작매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환자분, 퇴원 축하 선물이에요. 좋아하셨으면 좋겠네요.”송남지는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작매를 바라보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차에 올라탄 송남지는 최보라가 든 장미를 슥 보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언니, 다음엔 작매로 사줘. 난 이게 더 좋더라.”최보라가 화들짝 놀라며 맞받아쳤다.“에잇, 부정 타게 무슨 다음이야! 다신 병원 근처에도 얼씬하지 마.”꽃다발을 뒷좌석에 가지런히 놓은 송남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이젠 정말 병원 지긋지긋해. 가을 끝자락부터 초겨울까지 전부 병원에서 보낸 것 같아. 재스민 겨울 전시회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모르겠네.”전시회 이야기가 나오자 최보라가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박재용이라는 사람, 재스민이랑 계약했다며? 진짜 잘생겼어? 듣기로는 라인국 대부호 집안 도련님이라던데, 딱 내가 환장하는 연하남 스타일이잖아.”송남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언니도 그 사람 성깔 한번 겪어보면 절대 그런 소리 안 나올걸?”최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상에 빠진 듯 중얼거렸다.“오, 까칠한 성격? 그럼 더 마음에 드는데!”차는 어느덧 하씨 저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고가도로에 올라서고 나서야 송남지는 최보라의 번쩍거리는 새 차를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요즘 전시 기획이 그렇게 돈이 잘 돼? 포르쉐 풀옵션이라니.”송남지의 물음에 최보라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스폰서가 쐈어.”“스폰서라고?”송남지가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언니, 혹시 이상한 만남 같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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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7화

“하정훈 그 자식은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넌 대체 친구를 어떻게 사귀는 거야? 오늘 남지 퇴원하는 날인데 얼굴 한 번 안 비치는 게 말이 돼? 정말 그렇게 죽을 만큼 바빠?”최보라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오지훈은 하정훈을 변호하느라 진땀을 뺐다.“보라야, 성은 그룹이 요즘 처리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정말 정신이 없거든...”“흥, 바빠? 바쁘다는 사람이 곽지민이랑 바에 가서 술을 마셔? 주변에 여자들을 잔뜩 끼고 말이야. 하여간 남자들은 다 똑같아!”오지훈은 다급하게 발을 뺐다.“그 인간들은 그 모양이지만 난 아니야.”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하정훈을 지켜주기는커녕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찼다.사실 오지훈 본인도 가끔은 하정훈이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저렇게 꼬였는지 말이다.송남지가 보기 싫다고 했다고 진짜로 안 가고 계약 때문에 쫓아냈다고 퇴원 길에도 안 나타나다니.최보라를 간신히 진정시킨 오지훈은 바로 성은 그룹으로 차를 달렸다.그러고는 최보라에게 받은 화풀이를 고스란히 하정훈에게 쏟아부었다.원한은 갚아야 제맛이고 이런 울화는 밤을 넘기지 않고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니까.하정훈은 막 다국적 화상 회의를 끝내고 미간을 짚으며 비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그때 오지훈이 대표실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왔다.하정훈이 눈을 들어 오지훈을 바라보자마자 상대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음을 직감했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누가 네 성질을 긁어놨어?”오지훈은 성큼성큼 다가와 비서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뺏어 들었다.“나중에 다시 와. 하 대표랑 할 얘기가 좀 있으니까.”비서가 나가자 하정훈이 여유롭게 고개를 들었다.“원인 제공자가 나라는 표정이네?”오지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쏘아붙였다.“하정훈, 너 진짜 나랑 이대로 끝내고 싶은 거야!”하정훈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꾸했다.“비서가 나가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우리 둘이 사귀는 사이인 줄 알겠어. 밥은 아무거나 먹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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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8화

하정훈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오지훈이 그 뒤를 바짝 쫓으며 물었다.“갑자기 어디 가는데?”하정훈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고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단 2초만 지체했을 뿐이었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성큼 들어가며 오지훈의 질문에 답했다.“남지 퇴원할 때 못 간 거 뭐라고 했잖아. 지금 당장 집으로 가는 중이니까 됐지?”오지훈도 엘리베이터에 잽싸게 올라탔다.“그래, 그래야지.”엘리베이터 안에서 오지훈은 하정훈에게 간곡히 당부했다.“가서 잘해. 나랑 최보라 연애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하정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네가 언제부터 최보라랑 사귀었다고? 최보라도 그 사실을 아는 거야?”오지훈이 기세등등하게 답했다.“내가 못 꼬실 여자가 어디 있냐. 어쨌든 네 우정 어린 지원 사격 덕분이다, 고마워.”하정훈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나랑 남지 일은 너희 연애에 지장 줄 일 없어. 하지만 너희 사이에 생긴 문제가 우리 관계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오지훈이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하정훈이 오지훈을 빤히 쳐다봤다.“네 행실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괜히 장난처럼 시작했다가 상대방만 진심으로 만들고 차버리지 마. 그때 가서 내가 보라 씨 편을 들어야 할지, 네 편을 들어야 할지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고.”오지훈이 입술을 삐죽거렸다.“나라고 개과천선하지 말라는 법 있어?”엘리베이터가 주차장에 도착하자 하정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렸다.“난 개과천선 같은 거 안 믿어.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만 믿지. 그러니까 처신 잘해. 우리 사이에 찬물 끼얹지 말고.”하정훈이 벤틀리를 향해 급히 걸어가자 오지훈은 엘리베이터에서 느릿하게 나오며 중얼거렸다.“참나, 너희 사이는 이미 얼음장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끼얹을 찬물이 어디 있다고!”물론 이 말은 하정훈이 차에 올라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내뱉은 것이었다.허정훈의 앞에서 대놓고 할 용기는 없었다.주변 친구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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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9화

이미란은 도련님이 분명 사모님 때문에 달려온 것이라 직감했다.하정훈은 거실로 들어서며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평온한 목소리로 묻고 싶었지만, 떨리는 음성 끝에는 그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났다.“미란 이모, 남지는? 돌아왔죠? 몸이 안 좋아서 방에서 쉬고 있나요?”이미란은 난처한 기색으로 도련님을 바라보며 더듬거리며 대답했다.“도련님, 그게... 사모님은 30분 전에 이미 짐을 챙겨서 떠나셨습니다...”하정훈의 별처럼 빛나던 눈동자가 그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숨길 수 없는 공포를 내비쳤다.“떠났다고?”짐까지 다 챙겨서 떠났단 말인가? 이미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정훈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엄연한 사실을 숨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이미란은 무너져 내릴 듯한 도련님의 모습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도련님, 사모님께서 말씀하시길 요즘 겨울 전시회 준비 때문에 아주 바쁘시답니다. 한동안 갤러리에 머물면서 작업에 집중하신다고 하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이미란은 이렇게라도 말하면 하정훈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질까 기대했다.하지만 하정훈은 이 미묘한 시점에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감정을 추스르는 데 일 분 넘게 시간이 흘렀다.이미란이 다시 물었다.“도련님, 일찍 돌아오셨는데 저녁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하지만 하정훈은 손을 내저었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감정은 어느 정도 정돈된 상태였으나 목소리만은 평소보다 낮고 거칠게 가라앉아 있었다.“괜찮아요, 생각이 없네요.”이미란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시장하시면 언제든 저에게 말씀하세요.”하정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채 침실로 향했다.한 달 가까이 비어 있었음에도 방안은 먼지 하나 없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창가에 놓인 꽃은 오늘 아침에 갓 바꾼 듯 싱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그 화사한 풍경을 마주한 하정훈의 속은 오히려 텅 빈 듯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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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0화

송남지는 당황했다. 하정훈의 목소리에서 이토록 절절한 슬픔과 상처받은 진심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그의 말은 추궁이라기보다 서글픈 혼잣말에 가까웠다.송남지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몇 초가 지나서야 간신히 대답을 찾아냈다.“요즘 갤러리에 일이 너무 많아서요. 겨울 전시회 준비가 생각보다 늦어져서...”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도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하정훈은 30초가량 깊은 침묵에 빠졌다.송남지는 통신 상태가 좋지 않은가 싶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여보세요? 제 목소리 들려요?”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즉각 대답이 돌아왔다.“응, 남지야. 다 듣고 있어.”하정훈은 결국 그녀의 핑계를 받아들이기로 한 듯했다.송남지는 짧게 숨을 들이켜며 말을 맺었다.“그럼 이만 끊을게요. 이제 갤러리 다 왔거든요.”하정훈의 낮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갤러리까지 데려다주던 최보라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니? 처음부터 갤러리로 가자고 했으면 헛걸음은 안 했을 거 아냐.”캐리어를 끄는 송남지의 어두운 표정은 쓸쓸한 겨울 풍경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사실 그녀는 처음에 정말 하씨 저택으로 돌아가려 했었다.갤러리가 아무리 바빠도 핑계일 뿐이었다.하지만 집에 돌아와 하정훈이 그동안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는 이미란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이곳을 너무 ‘우리 집’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서글픈 회의감이 밀려왔다.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송남지는 더 이상 하씨 저택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하정훈은 돌아오지도 않는데 홀로 저택을 지키고 있자니, 마치 냉궁에 갇혀 버림받은 여인이 된 기분이었다.그런 기분이 끔찍이도 싫었지만, 막상 하정훈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을 때 묘하게 죄책감이 들었다.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박재용은 송남지가 재스민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15분 전부터 갤러리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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