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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821 - Chapter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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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1화

송남지가 뒤를 돌아보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하정훈이 보였다.“나도 가만히 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땀까지 뻘뻘 흘리세요?”하정훈은 익숙한 손길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방울을 톡톡 닦아내며 설명했다.“윤양 기온이 서경보다 좀 높아서 더위를 타나 봐.”송남지가 하정훈을 훑어보았다. 하얀 셔츠는 맨 윗단추까지 꽉 채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얇은 정장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다.“그렇게 입었으니 당연히 덥죠.”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뻗어 하정훈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윤양에서 더위 먹고 쓰러져서 나 골치 아프게 하지 마시고요.”단추가 풀리자 하정훈의 목에 걸려 있던 평안부가 순식간에 드러났고 송남지의 손이 셔츠 깃에 머문 채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당혹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허 참, 이걸 진짜 몸에 지니고 다니시는 거예요?”하정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평안부를 셔츠 안으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몰랐어? 나 은근히 미신 믿거든. 이왕 빌어온 평안부인데 당연히 차고 다녀야지.”골목 사이로 간만에 바람이 불어와 송남지의 뺨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급하게 걷느라 그녀도 지친 기색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닿자 송남지는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나 보러 윤양까지 오신 거예요? 무슨 일인데요?”하정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꼭 여기서 서서 얘기해야 해?”방금 닦아낸 이마에 다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송남지는 하정훈이 윤양에 온 게 처음이기도 하고 여준휘의 골칫거리였던 은지영의 민원 건을 깔끔하게 처리해 준 게 떠올라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저 앞에 식당 있으니까 그리로 가요.”그제야 하정훈의 얼굴에 서렸던 긴장이 가셨다.그는 송남지의 뒤를 따르며 덧붙였다.“너 찾으러 온 거 아냐. 마침 화동에 출장 올 일이 있었을 뿐이지.”“네, 네.”송남지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식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이곳은 그녀와 소윤이 자주 오던 동남아 음식점이었다. 소윤은 임신 후기에 접어든 뒤로 평소 먹던 음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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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2화

송남지는 입을 달싹였지만, 고맙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죄책감 때문에 하는 보상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그렇게 하면 하정훈이 그녀에게 준 상처를 다 용서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았으니까.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하정훈은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했다.“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송남지는 픽 웃음을 흘렸지만 입가는 전혀 미동도 없어 그저 억지웃음처럼 보였다.그녀도 이렇게 까칠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에는 늘 하정훈을 향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그 선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평범한 관계처럼 대화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송남지는 가시 돋친 말투로 대꾸했다.“애초에 감사 인사를 드릴 생각도 없었어요. 본인이 원해서 하신 일이지 내가 시킨 건 아니잖아요.”하정훈은 그녀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주문을 마친 뒤 송남지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말씀해 보세요. 이 먼 윤양까지 오신 게 설마 저희 부모님 잘 모셔다드렸다는 보고만 하러 오신 건 아닐 테니까요.”하정훈은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건넸다. “지난번에 네가 시킨 일, 다 끝냈어.”송남지는 재스민에 관한 계약서를 살펴보다가 앞쪽 몇 줄을 채 읽기도 전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재스민 양도에 관한 계약서였는데, 양도인란에 온통 자신의 이름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방금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본인이 원해서 하신 일이지 내가 시킨 건 아니잖아요.’그런데 지금 이 재스민 건은 정말로 송남지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닌가?미간을 찌푸린 채 계약서를 바라보던 송남지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번에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하정훈은 오늘 정말로 계약서를 내민 것이다.“사인해. 사인하고 나면 네가 재스민을 원하든 원치 않든 재스민은 네 거야.”송남지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식당 사장이 직접 요리를 내오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송남지 씨, 정말 비즈니스 파트너였나 보네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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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3화

송남지가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침묵을 깼다.“내가 아무 말 안 하면 계속 이렇게 마주 앉아만 계실 거예요?”하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게 신사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줄게. 오늘 답이 안 나오면 계약서를 들고 가서 더 고민해도 좋아.”송남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하정훈을 바라보았다.“재스민은 어떻게 손에 넣으신 거예요?”하정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은배석을 찾아갔어. 은배석이 성서 지구 프로젝트에 끼고 싶어 하길래, 수익의 일부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재스민을 넘겨받았지.”송남지는 성서 지구의 그 프로젝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면 은씨 가문이 그렇게까지 끼어들려고 애썼을 리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이제 와서 그렇게 큰 비용을 들여 재스민을 되찾아올 거였다면, 그때는 왜 재스민이 내 손에서 떠나가는 걸 보고만 있었나요?”누가 봐도 은지영이 재스민을 뺏어갈 수 있었던 건 하정훈과 무관하지 않았다.지난날의 기억이 송남지의 뇌리를 자극하며 감정을 걷잡을 수 없이 뒤흔들었다.“대체 나한테 얼마나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하정훈 씨?”그녀의 어두운 기색을 눈치챈 하정훈의 안색이 굳어졌다.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 어떤 말을 해야 그녀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송남지가 쏟아내는 감정의 폭우를 고스란히 받아낼 뿐이었다.쏟아지는 비안개 속에서 그는 우산을 쓰지 않기로 택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고마워라도 할 줄 알았나요? 돈이면 당신이 했던 짓들이 다 없던 일이 될 것 같아요? 당신은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본인 편안하자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속물적인 재벌들과 똑같네요. 나를 이용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생각은 버리세요.”송남지는 탁자 위의 계약서를 집어 들어 반으로 찢고, 다시 반으로 찢기를 반복해 잘게 부수어 버렸다.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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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4화

밤이 깊어지자 윤양의 무색 바에는 여행 온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각양각색의 남녀들이 강렬한 비트의 음악에 맞춰 스테이지 위에서 몸을 흔들고 있었다.일찍이 소윤이 이곳에 오자고 졸랐을 때만 해도 송남지는 임신 중엔 안정이 최고라며 또 본인은 이런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싫어한다며 딱 잘라 거절했었다.그랬던 그녀가 지금, 누구의 동행도 없이 홀로 이곳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생경하게 느껴졌다.어쩌면 그녀에겐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를 쏟아낼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하정훈과 헤어진 뒤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가슴 깊은 곳의 감정을 제대로 분출해 본 적이 없었다.5월 말의 윤양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는 창문 너머의 풍경을 비로 적셨다. 휴대폰 화면에 잡힌 빗방울은 꼭 유리창이 소리 없이 우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그녀는 그 찰나의 모습을 기록해 SNS에 사진을 올렸다.그러고 보니 게시물을 올리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인, 반년 만의 일이었다.[비가 올 때 유리창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데, 사람은 어느 타이밍에 울어야 가장 적당할까?]방금 찍은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덧붙였다.게시물을 올리자마자 옆 테이블의 젊은이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언니도 윤양에 여행 오셨어요? 혼자 마시면 적적할 텐데 저희랑 합석하실래요?”송남지가 슬쩍 살펴보니 조명이 어두웠음에도 그들이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듯 순수해 보이는 무리라는 게 느껴졌다.기왕 기분 전환하러 나온 거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젊은 친구들은 그녀가 불편해할까 봐 일부러 여학생 옆자리를 내주었다.덧니가 매력적인 여학생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언니, 저희는 화동 예술대 학생들이에요. 주말이라 놀러 왔는데 언니는 여행 중이세요, 아니면 여기서 일하세요?”송남지는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아, 다들 아직 졸업 전이였어? 난 여기서 일하고 있어.”여학생이 동경 어린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보았다.“언니, 진짜 너무 예쁘세요. 저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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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5화

말을 마친 효린은 송남지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안 그래요, 언니?”송남지는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목을 타고 넘어가는 독한 기운에 깜짝 놀랐다. 요즘 젊은 애들은 원래 이렇게 독한 술을 마시나?그나마 한 번에 원샷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술기운이 살짝 오르자 송남지도 조금 더 대담해졌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남학생에게 손짓했다.“저기, 이쪽으로 좀 더 가까이 앉을래?”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때는 이런 여우 같은 애를 좀 골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효린의 오빠는 예기치 못한 제안에 당황하면서도 설레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저요?”유진을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와! 사랑의 신호다! 우리 모태솔로 주승현, 드디어 마법에서 풀려나는 거야?”효린은 주승현을 열렬히 끌어당기며 옆자리에 앉혔다.“오빠, 오빠한텐 이렇게 예쁜 언니가 딱이야. 어장관리나 할 줄 아는 누구랑은 급이 다르다고!”그 말에 유진이라는 여학생은 눈매를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사람들 등에 떠밀려 송남지 옆에 앉게 된 주승현은 어스름한 조명 아래서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희고 매끄러운 피부는 맑고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조화로워 어디가 제일 예쁘다고 꼽기 어려울 만큼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머리카락 끝에선 은은한 향기마저 감돌았다.주승현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긴장한 기색으로 더듬거리며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주승현이라고 해요. 올해 화동 예술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사진을 전공하고 있고요...”송남지가 살며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동자 속에서 별빛이 부서지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매혹적이었다.그 시선에 주승현의 심장이 박자를 놓쳤다.“어머, 사진 전공이었어? 난 그림 전공인데. 하지만 졸업한 지는 꽤 됐지. 올해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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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6화

빗방울이 가득 맺힌 유리창 너머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던 것이다.검은 우산을 받쳐 들고 서늘한 눈빛을 한 그 남자의 모습이었는데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송남지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술을 좀 마셨더니 감정 조절이 안 돼서 결국 헛것까지 보게 된 모양이었다.송남지는 눈앞의 어린 친구에게 시선을 돌리며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상관없을 정도로 그렇게 예뻐 보여? 나 이혼 두 번이나 했는데.”주승현이 수줍게 대답했다.“누나처럼 예쁜 분이면 과거가 좀 복잡할 수도 있죠.”이래서 다들 연하남을 찾는구나 싶었다. 정서적 만족감이 대단했다.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유진이 참지 못하고 콧방귀를 뀌며 끼어들었다.“난 저런 스타일 잘 알아. 돈 많은 중년 졸부 꼬셔서 공사 좀 치고 그 돈으로 얼굴 싹 갈아엎은 다음에 젊은 애들 꼬시는 부류지.”유진은 송남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그쪽 나이대 남자들은 그런 거 다 눈치채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들 상대로 사기 치는 거잖아요.”송남지가 입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뒤돌아볼 틈도 없이 그녀를 끌어당긴 남자가 유진에게 대꾸했다.“내가 중년 졸부로 보여?”유진을 포함해 송남지까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멍해졌다.송남지가 고개를 돌리자 어스름한 조명 아래서 묘하게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하정훈의 옆얼굴이 보였다.송남지가 목소리를 낮춰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여기까진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하정훈은 그녀의 SNS에 올라왔던, 유리창이 눈물을 흘리는 듯했던 사진을 떠올렸다.윤양 지리를 잘 알았다면 벌써 찾아오고도 남았을 터였다.유진이 의심쩍게 물었다.“그쪽이 전남편? 말도 안 돼...”하정훈이 여자를 차갑게 응시했다.“내가 전남편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본인이 추잡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을 다 네 수준으로 보지 마. 그건 본인 인성 문제니까.”효린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오빠를 어장에 가둬두고 이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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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7화

송남지는 그의 섬뜩할 정도로 붉은 눈매를 보고 당황하며 물었다.“괜찮아요?”하정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어, 괜찮아.”바 밖에는 장대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윤양의 기온은 크게 올라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될 터였다.하정훈은 우산을 받쳐 들었지만 송남지가 보기엔 그 우산이 곧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우산의 한쪽 끝이 계속해서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송남지가 고개를 들어 확인했을 때 하정훈의 왼쪽 어깨는 이미 완전히 젖어 있었다.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하정훈은 매너 있게 차 문을 열어 송남지가 먼저 타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우산을 접고 차에 올라탔는데, 그 짧은 찰나에도 비에 쫄딱 젖어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주소는?”하정훈이 물었다.송남지는 내키지 않는 듯 마당이 딸린 집 주소를 읊었다.윤양은 그리 넓지 않아 바에서 집까지는 채 15분도 걸리지 않았다.택시가 집 앞에 멈춰 섰을 때 빗줄기는 오늘 밤을 다 적셔버리겠다는 듯 더욱 거세졌다.차에서 내린 송남지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았다. 왜 그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하정훈을 자신의 거처까지 데려오고 말았다.송남지는 코를 훌쩍이며 온몸이 젖은 하정훈을 쳐다봤다. 원래는 그를 그냥 보낼 생각이었지만, 이 빗속에서 자신을 위해 우산을 기울였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대문 앞으로 다가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대문이 좁아 둘이 동시에 들어갈 수 없자 하정훈은 우산을 씌워주며 그녀를 먼저 들여보냈다.송남지의 발걸음을 따라 우산도 함께 움직였다.문득 뒤를 돌아보자 하정훈은 무방비하게 빗속에 노출되어 있었다.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하정훈 씨도 어서 들어오세요. 따뜻한 물로 씻지 않으면 감기 걸려요.”하정훈은 충혈된 눈으로 송남지를 따라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그는 마당 구석구석을 살피며 자신이 없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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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8화

옷을 건네받을 때 송남지의 손이 하정훈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순간 그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의 손끝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걸까?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늘했다.아무리 윤양에 폭우가 쏟아진다 해도 체온이 이 정도로 떨어질 리는 없었다. 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감기 걸린 거 아니에요?”문은 여전히 틈이 벌어져 있었다.욕실 안의 하정훈이 잠시 멈칫하더니 대답했다.“응, 그런 것 같아.”문이 완전히 닫히고 송남지는 그의 옷을 걸어두고 한참 동안 드라이기로 말렸다. 그러고 나서 냉장고에서 감기약을 찾아냈다.일을 마치고 보니 주전자의 물이 식어 있어 다시 뜨거운 물을 끓였다.어찌 됐든 그녀한테 우산을 씌워주다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 거니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소파에 기대앉은 송남지의 시선이 처마 밑으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줄기에 머물렀다. 한참을 그렇게 턱을 괴고 기다리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르르 단잠에 빠져들었다.비몽사몽 중에 꿈을 꾸었는데, 하씨 가문에서 하정훈을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꿈에서 깨어났을 때 송남지는 자신의 뺨이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인상을 쓰며 나직이 중얼거렸다.“꿈일 뿐인데 왜 이렇게 한심하게 울고 난리야...”그때 위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송남지가 고개를 들어 보니 하정훈이었다.그는 손을 뻗어 휴지를 내밀었다.송남지는 휴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그녀가 받지 않자 하정훈은 몸을 숙여 그녀의 눈물 자국을 직접 닦아주며 대답했다. “조금 됐어. 네가 잠들었길래 옆에 좀 앉아 있었지.”눈물을 다 닦아준 하정훈의 말투에는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대체 무슨 무서운 꿈을 꿨길래 눈물까지 흘려?”송남지는 눈을 깜빡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욕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정말로 무서운 꿈이었어요.”송남지에게 하정훈과 함께했던 지난날은 그 무엇보다 두려운 악몽과도 같았다.그녀는 욕실 문 앞에 멈춰 서서 나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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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9화

송남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단독 별장 이야기를 꺼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하정훈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보상이라도 하라는 식으로 비꼬며 던진 농담이었다.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재스민도 필요 없고 별장도 안 받을래요. 다 농담이었어요.”말이 끝나고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하정훈은 무언가를 곱씹는 듯하더니 1분 가까이 흐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도 알잖아, 나한테 농담은 없다는 거.”그는 말을 마치며 휴대폰을 송남지에게 내밀었다.“요즘은 계약도 간편해. 전자 서명만 하면 돼. 네가 사인만 하면 재스민도, 윤양의 단독 별장도 다 네 거야.”그녀가 원하는 것, 그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녀의 것이 될 수 있었다.머리를 말리던 송남지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쏘아봤다.“하정훈 씨, 내 말이 말 같지 않나요? 못 알아들으시는 거면 나도 더는 말 섞기 싫으니까 당장 내 집에서 나가주세요.”하정훈은 미간을 좁힌 채 송남지의 날 선 감정을 묵묵히 받아냈다.그는 성급하게 대꾸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말싸움으로 번질 것 같았고,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다툼도 생기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십여 초가 지나 하정훈이 입술을 뗐다.“나랑 말하기 싫은 거 알아. 상관없으니까 사인해. 그럼 바로 나갈게.”송남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나 협박하는 거예요?”하정훈은 미간을 더욱 깊게 누르며 답했다.“아니, 네가 말했던 것들이라 준비한 것뿐이야.”“준비했으니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건가요?”송남지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그럼 예전에 나한테 했던 그 수많은 달콤한 말들은요? 다 지키셨나요? 당신이 한 말은 농담이 될 수 있고, 내가 한 말은 안 된다는 건가요? 하아, 하정훈 씨. 평생 갑으로만 살아서 감이 안 오시나 본데, 다시 말씀드릴게요. 전 당신의 을이 아니에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 침실로 향했다.침실과 거실이 트여 있어 거실에서도 침실이 훤히 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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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0화

송남지는 하정훈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서 거의 들어 올려지다시피 끌려 나왔다.소파로 밀려간 그녀에게 하정훈은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을 쏘이며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빗어 넘겼다.그녀가 벗어나려 버둥거려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소파 옆에 선 하정훈은 엄격한 어른처럼 단호하게 말했다.“머리 젖은 채로 자면 머리도 아프고 감기 걸려. 다 큰 사람이 자기 몸 하나 챙길 줄 몰라?”송남지는 원망 섞인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대꾸했다.“보시다시피 당신이 없던 날들, 나 자신을 아주 잘 돌봤고 생활도 규칙적으로 잘 꾸려왔거든요.”하정훈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으나 그는 더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머리를 말려주었다.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보송보송하고 따뜻해질 때까지 그는 아주 세심하게 움직였다.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감촉에 송남지는 순간 묘한 착각에 빠졌다.창밖의 빗줄기는 가늘어져 바닥을 토닥였고 실내의 은은한 황색 조명 아래서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다독이고 있었다.이 모습은 마치 그들이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하정훈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바라보았으나 송남지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버렸다.그의 얼굴은 너무 반칙이라 가끔 멍하니 넋을 놓게 만들기 때문이었다.“됐어요, 이제 다 말랐으니까 가서 자도 되죠?”송남지는 말을 마치자마자 침대 쪽으로 향했다. 하정훈이 나갈 기색이 없는 데다 억지로 쫓아낼 수도 없으니, 차라리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면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짓 따위는 체면상 못 할 테니, 머지않아 알아서 자리를 뜨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송남지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하정훈은 마치 제 집 소파에 앉아 있는 것처럼 한없이 여유롭고 차분했다.그 감정의 기복 없는 모습이 송남지에게는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하정훈이 나지막이 입을 열어 그녀를 설득했다. “사인해, 그냥.”송남지가 몸을 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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