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Chapter 171 - Chapter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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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화

콩뼈는 이미 그와 꽤나 친숙해졌기에 평소 그가 들어오면 짖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짖는 소리가 너무나도 다급했다.달빛 아래, 작은 뜰이 새로 단장된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새것은 새것이었으나 왠지 사람의 기운이 쏙 빠져나간 듯 텅 비어 보였다.방 안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나 내실의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아 가느다란 틈 하나가 열려 있었다.조심스럽게 문을 밀어보자 그림자가 바닥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그의 심장이 순식간에 움켜쥐어진 듯 조여왔다.침상에 아무도 없자 주종현의 얼굴은 한순간에 굳어졌다.안과 밖을 모두 뒤졌지만 개 짖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하 유모와 설강도 보이지 않았다. 네 명의 멀쩡한 생사람이 그대로 사라진 것이었다.“위심!”위심이 한줄기 번개마냥 들이닥쳤다.“세자 저하!”주종현은 뼈가 으득으득 갈기는 소리가 날 만큼 주먹을 힘껏 쥐어졌다.“오늘 동산 장자를 맡은 자는 누구냐?”“이 지휘와 오 관사이옵니다.”“당장 불러오거라.”두 사람이 황급히 뛰어왔을 때 주종현은 작은 뜰 한가운데 서 있었다.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난 분명 탈 없이 지켜라 했다. 강 마님은 어디에 있느냐?”오 관사는 이런 세자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지라 입술을 떨며 말했다.“세자 께서 강 마님은 만 대인께서 지키신다 하여 소인들은 감히 더 묻지 않았사옵니다.”영국공부의 강 마님이 사라졌다. 이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나갈 수도 없었다. 소식이 알려지는 순간, 강시아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까.저택의 앞마당, 뒤뜰, 정원.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다 뒤졌지만 사람은커녕 귀신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위심은 사람을 이끌고 동산 장자를 따라 수색에 나섰다. 주종현과 만천 두 사람은 그 길로 밤을 뚫고 송 가에 잠입했다.송하윤은 몇 번이고 강시아를 죽이려 했고 입막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수까지 동원한 자였다.강시아와 연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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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화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주종현의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갑고 매서웠다. 그의 등 뒤로 번개와 천둥이 뒤섞여당장이라도 눈앞의 여인을 두 갈래로 벨 듯한 기세였다.송하윤은 문틀을 붙잡고 일어섰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나 여전히 준수한 용모를 자랑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망울이 일순 흐트러졌다.“종현 오라버니, 당신도 저를 속였나요? 왜 모두가 저를 속이는 겁니까?”주종현은 검을 뽑아 차갑게 그녀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다시 묻겠다. 강시아는 어디에 있느냐!”“강시아…?”송하윤은 마치 이제야 그 이름을 이해한 듯 허공에서 방황하던 시선을 그에게로 돌리더니 입을 막고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당신은 강시아를 찾는 겁니까? 저를 찾으러 온 게 아니고요?”그녀는 목에 닿은 살벌한 칼날조차 느끼지 못한 듯 미친 듯이 웃어댔다.먹구름 사이로 터져 나온 묵직한 천둥소리는 그녀의 광기를 더 또렷하게 했다.그러자 위심이 얼굴을 찌푸렸다.“세자 저하, 아가씨는 이미 미친 것 같사옵니다.”주종현은 더 볼 가치도 없다는 듯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했다.“경성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사람을 찾아오거라!”콩알만 한 빗방울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 떨어졌다.이야기가 일단락된 이 기쁜 날에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유일한 그 사람을 그는 잃어버리고 말았다.비 내리는 밤, 말발굽 소리만이 메아리쳤다.만천이 빗속을 가르며 질주해 와서 외쳤다.“세자 저하! 모든 성문을 수색했으나 강 마님을 자는 아무도 없다 하옵니다!”주종현은 만천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 위로 올라탔다.“나는 강 씨의 안위를 너에게 맡겼다. 한데 지금 강 씨는 생사불명이고.”만천은 그가 다 하지 않은 뒷말을 알고 있었다.‘강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도 무사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만천은 이를 악물었다.“고작 첩 하나일 뿐인데…”위심은 만천의 불만을 읽어내고는 말했다.“세자 저하께서는 지금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것이네.”만천은 고개를 틀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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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화

천둥과 번개가 밤하늘을 가르며 방 안을 한순간 하얗게 밝히고 지나갔다.편지 위의 글자들이 그 번개의 빛 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이 편지가 진짜라고 그에게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주종현은 거의 기어가다시피 미친 사람처럼 밤 속으로 뛰쳐나갔다.마치 마가 낀 사람처럼 유 가의 대문을 발로 걷어찼다. 대문이 무너지면서 문을 열러 오던 하인이 하마터면 그 아래에 깔릴 뻔했다.“대, 대인! 유 대인은 이미 주무십...”하인은 주종현의 얼굴은 몰랐으나 관복만은 알아보았다.“유한석, 당장 나와!”주종현은 하인 따위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장검을 움켜쥐고 피처럼 붉게 물든 눈을 하고는 안으로 들이닥쳤다.“하관이 세자 저하의 승진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정한 옷차림으로 걸어 나오던 유한석의 어깨에 주종현의 검이 그대로 꽂혔다.“강시아는 어디에 있느냐?”“그녀는 죽었습니다.”주종현의 붉어진 두 눈이 창백하지만 침착한 남자를 향해 뒤틀렸다.그는 마치 짐승과도 같이 포효했다.“그녀는 죽지 않았다! 감히 나를 속이지 말거라!”유한석은 핼쑥한 얼굴로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아까 못다 한 말을 이어갔다.“하관은 세자 저하의 승진을 축하드립니다.”그는 피식 웃었다.“세자 저하께서는 성공하셨습니다. 그러니 강시아도 헛되이 죽은 건 아니지요. 송 아가씨와 강시아의 다툼은 겉으로 보기엔 후궁 간의 사소한 싸움 같지만 송하윤의 뒤엔 송이당이 있었고 그 뒤엔 태후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그 한복판에 잠입하셨고 그동안 거의 여러 번 들킬 뻔도 하셨지요. 세자 저하께서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시고 계시기에 이 한석이 대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순간 주종현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검은 더 깊고 잔혹하게 파고들었다.“본세자의 일에 네가 뭐라고 끼어드는 것이냐! 강시아는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말도 안 되는 연극 따위는 이미 질렸단 말이다! 어서 그녀를 내놓거라!”유한석은 힘을 잃고 문짝에 부딪힐 때까지 물러났다.더는 길이 없자 그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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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화

“세자 저하!”위심이 정신없이 달려드는 주종현을 붙잡았다. 그는 이미 미쳐버린 듯 두 다리로 경성의 큰길부터 골목까지 샅샅이 뒤지고 또 뒤졌다. 단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얼굴엔 짧은 푸른 수염이 까칠하게 올라 있었다. 두 눈은 피로 물들었고 온몸에서는 얼음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주종현은 위심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시아… 넌 어디에 있는 것이냐? 도대체 어디에 숨은 것이냐?”“세자 저하,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강 마님은 이미 죽었사옵니다!”주종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서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숨은 것이다.”그의 행색은 마치 혼이 빠진 사람과도 같았는지라 위심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 조종현의 뒤 목을 내리쳐 기절시켰다.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사아문 안의 공기 중에는 탄 냄새가 떠돌았다.숨이 막히는 듯한 지독한 탄내였다.위심은 침상 위에 쓰러져 눈을 감고 있는 세자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돌려 곧바로 시체 보관실로 향했다.그곳은 토가 나올 정도로 진한 악취가 뒤덮고 있었다. 지키던 병사들은 이미 참을 만큼 참은 눈치였다. 이 사건이 지체되면 경사아문에 더 남아 있기가 버거울 정도였다.방 한가운데는 타 죽은 두 구의 큰 시체와 하나의 작은 시체가 놓여 있었다.위심은 도저히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탁자 위에 놓인 비수에 눈이 멈춰 섰다.“이, 이 비수는… 어디서 난 겁니까?”그 비수는 그가 예전에 설강을 괴롭히던 사기꾼을 쫓아낼 때 던졌던 바로 그 비수였다.병사가 급히 말했다.“어제 화재 현장에서 잠화대가 찾아온 것입니다!”위심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 비수를 집어 들었다.설강과의 인연이 그의 기억을 천천히 헤집었다. 그전에 강시아를 모시던 하녀와 비해 약간 어숙한 부분이 있던 설강이 오히려 그의 기억에 더 깊게 자리 박았다.그의 시선이 다시 그 세 구의 타죽은 시체로 향했다.“어쩌자고 이리 어리석은 짓을 한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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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화

“세자 저하! 강 마님은 이미 죽었사옵니다! 인정하지 않으셔도 이미 죽었단 말이옵니다!”위심은 주종현의 양팔을 꽉 움켜쥐고 광기로 치닫는 그의 의식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 했다.“그녀는 죽지 않았다! 이건 그녀가 아니란 말이다!”주종현의 동공이 급히 수축했다가 다시 커졌다. 눈동자는 짙게 충혈되어 이미 이성을 잃은 자와 다름없었다.“감히… 네 입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말거라!”그는 주먹을 움켜쥐어 위심의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위심은 그 일격을 버텨낸 뒤 두 번째로 날아오는 주먹을 붙잡았다.두 사람은 좁은 시체 보관실 한복판에서 주먹과 발길질을 주고받았다.위심은 그의 공격을 받아내고 또 막아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세자 저하!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이 남았는지 잊으셨사옵니까! 저희가 몇 년을 엎드려 쌓아 올린 판국인데 여기서 다시 무너뜨리려는 것이옵니까?”그 말에 주종현의 의식이 서서히 현실로 끌려 나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놓았고 두 사람은 동시에 두 걸음 물러섰다. 그때 그의 뒤꿈치가 작은 시신이 놓인 탁자를 치며 넘어뜨렸다.“조심하십시오!”주종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었다.작은 시신이 땅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고 충격을 견디지 못해 작은 팔이 부러졌다.그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시신의 겨드랑이 아래 기적처럼 그대로 남아 있는 살갗이 드러났다.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선명한 태기가 있었다.그의 입술이 격렬하게 떨렸다.“연아에겐… 태기가 없다.”위심도 그 순간 얼어붙었다.이불 속에서 끄집어 데려온 장석이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자네가 한번 봐보게.”그는 시신을 이리저리 확인하고는 말했다.“죽은 지 며칠이 지나서야 불에 탔군요.”주종현의 눈동자가 번개에 맞은 듯 흔들렸다.위심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네 말은 이 화재가 죽은 시신을 미리 사다가 꾸민 위장이라는 뜻이냐?”장석은 그를 흘겨보았다.“믿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당신들의 시체 검사관을 불러와 확인해 보시던가요.”위심은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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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화

아람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설의 손을 잡아끌고 뛰다시피 나왔다. 주인장은 두 사람이 달아나는 꼴을 보며 냉소를 흘렸다.“고작 이런 담탱이로 어디서 한몫 잡겠다고.”객점을 벗어나자마자 아람은 멈추어 서서 목덜미를 미친 듯이 긁어댔다.“아, 간지러워 죽겠구먼!”며칠 전에 강시아의 얼굴로 주인장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굳이 이런 고생을 자처할 리 없었다.아설이 약을 꺼내 건넸다.“어서 드세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성만 벗어나면 괜찮아질 겁니다!”마차 행렬은 이미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맨 끝에 있는 마지막 짐마차에 올랐다. 아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마지막에 앉으면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저기요, 앞에 마차가 또 있잖아요. 저희도 마차를 타고 싶습니다.”관사가 말했다.“당신들의 내는 돈으로는 이 수레가 다입니다.”“저희가 돈을 더 낼게요.”“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리가 없습니다. 마차를 타려면 닷새는 더 기다려야 하거든요.”“닷새… 그럼 됐습니다.”경성에 오래 머물수록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게 상책이었다. 차량 행렬이 흔들리며 서성문 가까이 도착하였건만 성문 앞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아람의 가슴이 스멀스멀 불안으로 조여왔다.“왜 이렇게 줄이 긴 것이냐?”앞 수레에 타고 있던 사내가 돌아보며 말했다.“탐관을 잡는다고 합니다!”또 다른 사내가 맞장구쳤다.“맞습니다. 어제만 해도 반쯤 되는 관리를 잡아갔다고 하지요. 그 뭐냐… 국공부 세자께서요.”“영국공부 세자라고 합니다! 듣자 하니 혼례 중반에 폐하께서 내린 성지를 받고 새 신부도 버리고 칼을 들고나가 탐관을 베었다더군요!”두 사람은 흥분해 이 말 저 말을 보태어 떠들었다.하지만 아람의 마음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막 출성을 하려는 차에 돌연 성문 검문이 이렇게 엄해지다니. 설마 벌써 들킨 건 아니겠지?아설 역시 불안해 손을 꽉 잡았다. 아람은 조용히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며 말했다.“내가 앞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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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화

잿더미가 다 된 마음에 겨우 다시 작은 희망이 붙으려던 순간이었다.관사가 식은땀을 닦으며 정표를 들고 뛰어왔다.“대인, 이 사람만 없사옵니다.”정표에는 단 한 글자만 적혀 있었다. 주종현의 시선이 정표 위의 ‘강’ 자에 멈추었다. 그 곱고 단정한 글씨 위로 그는 떨리는 손끝을 조심스레 얹었다. 정표에 적힌 서명과 도장은 자그마치 반달 전의 날짜였다.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금세 눈가를 타고 흘러 두 방울의 눈물이 되었다.“강시아, 이렇게까지 공을 들였단 말이냐?”그저 그의 곁에서 멀어지기 위해.“뭐라 하셨사옵니까?”관사는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라 되물었다.주종현은 정표를 고이 접어 옷자락에 집어넣고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깔았다.“이젠 가도 좋다.”위심은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강마님도 참 담이 크신 사람이셔... 감히 거짓 죽음을 꾸미다니!’왜선지 그날 맡았던 냄새가 익숙하다 했더니 그것은 장석이 시신의 악취를 가리기 위해 뿌리던 약 냄새였다. 억울하면 울기만 하던 사람이 시신을 사 와 불까지 지르다니... 시간이 지나면서 배짱도 크게 자란 모양이었다.주종현은 복작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성문은 철저히 지키고 순찰을 강화하거라.”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고 낮았다.“본세자는 그녀가 과연 얼마나 숨을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아람은 아설의 손을 꼭 쥔 채 떨리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어떡합니까?”아설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많은 준비를 했건만 어째서 금방 들켜버린 것일까? 성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녀는 나갈 수 없었다.아람은 이를 악물고 벽에 기대섰다.“이 감옥을 못 뚫을 이유는 없다. 가서 사람을 찾아보자꾸나!”마시는 악취도, 사람의 북적임도 여전한 곳이었으나 여 마님의 마구간만큼은 여전히 깨끗했다. 말을 닦는 계집아이도 여느 때처럼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또 당신이군요.”여 마님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아람은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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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화

아람의 눈이 밝아졌다.“그렇다면 문 마님…”“제 이름은 문희입니다.”“문희 아가씨, 당신은 용모를 바꿀 수도 있군요!”문희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한번 시도해 보시겠습니까?”그녀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아람과 함께 작은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문희의 손놀림은 섬세하고도 능숙했다.그림을 잘 그릴 뿐만 아니라 머리도 능란하게 손질했다.아람은 그녀의 손끝 아래에서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성왕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아설은 이미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이,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요!”아람은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소녀, 아람이라 합니다.”아설도 씩 웃으며 따라 예를 올렸다.“아람 아가씨.”“이제는 틀림없이 성문을 나갈 수 있겠지요?”문희는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입만 열지 않는다면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아람이 웃었다.“그렇다면 잠시 벙어리로 지내는 수밖에 없지요!”세 사람이 다시 성문으로 향할 준비를 하자 문희가 앞으로 나섰다.“셋이서 한 수레에 타면 눈에 띌 겁니다. 두 대로 나누어 가시지요. 당신은 앞의 마차를 타고 아설 아가씨는 아이를 안고 뒤 마차에 타는 것이 좋겠습니다.”그 말에 아설은 연아를 꼭 안아들었다.“제가 연아를 잘 지킬게요!”아람은 이를 꽉 물었다.“좋다! 그럼 나누어서 타자!”두 마차가 성문 앞의 대기 줄에 섰을 때 그녀의 심장은 거의 목까지 차올랐다.자신은 물론이고 뒤편의 아설도 들킬까 두려웠다.“검문이다. 문발을 올리거라.”마부가 나섰다.“관원님, 이분은 저희 마님이옵니다. 수배자가 아니지요.”“쓸데없는 말은 말고 올리라면 올리거라!”관병은 사람을 밀치고 가리개를 젖혔다.아람의 심장이 입까지 튀어나올 듯했다.관병은 그녀를 두어 번 훑어보고 초상화와 대조한 뒤 말했다.“가거라.”막 한숨을 쉬려던 찰나, 갑자기 차갑고 맑은 음성이 울렸다.“잠깐.”문발 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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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주종현은 그저 옅게 한 번 훑더니 곧 시선을 떼어냈다. 두 대의 마차가 천천히 지나갔다.다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지만 왜인지 가슴 한 편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그는 문득, 연아를 처음 가졌을 때의 강시아를 떠올렸다. 첫 회임을 했을 적에 그녀는 유난히 힘들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그 와중에도 가장 좋아하던 것은 덕흥루의 구운 닭이었다. 그러다 태어난 딸은 기묘하게도 그와 똑같이 밤떡을 좋아했다.“대인!”갑작스러운 부름에 주종현의 추억이 돌연 끊겨 버렸다.“알아냈사옵니다! 오동거리 입구의 그 객잔 주인이 초상화 속 사람을 보았다고 하옵니다!”그의 눈빛이 가늘게 모아지더니 이내 말 등에 올랐다.왼편으로 멀어지는 마차 한 대와 오른편으로 달려가는 한 필의 준마.결국, 둘은 각자의 방향으로 더욱 멀어져 갔다.마차는 무사히 경성을 빠져나왔다.아람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지만 보이는 것은 단단한 마차의 뒤판뿐이었다.“왜요? 미련이라도 남았습니까?”귓가에 담담한 목소리가 스쳤다.뒤돌아보니 조금 전 그들을 도와준 청년이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문가에 걸터앉아 있었다.그제서야 그녀는 이 사람의 역시 팔다리가 무척 길어 주종현과 나란히 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 체격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아냈다.“공자께서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잠시 후 십리정만 지나면 저희를 내려주셔도 됩니다.”젊은 공자는 고개를 들더니 입꼬리를 올렸다.“강 마님께서 이렇게 빨리 정을 거두실 줄은 몰랐군.”그녀의 얼굴빛이 굳었다.“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그는 아무 말 없이 아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눈을 감은 채 마차문에 기댔다.아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겨우 가라앉은 심장이 다시금 조여들기 시작했다.이제 막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왔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늑대 굴로 뛰어든 셈이지 않은가?주종현은 이토록 대대적으로 그녀를 찾고 헤매고 있었다.성왕 또한 주종현에 의해 집을 수색당한 적이 있다. 그런 주종현 앞에 그녀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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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화

연아가 어디서 꺾어왔는지 모를 들꽃 한 다발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외쳤다. “어머니!”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작은 손으로 입을 꾹 가렸다.“아버지.”문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치마를 입은 아버지가 어디에 있느냐?”연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머니께서는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랬어요. 그러면 단설기를 먹을 수 있거든요.”아람은 그녀에게 다가가 작은 손을 꼭 잡아 주었다.“금주는 봄 파종을 놓쳤다 하지 않았나요? 경성의 쌀값도 그렇게 올랐는데...”문희가 가볍게 웃었다.“아람 아가씨, 풍년인지 흉년인지는 결국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에 달려 있습니다.”그녀는 미간을 좁혔다.“한데 지금은 성문을 활짝 열어두었잖아요. 곡식을 거두러 온 사람들이 금주에 도착하면 다 들통날 텐데요?”문희는 되물었다.“금주가 봄 파종을 놓쳤다는데 누가 금주로 오겠습니까?”아람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곡식이 풍년이라 한들 그걸 누구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지난 생의 기억은 고작 후부 안살림에서의 다툼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금주의 사정을 알 리는 없을 터. 또한 경성에서 벗어난 지금도 금주의 상황을 알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소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농지가 있다면 당연히 마을도 있을 것이다.그녀는 문희 옆에 쭈그려 앉아 물었다.“문희 아가씨, 금주를 벗어나려면 아직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문희는 마른 가지를 모아 불에 넣었다.“밤새 달린다면 내일 아침이면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아설이 불가에 놓인 물병을 들어 빈 솥에 따르며 식히기 시작했다.“문희 언니, 이제 뭘 더 하면 되나요?”아람은 고개를 돌렸다.문희 언니라니. 이제 안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언니 타령을 하는 거지?“언제 그렇게들 친해진 것이냐?”아설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문희 언니는 정말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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