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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831 - Chapter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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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1화

위선적이라는 말이 하정훈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어쩌면 그는 정말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관계를 정리하겠다고 결심했음에도 그녀를 향한 감정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으니까.“정말 무뢰한이 따로 없네요, 하정훈 씨. 어떻게 이토록 뻔뻔할 수 있어요? 당신이 예전에 씌워준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지금 내 몸을 전부 적시는 기분이에요.”과거에 하정훈은 자신의 권력과 능력으로 그녀를 위한 따뜻한 온실을 만들어준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는 그 똑같은 힘을 이용해 그녀를 끊임없이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지금 그녀의 집에 멋대로 눌러앉아 있는 것도 결국 그녀가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 아닌가.하정훈은 시선을 내린 채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물론 송남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긴 침묵 끝에 고개를 든 하정훈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남지야, 네가 원하던 게 그런 게 아니라면 도대체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는 거요.’송남지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그가 먼저 체면을 내팽개친 이상 그녀 역시 더는 예의를 차릴 이유가 없었다.송남지는 입술 끝을 비틀어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내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줄 수 있다고요?”하정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다 줄게.”그의 눈에는 희미한 기대감마저 서려 있었다.송남지는 그 눈빛의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한 채 웃으며 덧붙였다.“그럼 옷 다 벗고 내 앞에 서 있어 봐요.”그녀는 알고 있었다. 무슨 요구를 하든 하정훈이라면 다 해낼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이것만큼은 그에게도 분명 불가능한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토록 고귀한 그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채 그녀의 시선을 견뎌내는 수치를 허락할 리 없었다.“못 하겠나요? 못 하겠으면 앞으로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줄 수 있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마세요.”송남지는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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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2화

송남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정훈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누군가에게 이런 노골적인 시선을 받는 것이 하정훈 인생에서도 처음일 것임은 자명했다.과거에 누구보다 깊고 뜨거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가 눈앞에 당당히 서 있자 송남지는 차마 시선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런 그녀의 회피하는 눈빛을 보며 하정훈이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내가 다 벗었는데, 왜 보질 못해?”송남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가슴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간신히 시선을 다잡으며 하정훈을 똑바로 응시했다.“그냥 좀 질려서 그래요. 됐으니까 이제 입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샤워 가운을 집어 하정훈에게 던져버렸다.하정훈은 가운을 받아 몸에 걸치며 대꾸했다.“벗으라고 해서 다 벗었는데도 정말 안 볼 거야?”그의 눈빛은 빗속에 홀로 남겨진 유기견처럼 애처롭게 젖어 있었다.송남지는 시종일관 미간을 펴지 못한 채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방금 한 말은 취소할게요.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가보세요.”하지만 하정훈은 요지부동이었다.“이미 말했잖아. 네가 재스민이랑 윤양 별장 받겠다고 하기 전까진 안 나간다고.”가끔 하정훈을 보면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는 고집불통 황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송남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장에서 이불 한 채를 꺼내 소파로 던졌다.“안 갈 거면 마음대로 하세요.”그녀가 항복한 것이다.소파에 던져진 이불을 보며 하정훈의 얇은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깊은 밤, 침대에 누운 송남지는 이 넓은 마당에 왜 독립된 거실 하나 따로 만들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그랬다면 하정훈과 한 공간에 있는 이 묘한 불편함을 견디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그의 기척은 아주 미미했지만, 한 지붕 아래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거리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소란스러웠다.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지만 의식이 흐릿해진 틈을 타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나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악몽이 시작되었다.송남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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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3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유독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하지만 입술을 겹쳐온 송남지는 멈추기는커녕 더욱 격렬하게 파고들었다.하정훈은 자신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그간 억눌러온 모든 감정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그는 그녀의 위를 덮치듯 안으며 주도권을 쥐고 뜨겁게 뒤엉켰다.비가 그친 일요일 아침, 송남지는 평온하게 잠에서 깨어났다.어제의 비가 무색하게 윤양의 하늘에는 눈 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자기 전 미처 닫지 못한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빛에 송남지는 눈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커튼을 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왜 옆에 사람이 있는 거지?’지난 몇 달간 윤양에서 혼자 지내는 삶에 익숙해졌던 터라 눈을 떴을 때 누군가의 온기가 느껴지는 상황이 몹시 당혹스러웠다.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면서 경악은 잦아들었지만, 소파에 있어야 할 하정훈이 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확인하자 미간이 깊게 패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깊이 잠든 하정훈을 거칠게 흔들며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쏘아붙였다.“하정훈 씨, 정말 이럴 거예요? 진짜 무뢰한이 따로 없네요!”사실 하정훈은 그동안 제대로 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수리스에서는 병마와 싸우느라 잠을 설쳤고 서경에 돌아와서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송남지가 없는 하씨 저택에서의 수면은 병실에 있을 때보다도 형편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 송남지를 품에 안고서야 그는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하정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겨우 눈을 떴고 그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잔뜩 화가 난 송남지의 얼굴이었다.송남지는 마치 그가 무슨 천인공노할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분노를 쏟아냈다.상황 파악이 안 된 하정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뭐?”송남지는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팍을 가리며 쏘아붙였다.“본인이 뭘 어쨌는지 진짜 몰라서 물어요?”하정훈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다시 되물었다.“내가 뭘 어쨌는데?”그 말에 송남지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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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4화

송남지는 하정훈의 가슴팍에 잡혀 있던 발을 단숨에 빼내며 쏘아붙였다.“어젯밤은 실수였어요. 여기서 하룻밤 묵으셨으니 이제 그만 가주시죠?”그녀는 이불을 몸에 칭칭 감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젯밤 두 사람은 한 침대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밤을 보냈으니 송남지는 물론 하정훈도 당연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었다. 송남지가 이불을 가로채 도망치듯 몸을 피하자 침대의 하정훈은 무방비하게 전신을 드러내고 말았다.하정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게 그렇게 좋아? 예전엔 이런 취향이 있는 줄 몰랐는데.”송남지는 이불을 꽉 쥔 채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쏟아지는 햇살 아래 하정훈의 매끈한 피부가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번개 같은 속도로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다 입고 나니 다시 전투 모드로 돌아온 기분이었다.“계속 안 가실 거예요?”하정훈은 이미 지난밤 비에 젖었다가 마른 옷을 챙겨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어제와 다름없이 소파에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고 그 모습은 도무지 이곳을 떠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그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응, 갈 생각 없어. 네가...”송남지는 그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가방을 낚아채듯 챙겨 들고는 간단하고 신속하게 물건을 챙겨 넣었다.“좋아요, 당신이 안 가면 내가 나가죠!”하정훈이 반응하고 뒤쫓아 나왔을 땐 이미 그녀가 골목 저편으로 사라진 뒤였다.홀로 남겨진 하정훈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마당에 서 있었다.“그렇게나 싫은 거면, 애초에 그런 말은 왜 꺼낸 거야?”송남지는 몇 달간 정들었던 집에서 피난이라도 가듯 빠져나왔다. 윤양에서 갈 곳이라곤 출산을 앞두고 쉬고 있는 소윤의 집뿐이었다.소윤은 송남지에게 꽃차 한 잔을 끓여 건네고는 배를 받쳐 들며 맞은편에 앉았다.“뭐라고? 전남편이 네 집 마당을 점령하고 안 비켜줘서 갈 곳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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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5화

소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남지야, 사람이 아무 예고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어. 분명 네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었을 거야.”송남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 모르는 일이란 게 결국 그 사람 마음이 떠난 거 아닐까? 이혼 서류를 가져다준 것도 그 여자였으니까.”소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정말 제정신인 남자가 내연녀를 시켜서 이혼 서류를 보낸다고? 그 여자가 심부름꾼이야, 아니면 애인이야?”송남지는 순간 멍해졌고 미간을 찌푸렸다.소윤의 말이 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문득 라인국 전시회에서의 일이 떠올랐다.그때 임승아가 찾아와 사과했을 때, 하정훈은 분명 그녀와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었다.그녀가 한참 생각에 빠져 있자 소윤이 다시 차를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이제 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난 평생을 살면서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봐. 좋아한다면 왜 끝까지 파헤쳐보지 않아? 왜 모든 일의 전말을 정확히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 건데?”소윤은 송남지의 어깨를 다독이며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그 사람한테 이혼하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물어본 적 있어?”송남지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그때 그 사람은 내 전화도 안 받았어. 타국까지 찾아간 나를 차갑게 대하기만 했고 나중에 내 일을 방해해서 많은 걸 잃게 만들기도 했지. 그때 난 주제 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그 여자가 이혼 서류를 가져왔을 때, 더 이상 물어볼 게 없다고 단정 지어버린 거야.”소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사람은 참 그래.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믿거든. 설령 소중한 걸 잃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심만큼은 끝까지 버리기 싫은 법이니까.”송남지가 갑자기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진지한 얼굴로 소윤을 바라봤다.“고마워, 소윤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가방을 챙겨 떠나려는 그녀를 보며 소윤이 웃음을 터뜨렸다.“천만에.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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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6화

물뿌리개의 물은 계속해서 밖으로 넘쳐흐르고 있었지만 하정훈은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서서 입술만 달싹일 뿐 긴 침묵을 지켰다.송남지는 그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하정훈을 응시했다.결국 그 화초가 물에 잠겨 죽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송남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더 주면 이 꽃, 내일이면 죽을 거예요.”하정훈은 그제야 손을 멈췄지만,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역력했다.그 당혹감이야말로 소윤이 말했던,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사건의 전말’임을 송남지는 직감했다.송남지는 격앙된 마음으로 하정훈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그래서, 나랑 이혼하려고 했던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요?”하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시선을 피했다.“갑자기 그건 왜 물어?”이미 몇 달이나 지난 일이었다.다 끝난 마당에 이제 와서 과거의 균열이 무엇이었는지 묻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하정훈의 마음이 요동치더니 굳게 다잡았던 결심이 순간 흔들렸다.그의 망설임은 송남지의 확신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정훈 씨,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죠?”하정훈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답했다.“너한테 숨기는 거 없어.”그는 살면서 거짓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의심을 차단하기 위해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만 했다.송남지는 고개를 들어 하정훈의 눈을 보았다. 너무나 진실하고 덤덤해 보이는 눈동자였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거짓말. 분명 나 몰래 숨기는 거 있잖아요.”하정훈은 팔에 통증을 느꼈는지 눈썹을 까딱이며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너한테 숨기는 거 없어.”“그럼 말해봐요. 나랑 이혼하려던 진짜 이유가 뭔지.”송남지는 하정훈의 손을 꽉 거머쥔 채 그의 눈빛에서 일렁이는 그 어떤 사소한 신호라도 잡아내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그러나 한참을 들여다봐도 그의 눈에는 오직 고고하고도 냉담한 거리감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하정훈은 자신을 탐색하는 송남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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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7화

“사인하라고 했던 거, 지금 할게요.”하정훈은 당황한 듯 멍하니 있다가 답했다.“어, 그래.”그는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파일을 열었다.“여기에 사인하면 돼.”송남지는 널찍한 서명 칸을 응시하며 휴대폰을 받아 들고는 화면 위에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송남지]평소라면 2초면 끝났을 서명인데, 오늘따라 유독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이 서명이 끝나면 하정훈과는 다시 예전처럼 서로의 인생에 참견할 일 없는 사이가 될 것이었다.사인을 마친 송남지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보았다.“이제 그만 가보실래요?”하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재스민이랑 윤양 별장 건은 나중에 김 비서 시켜서 연락할게.”송남지는 짧게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하정훈은 딱히 챙길 짐도 없었지만,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송남지가 눈을 들어 물었다.“뭐 잊으신 거라도 있어요?”하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송남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버티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처음엔 소윤의 말처럼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 기대하며 돌아왔지만, 정작 하정훈은 단순히 마음이 떠난 것뿐이라고 했다.그 순간 그녀는 재스민이니 별장이니 하는 것들이 다 무의미해졌다. 어차피 끝난 사이라면 가져도 그만, 안 가져도 그만이었다.하정훈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마당을 나섰지만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송남지는 더없이 우울한 주말을 보냈다.월요일, 그녀는 가벼운 짐을 꾸려 여준휘의 차를 몰고 소윤과 함께 화동으로 향했다.“네가 우리 전시관으로 와서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이 무거운 배를 이끌고 출장을 갔을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해.”소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농담조로 말했다.송남지가 소윤을 놀리듯 대꾸했다.“배부른 몸으로 남편 찾아가는 건 안 힘들고? 네 남편도 참 너무하다. 주말인데 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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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8화

송남지는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왜? 벌써 염장 지르려고? 오늘 저녁이라도 사주겠다는 거야? 나 바쁠지도 모르는데.”송남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격렬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찢어질 듯한 통곡이었다.송남지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소윤아, 왜 그래? 울지 말고 말해봐! 만삭에 그렇게 울면 아기한테 안 좋아!”소윤이 오열하며 대답했다.“방금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갔는데, 웬 여자가 막 샤워하고 나와서 수건만 걸치고 있는 거야. 그 여자가 나를 보더니 왜 비밀번호를 알고 있느냐면서, 혹시 우리 남편 동생이냐고 묻더라...”송남지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할 말을 잃었다.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소윤아, 일단 거기서 가만히 나 기다려. 내가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야 해, 알았지?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제발.”“남지야, 조윤혁이 바람을 피웠어. 그럼 우리 아기는 어떡해?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가 없어지는데 난 어떡하냐고.”송남지는 급히 시동을 걸었다. 소윤이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마음이 급했지만 서두를수록 일이 꼬였다.하필 결정적인 순간에 계기판에 엔진 고장 메시지가 뜬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전화기 너머 소윤의 흐느낌은 계속되었다.“우리 아기가 아빠 없이 태어나는 거 싫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남지야. 차라리 아기랑 같이 죽어버릴까?”“안 돼, 절대 안 돼, 소윤아! 내가 갈 때까지 꼭 기다려줘, 제발! 네가 말했잖아,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말은 파악해야 한다고. 내 말 맞지?”흐느끼는 소리는 더욱 커졌고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송남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이젠 아무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아. 그 여자가 나더러 조윤혁 동생이냐고 묻더라니까. 조윤혁한테 시골에서 아이 가질 준비하는 여동생이 있다고 했대. 그 여자, 너무 상냥하고 친절하게 조윤혁 퇴근하면 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챙겨주기까지 했어...”차는 이미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고 송남지는 다급히 차에서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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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9화

소윤의 일을 다 들은 하정훈이 갑자기 손을 뻗어 송남지의 손등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내가 좀 더 빨리 밟을게.”송남지는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화동이라는 도시 전체가 정교한 잿빛으로 물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난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이 갑자기 떠나는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상황을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어요.”하정훈이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알아, 남지야. 최대한 빨리 갈게.”다행히 아파트와 쇼핑몰의 거리는 멀지 않았고 10여 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그 광경을 본 송남지는 발끝이 허공에 뜬 듯 아득해졌다.그때 하정훈이 옆에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극심한 현기증에 송남지는 이마를 짚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소윤이는 내 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어요. 만약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소윤이 가족들에게 뭐라고 사죄해야 하죠?”하정훈이 군중 너머를 살피더니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엄중하게 입을 뗐다.“남지야, 지금 올라가면 소윤 씨를 설득할 기회가 있어.”그러고는 옥상을 가리켰다.위를 올려다본 송남지의 눈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인영이 들어왔다.그녀는 사람들을 밀치며 정신없이 달렸다.“소윤아, 안 돼! 제발 나쁜 생각 하지 마!”하정훈은 그녀의 뒤를 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는 운전대를 잡을 상태가 아니었으며 무리하게 걷는 것조차 금물이었다.하지만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가는 송남지를 혼자 둘 수 없었기에 그는 다리의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엘리베이터에 타기 전 멀리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하정훈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송남지를 다독였다.“소방대가 도착했으니 아래에 에어매트를 깔 거야. 네가 걱정하는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하지만 송남지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불안해했다.“매트 위치랑 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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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0화

하정훈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보였다.“더 이상 안 갈 테니 진정하세요.”소윤은 하정훈의 뒤에 서 있는 송남지를 무력하게 바라보았다.“남지야, 걱정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정말 못 견디겠어. 우리 아기가 남겨진 짐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송남지는 소윤이 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계속해서 현기증을 느끼며 신음하듯 말했다.“소윤아, 제발 나쁜 생각 하지 마. 내려가서 얘기하자, 해결 못 할 일은 없어!”그녀는 말을 내뱉으며 마음속 깊은 공포를 억누르고 소윤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하지만 송남지가 가까워지자 소윤은 더욱 흥분하며 몸을 떨었다.“오지 마! 다들 저리 가라고!”송남지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옥상 끝에 선 소윤은 멀쩡한데, 오히려 그녀의 다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하정훈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직이 위로했다.“남지야, 너부터 진정해야 해. 천천히 설득해 보자. 괜찮을 거야.”그제야 송남지의 호흡이 조금은 안정되었다.그녀는 하정훈을 바라보았다. 이 아스라한 높이의 옥상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하정훈이었다.위태롭게 서 있던 소윤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반년 전부터 조윤혁이 매주 야근을 했어. 그때 나랑 아기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지. 책임감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어. 화동에서 혼자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온 건데, 여기서 새 여자친구를 마주할 줄이야. 그 여자 눈엔 내가 시골에서 애 낳을 준비 하는 여동생이라니. 참 우습지, 정말 우스워...”송남지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윤양에 머무는 동안 송남지에게 친구라고는 소윤뿐이었다.소윤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사람 냄새는 송남지를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끌어올려 주었다.서경에서 겪었던 그 모든 상실감을 소윤이 구원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이제 송남지는 자신이 소윤의 구원이 되고 싶었지만, 높은 옥상 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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