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151 - 챕터 160

205 챕터

제151화

오동거리는 큰길과 맞닿아 있는지라 강시아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이 거리는 사람이 많은 탓에 불을 붙인다 한들 금세 꺼질 터였다. 불이 조금이라도 오래 타오르게 하려면 더 많은 가연성 물건을 미리 사두어야 했다.주온청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강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예전에 유한석에게 향낭을 전해준 적이 있어 유 가의 거처가 이 근방임을 알고 있었다.“강 마님 오라버니와 유 대인께서는 동문수학한 절친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어찌하여 유 대인의 집에서 함께 지내지 않는 겁니까? 정 안된다면 국공부 객원에 묵어도 될 텐데 굳이 따로 집을 얻는 이유가 있습니까?”‘아가씨께서 드디어 눈치가 좀 트이셨나?’그러다 주온청은 홀로 무엇인가 깨달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아, 그렇군요. 강 오라버니께선 과거를 앞두신 몸이시니 방해받지 않으려 따로 조용한 거처를 얻은 것이겠지요. 유 대인께서는 참으로 배려심이 깊은 분이십니다!”“예,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주온청은 스스로 내린 결론이 마음에 들었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두드리던 그녀의 손이 곧 멈추더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안에 아무도 살지 않을 텐데 내가 왜 두드렸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끼익 열리더니 안쪽에서 유한석이 걸어나왔다. 그의 턱에는 수염이 어슴푸레 돋아 있었고 마치 하룻밤 새 잠 못 이룬 듯 피로가 짙게 어려 있었다.반나절 내내 말이 없던 주온청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유, 유 대인?”유한석의 시선은 그녀의 뒤에 선 강시아를 스친 뒤, 그들이 사온 물건들로 옮겨갔다. 그는 조용히 비켜서며 말했다.“일단 들어오시지요.”저택 안은 생각보다 훨씬 허름했고 잠자리 하나 마련되지 않은 휑한 곳이었다. 주온청은 마치 친오라버니의 방을 살핀 후 병이에게 다음날 부족한 물건을 사오라 명했다. 그러다 문득 돌아서서 유한석에게 말했다. “유 대인, 이 저택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네요. 저에게 한마디만 일러두시지 그러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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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화

그녀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한 번 바라보고서야 낮게 말했다.“유 대인, 할아버지께서 댁으로 와 함께 이야기하자 하셨습니다”여 각로는 여러 조정을 거쳐 온 조정의 버팀목이었고 절반이 넘는 신하가 그의 문하생이였을 뿐 아니라 그 문하생의 제자까지 이어질 정도였다. 그의 지위는 단 한 사람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유한석은 여 각로가 가장 아끼는 인재였다. 영리하고 침착한 데다 얽힌 인연 또한 없으니 그야말로 손에 쥐기 가장 편한 칼날이었다.유한석이 여 가에 도착했을 때, 여 각로는 약을 먹은 직후인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최근 여 가가 야간 기습을 당한 탓에 노인의 기력은 크게 쇠하여 아침 조회에 나서는 것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지금 이 시기에 여 각로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태후 일파의 기세가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여 각로는 유한석을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밀어 넣은 것이다. 주종현의 계획은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하찮은 첩 하나가 죽는 대가로 조정이 잠시라도 안정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백성을 위한 길이라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각로.”유한석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여 각로는 비스듬히 눈을 떴다. 제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앉거라.”단 세 글자를 내뱉고도 그는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여서린이 급히 가래통을 들고 다가왔으나 여 각로는 손을 저어 물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서린아, 너는 먼저 돌아가거라. 한석이와는 공무로 할 말이 있다.”여서린은 두 사람을 살폈다가 나직이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린 후 물러났다.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여 각로는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한석아, 내일은 네가 나 대신 병가를 올리거라. 혹여 내가 버티지 못해 떠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장례를 치러서는 안 된다. 부득이하게 치르게 된다면 반드시 주 세자의 일이 모두 끝난 뒤 발인해야 한다.”“스승님…”유한석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여 각로는 마른 손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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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설강은 연아 곁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가만히 양옆으로 넘겨주었다.“아가씨께서 이렇게까지 먹는 것을 좋아하시니 떡 한 조각에 홀랑 속아 넘어가 버릴 수도 있겠습니다.”“누가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냐?”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연아는 금세 환히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밤떡을 번쩍 들어 올려 아버지에게 내밀었다.“아버지! 연아 밤떡 드실래요? 셋째 고모께서 연아한테 사주셨습니다!”주종현은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미소 지은 뒤 설강에게 말했다.“설강, 연아를 데리고 잠시 나가서 놀다 오거라.”설강은 무심결에 강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연아의 작은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주종현은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진 문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저 아이가 예전 네 하녀보다 훨씬 낫군.”강시아는 가볍게 웃었다.“이전 그 아이는 작은 마님께서 서방님의 시중을 들라고 따로 준비하신 아이였지요. 그러니 저 같은 첩을 모시는 게 마음에 들 리 있겠습니까?”“그런 시답잖은 사람 이야기는 더 하지 말자.”주종현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것 좀 보거라.”“예? 이게 무엇입니까?”강시아는 의아한 얼굴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주종현은 그녀의 낯빛이 변한 이유가 그저 충격적인 내용 때문일거라 여겨 낮은 목소리로 다독였다.“두려워하지 마라. 너더러 맹 노장군의 손녀 신분을 가칭하라 한 것은 오롯이 너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다.”“네 오라버니도 과거를 볼 몸이라 하지 않았느냐? 맹 가를 뒷배로 두면 조정에서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강시아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조심스레 흘러나왔다.“저더러… 신분을 속이라는 말씀입니까? 폐하께서는 맹 노장군을 예우하시지요. 한데 그분의 외손녀라 나서는 것은 폐하를 속이는 대역죄이자 사형감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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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설강이 연아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마님, 지금 집안에서는… 마님이 무슨 대장군의 외손녀라며 떠들어 대던데요!”강시아는 이미 마음을 가라앉힌 뒤였다.이렇게까지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는 것은,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반드시 그 신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깔린 뜻이었다. 이것이 과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새 신분을 덧씌워주는 것인지, 아니면 더 값비싼 장기말로 만들려는 것인지 그녀는 알 길이 없었다.설강은 강시아가 말이 없자 재빨리 문을 닫고 속삭였다.“마님, 그래도… 떠나실 생각이옵니까?”가난한 집에서 나온 첩과 대장군 집안의 외손녀라는 첩. 그 비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만약 그 신분이 성립된다면 강시아는 장차 엄청난 배경을 등에 업게 될 것이다.설강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사실… 마님께서 좋은 출신을 가지셨다면…”강시아는 고개를 저었다.“억지로 씌운 신분은 기름 끓는 화로 위에 선 것과 다를 바 없다. 불붙어 죽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움직이는 것이 낫지.”설강은 말을 잇지 못하고 결국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깨달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강시아는 떠날 것이다. 어떤 신분을 덧씌우든, 세자의 첩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강시아는 평생 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마님. 마님께서 마음만 정하신다면… 소녀 설강은 영원히 마님 곁을 따르겠사옵니다.”그 말에 강시아는 잠시 입술을 오므리며 미소를 지었으나 이내 표정을 굳혔다.이 사람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이런 신분을 그녀 머리 위에 씌웠다는 것은 오라버니 역시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일 터.오라버니에게 어떻게 이 말을 전할 수 있을까?전생에서 오라버니는 과거를 보겠다며 경성에 온 적이 없었을뿐더러 편지 한 통조차 보내온 적이 없었다. 이번 생은 그녀가 다시 태어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고 그 변화가 천리 밖의 오라버니 운명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경성으로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찾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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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당신…”그의 목구멍은 꽉 조여 오는 듯 답답했다. 눈앞의 강시아를 바라보자니 눈가가 갑자기 뻑뻑하게 말라들었다.이제 그는 강세오가 평생 마음에 걸고 살아온 누이가 죽으러 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이 모든 일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말이다.강시아는 그의 그런 표정을 보자 속으로 냉소했다.강요하듯 그녀에게 자결을 권하던 그 편지를 쓸 때에도 과연 이렇게 세상을 연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제 오라버니께 전해주십시오.”강시아는 물건을 그의 손에 밀어 넣고는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오라버니가 이 향낭을 유한석에게 맡길 만큼 그를 신뢰했다면 그녀 역시 유한석을 믿어주면 그만이었다.마차가 풍교를 지날 무렵, 정연하게 늘어선 거대한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관병들이 길을 트고 길 위의 사람과 수레들은 모두 길가로 물러섰다. 강시아가 창문 발을 올리자 정면에서 마주친 한 쌍의 눈과 시선이 얽혔다.소휘가 고삐를 잡고 있었고 그 역시 그녀를 알아보았다.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비켜 피하며 사색에 잠겼다. 그녀가 맹 노장군의 외손녀라니. 그 옥패를 진작에 보았건만 결국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그녀에게는 오라버니가 있고 그는 초주에 머물고 있다 했으니 며칠 지나면 분명 소식이 올 터였다.그때 설강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오늘 번왕께서 출경하신다고 하옵니다.”강시아는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이 많지만 조금은 고집스럽던 그 아이가 떠올랐다. 성왕이 떠나면 그 아이는 이제 누가 지켜줄까?그 생각이 스치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기 하나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근심한단 말인가? 게다가 태후의 어린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아이는 평생 보호받으며 살 것이 분명했다.행렬이 완전히 지나가자 강시아는 창문 발을 내려놓고 오동거리의 열쇠를 설강에게 건넸다.“사람을 구해 간단히 도장을 꾸리거라. 밤중에 의장 사람들에게 몰래 시신을 들이게 하고.”음혼을 치르는 일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니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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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강시아는 손수건으로 연아의 작은 얼굴을 살며시 닦아주었다.“연아나 많이 먹거라.”하 유모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강시아의 손에서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마님, 내일부터는 연아 아가씨께서 열흘 동안 휴식을 취하신다 하옵니다.”강시아의 신분이 이토록 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곡식 장사에서 벌어들인 돈도 아낌없이 나눠주는 인심을 보며 하 유모는 예전부터 그녀가 복 많은 사람이라 여겼다. 얼마 전 하대우 역시 상단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곡식 가게가 자리를 제대로 잡기만 한다면, 빠르면 가을에 국공부에서 일을 관둘수도 있을 것이다.강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곧 대혼이 있을 텐데 우리 같은 작은 뜰에서 도울 일이 뭐가 있겠느냐? 이참에 며칠정도 쉬어도 될 것이다. 내 기억엔 네 아들도 고향에 남아있다고 했지? 꽤 오래 못 보지 않았느냐?”하 유모의 눈빛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연아 아가씨가 태어난 뒤로 아이를 본 적이 없사옵니다.”“그렇다면 다녀오거라.”하 유모는 잠시 연아를 내려다보며 머뭇거렸다.“그럼 작은 아가씨는 어찌해야 하옵니까?”강시아는 부드럽게 웃었다.“집에 사람이 얼만데, 설마 잃어버리기라도 하겠느냐?”하 유모는 곧 마음이 누그러져 작은 보따리를 챙기고는 들뜬 얼굴로 집을 나섰다.연아는 벌써 글을 읽고 쓸 수도 있게 되었는데 정작 자신의 아들은 몇 해째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잠잠했던 그리움도 강시아가 한 번 언급하니 순식간에 물결처럼 밀려올랐다.저녁 식사가 차려질 무렵, 주종현이 찾아왔다.설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하 유모도 그녀의 말대로 이미 길을 나선 뒤였다.집 안은 혼례 준비로 온통 소란스러웠으나 강시아의 작은 뜰만은 유달리 적막했다.그의 시선이 처자에게 떨어졌다.“아버지! 어서 와서 밥 먹어요!”연아는 늘 그렇듯 해맑은 얼굴로 두 손을 흔들었다.주종현은 강시아 맞은편에 앉았다.“시아.”강시아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기 한 점을 집어 연아의 그릇에 놓았다.“연아야, 어서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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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밤이 완전히 내려앉을 무렵, 장석은 소를 몰아 서쪽 성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성문을 지키는 병사들과는 이미 말을 맞춘 상태였다. 그가 시신 모는 자로 이름난지 오래인지라 병사들은 그를 보자마자 슬쩍 피하며 자리를 열어주었다. 그가 건넨 은전도 멀찌감치 던져 놓았을 뿐 누구도 굳이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그가 멀어져 가자, 막 새로 부임한 젊은 병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왕 형님, 왜 저 사람은 검문도 안 합니까?”“성 밖 의장의 사람이라 시신 나르는 게 일이다.”젊은 병사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곧 다시 의문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한데 시신을 왜 성 안으로 들여옵니까?”왕 형님이라 불린 병사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그야 뻔하지. 의장에서 산 사람한테 시신을 팔아 음혼을 지내려는 거겠지. 나도 몇 번 봤거든. 밤에 들여와 법사를 불러 의식을 치르고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내보내 묻어 버리는 것이다.”젊은 병사는 등골이 서늘해져 몸을 움찔거렸다.“죽은 자로 장사를 하다니… 저승이 두렵지도 않나 봅니다.”왕 형님은 그 말이 못마땅했는지 그의 뒤통수를 딱 하고 쳤다.“그게 어찌 장사냐! 공덕이 하늘을 찌르는 일이지! 저 의장의 스승과 제자 둘 아니었으면 성 안의 이름 없는 시신은 네가 날마다 나르러 다녔을 것이다!”젊은 병사는 그제야 합장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위심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병사들은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나른한 태도가 못마땅했던지 위심은 미간을 좁히며 말을 던졌다.“요 며칠은 절대로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왕충은 즉시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예!”위심은 손짓했다.“넌 나를 따라오거라. 세자 저하의 대혼 날엔 너는 삼백 명을 데리고...”한편, 장석은 적힌 주소를 따라 시신을 실은 수레를 조심스레 작은 뜰 앞에 세웠다. 뜰에는 도장 하나만 놓여 있을 뿐, 음혼에 필요한 물건이라곤 흔적조차 없었다.“이게 혼을 달래는 겁니까?”설강은 코를 소매로 꽁꽁 막은 채 대강 둘러댔다.“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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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밤이 깊어갈 무렵, 설강은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돌아왔다.마당 한켠에서 콩뼈가 인기척을 듣고 쑥 튀어나오자 설강은 그 자리에서 비명을 삼키며 꽃덤불 속으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콩뼈!!”설강은 떨어뜨린 신발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콩뼈를 향해 던졌다. 콩뼈는 급정지라도 한 듯 멈칫하더니 냉큼 돌아 마당 깊숙이로 줄행랑쳤다.신발은 마침 막 들어오던 사람의 종아리에 툭 부딪혔다.위심은 발치에 떨어진 꽃신을 한번 쳐다보더니 곧 머리를 들어 꽃덤불에서 엉망으로 기어나오는 설강을 바라보았다.“설강 아가씨, 한밤중에 꽃밭 일이라도 하시려는 모양입니다.”설강은 황급히 쪼그려 앉아 맨발 한쪽을 치맛자락 속에 감췄다.“귀, 귀군께서는 이 밤중에 왜 이곳에 온 겁니까?”위심은 발끝으로 신발을 가볍게 차올려 계산이라도 한 듯 정확히 그녀 앞에 떨어뜨렸다.“당연히 저택을 나가야 하니까요. 세자 저하 댁에서 나오면 이 길로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설강은 찌그러진 꽃신을 얼른 뒤로 감췄다.“그렇다면 어서 가세요!”위심은 몇 걸음 걸어가다 갑자기 발걸음을 돌려 설강 앞에 조용히 쭈그려 앉았다.“설강 아가씨, 그쪽에서…”그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무슨 냄새가…?”설강은 자신의 팔을 들어 진지하게 맡아보았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무, 무슨 말입니까? 제가 하녀라고 해서 냄새가 난다는 겁니까?”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는 위심을 밀쳐내고 작은 뜰로 도망치듯 달려 들어갔다.“아니, 그게 아니라…!”해명할 틈도 없이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됐다. 내일 다시 말하지 뭐.”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다음 날 아침.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시아는 연아를 데리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보니 작은 뜰은 어느새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고 유모가 그녀를 보자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마님, 시끄러워 깨어나신 건 아니겠지요? 큰 마님께서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 장정들이 모인 틈에 마님의 뜰도 새로 단장하라고 하셨습니다.”강시아는 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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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다시 어두운 밤이 내려앉았다.강시아, 설강, 그리고 연아는 오늘 밤을 끝으로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예정이었다.주종현은 거리 저쪽에서 연아가 작은 토끼 인형을 사달라며 아양을 부리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강시아는 줄곧 고개를 저었으나 설강이 토끼 모양 종이 등롱을 사주자 그제야 연아의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생각해보면 이렇게 셋이 함께 거리를 누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을 국공부 울타리 안에서만 보냈는데도 강시아는 단 한 번도 원망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주종현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고 돌아섰다.원망이 없을 리가 없지. 어제 그녀가 던진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이미 깊은 원망이 배어 있었다.조금만 더 기다려 주거라. 딱 사흘만이면 된다.“대인! 대인! 누가 찾아왔사옵니다! 꼭 뵙고 싶다고 하옵니다!”경사아문의 어린 병사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누구기에 그리 조급해한 것이냐?”“그게… 절대 말 못 하겠다 해서요!”“아문으로 돌아간다.”“마님, 너무 많이 산 것 같사옵니다.”설강이 귀를 슬쩍 들이대며 다가왔다.강시아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말했다.“내일이면 왜 필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지나치게 많아 보이는 물건들은 사실 그녀가 진짜 숨겨야 할 것들을 감추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남자 옷이며 밧줄이며 화전(火折子) 같은 물건만 들고 다니기엔 눈에 너무 띄었기 때문이다.강시아는 처음 오동거리를 둘러봤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골목은 시내가와 붙어 있으면서도 실제로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한석 역시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으려 그곳을 골랐겠지. 그 생각에 강시아는 씁쓸하게 콧방귀를 뀌었다.나 역시 무고한 사람인데.다행히 그녀도 오늘 밤이면 사라질 몸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죄의 무게를 차라리 그에게 떠넘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유한석이 그녀에게 자결을 요구하며 보낸 편지는 어제 주종현이 남겨두고 간 비녀와 함께 묶어두었다. 주종현이 비녀를 찾기만 하면 그 안에서 유한석의 친필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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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강시아와 설강의 심장이 동시에 턱밑까지 치솟았다.필요한 준비는 이미 모두 끝내 두었건만 꼭 이런 막판에야 뜻밖의 변수가 튀어나오지.만약 관병이 강제로 들이닥치거나, 그 집이 유한석이 빌린 집이라는 사실이라도 파헤치게 된다면 그녀가 석 달을 꼬박 들여 쌓아 올린 모든 준비는 한순간에 허사가 된다.설강이 벌떡 일어서자 강시아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지금 뭐 하려는 것이냐!”“가서… 가서 상황을 보고 오겠사옵니다.”“안 돼. 들키면 그냥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아니옵니다! 저는 골목 어귀에서 슬쩍 보기만 하겠사옵니다. 아무 일도 없으면 바로 돌아올 것이고 만약 문을 부수고 있다면 이쪽을 향해서 고개만 돌려 보이겠사옵니다.”강시아의 손아귀는 더 세게 조여들었다. “설강, 노비가 도망가면 사형감이다.”설강이 잡혀가 관아 문턱을 넘게 된다면 다시는 살아 나오지 못할 것이다.“제가 무슨 도망친 노비이옵니까? 그냥 이 동네 아줌마들처럼 궁금해서 그러는 것이지요.”설강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강시아의 손을 살짝 떼어내고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이 거리는 번화가처럼 사람 왕래가 많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 다다르니 관병 둘이 골목 한가운데에서 갈팡질팡하며 더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설강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역시 이곳은 사람들조차 입에 올리기를 꺼릴 만큼 흉흉한 곳이었다.무슨 핑계라도 대서 두 관병을 꾀어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등 뒤에서 설강을 얼어붙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설강 아가씨.”설강은 몸을 굳힌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만천이 준마 위에 앉아 있었고 말은 불안한 듯 고개를 연신 흔들고 있었다.“설강 아가씨께서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설강은 손가락을 꼬며 들끓던 당혹을 겨우 누르고 입을 열었다.“앞쪽에 제 고향 언니가 살아서요. 찾으러 왔습니다.”만천은 딱히 수상히 여기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였다.“저택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제가 바래다드리지요.”“아, 아니요!”자신의 거절이 너무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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