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Chapter 741 - Chapter 750

819 Chapters

제741화

적막에 잠겨 있던 대영 안에 갑자기 뿔나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많은 횃불이 동시에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진영 전체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셀 수도 없는 대성조의 병사들이 장막 뒤에서, 눈더미 속에서, 도무지 사람이 숨어 있을 것 같지 않은 온갖 곳에서 함성을 터뜨리며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는 아무리 보아도 병력이 비어 있는 군영의 모습이 아니었다. 불찰친왕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망했다. 함정이었다. 사방이 전부 대성조의 군대였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은 마치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죽음의 부름 같았다. 그들은 완전히, 철저하게 포위된 것이다.“후퇴하라!”“어서 물러나라!”푸른 산만 남아 있다면 장작은 다시 구할 수 있는 법이라고 불찰친왕은 더 이상 체면도,맹여산의 목숨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거칠게 고삐를 잡아당겨 말머리를 돌려서는 미친 듯이 왔던 길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것은 쉬웠지만 나가는 것은 달랐다. 서북대영이란 곳은 그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차가운 화살 하나가 그의 왼쪽 어깨를 정확히 꿰뚫었다. 강한 충격에 그는 거의 말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눈앞이 새까맣게 흔들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말의 배를 조였다. 뒤에서는 우륵 병사들의 절망 어린 비명이 터졌고 살 속으로 무기가 파고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기편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처참한 울음이 이어졌다. 이 밤, 우륵 연합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불찰친왕은 마치 집 잃은 들개처럼 눈보라 속에서 남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초라하게 달아났다. 주종현은 얼굴에 쓴 가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불찰친왕이 달아난 방향을 깊지만 파문 한 점 일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번 싸움은 이겼으나 그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그가 있는 한 누구도 대성조의 땅에 발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눈은 계속 내렸다. 하얀 눈송이가 그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
Read more

제742화

그녀의 목소리에 알아차리기 힘든 떨림이 묻어 있자 맹시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자수틀을 아설에게 건넸다.“설아, 연아랑 복동이 데리고 뒤에 가서 과자 좀 먹여.”“예, 아가씨.”아설은 눈치를 채고는 재빨리 복동이를 안아 들고 연아의 손을 잡아 밖으로 물러났다. 따뜻한 온돌방 안에는 이제 두 사람만 남았다. 맹시은은 직접 하연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 차가운 손에 쥐여 주었다.“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무슨 일로 뛰어왔습니까?”하연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지만 손끝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입을 열려는 순간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나… 아버지한테서 편지를 받았어.”맹시은의 심장이 단숨에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연의 아버지 하훈은 이번 원군의 총사령이었다.“편지에 뭐라고 하셨습니까?”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주 차분했다. 하연은 온 힘을 다해 말을 꺼내려는 듯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옥문에서… 큰 승리를 거뒀대. 우륵 연합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새로 뽑힌 맹주 불찰친왕도 중상을 입고 도망쳤다고 했어.”시은의 팽팽하던 신경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 승전이라면 언제나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하연의 표정을 보자마자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 다음은요?”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하연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헌데 우륵의 근본 전력은 아직 남아 있어. 게다가 그동안 눈치만 보던 여러 동맹 세력들이 이번 패배에 분노해서 오히려 병력을 더 보냈대. 지금 서북대영은 거의 우륵 전역의 병력에게 삼면에서 포위된 상황이야. 앞뒤가 다 적이란 말이야. 아버지 편지에… 큰오라버니가 경기대영의 병력을 이끌고 밤낮없이 서북으로 달려갔다고 적혀 있었어.”그 말을 듣는 순간 맹시은의 얼굴도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 씨 가문의 장자 하주까지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전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편
Read more

제743화

맹시은의 손끝은 손바닥의 여린 살을 거의 파고들 지경이었다. 따끔한 통증이 스쳤지만 가슴속으로 번지는 싸늘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흔들리면 안 됐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뼛속까지 스며들던 냉기를 억지로 눌러 삼켰다. 그리고 마차 발을 살짝 들어 올려 눈보라 속에서 말을 타고 따르던 곽범에게 눈짓을 보냈다. 맹시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곽범, 따라가. 너무 가까이 붙진 말고 멀찍이서만 쫓아. 어디로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만 보면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몸을 먼저 챙겨.”“예.”눈보라 사이로 들려온 곽범의 대답은 낮고도 단단했다. 이내 그는 새하얀 설경 속에 사라졌다. 마차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연은 맹시은의 침착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급하게 뛰던 제 심장도 이상하리만치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시은, 너는… 소휘가 뭘 하려는 것 같아? 번왕이면서도 조서도 없이 멋대로 경성으로 돌아오다니, 이건 목이 달아나도 할 말 없는 대죄잖아.”맹시은의 시선은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송이 위에 머물렀다. 고요히 가라앉은 눈빛은 오래된 우물처럼 깊었다.“돌아올 엄두를 냈다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무얼 하려는지는…”맹시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속셈이야 뻔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백마사의 향불은 과연 성했다. 이토록 눈이 퍼붓는 날인데도 오가는 참배객들의 발길은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맹시은과 하연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움직였다. 두 사람은 정성스레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멀리 변경에 있는 이들을 위해 장명등을 밝혔다. 주황빛 불꽃은 낡은 청동 등잔 안에서 말없이 잔잔히 흔들렸다. 가늘게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그리움과 기도를 실어 올리는 듯했다. 부디 그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부디 그들이 승리하여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기도를 올렸다. 백마사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곽범은 아직 돌아오지
Read more

제744화

내우외환이었다. 그야말로 나라의 기둥마저 흔들리는 듯한 위태로운 때였다. 하연은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곁에 놓인 작은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저 썩은 쥐새끼들! 나라의 좀벌레 같은 것들! 변방의 장수들은 얼음 같은 눈밭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며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저 자들은 경성에 틀어박혀서 자기 권세와 부귀만 챙기려고 온갖 잔꾀로 물을 흐리고 판을 뒤흔들고 있어! 저런 자들은 전부 묶어다 변방으로 보내 버려야 해! 전마 발굽에 짓밟히고 휘어진 칼날이 목에 들이대지는 기분이 어떤 건지 직접 겪어 보게 해야지! 저들이 입만 열면 쉽게 얻을 수 있다 말하는 이 강산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뼈 위에 세워졌는지 똑똑히 보게 해야 해!”말을 할수록 그녀의 감정은 더욱 격해졌고 눈가까지 붉어졌다. 맹시은은 가만히 눈썹을 모았다.“하연 아가씨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저도 압니다. 헌데 소휘는 일곱 째 전하 소림과 마찬가지로 폐하의 친동생입니다. 그가 봉지에서 몰래 병력을 모았을 때 폐하께서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하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얼굴에 가득했던 분노가 서서히 힘 빠진 기색으로 변해 갔다. 그랬다. 황제는 그저 칙서를 내려 꾸짖었을 뿐이었다. 크게 문제 삼는 듯 보였지만, 결국 가볍게 넘겨 버렸다. 심지어 그의 번왕 작위조차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맹시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절제되어 있었다.“황실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은 전부 추측일 뿐이에요. 아무 근거 없이 왕야를 모함하면 어떤 죄인지 알고 있습니까?”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구족이 멸문되는 대죄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에 숨조차 막힐 것 같았다. 분명 눈앞의 상대가 늑대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기분이었다. 온돌방 안은 다시 깊은 침묵에 잠겼다.한참 뒤. 맹시은은 몸을 돌려 책상 앞으로 걸어가 직접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Read more

제745화

맹시은이 딸의 머리를 빗어 주던 손이 잠시 멈췄다. 연아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연아.”맹시은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엄해졌다.“잊었느냐? 지난번에도 그 아이 때문에 너희 둘이…”연아는 곧장 의자에서 몸을 돌리더니 맹시은의 팔을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어머니, 제가 잘못한 거 알아요. 그래도 일곱 째 전하는 제가 경성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예요. 국자감에서 어떤 애들이 저보고 아버지가 없다고 놀렸을 때도 전하께서 나서서 제편을 들어 줬어요. 지난번에는 사고도 치고 많이 놀랐지만 그래도 제 친구잖아요. 제 생일인데 친구를 초대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아이의 눈빛은 맑았고 또 완고했다. 그 작은 세상 속에서는 모든 일이 단순했다. 친구라면 당연히 초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딸의 맑은 눈을 마주한 순간 맹시은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권모술수니, 이해득실이니 하는 계산은 한순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다.”생일 잔칫날이 되자 진국공부는 위아래로 새롭게 정돈되었다. 며칠간 드리워져 있던 음울한 기운도 함께 씻겨 내려간 듯했다. 조 아가씨와 왕 아가씨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요즘 경성에서 가장 유행하는 비단 꽃과 향낭을 연아에게 선물로 가져왔다. 세 소녀가 한데 모이자 금세 재잘거리는 소리와 맑은 웃음이 꽃처럼 터졌다. 잔칫상이 차려질 즈음이 되어서야 일곱 째 전하 소림이 느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시간을 딱 맞춰 온 듯했다. 맹시은은 그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지난번 화약 사건 이후로 한 달은 넘게 그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고작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이 아이는 꽤나 많이 달라진 듯했다. 키도 한 뼘은 자란 듯 훌쩍해졌고 눈매에서는 장난기와 철없음이 조금 걷혀 차분한 기색이 더해져 있었다. 그는 보람빛 비단 도포를 입고 있었다.“맹 이모.”맑은 그 목소리에는 자만도, 위축도 없었다. 친왕인 그에게는 본래 예를 갖출
Read more

제746화

“어떤 귀한 분이 길에서 저를 붙잡고 금 한 닢을 주면서 상점 점원인 척하고서라도 반드시 물건을 전하고 그 말을 그대로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망토로 머리를 깊이 가리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문밖 쪽을 향해 아주 빠르게 스쳐 갔다. 거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지극히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맹시은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녀의 마음이 더 깊이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곁에 서 있던 소림이 문득 “어?”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그는 상자 가득한 보석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옥패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기룡 무늬가 새겨진 양지백옥 패였다. 옥빛은 온화하고 윤기가 흐르며 조각 또한 정교해 단번에 범상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연아와 다른 두 소녀도 곧장 그쪽으로 몰려들었다.“일곱 째 전하, 그 옥패가 특별한 건가요?”왕 아가씨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소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옥패를 앞뒤로 돌려 보며 살피고 있었다. 이마는 살짝 찌푸려졌고 눈빛에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생각과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이상하네…”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이 옥패, 왜 이렇게 셋째 형님의 것과 닮았지?”그는 고개를 들어 맹시은을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에는 아직 확신하지 못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그러자 맹시은의 심장이 순간 움찔했다.“일곱 째 전하, 성왕 전하께서도 같은 옥패를 갖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응.”소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점점 더 확신에 가까워졌다.“셋째 형님은 어릴 때부터 이 옥패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까. 절대 틀릴 리 없어. 이 무늬랑 매듭 묶는 방식까지 똑같거든… 설마 셋째 형님께서 경성에 돌아오신 건가?”그 순간, 맹시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딸의 생일인데, 아비 된 사람이 어찌 빠질 수 있겠느냐.”그 말이 소휘의 음침하고 오만한 얼굴과 순식간에 겹쳐졌다. 정말로 그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역겨움과
Read more

제747화

“온돌방 밖 뜰에 숯불을 피워 두었단다. 미리 재워 둔 양고기도 준비해 두었고. 우리 나가서 고기 구워 먹을까?”“좋아요!”먹을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들은 금세 방금 전의 일은 잊은 채 환성을 지르며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숯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양고기를 화로 위에 올리자 곧 지글지글 기름튀는 소리가 났다. 짙은 고기 향에 향신료 냄새가 섞여 서늘한 공기 속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아이들의 웃음과 장난 소리가 맑고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들을 바라보는 맹시은의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살기가 미친 듯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녀는 하녀들과 몇몇 유모들에게 아이들을 잘 돌보라고 일러 두고 몸을 돌려 조용히 그 소란스러운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사람 하나 없는 회랑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걸려 있던 온화한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직 차갑게 굳은 긴장만이 남아있었다. 소휘의 것이 분명한 그 옥패가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꽉 쥐어져 있었다. 단단한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프게 눌렀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심장은 북을 두드리듯 거칠게 뛰었다. 맹시은은 걸음을 재촉해 인적 드문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이르자마자 곽범의 그림자가 귀신처럼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아가씨.”맹시은은 손을 펼쳐 그 옥패를 곽범 앞에 내밀었다.“이 물건을 알아보겠느냐?”곽범은 한 번 보자마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이건… 성왕 전하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옥패입니다. 몇 번 직접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절대 틀릴 리 없습니다.”역시. 맹시은의 마음이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손을 다시 꽉 움켜쥐었다. 옥패는 손바닥 안에서 뜨겁게 달군 낙인처럼 느껴졌다. 심장 끝까지 타들어 가는 듯했다.“곽범.”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주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지금 당장 경사아문에 가. 위심에게 전할 말이 있다.”곽범은 몸을 숙여 조용히 기다렸다. 맹시은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번왕이 경성에 들어왔다. 경성
Read more

제748화

새하얀 눈이 끝없이 쌓여 하늘과 땅이 한 빛으로 이어져 있었고 주홍빛 궁벽이 그 사이를 가르며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막 내린 새 눈이 갓 깨끗이 쓸어 둔 궁도를 다시 덮어 버렸다. 소휘의 검은 금실 구름무늬 장화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천천히 디뎠다.“사각… 사각…”작고 둔한 눈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눈 위에는 또렷한 발자국이 하나씩 남았다. 그는 마치 이 궁궐이라는 감옥을 다시 한번 길이로 재어 보는 듯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곳의 벽돌 하나, 기와 한 장까지도 그의 어린 시절이 스며든 곳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문득 그는 오래전 어느 겨울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선황이 태자 형의 손을 잡고 이 궁도를 걸으며 매화의 종류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던 날이었다. 그때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태자는 나라의 동량이니 서리를 견디는 매화처럼 강인한 기개를 가져야 한다고 했었다. 태자는 원후 소생으로 선황이 온 마음을 다해 키워 낸 후계자이자 가장 큰 기대를 받은 정통 장자였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는 둘째 황자였다. 타고난 재능은 평범했지만 성격은 호탕하고 자유로웠다. 그의 어머니는 숙비였고 가문 또한 명망이 높았다. 비록 선황의 총애는 받지 못했어도 적어도 미움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했는가. 소휘의 입가에 자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름조차 없는 궁녀였다. 그를 낳을 때 난산으로 죽었고 죽은 뒤에야 선황에게서 ‘소의’라는 봉호를 받았다. 그것은 은혜라기보다는 시혜에 가까웠다. 황자라는 그의 신분이 너무 우스워 보이지 않도록 덧씌운 겉치레 같은 것이었다. 황자라 불리며 천자의 혈통이라 했지만 그의 삶은 평범한 집안 아이들만도 못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모든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법을 배웠다. 틈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굶주린 늑대 새끼처럼 누가 자신을 살
Read more

제749화

소휘는 옷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는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신, 폐하를 뵙습니다. 신은 조서 없이 경성에 들어온 것이 이미 규례를 어긴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 번 죽어도 마땅한 죄입니다.”소휘는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알맞은 두려움과 자책이 배어 있었다.“이 상태로 대놓고 성에 들어왔다면 백관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고, 내일 아침이 되면 신을 탄핵하는 상소가 폐하의 어안 위에 산처럼 쌓였을 것입니다. 신은 폐하께 조금의 번거로움도 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말은 물 흐르듯 빈틈이 없었다. 조서를 어기고 입경한 죄를 교묘하게 ‘군주를 위한 배려’라는 명분으로 돌려놓았다. 어안 뒤에 앉아 있던 황제가 마침내 붉은 붓을 멈추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소휘에게 내려앉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은 눈빛이었다. 잠시 뒤 황제가 웃었다. 아주 옅은, 눈까지는 닿지 않는 웃음이었다.“일어나거라.”황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너는 참, 어릴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구나.”소휘는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공손히 서 있었다. 말씀을 기다리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채였다. 황제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빈틈없는 말 한마디, 그리고 옥처럼 온화한 그 웃음 하나로 사람들을 다 속이곤 했지. 가끔은 생각한다. 그 웃음 뒤에 도대체 어떤 마음이 숨어 있는지.”소휘의 심장이 순간 움찔했으나 얼굴에는 여전히 공손하고 온순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폐하께서 신을 오해하신 듯합니다. 신의 마음은 언제나 폐하를 향한 충정뿐입니다.”황제는 그저 미묘하게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붉은 붓을 내려놓자 곁에 서 있던 전 내관이 곧장 다가왔다. 그는 깨끗한 수건을 공손히 받쳐 들고 있었다. 황제는 천천히 손을 씻었다. 모든 동작이 느긋하고 침착한 것이 마치 모든 것을 이미 손안에 쥐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물방
Read more

제750화

“신, 황공하옵니다!”소휘의 목소리에는 적절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비밀을 들킨 뒤의 놀람과 죄책감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폐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사를 바로잡으시며 조정 안팎의 혼탁함을 씻어내고자 힘쓰셨습니다. 천하에 다시 맑은 하늘을 돌려주고자 하시는 그 뜻을 저 역시 멀리 우주에 있으면서도 늘 마음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비록 폐하 곁에서 직접 근심을 나누지는 못하오나 조정을 향한 걱정은 한시도 놓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고심 또한 늘 헤아리고 있지요. 제가 사사로이 병사를 훈련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결코 반역의 마음은 없었습니다!”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마치 자신의 심장을 꺼내 보여 주기라도 할 듯한 표정이었다.“그 병사들은 폐하를 위해 길러 온 것입니다! 언젠가 폐하께서 가장 날카로운 칼이 필요하실 때, 온갖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아가 폐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간악한 자들을 베어 낼 칼이 필요하실 때, 저와 저의 수만 장병은 폐하를 위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그의 말은 진심이 묻어나는 듯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피로 쓰인 것처럼 들렸다. 어좌 위의 황제는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이 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라 하지도, 책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높은 자리에서 마치 오래 공들여 준비한 한 편의 연극을 차분히 감상하는 관객처럼 그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 소휘의 무릎이 서서히 저려 오기 시작할 즈음, 황제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주 가벼운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소휘의 심장은 더욱 팽팽히 조여 들었다.“너의 마음을 짐 또한 이제 알겠다.”황제는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일어나거라. 바닥이 차다.”소휘의 가슴속에서 팽팽히 당겨 있던 긴장은 조금도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조여들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서 있었다. 황제는 엄지에
Read more
PREV
1
...
7374757677
...
8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