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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 のすべてのチャプター: チャプター 891 - チャプター 900

912 チャプター

제891화

“약한 비가 내리다 제법 굵어질 거랍니다. 바람도 불고, 기온은 10도에서 12도 안팎입니다.”보고를 듣자마자 하정훈은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읊조렸다.“해변 섬에서 수리스까지 그렇게 급하게 날아왔으니, 겉옷 하나 제대로 못 챙겼을 게 뻔해.”하정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당장 전화해!”김서윤은 지체 없이 송남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하정훈이 송남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을 켰다.“송남지 씨, 지금 어디세요?”수화기 너머로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송남지가 지금 비를 맞으며 서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린트 강 근처예요. 메리어트 호텔에 들어가서 하정훈이 있는지 확인해보려던 참이었어요.”하정훈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김서윤에게 눈짓하며 휴대폰을 이쪽으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김서윤이 휴대폰을 하정훈의 곁으로 가져다 대자, 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뗐다.“메리어트 호텔 안으로 들어가서 비 피해 있어. 지금 당장 데리러 사람 보낼 테니까.”송남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정훈, 사람을 보내서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보낸 사람이 도착할 때쯤이면 난 이미 거기에 없을 거예요.”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빗소리에 묻힌 송남지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만은 흔들림이 없었다.“하정훈, 내가 김 비서한테도 말했던 것처럼 강을 따라 걸으면서 수리스에 있는 모든 호텔을 다 뒤질 거예요. 당신을 찾을 때까지.”그녀의 지독한 고집이 수화기를 타고 하정훈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그 순간 하정훈은 깨달았다. 송남지의 말뜻은 자기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 한 그녀는 이대로 빗속을 헤매며 계속 자신을 찾을 거란 의미였다.하정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열기 전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안 추워?”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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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2화

하정훈이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왔을 때, 김서윤은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볼 수 있었다.그저 옷을 한 벌 갈아입었을 뿐인데도 그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김서윤은 자신이 준비해 둔 휠체어가 분명 쓸모가 있을 거라 직감했다.하지만 하정훈은 휠체어를 흘끗 쳐다보기만 할 뿐, 보라색 지팡이를 짚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김서윤이 텅 빈 휠체어를 밀며 다가가 말했다.“대표님, 이걸 타고 내려가시죠.”그는 하정훈이 송남지 앞에서는 절대 휠체어에 앉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 앞이 아니라 병원이었다. 하정훈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단호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안 타. 남지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당연히 미리 준비를 해야지.”그가 원한 것은 걷는 것에 먼저 적응하는 것이었다.막상 송남지 앞에서 비틀거리며 걷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린트 강변. 휴양지에나 어울릴 법한 차림새의 여자는 쏟아지는 빗줄기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새벽의 밤기운은 한결 더 싸늘해졌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여자는 마치 어두운 밤비 속에서 천천히 시들어가는 정열적인 장미 한 송이 같았다.운전기사가 차를 몰아 송남지 곁에 멈춰 세웠다.차가 멈추자마자 김서윤이 재빨리 내려 우산을 받쳐 들고 하정훈의 차 문을 열었다.얼룩진 빗물이 고인 도로 위로 구두가 닿으며 투명한 물보라가 일었다.내내 짙은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두 발을 땅에 안정적으로 딛고 서서야 김서윤이 들고 있던 우산을 건네받았다.김서윤이 또 다른 우산을 펼쳐 하정훈에게 건넸지만 그는 거절했다.하정훈은 우산을 든 채 송남지의 곁으로 걸어가 그녀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송남지 위로 쏟아지던 비가 멈췄지만 대신 하정훈의 어깨는 순식간에 비에 젖어 들어갔다.“남지야.”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송남지가 고개를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비에 젖은 장미꽃 같았고 그 위로 빗물이 꽃잎을 한 장씩 씻어내듯 흘러내렸다.하정훈과 시선이 마주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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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3화

하정훈은 거의 명령에 가까운 단호한 어투로 송남지에게 말했다.“방으로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해. 안 그러면 병나니까.”송남지는 꽤 고분고분한 태도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직원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김서윤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바짝 뒤따라가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찰나, 송남지가 밖에서 그를 막아 세웠다.“김 비서님, 오늘 밤은 이만 퇴근해도 좋아요.”김서윤은 난처한 기색으로 하정훈을 흘끔 쳐다보았다.지금 하정훈의 컨디션으로는 언제 위급한 상황이 터질지 모를 일이었다.자신이 없는 사이에 덜컥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란 말인가?그는 하정훈을 바라보았으나, 하정훈 역시 그를 남게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어쩔 수 없이 김서윤은 로비의 휴게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대표님, 저는 저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직원이 맨 앞에 선 가운데, 송남지와 하정훈은 엘리베이터 벽 쪽에 바짝 붙어 섰다.빗물이 그녀의 드러난 맨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송남지는 대담하게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하정훈의 손가락에 걸고는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매만졌다.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뜨겁고 끈적하게 달아올랐다.“하정훈, 당신은 여전히 날 사랑하는 게 분명해요.”그것은 질문이 아닌 확신에 찬 단언이었다.하정훈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천천히 올라가는 층수 표시기만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그는 송남지의 이 도발적인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몇 초간 뜸을 들이던 송남지는 마치 길들지 않은 아기 고양이처럼 하정훈의 허리춤을 홱 잡아끌더니,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얇은 입술을 매섭게 깨물었다.“쓰읍...”날카로운 통증이 순식간에 번지자, 하정훈은 목소리를 짓누르며 짧은 숨을 들이켰다.낌새를 눈치챈 직원이 뒤를 돌아보았다.송남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직원에게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직원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송남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하정훈을 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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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4화

하지만 송남지는 그 자리에 선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정훈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그 어떤 타협도, 굴복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가 씻으라고 해서 씻는 것조차 그녀에겐 굴복이었다.지독한 오기로 똘똘 뭉친 송남지가 고개를 저으며 하정훈을 직시했다.“내 질문에 대답하기 전까지는 절대 안 씻을 거예요.”하정훈의 눈가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난처함이 번졌다.평소엔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었기에, 지금의 하정훈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세상 모든 일에 해결책을 쥐고 있던 그였건만, 송남지를 욕실로 들여보낼 뾰족한 수는 찾지 못했다.하정훈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켜 옷장에서 목욕 가운을 꺼내 와 그녀의 몸에 둘러주려 했다. 하지만 가운이 어깨에 닿기가 무섭게, 송남지는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홱 털어 가운을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툭. 가운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하정훈은 찌푸린 얼굴로 허리를 굽혀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마치 방금 처음 가운을 꺼내왔을 때처럼 차분하게 다시 그녀의 어깨 위로 가운을 둘렀다.하지만 송남지 역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시 어깨를 털어 가운을 떨어뜨렸다.이런 실랑이가 서너 번쯤 반복되었을까. 다시 가운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는 하정훈의 이마에 어느새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것을 본 송남지가 차갑게 비아냥거렸다.“요즘은 운동 안 해요?”송남지가 아는 하정훈은 아무리 바빠도 운동만큼은 빼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전엔 그의 체력이 그렇게 좋은 이유가 다 꾸준한 운동 덕분인 줄만 알았다.그런데 고작 바닥에 떨어진 가운 몇 번 주웠다고 반죽음이 된 사람처럼 굴다니.하정훈은 숨을 멈추고 힘겹게 가운을 주워 올렸고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훅하고 내쉬었다.하정훈은 끈질기게 그녀의 어깨 위로 가운을 다시 덮어주며 송남지의 질문에 답했다.“요즘은 일이 좀 바빠서 운동할 시간이 거의 없었어.”주된 이유를 숨기긴 했으나 거짓말은 아니었다.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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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5화

말을 끝맺고 나서야 하정훈은 눈을 들어 송남지의 맑디맑은 두 눈을 직시했다.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송남지는 흠뻑 젖어 처참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었음에도, 그녀의 눈빛만은 유난히도 투명했다.하정훈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질 만큼 맑은 눈이었다.십여 초간 시선이 얽힌 뒤, 송남지가 불쑥 입꼬리를 끌어올렸다.“하정훈, 난 안 믿어요.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런 입에 발린 소리, 안 믿는다고요. 날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내가 이 빗속을 뚫고 수리스에 있는 호텔을 모조리 뒤지고 다니든 말든, 당신을 찾든 말든 그냥 내버려 뒀겠죠.”그녀의 눈빛은 마치 하정훈의 영혼마저 단숨에 꿰뚫어 보는 예리한 검과 같았다.하정훈의 시선이 다급하게 흔들렸다. 그는 호텔에 장식된 그림을 보기도 하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내다보기도 했지만 송남지의 눈만은 애써 외면했다.그는 짐짓 가벼운 바람둥이처럼 굴며 말했다.“그냥 매너를 지킨 것뿐이야. 알다시피 난 뼛속까지 신사잖아. 게다가 넌 최보라의 사촌 동생이고. 최보라는 지금 오지훈이랑 약혼한 사이인데 그놈이랑 내 우정이 어디 보통이야? 만약 네가 수리스에서 날 찾겠다고 쏘다니다 사고라도 치면, 최보라가 오지훈을 가만두겠어? 그럼 오지훈 역시 날 가만두지 않겠지.”오래전 송남지는 미대에 다닐 때 심리학 수업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소 말이 없던 사람이 특정 순간에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라고.진실은 언제나 명료하고 간결하지만, 거짓은 장황하기 마련이다.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보통 말이 길어질수록 그 안에 담긴 설득력이 더 크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하정훈, 당신은 정말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요.”송남지는 그렇게 말하며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어깨를 움츠렸다.방 안의 난방을 한껏 높였음에도, 빗속에서 무려 열 시간이나 떨며 뼛속까지 스며든 한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추위에 가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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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6화

이런 광경은 오히려 더 노골적인 무언가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 심장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하정훈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찰나에 본 흩뿌려진 물방울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파문을 남긴 뒤였다.그는 사춘기 소년처럼 당황해하며 서둘러 욕실 밖으로 뛰쳐나왔다.어스름한 호텔 조명 아래 베이지색 소파에 앉은 그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기색이 역력했고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스스로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려 퍼져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한참 동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평정을 되찾을 무렵, 욕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하정훈은 이번에도 선뜻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조심스레 시선을 딴 곳으로 두며 물었다.“다 씻었어? 몸은 좀 어때? 의사라도 불러줘?”송남지는 욕실 문가에 기대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하정훈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래요?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하정훈은 여전히 송남지에게 시선을 주지 못한 채였다.그러다 송남지의 발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자 그제야 아주 조심스럽게 눈길을 살짝 돌렸다. 정말 아주 살짝이었지만 하얀 샤워 가운을 걸친 송남지의 모습이 확인되자 그는 비로소 굳어있던 어깨를 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송남지는 상황을 눈치채고는 곧장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1인용 소파는 그녀가 자리를 잡는 순간 비좁아졌다.하정훈은 끝까지 거리를 두려 애썼지만, 공간의 한계로 두 사람의 몸은 이미 틈 하나 없이 닿아 있었다.그런 하정훈을 빤히 응시하며 송남지가 물었다.“대체 뭐가 두려운 건데요?”남자가 굳게 입을 다문 채 정면만 응시하자 그녀가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혹시 눈 돌아갈 만큼 자극적인 장면이라도 볼까 봐 그래요? 주체 못 할 정도로 흥분할까 봐?”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남지는 하정훈의 손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오르내리는 그녀의 가슴골이 손바닥에 생생히 전해진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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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7화

하정훈은 깊은 호흡을 내뱉으며 제 허리를 집요하게 파고든 송남지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송남지는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듯 온 힘을 다해 매달리고 있었다.평소 젠틀한 성품인 그는 강제로 그녀를 뿌리치지 못했고 사실 지금 그에게는 그녀를 밀어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자신의 허약함을 겉으로 완벽하게 감추고 있었기에 송남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정작 하정훈은 본인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결국 하정훈은 무력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안 갈 테니까, 일단 좀 놓아줘.”송남지는 여전히 손을 풀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깨달았던 것이다. 순종적인 여자가 얻는 것은 그저 허울 좋은 이름뿐이지만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인 여자는 결국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는다는 사실을.그녀는 더 이상 순종적인 여자로 살지 않기로 했다.최보라의 말처럼 타인의 사춘기는 십 대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서른이 되어 비로소 첫 반항기가 찾아온 듯했다.“싫어요, 안 놓을래요.”송남지의 대답은 확고했다.하정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금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너무 힘주어 잡은 탓에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마음이 쓰인 하정훈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남지야, 나 안 간다고 했잖아. 말해 봐, 여기 남아서 뭘 해주길 바라는 거야?”송남지는 눈을 깜빡이다가, 그가 떠나지 않겠다는 말에 그제야 빠르게 몸을 일으켜 그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나랑 같이 자요!”하정훈은 순간 눈동자가 흔들릴 만큼 적잖이 놀랐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평온함을 유지했다.“그래, 여기 남아서 너랑 같이 잘게.”대답을 마친 하정훈이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송남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대로 서서 불만스러운 듯 툭 내뱉었다.“정훈 씨, 당신한테서 약 냄새 나요.”마치 은밀한 비밀이 탄로 난 사람처럼 하정훈은 찰나의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태연한 척하며 송남지를 돌아보았다.“그럼 씻고 올게.”하정훈이 욕실로 들어가자 이내 물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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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8화

송남지는 억지로 문을 가로막고 있던 임승아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러고는 입꼬리만 올린 채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임승아 씨, 지금 당장 안 가면 호텔 보안팀 부를 거예요.”임승아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으나, 송남지의 완강한 태도에 더 이상 방 안으로 발을 들일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방법이라면 단 하나...진실을 털어놓는 것이었다.임승아는 미세하게 눈매를 떨며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끝내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잠시 후 임승아는 엄숙한 표정으로 경고했다.“송남지 씨, 그 대가는 그쪽이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송남지는 코웃음을 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 방문을 닫아버렸다.‘나를 겁주려고?’송남지는 그런 협박 따위에 겁먹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정훈이 욕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욕실 유리 너머로 비치는 물보라를 바라보던 송남지는 갑자기 목이 조여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고 얼굴이 달아올랐다.욕실 안의 물소리가 만들어낸 풍경 때문이 아니라, 빗속을 걸으며 얻은 고열이 뒤늦게 송남지를 덮친 탓이었다.하정훈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송남지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잠든 것처럼 보였다.그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 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칠 거라 예상했는데 들고양이처럼 날카롭던 송남지가 이토록 조용히 쪽잠을 자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하정훈은 나직이 웃음을 터뜨리며 입술을 달싹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굴더니, 샤워하는 짧은 사이에 이렇게 지친 거야?”하정훈은 잘 다려진 정장을 챙겨 입고 자리를 떠날 채비를 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송남지를 돌아보았다.잠든 와중에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송남지의 얼굴이 묘하게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하정훈은 그녀의 몸 위를 탐욕스럽게 응시하다 돌연 눈매를 좁히더니 다급히 송남지에게 다가가 몸을 굽히고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살짝 닿기만 했을 뿐인데도 손바닥 끝에 닿는 열기는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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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9화

이미 하정훈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송남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붉은 입술을 그의 귓가에 바짝 밀착시킨 채 나직이 속삭였다.“하 선생님, 어째 체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것 같네요? 다리 다 나으면 운동 좀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송남지의 애교 섞인 투정에는 은근한 도발이 담겨 있었고 이는 하정훈의 승부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수리스의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두 사람의 밤은 그렇게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폭우가 잦아들었고 호텔 침실 안에는 지칠 대로 지친 두 사람만이 남았다.하정훈은 자신의 품에 안긴 송남지의 이마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이제 열은 다 내렸군.”하정훈의 말에 송남지는 고양이처럼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며 기분 좋게 웅얼거렸다.“역시 하 선생님 처방이 제일 용하네요.”하정훈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품 안의 송남지가 고른 숨소리를 내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안심하며 잠에 들었다.한편 호텔 로비에서 밤이 깊도록 자리를 지키던 김서윤은 몇 번이나 잠결을 헤매다 성루이야 병원에서 온 전화에 정신을 차렸다.전화를 받자마자 의사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정훈 씨의 신체 데이터가 위험 수치를 넘어 폭주하고 있습니다. 이건 명백한 자살 행위예요!”김서윤은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자살이라니요? 그게 무슨!”병원 측의 상세한 설명을 듣는 김서윤의 안색은 이미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엘리베이터 쪽을 응시하며 말했다.“어떻게든 설득해 보겠습니다.”의사는 다시 한번 엄중하게 경고했다.“하정훈 씨께 똑똑히 말씀드리세요. 지금 상황은 약물이나 안정만으로 버틸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는 즉시 비상 회의를 소집해서 수술 시간부터 잡아야 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전화를 끊은 김서윤의 손이 멈추지 않고 파르르 떨렸다.그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만약 하정훈이 스스로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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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0화

하씨 가문 정원에는 나한송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휩쓸린 낙엽 한 장이 허공을 맴돌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하종현은 몇 초의 시간을 들여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진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 짙은 비애가 번졌다.그는 긴 숨을 내뱉으며 애써 표정을 다잡았지만, 이내 모든 힘이 빠진 듯 어깨가 처졌다.곧이어 깊은 한숨 섞인 자책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우리가 정훈이를 너무 오냐오냐 키운 건 아닐까. 제멋대로 하도록 둔 게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한 거겠지.”눈시울이 붉어진 오가은은 이미란에게 수리스로 갈 채비를 시켰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종현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여보, 정훈이는 어릴 때부터 다른 집 아이들과 달랐어요. 우리가 행운아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완벽했죠. 그 애가 성은 그룹을 이끌며 전례 없는 성취를 이뤄냈을 때 우리가 누렸던 그 환희를 떠올려 봐요. 그때 그토록 그 아이를 자랑스러워했다면, 지금 와서 그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고 후회하지 마세요.”...수리스.식은땀을 흘리며 카드키를 손에 꽉 움켜쥔 김서윤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호텔 객실 문을 응시했다.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소파 위에 쓰러진 남자가 단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 그토록 빛나던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채 반쯤 풀려 있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장 처참하고 무기력한 모습이었다.숨조차 가늘게 몰아쉬며 누워 있는 그의 모습에 김서윤은 덜컥 겁이 났다.다급히 달려가 하정훈을 부축하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하정훈이 힘겹게 입을 뗐다.“조용히 해, 남지 깨면 안 돼.”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송남지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길 원치 않았다.김서윤은 동작을 최대한 멈추고 신중하게 하정훈을 부축해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그러나 곧이어 느껴진 하정훈의 신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위태로웠다.하정훈의 팔이 힘없이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다.김서윤은 덜컥 겁이 나 다급히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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