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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1화

하정훈이 깊은숨을 내뱉으며 물었다.“서윤아, 사랑은 모든 걸 같이 감당하는 거라고 생각해?”김서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랑한다면 당연히 모든 걸 함께 짊어져야죠!”하정훈은 고개를 숙인 채 낮게 웃었다.“넌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야. 만약 너한테 정말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갑자기 죽음을 앞뒀다고 가정해 봐. 뭐가 제일 걱정될 것 같아?”김서윤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제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아내가 무너지지 않을까, 제가 떠난 뒤에 그녀를 돌봐줄 사람은 있을까 하는 게 가장 걱정될 것 같습니다.”“거봐, 내 말이 맞지? 내 죽음이 결국 남지를 무너뜨릴 거라면, 차라리 내 죽음을 모르게 하는 게 나아. 아니면 남지가 날 미워하게 됐을 때 알리는 게 낫지. 그때라면 내 죽음이 남지에겐 차라리 기쁜 소식일지도 모르니까.”이 질문에 정답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김서윤도 말을 아꼈다.“대표님, 시키신 일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느껴지시면 지체 말고 연락 주십시오.”김서윤은 병원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날 받았던 전화만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날 밤, 성은 그룹을 떠나 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하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고 경황없이 나오느라 약을 챙기지 못했는데 비까지 맞았다고 했다.목소리만 듣고도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한 김서윤은 급히 사람을 보내 하정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약을 보내게 했지만,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음을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약이 도착하기 전 증세가 호전되었지만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던 김서윤은 결국 하정훈의 부모님께 사실을 알렸다.그리고 두 분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서경에서 이곳으로 단숨에 달려왔다.비록 운명처럼 정해진 병이라 해도 그날 밤 같은 상황만큼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송남지는 차에 올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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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2화

새벽 2시 반, 정적에 잠긴 병원의 밤을 뚫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복도 벤치에 앉아 있던 송남지와 하정훈은 조금 전의 초조함을 털어내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시울에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과 기쁨이 빛무리처럼 번져 나갔다.오랫동안 억눌렸던 긴장이 풀린 순간,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껴안으며 중얼거렸다.“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하지만 서로의 온기가 닿자마자 어색함을 느끼고는 황급히 몸을 떼었다.사선을 넘나들었던 소윤의 상태는 다행히 안정적이었고 고비를 넘긴 그녀는 지금의 평온함을 그 어느 때보다 소중히 느끼는 듯했다.소윤의 부모는 갓 태어난 아이를 슬쩍 쳐다보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고생한 딸에게 쏠려 있었다.두 사람은 산실 침대 양옆에 붙어 서서 소윤의 손을 꼭 맞잡았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자꾸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윤아, 어쩌자고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어? 그런 쓰레기 같은 놈 때문에 인생을 버리려 하다니,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야. 너한테는 엄마랑 아빠가 있잖니.”소윤은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터뜨렸다.“엄마, 아빠, 제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거 알아요. 그때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런 큰 고비를 겪고 나니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모든 게 얼마나 소중한지... 비록 아이에게 아빠는 없겠지만, 그래도 행복한 집에서 자라게 할 거예요.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있고 또 누구보다 아껴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니까요.”그 화목하고 따스한 풍경을 지켜보던 송남지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툭 떨어졌다.하정훈이 손수건을 내밀며 짧게 말했다.“닦아.”송남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은 대체 손수건이 어디서 그렇게 계속 나와요?”하정훈이 나직하게 대꾸했다.“알 거 없어.”눈물을 닦아낸 송남지의 시선 끝에는 소윤이 머물렀다. 소윤의 눈동자에는 말로 다 못 할 고마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굳이 긴 말을 내뱉지 않아도, 찰나의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마음은 깊게 맞닿았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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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3화

송남지는 하정훈을 돌아보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무슨 헛소리에요? 내 방 잡으려는 거예요. 이런 비즈니스호텔은 하정훈 씨가 지내기에는 불편할 거니까요.”병원과 가까운 곳을 찾다 보니 접근성만 따졌을 뿐 호텔 등급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니 이런 평범한 비즈니스호텔은 평소 하정훈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하지만 송남지의 예상과 달리 하정훈은 짙은 눈썹을 까닥이며 말했다.“트윈룸으로 부탁합니다. 좁은 건 딱 질색이라서요.”송남지는 얼떨결에 카드키를 받아 들고 하정훈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송남지는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걷다 객실 문 앞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이 근처에 다른 고급 호텔도 있을 텐데, 굳이 나랑 같이 불편하게 여기 안 계셔도 돼요.”하정훈은 대답 대신 송남지의 손에서 카드키를 가져가 도어락에 갖다 대며 하품을 내뱉었다.“졸려 죽겠네, 빨리 자자.”문이 열리자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깔끔한 비즈니스호텔 트윈룸이 나타났다.하정훈은 피곤이 몰려오는지 화장실 쪽 침대에 몸을 던졌고 창가 쪽 침대를 송남지에게 양보했다.송남지는 침대 옆에 서서 이미 눈을 감아버린 하정훈을 흘겨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어떻게 남녀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한 방에 들 수 있지? 그것보다 이 사람은 어떻게 아무 생각도 없이 저렇게 바로 잠들 수가 있어?'송남지는 입술을 비죽이며 깊은숨을 내뱉고는 조심스럽게 욕실로 향했다.화동의 5월은 날씨가 제법 후덥지근했고 하루 종일 고생한 탓에 샤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곧 욕실 안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침대에 누워 잠든 척하던 하정훈은 천천히 눈을 떴고 그 깊은 눈망울에는 수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뿌연 욕실 유리 너머로 송남지의 실루엣이 가물거리며 비쳤다.하정훈은 이 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릴까 두려운 듯, 감기 아까운 눈으로 그 유리창을 멍하니 응시했다.그러다 물소리가 잦아들자 황급히 눈을 감았다.송남지는 몸을 꼼꼼히 감싼 채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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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4화

텅 빈 침대 위에는 구겨진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처음에 송남지는 하정훈이 씻으러 간 줄로만 알고 몸을 뒤척이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하지만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쪽으로 걸어가며 나지막이 물었다.“욕실에 있어요? 하정훈 씨?”어젯밤 그가 몹시 피곤해했던 터라 지금쯤 씻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욕실 안은 고요했고 송남지의 물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제야 그녀는 하정훈이 정말 떠났음을 깨달았다.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침대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하정훈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프로필은 모감주나무 아래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그동안 SNS 게시물도 비어 있었고 답장도 없었기에 송남지는 그가 이 계정을 더는 쓰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일이 생겨서 서경으로 돌아간다.]짧은 문장이었지만 송남지는 한참을 들여다봤다.그렇게 가라고 해도 안 가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서경으로 가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이 너무나 느닷없었다.송남지는 대화창에 답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보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저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리려 보낸 메시지일 테니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 후 송남지는 병원에서 소윤과 일주일을 보냈다. 독서와 그림으로 채워진 알찬 시간이었다.일주일 후 소윤의 상태가 호전되자 부모님이 차로 그녀를 윤양까지 데려다주었고 송남지 역시 여준휘의 CRV를 몰고 윤양으로 향했다.이번에는 짐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작은 마당의 짐을 막 다 정리했을 무렵 대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어보니 정장 차림의 부동산 직원이 서 있었다.상대방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송남지 씨 되시죠? 얼마 전 하정훈 씨가 송남지 씨를 위해 별장을 한 채 매입하셨는데 오늘은 그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논의하고자 찾아왔습니다.”그제야 송남지는 자신이 서명했던 두 건의 전자 계약서 중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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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5화

송남지는 미소 지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주방으로 가 일손을 도왔다.소윤의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나무랐다.“이 사람이 눈치도 없이, 귀한 손님을 어떻게 부엌에 들여!”담요를 두르고 의자에 앉아 있던 소윤이 곁에서 거들었다.“아빠, 요즘은 자급자족이 유행이에요. 손님이라도 공짜로 얻어먹으면 마음이 불편하거든요.”송남지도 얼른 말을 맞췄다.“맞아요, 공짜 밥은 늘 마음이 무겁더라고요.”그러자 소윤의 어머니가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고마움이 가득했다.“남지야, 네가 여기서 먹는 건 절대 공짜가 아니란다. 약속해주렴, 서경 생활이 힘들고 답답해지면 언제든 윤양으로 오겠다고. 여기가 네 두 번째 집이야.”송남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지만 다시 이곳에 올 날이 언제일지는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했다.식사를 마친 뒤, 송남지는 잠시 아이와 놀아주었다.소윤을 닮아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사내아이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마치 말을 거는 것만 같이 사랑스러웠다.“남지야, 내가 부탁한 이름 생각해 왔어?”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던 송남지가 대답했다.“만이라고 지으면 어떨까? 마침 아이가 태어난 날이 소만이었잖아. 만물이 가득 차오르라는 뜻으로.”소윤이 엄지를 치켜세웠다.“만이! 이름 진짜 예쁘다. 만물이 가득 차오른다는 뜻처럼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니, 나중에 자라서도 겸손하고 듬직한 남자가 됐으면 좋겠어.”생기가 도는 소윤의 눈동자를 보며 송남지의 마음도 한결 밝아졌다.“소윤아,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해, 알았지? 내가 언제나 네 버팀목이 되어줄게. 이제 만이도 있으니 절대로 나쁜 생각 하면 안 된다.”옥상에서의 일을 떠올린 소윤이 쑥스러운 듯 입술을 내밀었다.“그런 바보 같은 짓은 내 인생의 흑역사야. 걱정 마. 이렇게 귀여운 아들이 있고 의리 넘치는 양엄마까지 있는데, 내가 어떻게 또 그런 생각을 하겠어.”송남지를 배웅하며 소윤은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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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6화

윤양에서 서경으로 돌아오기 위해 송남지는 기차와 비행기를 갈아타며 이동했고 밤이 되어서야 서경 공항에 도착했다.마중을 나온 사람은 최보라였다.송남지의 갑작스러운 귀환에 최보라는 다소 당황하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최보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정말 윤양 일 그만두고 아예 서경으로 돌아오기로 한 거야?”송남지는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서경의 풍경을 바라보며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진짜 그만뒀어.”최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거기 전시관 직원이 너 정식 절차 밟고 들어온 거 아니라고 사사건건 시비 걸었다며. 혹시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그만두기로 한 거야?”송남지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못한 채 다소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듯했다.“아니, 그 사람이 좀 짜증 나게 굴긴 했어도 내가 그런 애한테 휘둘릴 사람은 아니잖아. 그 사람 때문에 내 결정을 바꿀 일은 더더욱 없고.”최보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럼 왜 갑자기 돌아온 건데? 설마... 너랑 하정훈 사이에...”하정훈의 이름이 나오자 송남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그 얘긴 나중에 하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오늘 저녁 메뉴야. 오후에 먹은 기내식이 진짜 형편없었거든. 나 지금 배고파서 꼬르륵 소리까지 날 지경이라고.”최보라는 더 캐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미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송남지를 데려갔다.그곳은 서경에서 꽤 이름난 서경 요리 전문점이었다. 그 자리에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오지훈은 물론, 유경태까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룸에서 송남지는 농담처럼 입을 열었다.“일부러 나 왔다고 이렇게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주는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오지훈은 뭔가 비밀스럽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남지 씨 환영회 핑계 삼아 깜짝 발표할 게 좀 있는데, 괜찮죠?”송남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상관없어요. 혹시 두 사람 결혼 발표라도 하려고요?”최보라가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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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7화

송남지는 젓가락을 들던 손을 멈칫하더니, 일부러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하정훈 씨를 초대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에요? 왜 굳이 저한테 미리 알려주시는 건데요?”최보라가 조금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네가 그 사람을 마주치기 싫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두 집안 정이 깊기도 하고 같은 바닥이라 워낙 가깝잖아. 집안끼리도 친하고 두 사람 사적인 사이도 그렇고...”송남지는 다시 음식을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응, 알아. 걱정 마. 내가 하정훈 씨 보기 싫다고 앞뒤 안 가리고 자리를 피할 정도로 철없진 않으니까. 딱히 그 사람이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마지막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게다가 송남지가 서경으로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두 사람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식사를 마친 뒤 오지훈은 유경태를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총각파티를 한다며 바에 가기로 했다.평소 최보라는 그런 일에 참견하지 않는 편이라 그들이 놀러 가도록 내버려 둔 채, 송남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다주었다.마침 그 아파트는 최보라가 오지훈과 동거를 시작하며 잠시 비어 있던 상태였다.송남지는 아쉬운 듯 입술을 비죽였다.“이제 오지훈 씨랑 같이 살 텐데, 오늘 밤은 나랑 좀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송남지가 눈을 깜빡이며 장난스럽게 묻자 최보라는 콧방귀를 뀌었다.“집 빌려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지, 같이 있어 주기까지 바래? 꿈도 야무지네. 내일이라도 당장 하정훈한테 가서 한마디 해야겠어. 전처가 서경에 돌아왔는데 집 한 채도 없다니, 걔도 참 지독하다.”송남지는 깊은숨을 들이켰다.“언니, 아까 내가 왜 돌아왔는지 물었지?”최보라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표정으로 되물었다.“왜? 이제야 말해줄 마음이 생긴 거야?”송남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정훈 씨가 윤양까지 나를 찾아왔었어. 겉으론 일 때문이라더니, 재스민을 사서 내게 돌려주더라고. 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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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8화

하정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공항 입구로 쏠렸다.“와우!”누군가 감탄 섞인 농담을 던졌다.“보라야, 네 사촌 동생 진짜 장난 아닌데?”하정훈 역시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잘생긴 눈썹이 움찔하며 올라갔고 깊고 검은 눈동자에는 경이로운 기색이 스쳤다.송남지는 작은 블랙 캐리어를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짧은 데님 팬츠에 몸매가 드러나는 화이트 티셔츠를 매치한 그녀는 한 줌도 안 될 듯한 가냘픈 허리 라인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사람들 쪽으로 걸어오던 송남지는 자신을 향한 감탄과 놀라움이 섞인 시선을 느끼고는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미인 처음 봐요?”그녀는 확실히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과거 서경 미대 여신 투표에서 정점에 올랐던 그녀였으나, 워낙 조용히 지낸 탓에 동기들조차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에는 돈을 써서 순위를 조작했다는 비아냥 섞인 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하지만 그녀를 직접 본 사람만이 알았다. 그 명성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를.다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늘 은밀하고 스스로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정적이었다.그래서 이런 사람이 조금만 꾸미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면, 화장기 없는 얼굴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만으로도 이미 반칙이나 다름없었다.오지훈이 최보라의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전엔 하정훈이 왜 그렇게 송남지랑 결혼하려고 안달복달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거든.”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것도 모자라 치밀한 계획까지 세워 결혼에 골인했다는 사실이 늘 의아했던 터였다.최보라가 경고 어린 눈빛으로 오지훈을 쏘아봤다.“너, 지금 보고 반한 거 아니지? 내 동생이야.”오지훈이 인상을 팍 쓰며 대답했다.“무슨 소리야. 그냥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라서 그래. 하정훈이 송남지랑 결혼한 건 분명 그녀가 예뻐서일 거야. 근데 송남지의 예쁨은 뭐랄까, 처음엔 눈에 잘 안 띄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그런 종류 같아.”최보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의기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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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9화

송남지와 곽지민은 나란히 걸으며 담소를 나누었다.“은지영이 재스민을 포기했다면서? 그럼 다시 네가 관장인 거야? 재스민 복귀하려고 서경으로 돌아온 거지?”얼마 전 은지영은 재스민 건으로 소동을 일으키자 하정훈은 은지영이 재스민을 포기하게 하려고 은씨 가문에 상당한 이권을 넘겨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하지만 이 바닥 생리에 밝은 은지영은 가문의 이득이 개인의 안위보다 우선임을 잘 알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천남현까지 끌어들이며 죽기 살기로 버텼다.하지만 결국 은지영의 패배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자발적 포기라면 실속이라도 챙겼겠지만, 억지로 끌려 내려온 것이라면 그녀는 이미 처참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을 터였다.그리고 하정훈이 이토록 공을 들여 재스민을 되찾으려 한 이유는 결국 송남지 때문임이 명백했다.송남지는 궁금한 듯 물었다.“벌써 소문이 다 퍼졌어요? 난 아직 재스민에 출근도 안 했는데.”곽지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본인이 직접 가지 않았어도 하정훈이 재스민을 위해 그렇게까지 움직였는데, 주인 자리가 누구한테 갈지는 안 봐도 뻔한 거 아냐?”송남지는 가느다란 눈썹을 휘며 미소 지었다.“다들 참 눈치도 빠르네요. 하지만 나랑 하정훈 씨는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요?”곽지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혼해도 재결합할 수 있는 거고, 인생은 아직 길잖아. 한창 지지고 볶으며 살 나이지.”송남지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비행기에 오를 때 최보라가 슬그머니 다가와 송남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았다.“스타일 바꿨네? 누구를 홀리려고 이러실까?”송남지도 최보라의 허리를 마주 안으며 대꾸했다.“언니 홀리려고 그러지. 언니가 정신 좀 차리고 오지훈이 만든 결혼이라는 무덤에 발 안 들였으면 좋겠거든.”“그건 좀 힘들겠는데. 알다시피 내 취향, 아주 확고하잖아. 차라리 곽지민한테 한번 써먹어 봐. 저런 변호사들은 평소에 정장만 빼입고 되게 고고한 척해도 실은 속이 아주 음흉하거든. 딱 너 같은 날라리 스타일한테 사족을 못 쓸걸.”송남지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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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0화

하정훈이 고개를 들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송남지의 얼굴이 그의 눈동자에 가득 찼다.예전의 하정훈은 미처 알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오늘의 송남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예전의 아름다움이 내성적이고 조심스러운 편이었다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그녀는 화사하고 당당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어떤 모습이든 하정훈의 마음을 뒤흔들기엔 충분했다.송남지는 하정훈의 대답이 늦어지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자리를 살폈다.“아, 누구 있어요?”그녀가 막 자리를 옮기려 하자 하정훈이 뒤늦게 입을 뗐다.“아니, 없어.”송남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하정훈의 옆자리에 앉았다.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대부분 그녀와 하정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같은 사교계에 있다 보니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런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충분했다.특히 친한 지인들은 더 의아해했다.곽지민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하정훈 옆엔 늘 그 여비서가 붙어 다녔잖아. 다들 지금 애인이라고들 하던데 오늘은 왜 안 보여?”최보라도 입술을 삐죽였다.“내 사촌 동생 성격이 보통이 아닌데, 웬일로 하정훈 옆에 먼저 앉았대?”오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다들 오늘 남지 씨가 평소랑 많이 다르다는 생각 안 들어?”유경태도 흥미롭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확실히 다르네.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아.”최보라는 조용히 제 동생을 관찰했다.딴사람 같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전의 송남지는 늘 자신을 억누르며 매사에 조심스러웠던 아이였다.하지만 지금의 송남지는 대담하고 화사했다. 심지어 옷장에만 모셔두었던 과감한 스타일의 옷들까지 소화해 낼 정도였다.예전의 그녀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옷들이었다.최보라는 아마 섬으로 떠난다는 설렘에 기분이 들뜨고 여유로워져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비행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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