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가면을 쓴 남편 / Chapter 581 - Chapter 590

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581 - Chapter 590

782 Chapters

제581화

어시스던트의 얼굴에는 인내심이 가득했지만,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엄가을 씨, 전 노동의 대가를 받으러 온 거지 제 자존심을 팔러 온 게 아닙니다. 당신이 주는 보수는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지불이지 인격을 짓밟아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란 뜻이에요.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죠. 더는 이런 취급 받으며 일할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각자 갈 길 가시죠.”말을 마친 어시스던트는 가방을 움켜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기자회견장 홀에는 엄가을 혼자만 남았다.그녀는 텅 빈 홀을 멍하니 응시했다. 먼발치 거울 속에는 완벽하게 세팅된 화장과 12센티미터의 높은 굽 위에 간신히 버티고 선 자신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위태로운 고층 빌딩 같았다.그녀는 마침내 이 순간, 모든 쓰디쓴 고통을 맛보았다....다음 날. 재스민 갤러리.서경의 오늘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였지만, 햇볕이 비치자 코트를 입어도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쨍한 핫핑크 코트를 입은 민지현은 마카롱 핑크 세단에서 내리는 송남지를 보고 기가 차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쯧쯧, 추워 죽으려고 환장했나? 옷이 저게 뭐야?”본인 역시 멋을 부리느라 추위를 참는 중이었지만 얇은 드레스 하나로 버티는 저 여자의 기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송남지가 뒷좌석에서 우아하게 내렸다.오늘은 하씨 가문의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왔다.늦잠을 자는 바람에 화장을 차 안에서 급하게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수많은 취재진이 카메라를 들이밀며 몰려들었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송남지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에 든 흰색 핸드백으로 살짝 얼굴을 가렸다.“송남지 씨, 어젯밤 정시연 씨가 폭로한 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송남지 씨, 보아하니 엄가을 씨는 정말 까칠한 상대 같은데, 혹시 예전부터 그 실체를 체감하셨던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송남지는 얼굴을 가리
Read more

제582화

하지만 웃음도 잠시, 송남지는 곧이어 도착한 하정훈의 경고성 문자를 보았다.[옷이 너무 얇잖아!]텍스트일 뿐인데도 그 위압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송남지는 장난스럽게 혀를 쏙 내밀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는데 하필 그 장면이 생중계 화면을 통해 하정훈의 눈에 딱 걸리고 말았다.그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을 안 듣네, 요 앙큼한 고양이가.”재스민의 겨울 전시회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순조로웠다.처음에 초청했던 재계 인사들은 물론, 뒤늦게 초청한 예술계 인사들까지 모두 참석했고 언론사들 또한 빠짐없이 자리를 채워 현장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말끔한 정장 차림의 박재용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운 송남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이야, 다 죽어가던 판을 이렇게 뒤집을 줄은 몰랐네요. 난 또 우리 삼촌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투자 구걸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더니만, 이제 보니 헛수고할 뻔했어요.”송남지는 웨이터가 건넨 샴페인 잔을 받아 들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막다른 골목에도 길은 있다, 그 말만으로도 투지가 솟구치지 않아요?”박재용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막다른 골목에 정말... 길이 있을까?’그는 송남지를 빤히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정말 그곳에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송남지는 평소 즐기지 않던 술이지만, 오늘만큼은 축배를 들어야겠다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길이 없으면 밟아서 만들면 되죠. 길이라는 게 원래 사람이 걸어가면 생기는 거잖아요?”그 말에 박재용은 생각에 잠긴 듯 샴페인 잔을 쥔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지금까지 자신에게는 오직 죽을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녀를 보며 어쩌면 없는 길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겨울 전시회가 성황리에 끝나고 송남지가 인터뷰를 하러 이동하려던 찰나, 민지현이 흥분된 표정으로 그녀를 막아섰다.“관장님, 예전에 계약 해지했
Read more

제583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송남지에게 윤이현의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브랜드 후원 건으로 연락했으리라 짐작하며 전화를 받는 동시에 재스민 갤러리 옆문으로 빠져나와 자신의 차로 향했다. 지금쯤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다.전화를 받자마자 송남지는 먼저 말을 꺼냈다.“윤 대표님, 오늘 전시회에 직접 오실 줄 알았어요.”겨울 전시회에 참석하겠다던 윤이현은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불참했고 별무리 측에선 브랜드 매니저만 모습을 드러냈다.이에 대해 윤이현은 구태여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처음에는 송 관장님께 흑심을 품고 후원 계약을 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젯밤 관장님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제가 직접 가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놀랐습니다. 별무리가 투자한 비용에 비해 재스민을 통해 얻는 가치가 훨씬 크더군요. 송 관장님,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과찬이십니다.”송남지는 윤이현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만찬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을 터였다.송남지는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이득을 보고도 짐짓 모르는 척하는 것도 질색이었다.그녀는 사실대로 말했다.“제가 대단하다기보다는 윤 대표님께서 관대하신 거죠. 어젯밤 만찬에서 제가 윤 대표님을 이용했다는 걸 아실 텐데도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하시니, 오히려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윤이현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정시연 씨가 그 동영상을 올리기 전까지는 저도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안들 어떻습니까. 미인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나름 운치 있는 일이죠. 게다가 제게는 또 다른 수확이 생겼거든요. 이번 일로 경쟁사의 점유율을 상당 부분 뺏어왔습니다. 특히 젊은 층의 반응이 뜨겁더군요. 사업가로서는 이용당한 대가치고 꽤 쏠쏠하게 남는 장사를 한 셈입니다.”윤이현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송남지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윤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게다
Read more

제584화

송남지가 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오후의 햇살은 부서지듯 쏟아졌다.차창 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니 길은 막힘 없이 뚫려 있었고 햇살은 눈부시게 찬란했다.문득,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그 어떤 하루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서경을 떠나 하정훈이 있는 도시로 향하는 비행기는 3시간 20분의 비행 끝에 땅에 닿았다.화려하면서도 청초한 느낌을 주는 그녀의 드레스는 서경에서는 다소 추워 보였지만 이곳의 날씨에는 안성맞춤이었다.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내릴 때까지, 그녀는 어디서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차가운 느낌을 주는 동양적인 얼굴에 화사한 빛깔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걸음걸이는 하늘거리듯 우아했다.송남지는 여권과 환전한 현지 화폐를 가방에 챙겨 넣고 현지 유심칩을 구매한 뒤 하정훈이 머무는 호텔로 향할 채비를 했다.그런데 막 유심칩을 갈아 끼우고 고개를 드는 순간, 인파 속에서 불타는 듯한 시선 하나가 자신에게 꽂혀 있음을 느꼈다.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항 안에서 송남지는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하정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송남지의 가슴이 벅차게 뛰어올랐다.굳이 마중 나올 필요 없다고 신신당부했건만, 그는 기어코 와 있었다.예고 없는 그의 등장에 설레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을 것이다.송남지가 겨우 두어 발자국을 떼었을 때, 하정훈은 이미 폭풍처럼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다가와 있었다. 그는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공항 한복판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온 힘을 다해 송남지를 안아 든 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벅찬 희열이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나타나는 가장 본능적인 환희였다.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을 되찾은 아이처럼, 그는 그녀를 품에 넣고 놓아줄 줄 몰랐다. 이러다 튕겨 나갈까 두려워진 송남지는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귓가에 외쳤다.“정훈 씨! 그만 돌아요, 넘어지
Read more

제585화

송남지가 차에 타자 하정훈은 재빨리 반대편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앉은 뒤, 몸을 숙여 송남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기가 그의 코끝을 가득 채웠다.“내가 옷 적게 입지 말라고 했을 때, 네가 혀 내밀던 모습도 언론에 다 찍혔어.”이 말을 듣자 송남지는 다소 민망해졌다.원래 ‘산이 높으면 황제도 멀다'는 말이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예외였다. 하정훈이 바로 코앞에 있었으니까.송남지는 금세 얌전해졌다. 조수석에 앉아 짐짓 창밖 풍경에 몰두하는 척하고 있을 때, 그녀의 손등 위로 따스한 온기가 덮였다.하정훈이 그녀 손을 꽉 쥐며 물었다.“창밖에 대체 뭐가 그렇게 네 시선을 사로잡는 거야?”송남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 모르는 척했다.심지어 웃으면서 창밖 다른 차들을 가리켰다.“여기 차들은 도색이 왜 이렇게 반짝거리는 것 같죠?”하정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흘끗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남지야, 넌 언제나 찔리는 게 있거나 무서울 때면 말이 많아지더라. 지금처럼 얼굴에 온갖 표정이 다 드러나고.”송남지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였지만, 하정훈을 향한 얼굴 위엔 숨기지 못한 감정들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제가 딱히 찔릴 게 뭐가 있다고요...”그녀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눈에 띄게 기어들어갔다.하정훈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얇은 입술에 가져다 댔다.그는 그녀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네가 찔리거나 두려울 게 없다면 됐어.”말을 마친 그는 날카로운 눈썹을 치켜뜨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보았다.송남지는 자신에게 곧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른 채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하정훈이 머무는 도시는 그리 크지 않아서 공항에서 호텔까지 차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평생을 서경의 복잡한 도심에서 자란 송남지에게는 꽤 생경한 거리감이었다.“여기가 수도 아니었어요? 어떻게 한 바퀴 도니까 바로 도착하네요.”하정훈은 몸을 숙여 송남지의
Read more

제586화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송남지는 유리 거울에 몸이 밀착된 채,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키스를 받아냈다.뜨거운 열망이 파도처럼 밀려와 전신을 휘감았다.송남지의 손은 힘없이 하정훈의 허리에 걸쳐졌고 깊은 입맞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멈췄다.이미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송남지는 하정훈이 자신을 안아 든 채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내맡겼다. 하지만 그는 침실 쪽으로 가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가 인피니티 풀 앞에 섰다. 그제야 송남지의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그녀는 망설임과 추측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정훈 씨, 뭘 하려는 거예요...”하정훈은 그녀를 내려놓고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코끝을 살짝 스쳤다.“글쎄? 내가 뭘 하려는 것 같아? 이건 내 말을 듣지 않고 몰래 혀를 내민 것에 대한 벌이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정훈은 송남지를 안고 인피니티 풀로 뛰어들었다.그는 송남지를 이끌고 수심을 가로질러 수영장 끝, 아득한 경계선까지 나아갔다. 그곳에서는 도시 전체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고 유유히 흐르는 메남강 위 유람선의 풍경까지 선명히 들어왔다.유람선 위에서는 관광객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은 28층에 위치해 있어 지상의 사람들이 그들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타인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송남지의 심장은 아찔하게 조여왔다.혹시라도 이 은밀한 모습이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그녀를 자극했던 것이다.하정훈이 등 뒤에서 그녀의 아랫배를 감싸 안고 몸을 바짝 밀착했다.물속에서의 감촉은 모든 것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다.송남지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고 수영장 벽에 기댄 몸 주위로 잔잔한 파문이 퍼져나갔다.수영장에서 스위트룸 거실로, 다시 거실에서 침실로 이어지는 내내 송남지는 일찌감치 기력을 잃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날이 어둑해지고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야 하정훈은 비로소 송
Read more

제587화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오직 그녀의 편안함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뭘 입어도 눈부시게 아름다울 테니까.송남지는 미소 지으며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었다.부드러운 순면 티셔츠는 몸에 닿는 감촉이 무척 편안했다.그녀는 막 옷을 갈아입은 하정훈을 바라보았다.정말이지, 두 사람의 옷은 제법 잘 어울렸다.둘 다 하얀색 티셔츠에, 그녀는 데님 스커트, 그는 무릎 기장의 데님 팬츠 차림이었다.송남지가 놀리듯 말했다.“정훈 씨, 그렇게 입으니 꼭 갓 입학한 대학생 같아요.”그러자 하정훈이 눈썹을 까딱하며 응수했다.“사모님이야말로 수능 막 끝낸 여고생 같은데.”말을 마친 그는 슬리퍼 한 켤레를 가져왔다.“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우리 그냥 이거 신고 나가자.”송남지는 하정훈의 도움으로 신게 된 검은색 슬리퍼와 그의 발에 신겨진 슬리퍼를 번갈아 내려다보았다.“설마 이것까지 커플템이에요?”하정훈은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이 옷이랑 슬리퍼, 전부 내가 특별히 준비한 거야.”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그를 보며 송남지는 사랑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유치하긴.”유치하다는 소리에도 하정훈은 좋다고 실실거렸다.“유치하면 어때.”마누라랑 커플룩 입을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서경에서는 숨기느라 바빴지만, 여기 동남아에서는 그럴 필요 없었다.기회가 생긴 김에, 그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송남지가 자신의 아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저녁은 유람선으로 예약했어. 메남강 야경 보면서 밥 먹자.”하정훈이 덧붙였다.“걸어갈래, 차 탈래?”이제 막 피로가 풀린 송남지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걸어가요. 주변에 재미있는 게 뭐가 있나 구경하면서 천천히 가고 싶어요.”하정훈은 기쁘게 동의하며 나가기 전 귀여운 미니 선풍기를 챙겨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이거 챙겨. 여기 더우니까 목에다 쐬고 다녀. 쓰러지지 말고.”송남지가 코웃음을 쳤다.“나 그렇게 약골 아니거든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 발짝 떼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지며
Read more

제588화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마자 송남지는 하정훈의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호텔 프런트 직원들이 보면 제가 뼈라도 없는 줄 알겠어요. 허구한 날 남의 품에 안겨서만 다니는 줄 알 거 아니에요!”하정훈은 송남지를 내려주었지만 그녀의 손은 놓지 않고 꼭 잡았다.“남지야, 서경에서야 좀 조심한다고 쳐도, 여긴 동남아야. 아는 사람 마주칠 일도 없는데, 모르는 사람들이야 뭐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안 그래?”그는 말하면서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넘겼다.느슨하게 묶은 포니테일 사이로 잔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그녀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정훈 씨 말도 일리는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제가 매번 안겨 다니는 건 너무 민망하다고요. 다친 데도 없는데 말이에요.”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하정훈은 송남지의 손을 잡고 호텔 프런트 데스크로 곧장 걸어갔다.그가 프런트 직원과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동안, 송남지는 그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비록 그녀가 평범한 티셔츠와 데님 스커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 로비의 수많은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중심으로 맴돌았다.그녀는 마치 왕자님 곁에 고요히 서 있는 고분고분하고 사랑스러운 공주님 같았다.프런트 직원과의 짧은 대화를 마친 하정훈은 송남지를 안심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딱 1분만 기다려. 금방 끝날 테니까.”송남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프런트에 무슨 말을 했어요?”하정훈은 얇은 입술을 말아 올려 미소 지었다.“이따 보면 알아.”1분 뒤, 제복을 입은 프런트 직원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하정훈에게 건넸다.하정훈은 그것을 받아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몸을 돌려 송남지의 귀 뒤와 목덜미에 흩어진 잔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하기 시작했다.그것은 가느다란 검은색 머리핀이었다.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송남지의 잔머리를 깔끔하게 고정해 주었다.그러자 송남지는 순간 훨씬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이곳 날씨는 덥고 습해
Read more

제589화

그녀는 길쭉한 나무 꼬챙이를 들어 수박 한 조각을 찍어 하정훈의 입가로 가져갔다.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하정훈은 이내 홀린 듯 입술을 벌렸고 시원한 수박이 그의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송남지는 까치발을 들고 눈을 가늘게 뜨며 기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달아요?”하정훈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 엄청 달아.”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송남지는 나무 꼬챙이로 자신의 수박 한 조각을 찍어 맛있게 입에 넣었다.혀끝에 닿자마자 그녀는 놀란 듯 소리쳤다.“진짜 달아요!”하정훈은 그녀의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아무리 달아도 너만 하겠어.”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송남지는 그저 수박 먹기에 정신이 팔려 하정훈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그녀는 두 번째 수박 조각을 자신의 입에 넣고 나서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물었다.“뭐라고요? 잘 못 들었어요.”하정훈은 어깨를 으쓱했다.“못 들었으면 됐어. 자꾸 말하면 내 진심이 가벼워 보일지도 모르니까.”솔직히 그는 자신의 사랑이 넘쳐서 송남지에게 그 마음이 오히려 진실하지 못하게 느껴질까 봐 스스로가 겁이 날 지경이었다.송남지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콧방귀를 뀌었다.“안 말할 거면 말아요.”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수박을 나누어 먹었다.송남지가 먼저 하정훈의 입에 수박을 넣어주면, 이어서 그녀도 한 조각을 입에 물고 달콤한 과즙을 음미했다.멀지 않은 메남강 강가에 정박한 유람선이 보이자 하정훈이 갑자기 불쑥 말을 꺼냈다.“남지야, 그거 알아? 나한테는 오늘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날이야.”송남지는 어리둥절했다.“왜요? 일이 잘 해결됐나요?”하정훈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아니.”송남지는 계속해서 추측했다.“그럼 재스민 겨울 전시회가 성공해서요? 아니면... 제가 당신을 보러 여기까지 와서?”하정훈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둘 다 아니야.”더 이상 짐작할 길 없던 송남지가 포기한 듯 물었다.“그럼 대체 뭐가 정훈 씨를 그렇게 행복
Read more

제590화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유람선은 미끄러지듯 강 중심으로 나아갔다.길게 이어지는 강변의 야경이 송남지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그녀는 이 모든 순간이 비현실적일 만큼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느꼈다.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악기를 턱에 괴고 두 눈을 감은 채 은은하게 퍼지는 선율에 흠뻑 젖어 있었고 강물 위로 불어오는 밤바람은 말할 수 없이 아늑했다.정통 동남아 요리에 이어 차갑게 칠링된 샴페인이 테이블에 올랐다. 하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병을 흔들더니, 경쾌한 펑 소리와 함께 직접 잔을 채우며 재스민 갤러리 겨울 전시회의 성공을 축하했다.송남지는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하정훈을 놀랍고 기쁜 눈으로 바라보았다.자신을 위해 샴페인까지 준비해 준 그의 이러한 세심한 배려와 의식적인 행동에 송남지는 마음이 포근하게 덥혀졌다.하정훈이 건넨 고블릿 잔을 받아 들자, 잔 벽에는 미세한 기포들이 맺힌 주황빛 샴페인이 일렁였다. 그 속에서 하나둘 톡톡 터져 오르는 기포들은 마치 칠흑 같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의 파편 같았다.송남지가 잔을 입가에 가져가려던 순간, 밤하늘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오색찬란한 불꽃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그녀는 경탄 어린 눈으로 하정훈을 보았다가 다시 홀린 듯 불꽃이 수 놓인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재스민 겨울 전시회 대성공을 축하합니다!]선명하게 새겨진 글씨가 송남지의 눈동자 속에 보석처럼 박혀 들었다.분명 고개를 한껏 젖혀 하늘을 우러러보는데도 눈가에 촉촉한 눈물이 맺히는 것은 왜일까?송남지는 입술을 꽉 깨물고 허리를 감싸 안는 하정훈을 찌푸린 미간으로 올려다보았다.“다음엔 이런 거 준비할 때 미리 말 좀 해줘요. 바보처럼 이렇게 감동받게 하지 말고.”그녀는 다른 손을 들어 눈가에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하정훈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더니 몸을 돌려 고개를 숙여 송남지를 진지하게 응시했다.“누구와 보내든 매일이 똑같을 순 없어. 남지야, 나와 함께하는 모든 날은
Read more
PREV
1
...
5758596061
...
7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