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Chapter 331 - Chapter 340

430 Chapters

제331화

순찰 인원이 부쩍 늘어난 밤, 깊은 적막 속에서 영내의 군사들은 막 교대에 들어가고 있었다. 짧게 끊어지는 새소리에 사방 숲속에서 백여 명의 산적이 물결처럼 튀어나왔다. 순찰병들은 재빨리 대응했지만 산적들은 전날처럼 숲속으로 몸을 숨겼고 추격 목표를 잃은 순찰병들은 또 한 번 허탕을 친 셈이었다. 산적들의 눈빛엔 모두 흥분이 번져 있었으나 도 형님은 오히려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였다.“오늘 군영 내에 병사가 얼마 없는 것 같구나.”옆의 산적들이 서로 맞보더니 말했다.“형님, 뭔가 착각하신거 아닙니까? 어딜 봐서 사람이 적다는 겁니까! 방금 전에는 잡힐 뻔도 했다니까요!”도 형님은 영내를 짧게 훑어보더니 말했다.“두 각 후에 다시 친다.”지정한 시간이 되자 산적들은 또다시 사방에서 기습을 벌였고 군영 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시각, 도 형님만이 군영 내의 주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확신했다. 주막에서는 처음부터 아무 기척이 없었던 것이다.그는 만류를 뿌리치고 주막의 방향으로 돌진했다. 순찰병들은 예상치 못한 재습격에 바로 칼을 들고 달려들었으나 도 형님의 칼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도 형님은 단방에 주막의 천막을 들어올리고 텅 비어 있는 내부를 확인하였다. 옆의 두 막사 역시 비어 있었다. 군영 전체가 빈 껍데기인 셈이었다.상황이 발각된 것을 인지한 순찰병들은 약속된 대로 곧장 말에 올라타고는 성으로 철수했다. 도 형님은 굳은 이를 악물고 잠에 빠진 듯 고요한 정현을 바라보았다.상황이 새어나간 것을 인지한 가짜 순찰병들은 곧장 말에 올라탔다.“염병할, 또 속았어! 전원 철수한다!”산적들은 산길을 제집 안방처럼 뛰어넘었다.“형님, 우린 도대체 언제쯤이면 관군에 편입될 수 있는 겁니까?”전에 도 형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고 지금의 인원들은 모두 새로 뽑힌 자들이었다. 이들은 그자들의 참혹함을 모르겠지만 도 형님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꽉 악물고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아정모를 알고 지낸 시간은
Read more

제332화

“아버지! 언제부터 산적이랑 구면이셨다고 그러십니까!”하연은 아주 많이 불만스러웠다. 큰 오라버니는 이미 그녀와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이번 토벌에서 공을 세운다면 집안 누구도 그녀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산적들이 스스로 항복을 해버린다면 공을 어떻게 세워야 한다는 말인가! 하 장군이 성큼 다가와서는 딸의 뒤통수를 후렸다.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고 마지못해 중얼거렸다.“아 아저씨.”정현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나 허름한 현청만큼은 한밤중에도 불과하고 환히 불이 켜져 있었다. 하연이 팔짱을 끼고는 문기둥에 기대선 채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지위가 제각각인 관리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연이 견디다 못해 입을 뗐다.“이렇게 질질 끌 게 뭐 있습니까? 죽일지 살릴지, 속 시원하게 한마디 해주시죠.”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고 어서 영지로 돌아가 있어라.”하연은 자신의 아버지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들어가서 한마디를 더 보태려고 하는 순간, 강세오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의 소매를 붙잡고는 뒤뜰로 데려갔다.“말동무를 찾아주마.”“누군데요?”잡아당기는 소매가 점점 뒤틀리는 게 거슬렸던지 하연은 아예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잡을 거면 손을 잡아야지 소매는 왜 잡는 겁니까!”“하 아가씨!”강세오가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마치 풀이라도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하연은 웃으며 깍지를 꼈다.“미리 말해두는데 제 손은 다른 아가씨들처럼 고운 손이 아닙니다. 그래도 싫어하면 안 됩니다.”강세오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그런 것 같습니다.”“그런 것 같다고요?”하연은 순식간에 그를 잡아당겼다. 가느다란 눈매에 위험한 빛이 뜨더니 음산하게 말을 꺼냈다.“책을 읽을 줄 밖에 모르는 선비가 다른 사람의 손도 잡아봤다는 겁니까?”어둠 속, 강세오의 얼굴은 또 금세 붉어졌다.“누이 말고는 그쪽 손 밖에 잡아본 적 없습니다.”“누이라
Read more

제333화

아람의 눈이 동그래졌다.“그… 그분을 마음에 두셨다고요? 제 오라버니를요?”아설도 시끄럽다고 투덜대던 그 사람을 이렇게 환하고 기운찬 하 아가씨가 좋아한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나랑 그 책벌레를 합하면 문무겸전이라니까! 앞으로 주종현이 또 너를 괴롭히면 내가 되돌려줄게! 그 사람은 너무 약해서 나한테 상대도 안 되거든.”그러고는 또 아람의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고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근데 말이야. 넌 어떻게 기꺼이 그 사람한테 애를 둘씩이나 낳아준 거야? 다른 여자를 정실로 들이겠다던데... 그건 들은 적이 없어?”아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웃었다.“제가 그를 버린 거예요. 그 사람이 또 누구를 들이든 이제 저랑은 상관이 없는 일이죠. 예전에는 집안이 가난해서 제가 몸을 팔아 국공부로 들어갔다가 딸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다 그분의 약혼녀가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오니 아들을 밴 채로 딸과 함께 죽은 척을 하고 도망을 친 것이지요.” 짧은 말 몇 마디에 그녀의 절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연은 반나절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무언가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잠깐만, 그러니까 네 말인즉은 네가 주종현의 그 죽었다는 첩실이었어? 약혼녀한테 몰려서 ‘죽은’거야?”하연의 아버지는 주종현의 후실은 항상 깨끗하다며 칭찬해왔다. 첩실은 하나밖에 없는 데다가 이미 죽었고 약혼녀는 병에 걸려서 파혼을 했다고 하면서 말이다.“와… 잠깐만. 머리가 정리가 안 돼!”이 몇 마디에 담긴 정보량은 과하게 많았다. 첩실이 정실한테 몰려 죽었고 정실 역시 파혼을 당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진심으로 궁금했는지 물었다.“그 사람은 널 도울 생각을 단 한 번도 안 했어?”아람은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그에게는 그의 계획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중요하지 않았죠.”하연은 벌떡 일어날 뻔했다. 주종현은 그녀의 아버지가 극찬을 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아니, 그걸 지금 두둔해 주는 거야?”아람은 고개를 저었다.“두둔이 아니
Read more

제334화

아정모의 시선이 정현 현청에 걸린 현판을 스치듯 지나갔다.“전하께서 모든 군량을 옮기신 것은, 하 장군을 견제하려는 뜻이시겠지만 제 아들마저 곤란해졌습니다. 이미 아뢰었듯, 세오의 앞길이 순탄해질 수만 있다면 저는 전하의 앞길을 여는 말발굽이 되겠다 약속해드렸을 뿐입니다.”소휘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아정모를 노려보았다. 아정모 역시 물러서지 않고 그의 시선에 맞붙었다. 소휘가 우선 웃으며 말했다.“그래, 본왕이 헤아리지 못하였군.”왕부의 마차가 천천히 다가와 그의 앞에 멈췄다.“밤새도록 수고했다. 본왕은 먼저 물러갈 테니 아 장군도 들어가 보거라.”아정모는 조용히 몸을 옆으로 굽혀 예를 표했다. 마차가 출발해 그와 스쳐 지나가고서야소휘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 총관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전하, 인구는 모두 다시 세어 보았습니다. 총 만 칠천 삼백 이십일 명입니다. 다만… 이번 일로 무 장군께서 심히 불만이 커보입니다. 임주의 번병이 크게 공을 세우고 군사를 모집하는 것을 약속하였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남은 곡식 값도 받아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손실은 삼만 냥 정도가…”그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본래라면 모두가 이익을 얻는 계책이었지만 아정모의 독단으로 인해 한왕의 신임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은전 삼만 냥도 손실되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공로는 하 장군이 낚아채 가버렸고 앞으로의 군사 모집 역시 하 장군이 손을 뻗을것이 분명했다. 소휘는 또 다른 수를 내어 하 장군이 스스로 손을 떼게 만들게 해야 했다. 한 수가 어긋난다면 천 리가 빗나간다더니, 참으로 맞는 말이었다. 소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아정모는 아직 쓸모가 있다. 당장은 손을 대지 않을 것이야. 유용한 자라면 본 왕도 조금은 너그러울 수 있지. 은전도 별 문제가 아니다. 본 왕에게 제일 모자라지 않은 것이 은전이니. 모자란 부분을 모두 매워서 아람한테 보내거라.”“명 받들겠습니다.”다음 날 아침, 정현
Read more

제335화

하연은 평소 여인의 옷차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칼을 휘두르고 창을 돌릴 때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늘 이 옷도 그야말로 급하게 사서 갈아입은 것이었다.계단을 내려서려는 순간, 발목 아래까지 내려온 치맛단을 밟는 바람에 그녀는 몸이 뒤로 확 넘어가며 한바탕 크게 나자빠질 뻔했다. 강세오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허공에서 허우적거릴 뿐 정작 본인이 휘청이며 계단 이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반면, 하연은 허리춤의 비파를 뽑아서는 현청 앞에 놓여진 돌사자에 빙빙 걸어맸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비파를 잡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돈 후 가뿐히 지면 위에 착지했다. 그녀의 발치에는 사정없이 나자빠진 강세오가 엎드려 있었다.“강 대인, 굳이 이렇게 큰 절을 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마침 방금 내린 유한석이 면바로 그 광경을 목격했다.“너 누구야! 사람이 넘어졌는데 그걸 틈타서 이득을 챙기려고? 그렇게 살다간 오래 못 버틴다!”하연이 서둘러 강세오를 부축하며 쏘아붙였다.“대… 대담하도다! 감히 자사 대인께 무례를 범하다니!”하인이 막 나서서 꾸짖으려던 찰나, 유한석이 손을 들고 그를 막아섰다.“여기 계신 아가씨는 본관과 강 대인이 옛 동문인 것을 모르고 한 말일 뿐이다.”하연은 결코 물러서지 않고는 계속 쏘아댔다.“당신이 그 백성들을 팽개치고 끝끝내 모습을 비추지 않은 자사 대인이셨군요. 책벌레,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며? 너는 이토록 선량한데 저자는 왜 이리도 비겁한 것이지?”마차에 타고 있던 여서린이 그 말을 듣고는 참지 못했는지 내려섰다.“아가씨, 말이 너무 지나치군요. 누가 소인이고 누가 군자인지를 아가씨 한 입으로 단정하는 겁니까?”여서린은 원래 나서고 싶지 않았으나 유한석이 여자와 말다툼을 벌이는 것은 아무래도 체면이 서지 않으니 대신 나선 것이었다.“너는 또 누구야? 내가 뭐라 하든 네가 들먹일 이유가 뭐 있는데? 나는 단정짓지 못하고 너는 단정지어도 된다는 거야?”하연은 싸움 실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말로도 절대
Read more

제336화

그녀는 주종현을 위협하기 위한 장기말이 될 수도 있었고 소휘의 진정한 목적을 가릴수 있는 상인일수도 있었다. 전생에는 변경에 전쟁이 폭발해, 주종현은 항상 밖에서 분주히 움직였고 그녀는 후원에 갇혀 있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온전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돌아본다면 내부에서 일어난 균열과 내분의 틈을 타 타국이 칼끝을 들이민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가 과연 난세로 기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휘가 그녀를 이용한다면, 그녀 역시 소휘를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법이다.“동생!”아람이 고개를 들자, 여자 옷차림의 하연이 문가에 날아들 듯 서 있었다. 작고 발랄한 아가씨한테 동생이라 불리우니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하 아가씨, 오늘은 어찌 이리 곱게 차려입은 것입니까? 혹 오라버니를 찾으러 오신 건가요?”“예쁘지!”하연이 한바퀴를 삥 돌았다. 방금 전의 시위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람이 변한 것 같다고 했지만 하연은 꽤나 마음에 드는 느낌이었다.“다만 걷는 게 좀 불편해. 자꾸 치마를 밟아.”이미 치맛단에 묻은 흙을 본 아람이 빙그레 웃었다.“그럼 굳이 치마를 입지 않아도 됩니다. 하 아가씨는 기마복도 잘 어울리는걸요. 씩씩하고 멋있잖아요.”그 한마디에 하연은 눈이 접히도록 히죽 웃었다. 왜 아람을 이토록 좋아하는 지 알 것 같았다. 말을 너무나도 이쁘게 했다. 집에서 남장을 하고 있으면 부모님은 물론 오라버니들도 뭣 같지도 않다 하지, 여장을 하면 셋째 오라버니의 군영의 호위들에 그녀의 사촌 언니들마저 그녀를 놀려대니 무얼 입어야 할지도 모를 판이었다.“아버지 말로는 며칠 안 있어 다시 군영으로 돌아간대. 근데 난 정현에 온 뒤로 한 번도 밖에 나가 놀지를 못해서 말이야. 책벌레는 언제 휴무야? 너희랑 같이 놀러 가고 싶어!”아람이 가볍게 웃었다.“놀러 가자면, 사람을 잘못 고르셨어요. 우리 오라버니는 정현에 부임한 뒤로 한 번도 놀러 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하연이 그럴 줄 알
Read more

제337화

하 장군은 번개가 스친 듯 고개를 홱 돌려 소휘를 바라보았다. 전장을 수백 번도 더 건너온 그의 눈빛에 살기 어린 냉광이 번졌다.“성왕 전하 곁에는 평범한 사람이 한 명도 없군요.”소휘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느슨하게 팔을 감싸안았다.“본왕이 운이 좋았을 뿐이지.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의 옥패에 새겨진 흑호군의 깃패를 보아서 말이다. 설마 진짜로 맹청련의 딸일 줄은 몰랐지. 맹 아가씨는 참으로 기구하지 않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지 못하는 데다가, 딸아이도 몸을 팔아 노비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정모가 당시 흑호군에서 쫓기듯 떠날 때 처자식이 이런 팔자를 맞이할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 장군, 이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면 아정모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알수 있겠나?”소휘는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아 장군이 품고 있는 깊은 뜻을 장군도 부디 헤아려 주길 바라네.”하 장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일들은 맹 노장군이 직접 처리한 일이었기에 소휘가 알 리 없었다. 소휘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맹 가는 더 이상 후계자가 없는 데다가 맹회 역시 늙었지. 막대한 서북군이야 이까짓 산적들을 군사로 영입하는 것은 쓰게 보지 않을 것 같네만. 하 장군이라면 정확한 선택을 하리라 믿네.”하 장군의 뒤어금니가 서서히 맞물렸다. 그와 한왕 모두 처음부터 소휘가 깔아둔 판 위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그해의 일은 그 역시 명을 받들어 움직였을 뿐이지, 아정모가 맹청련과 함께 도망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맹청련이 돌아왔을 때는 회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살이 기껏해야 될 어린 아이와 함께였다.맹 노장군은 아들을 인질로 삼다시피 한 덕분에 둘을 겨우 갈라놓을 수 있었으나 그 뒤 맹청련이 어떻게 다시 도망을 쳤는지는 그 역시 알지 못했다. 한 사람은 산적 무리 속으로 묻혀버렸고 다른 한 명은 이름도 모르는 벌판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와중에 남은 두 아이는 겨우겨우 살아났는데 아정모가 이 사실을 안다면 필히 그와 목숨을 걸고 싸울 터.
Read more

제338화

“저는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엔 누이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겨우 목숨을 이어왔습니다. 부모님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지금이라야 고작 작은 고을의 현령일 뿐입니다. 일생의 약속은 너무나 무거운 법이지요. 아가씨께서는 대장군의 따님이니 더 나은 집안을 고를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아가씨께서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훗날 저와 같은 궁핍한 현령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반 년의 기한을 드리지요. 혹 그때도 뜻이 변치 않는다면 삼서육례를 갖추어 정식으로 청혼을 하겠습니다.”하연은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웃었다.“책벌레. 우리 부모님이 나더러 맞선을 보지 않게 한 줄 알아? 그 사람들은 말이야, 나더러 마음을 거두고 내조나 열심히 하며 아이를 기르라고 하거나 나보고 지참금을 얼마나 낼 수 있냐 물어보더라. 더 한 자들은 내가 거칠고 교양이 없다면서 곱상하게 생긴 첩을 두 셋 더 붙여 보내라고도 했어.”여기까지 말한 하연은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그들의 살을 뜯어낼 기세였다.“난 문벌이 중요한 지는 잘 몰라. 한데 너만큼 바른 사람을 본 적이 없어!”강세오가 피식 웃었다.“인품이 좋은 사람이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습니다. 혼사는 아이 장난이 아닙니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약조는 쉬이 하는 것이 아니니 하 아가씨께서도 한순간의 감정 때문에 일생을 그르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내가 너한테는 많이 모자라?”하연이 당장 물었다.“아가씨가 좋으니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하연은 그의 말에 눈이 가늘게 휘며 미소 지었다.“좋아. 반 년! 내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꼭 청혼하러 와야 해!”뒤따라 오던 두 호위가 눈이 둥그레져서는 수군거렸다.“셋째 아가씨께서는 이미 결심한 것 아니야?”“강 대인께서 셋째 아가씨에게 후회할 시간을 남겨 준거야.”“그럼 강 대인 쪽에서 마음이 바뀌면? 셋째 아가씨는 그때 어디 가서 울라고?”“에이, 설마. 강 대인은
Read more

제339화

문 앞에 서 있던 아정모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본 뒤, 시선을 강세오에게서 잠시 멈추었다. 그러다 이내 그 시선조차 거두어 들이더니 안으로 걸어 들어와 하 장군 맞은편에 앉았다.“하 장군, 오랜만이네.”하 장군은 자기의 잔에 다시 술을 따라 올리고는 호탕하게 말했다.“저와 아 장군은 옛 벗입니다. 예전엔 둘 다 맹 장군 휘하의 부장이었지요. 전쟁터에서라면 저 하문정이 인정하는 사람은 맹 장군 빼고는 아 장군밖에 없지요!”소휘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아 장군이 바로 맹 노장군의 부장이었다니 본왕이 실례를 범했군.”아정모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말했다.“감히 그런 말씀은 들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미 산에 들어가 산적이 되었으니 지난날의 영광은 내다 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형제들을 데리고 이렇게 군병이 되는 것에 지원을 하게 되었지만 이들 모두 개개인의 사정이 있는 자들입니다. 대인들께서 저자들에게 기회를 한 번만 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만족할 만한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사람이란 성현이 아닌 이상 누구나 잘못은 있는 법이지. 고칠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소휘의 시선이 주종현에게로 옮겨갔다.“아 장군한테 소개하지. 이분은 도지휘사이자 금군 통령이신 영국공의 세자 주 대인이이다.”아정모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인사했다.“주 대인, 저와 형제들은 거친 사람들이니 폐하를 수호할 자격이 없는게 당연합니다. 형제들 역시 우주에서 줄곧 지내왔다 보니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성왕 전하께서 저희를 못마땅해하시지만 않는다면 우주에 남아 지방 번병이 되고 싶습니다.”“아 장군의 충성은 본왕도 알고 있지. 못마땅해하다니 그럴 일이 없지 않나? 한데 번병은 아무쪼록 군병들과는 다르니 폐하께서 허락을 하지 않는다면…”아정모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저는 이 요구 하나밖에 없습니다. 만약 안된다면 형제들과 다시 산적이 되겠습니다.”이제는 주종현도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짐작이 섰다. 애초부터 자
Read more

제340화

서남대영은 막사를 거두고 떠났고 한왕의 번병들 역시 헛수고만 하고 나서는 아정모가 항복한 그날 조용히 떠났다.한편 멀리 천리 떨어진 경성, 황궁의 깊은 곳.젊은 제왕은 높은 옥좌에 앉아 급히 올라온 장계를 차가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내관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아뢰었다.“모든 일이 폐하께서 예상하신 그대로 흘러갔습니다. 폐하께서는 과연 신묘한 통찰을 지니셨습니다. 그 산적들은 모두 성왕 전하의 휘하로 들어갔고 한왕은 얻은 것 하나 없이 오히려 성왕 전하께서 파신 곡식을 사들이느라 몇만 냥을 날렸습니다. 한왕은 앙갚음이 심한 사람이니 훗날 반드시 이를 갈며 보복할 것입니다.”황제는 빛과 그림자가 엇갈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굴의 절반이 어둠에 잠겼기에 그 표정은 좀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그렇단 말이지.”신묘하다? 그저 이미 겪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겪는 것이었다.한때 나라는 무너졌고 그는 천하를 잃었다. 그러니 지난 생에서의 죄를 이번 생에 되갚아줄 뿐이었다. 전 내관이 그를 한 눈 쳐다보더니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폐하, 또 한가지 일이 있습니다.”“말하거라.”황제는 몇 차례 기침을 하며 변방에서 올라온 장계를 펼쳐들었다.“예전, 소인더러 조사를 해오라던 그 강 마님의 일입니다. 본래는 주 가와 송 가의 집안 다툼에 휘말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여식이 죽은 척하고 도망가 그녀의 친오라버니인 강 장원의 현청에 머무르고 있다 합니다.”강시아는 고작 작은 장기말에 불과했다. 큰 판세를 뒤흔들 힘은 없으나 수많은 말들처럼 결국 흐름을 움직이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황제는 때마침 맹 노장군이 올린 장계를 보고 있었다. 전생에 강세오는 과거에 시도하지 못한 채 맹 노장군에 의해 강제로 군문에 편입되었다. 일개 서생이라 전장에 나가면서 치세의 재능이 빛을 발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라가 무너지고 성문이 열어젖혀진 그 날, 허공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장계 중, 강세오가 쓴 그 반쪽의 장계가 그의 발치에 떨어졌고, 그제야 그는 한 서
Read more
PREV
1
...
3233343536
...
4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