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Chapter 791 - Chapter 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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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1화

“모두 일어나거라.”황제의 목소리는 병중의 기운이 스며들어 미묘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맹여산과 진도림은 몸을 일으켰으나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전각 안은 죽음처럼 무거운 정적에 잠겼다. 한참이 지나서야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아득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하게 흩어졌다.“짐이… 꿈을 하나 꾸었다.”맹여산과 진도림은 서로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들 서로의 눈 속에는 같은 놀라움과 불안이 읽혀졌다.“짐이 본 꿈에서는 이 대성조의 강산이 결국 망하더구나.”그 말은 낮게 떨어졌지만 두 사람의 귓가에서는 번개처럼 요란하게 울렸다.“그 꿈에서 우륵은 우리 왕조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철기병이 북방을 짓밟았고 서쪽의 적융 또한 틈을 타 우리 강산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리고 짐은…”황제는 스스로를 비웃듯 쓸쓸하고 깊은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로 웃었다.“그 꿈 속의 짐은 무능하고 어리석은 황제였다. 먹고 놀 줄만 알 뿐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 결국에는 처자식도 지키지 못하고 선조들이 일궈낸 이 나라까지도 지켜내지 못했다.”맹여산과 진도림이 다시 무너져 내리듯 무릎을 꿇으며 이마를 차가운 금전 위에 깊이 박았다.“폐하! 꿈은 허망한 것이옵니다! 모두 허상일 뿐이니 부디 심려를 거두소서!”진도림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항상 근면하게 정사를 돌보시고, 신법을 시행하시며, 관리를 개혁하시고, 토지 겸병을 억제하셨습니다! 백성의 호적을 정비하여 국고를 채우고, 백성을 편안케 하셨으니 이는 전례 없는 성업이옵니다! 어찌 혼군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맹여산도 뒤따라 말했다.“폐하, 신은 이미 우륵의 아란 공주와 손을 잡았습니다. 머지않아 그 아들을 도와 왕위를 되찾게 할 것이며 그리되면 불찰의 난 또한 평정될 것입니다. 대성조의 북방은 백 년의 안정을 누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두 중신의 말을 듣자 황제의 눈에 잠시 안도의 빛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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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2화

“짐의 일곱 째 아우인 소림에게 제위를 잇게 하거라.”맹여산과 진도림의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비어버렸다. 황제는 지금 뒷일을 안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 두 장의 얇은 비단 문서가 태산보다 무겁게 느껴지면서 손끝과 발끝이 차갑게 식어갔다.*천녕 7년. 봄이 여름으로 기울 무렵, 마침내 승전의 소식이 전해졌다. 사월이 되는 때였다. 주종현은 벼락처럼 쏟아지는 기세로 삼천 정예 기병을 이끌고 나다 맹기 후방에서 기습을 감행했다. 그들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정확히 불찰 반군의 심장부를 찔렀다. 아란 공주는 어린 왕자를 데리고 열여 개 맹기의 호위를 받으며 대성조 기병의 보호 아래 왕성으로 돌아갔다. 어린 왕자는 만인의 시선 속에서 마침내 한왕의 자리에 올랐다.그리고 오월. 그 소식이 전선에 도달했을 때, 궁지에 몰려 있던 불찰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발악했다. 미친 듯이 회군하며 마지막 일전을 노렸으나 주종현이 이미 펼쳐 둔 것은 빈틈 없는 그물이었다. 그와 동시에 옥문의 수장인 하훈은 대군을 이끌고 출격해 적을 추격했다. 앞뒤에서 협공을 당하다 보니 군심은 무너졌고 세 달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마침내 모든 것이 가라앉았다. 우륵 군사의 절반 이상이 항복했고 불찰은 난전 속에서 생포되었다. 수년을 끌어오던 북방의 혼란은 이로써 끝을 맺었다.구월. 가을 하늘은 높고 맑았다. 개선, 그리고 귀환할 일만이 남았다.시월. 연이어 승전보가 전해졌다. 맹서강이 정현에서 감독하던 철광은 첫 번째 채굴과 제련을 마쳤고 정련된 강철은 끊임없이 경성의 군기감으로 운반되었다. 대성조의 무기는 이제 더욱 날카로워지고 갑옷도 더욱 단단해졌다. 국력 역시 날로 융성해졌다.주종현은 소수의 심복 호위만 데리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채 노을이 녹아내리듯 퍼지는 황혼 속을 지나 말을 몰아 경성으로 들어왔다. 주작거리는 여전히 수레와 사람이 뒤엉킨 채 번화했다. 그는 시전과 인파를 지나 길을 돌아 마침내 진국공부 문 앞에 말을 멈췄다.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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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3화

연아의 작은 몸이 쏜살같이 달려들어서는 그대로 주종현의 품에 부딪혀 안겼다. 그녀는 주종현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놓지 않았다.“아버지, 드디어 돌아오셨네요!”고개를 숙여 어느덧 자신의 허리까지 자라난 딸을 바라보노라니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눈동자마저 단번에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연아…”그는 몸을 굽혀 예전처럼 딸을 번쩍 안아 올리려 했으나 팔에 힘을 주는 순간, 문득 그녀의 딸은 기억 속처럼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딸은 이미 훨씬 자란 것이었다. 맹시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다가와 눈가가 붉어진 채 입을 열었다.“연아야, 얼른 내려오너라. 이제 다 큰 아가씨가 되어 가는데 아직도 이렇게 아버지한테 매달리면 어쩌느냐. 아버지는 쉬지도 못하면서 먼 길을 오느라 물 한 모금도 못 드셨다.”그녀는 손을 뻗어 딸을 떼어내려 했으나 주종현은 손을 들어 그녀를 조용히 막았다.“잠깐만 안고 있으마. 이제는 정말 못 안게 될지도 모르니까.”그 말에는 잃어버린 시간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쉬움이 깊게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듣는 맹시은의 가슴도 세게 조여들었다. 그 사이 복동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누나가 ‘낯선 사내’에게 달려든 틈을 타 번개처럼 손을 뻗어 접시 위에 남아있는 마지막 계화 소당을 낚아채서는 재빨리 입에 넣어버렸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우물거리면서도 눈은 그 사내를 향해 있었다. 아버지? 그럼 이 사람이 어머니와 누님이 말하던, 멀리서 나쁜 사람들을 물리치고 있다는 그 아버지라는 뜻일까? 주종현은 딸을 달래준 뒤에야 천천히 시선을 아들에게로 옮겼다. 연아를 내려놓고는 무릎을 굽혀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손을 내밀어 딸에게 했던 것처럼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복동이… 이렇게 컸구나.”하지만 자신과 똑 닮은 그 눈동자 속에 낯섦과 거리감이 가득한 것을 보는 순간, 주종현의 가슴은 찌르듯 아파왔다. 그는 손을 거두고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가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느냐?”복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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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4화

그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조금은 자조적인 기색과 함께 또 조금은 드러내지 못한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우리 혼례 때 나 대신 절을 올린 건 곽범의 누이였지. 너는 나를 ‘부군’이라 한 번도 불러준 적이 없었다. 이렇게 어렵게 구사일생으로, 시체더미와 피바다를 뚫고 살아 돌아왔는데…”조금 더 다가서자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두 마디쯤은… 좀 다정하게 말해줄 수 있지 않느냐?”맹시은은 순간 얼굴의 피가 전부 귀 끝으로 몰린 듯했다. 귓불이 눈에 보일 정도로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더니 그녀는 무언가에 데인 듯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반사적으로 멀리 있는 아이들을 힐끗 바라봤다.“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목소리는 낮았지만 급하고도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아이들… 아이들이 다 보고 있잖아요!”좀처럼 보기 힘든 그녀의 수줍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주종현의 가슴에 쌓여 있던 피로와 울적함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시원하고도 기쁜 기운을 담은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눈앞의 이 여인은 이미 갑옷을 살 속에 녹여 넣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걸 벗겨내려면 서두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는 방금 전 그녀의 말을 따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목소리 역시 다시 차분하고 안정된 기색으로 돌아갔다.“네가 말한 일들은 나도 다 알고 있다. 외조부와 하 씨네 큰 형님께서 이미 전서구로 소식을 전해왔거든. 폐하 쪽은… 너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곧바로 입궁해 뵈어야 할 것 같구나.”맹시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조차 눈치채지 못한 작은 허전함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돌탁자 위에서 그에게 먹일 떡이라도 집어 들려 했으나 백옥 접시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살짝 주종현을 흘겼지만 곧장 부드러운 걱정이 스며들었다.“당신도 참, 돌아올 거면 사람을 하나 보내 미리 알려주지 그랬어요. 주방에 말해서 따뜻한 밥이라도 준비하게 했을 텐데. 이렇게 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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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5화

궁벽은 높고도 웅장하게 차가운 달빛 아래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함광전 안에는 촛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나 공기 속에는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 짙은 약 냄새가 가득했다. 주종현의 발걸음이 전각 문턱을 넘는 순간, 미세하게 멈칫했다. 연좌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의기양양하던 그 얼굴은 지금 거의 투명할 만큼 창백해져 있었다. 달빛 같은 옅은 흰 옷은 그의 몸에 걸쳐져 어딘가 헐거워 보였다. 경성을 떠났을 때보다 너무도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주종현의 눈가가 조용히 붉어졌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처음 만났었다. 하나는 거리낌 없이 말을 달리던 황자였고 하나는 가문의 영욕을 짊어진 세가의 자제였다. 그들은 함께 마장에서 말을 달렸고 태부의 강학에서 함께 매를 맞았었다. 그러나 운명의 흐름은 끝내 그들을 서로 다른 길로 밀어 넣어 한 사람은 천하를 품은 황제가 되었으나 이 네모난 궁벽 안에 갇혀 날마다 소모되어 갔고 다른 한 사람은 제왕 곁의 중신으로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으나 사랑 하나를 위해 스스로 데릴사위가 되어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지만 가장 갈망하던 무언가는 이미 잃어버린 뒤였다.“왜 그러느냐?”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경성을 떠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짐을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그의 목소리는 오랜 병을 앓은 사람처럼 거칠고 지쳐 있었다. 황제는 전각 안에 깔린 무거운 기운을 덜어내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어보였다.“짐의 몸은 괜찮다. 요즘 날이 쌀쌀해져서 그저 감기에 좀 걸렸을 뿐이다. 태의들이 괜히 호들갑을 떨어 이런 약이나 잔뜩 가져다 놓았지. 그 탓에 입맛이 떨어져 조금 야위었을 뿐이다.”가볍게 흘리는 말은 마치 바람과도 같이 그 어떤 파문도 일구지 못했다. 그 말들을 듣고있는 주종현의 가슴만 괜히 조용히 죄어들었다. 그는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서서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신, 주종현, 폐하를 뵙습니다. 북방의 난은 이미 평정되었습니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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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6화

그의 곁에는 계산과 저울질, 강산과 사직만이 있을 뿐이었다. 일생의 심혈을 이 풍전등화 같은 대성조의 조정에 쏟아부었고 즉위한 일곱 해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사를 돌보며 마음을 다해 나라를 바로잡았다. 후궁에는 미인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으나 끝내 단 한 명의 자식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 아닌 인위적인 일이었다. 이 젊은 황제가 가장 단호한 방식으로 외척에게 휘둘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끊어낸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의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종현의 시선이 황제 곁의 어안 위로 떨어졌다. 그 위에는 산처럼 쌓인 상소문들이 있었다. 겹겹이 쌓인 그 종이들 하나하나가 대성조의 상처를 품고 있었다. 관료의 적폐, 부패한 관리, 뿌리 깊은 세가에 움직이기 시작한 번왕들까지. 수백 년 이어져 온 왕조는 이미 곳곳이 무너져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은 이 젊은 황제의 어깨 위에 차곡차곡 얹혀 있었다. 날이 쌓이고, 해가 쌓이면 결국은 그를 짓눌러 무너뜨릴 것이었다. 황제는 그의 생각을 꿰뚫은 듯 시선을 거두고 낮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지워지지 않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대성조는… 이미 고질에 깊이 병들었다.”그는 아무렇게나 상소문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금박으로 찍힌 글자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면서도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짐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간신히 숨을 이어주는 것뿐이다.”그는 상소문을 내려놓고 다시 주종현을 바라보았다.“일곱 째 아우는 아직 어리지만 성품이 단순하고 마음이 어질다. 훗날 좋은 인덕을 갖춘 군주가 되겠지. 헌데 아직 날개가 다 자라지 않았고 단련도 부족하니 길을 열어줄 좋은 스승이 한 명 필요하다.”황제가 또박또박 말하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무거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이 책임을 네가 맡아줄 수 있겠느냐.”말이 끝나자 함광전 안은 서로의 심장 소리마저 들릴 듯 고요해졌다. 주종현은 그의 뜻을 즉시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는 마치 먼 길을 떠나는 형이 가장 마음 놓이지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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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7화

주종현의 곧게 펴진 등은 그 한숨 앞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 속에서 타오르던 불꽃도 그 한숨에 흔들리듯 위태로워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한 번 점점 쇠약해져 가는 그 뒷모습을 향해 깊이 예를 올릴 뿐이었다. 군신 사이에는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었고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이미 태산처럼 무거운 약속이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함광전을 나섰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칼날위를 밟는 듯했다. 뒤에서 궁문이 천천히 닫히며 전각 안의 짙은 약 냄새와 그 무거운 맡김을 완전히 끊어냈다. 밤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오면서 늦가을의 차가운 기운이 얼굴을 따갑게 파고들었다. 그제야 주종현은 자신이 이미 식은땀에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 끝의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그 달은 함광전 안의 그 사람처럼 차갑고 고독했다.*궁도 끝자락. 희미한 등불 아래에는 눈에 띄지 않는 푸른 휘장의 마차가 조용히 서 있었다. 차창의 휘장이 살짝 흔들리며 청아하게 빛나는 얼굴 하나가 드러났다. 그 순간 주종현의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은 비로소 기댈 곳을 찾은 듯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해 휘장을 들어 올리고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차 안은 봄처럼 따뜻했고 그에게 익숙한 안신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맹시은은 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어 그의 차갑게 식은 손끝을 가볍게 감쌀 뿐이었다.“고생했어요.”수많은 말들이 그 나지막한 몇 글자에 담겨 있었다. 주종현은 그녀의 손을 되잡아 그에게만 허락된 온기를 끌어올리듯이 꼭 쥐었다. 눈을 감고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대자 온몸에 배어 있던 피로와 살기가 이 작은 공간 속에서 서서히 풀려갔다.*영국공부. 주종현은 혼례 이후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이상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마차는 번화한 거리를 지나 천천히 달렸다. 연아와 복동이는 창가에 매달리듯 기대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복동이는 입이 심심해서는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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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8화

조 씨는 아들을 거의 일 년 가까이 보지 못한 것을 맹시은의 앙심과 고집이라 여겼다. 애당초 그녀가 외인과 함께 수를 써서 맹시은의 아들을 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두 달 전, 중추절. 조 씨는 끝내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직접 명절 선물을 들고 손자와 손녀를 보러왔다며 진국공부를 찾았다. 그러나 맹시은은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저 하인들에게 명해 정중히 돌려보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조 씨더러 수화문 너머로 멀찍이서 두 아이를 한 번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아이들은 마치 어린 시절의 주종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맹시은은 그 한 번의 시선이면 조 씨가 평생을 후회하게 만들기엔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송하윤의 말을 믿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종래로 후회약 따위는 없었다. 부 안에서 곧 다급하고 뒤엉킨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조 씨가 거의 부축을 받다시피 하며 뛰어나왔다. 문 앞에 선 곧게 선 소나무 같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종현아… 내 종현아…”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면서 한 걸음 다가서려 했으나 주종현 곁에 선 담담한 얼굴의 맹시은을 보는 순간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멎어버렸다. 그녀의 얼굴 위로 복잡하고 난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뒤에 선 하인들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뭣들 하고 서있느냐!”“누가 저들을 들이라고 했느냐!”그때, 뒤에서 우레 같은 고함이 터져 나오더니 영국공이 잠옷 차림에 얼굴은 시퍼렇게 굳어서는 겉옷조차 걸칠 틈도 없이 뛰쳐나왔다. 한때 그에게 자랑이었던 아들은 가장 큰 치욕이 되어버렸다. 영국공부의 체면을 이 역적 같은 자식이 모두 짓밟아 버린 것이었다. 이제 조정에 나가면 등 뒤에서 누군가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영국공이 주종현을 노려보는 두 눈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뭐 하러 왔느냐.”그 목소리는 이를 악물고 짜낸 듯했다.“너는 이미 맹 가의 사람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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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9화

깨진 도자기 조각이 사방으로 튀자 하인들은 숨조차 죽인 채 얼어붙었고 호흡마저 가늘게 눌러 삼켰다. 공기 속에는 영국공의 격노가 남긴 여운과 조 씨가 억눌러 삼키는 흐느낌이 뒤섞여 떠돌았다. 연아는 그 살벌한 분위기에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맹시은의 옷자락을 꼭 움켜쥔 채 그녀의 뒤에 숨어서 겁에 질린 눈만 겨우 내비쳤다. 오직 주종현의 품에 안긴 복동이만이 근심이 무엇인지 모른 채 목을 길게 빼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주종현은 조용히 아들의 등을 토닥이다 그 작은 몸을 제 품안으로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문지방과 바닥에 흩어진 난장을 그대로 넘어섰다. 그의 걸음은 마치 미리 재어둔 듯 깨진 도자기 틈만을 정확히 밟아 지났다.“아버지.”그는 깊은 물처럼 고요한,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리 크게 노하실 것까지야 있겠습니까.”영국공은 분에 못 이겨 입술까지 떨렸지만 방금의 그 고함 한 번에 온 힘을 다 쏟아버린듯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소매를 거칠게 털어내듯 휘두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풍상을 견딘 얼굴 위에는 실망과 고통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조 씨는 그 모습을 보자 다급히 눈물을 닦아내고는 허둥지둥 앞으로 나섰다. 부군의 얼굴을 볼 용기도, 아들의 손을 붙잡을 용기도 없는 그녀는 시선을 두 아이에게로 돌렸다.“연아, 복동아, 이리 오너라. 할머니한테 오렴.”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마르지 못한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주방에서 행인락과 부용고를 막 만들었다더구나. 어서 와서 맛보렴.”그녀는 다급한 비위 맞춤이 실린 목소리로 뒤쪽의 하녀들에게 잇달아 분부했다. 하녀들은 마치 큰 사면이라도 받은 듯 이 수라장 같은 정청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물러났다. 주종현은 아들을 안은 채 정청 한가운데까지 걸어 들어가서는 그대로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아버지, 어머니.”그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텅 빈 정청 안에 묵직하게 울렸다.“아들은 폐하의 밀지를 받고 우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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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0화

“어머니, 생각이 많으십니다.”주종현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잔잔했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임금의 녹을 받는 자는 임금의 근심 또한 짊어지는 법입니다. 세상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아들은 신하로서 언제든 조서를 받고 경성을 떠나야 할지 모르는 몸입니다. 영국공부는 집안이 크고 기틀이 깊으니 주재할 사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그는 더 깊이 말하지 않았다. 소휘는 곁에 있고 조정의 물밑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으니 아직 모든 것이 가라앉은 때가 아니었다. 이 말들은 부모에게 차마 밝힐 수 없는 것이었다.“둘째 아우는 성정이 침착하여 큰일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조 씨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주종현의 팔을 꽉 움켜쥔 그녀의 손톱이 마치 마지막 남은 구명줄이라도 붙잡듯이 옷감 깊숙이 파고들었다.“종현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느냐! 너는 이 어미 인생의 전부다!”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리며 그녀는 억울함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문무를 겸비했지 않느냐. 어느 하나 남에게 뒤지는 것이 있느냐? 이 작위는 원래 네 것이어야 했다! 네 아우가… 어찌 너와 견줄 수 있겠느냐! 이제 겨우 맹 가로 장가든 것도 주 가를 온 경성의 웃음거리로 만들었거늘, 이제는 남은 작위마저 남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이냐?”조 씨는 가슴이 찢어질 듯 울부짖었다. 영국공은 내내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차갑게 비웃었다. 그는 흐느끼는 조 씨를 거칠게 떼어냈다.“망상이다! 지금 저 녀석은 이미 진국공부 사람이야! 살아도 맹 가 사람, 죽어도 맹 가 귀신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 가의 작위를 넘보겠다는 거냐?”주종현의 등은 여전히 곧았다. 그는 더 이상 ‘치욕’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휘청거리는 어머니를 부축했다.“아버지,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어머니도 몸을 돌보십시오.”잠시 말을 멈춘 그의 목소리에 비로소 자식다운 온기가 스며들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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