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세자의 혼례날, 첩은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Chapter 931 - Chapter 940

945 Chapters

제931화

“왜 그래? 경치가 별로야?”“예쁘긴 예쁘죠.”맹진영이 입맛을 다시며, 한껏 동경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헌데 전 아버지처럼 고사성어를 줄줄 읊는 재주도 없고, 어머니처럼 바람만 스쳐도 바로 몸이 나가는 솜씨도 없잖아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반짝이는 두 눈에는, 이 선경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인간 냄새가 가득 배어 있었다.“이런 풍경이면 말입니다... 네모난 상 하나 딱 펼쳐놓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동솥 하나 걸어놓고, 부드러운 양고기 몇 접시 썰어 올리고, 거기에 뜨끈한 양탕 한 그릇까지 곁들이면…”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슬쩍 침을 삼켰다.“그게 진짜 사람 사는 냄새죠!”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멀지 않은 매화나무 뒤편에서 노골적인 비웃음이 흘러나왔다.“누군가 했더니 먹보였군. 진국공부의 맹 아가씨다워.”보랏빛이 감도는 남색 비단 옷에 옥관을 단 소년 하나가 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열세네 살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단정했다.맹진영은 그를 보자마자 방금까지 웃고 있던 얼굴을 단번에 굳혔다.“차유담? 너 개야? 왜 가는 데마다 나타나?”그는 주종현의 벗 차윤서의 장남으로, 맹진영과 함께 국자감에서 공부하는 사이였다. 둘은 평소에도 앙숙이었다.차유담은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런 설경과 매화 앞에서, 머릿속엔 온통 양고기 생각뿐이라니. 역시 글 한 자 모르는 촌스러움다워.”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까지 곁들였다.“맹 상서 같은 청류 선비에게서 어떻게 너 같이 먹을 것밖에 모르는 딸이 나왔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군.”“내가 네 집 쌀이라도 먹었어?”맹진영은 순식간에 발끈했다. 소매를 걷어붙이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이 위선 떠는 새끼! 뒤에서는 몰래 야담이나 읽으면서, 스승님 앞에서만 사람인 척하는 꼴이 퍽 우습단 말이지!”“헛소리 하지 마!”차유담은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얼굴빛이 확 바뀌었다.“너야말로 헛소리야! 그건 민심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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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2화

주연아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쯤에는, 두 꼬마의 기세도 이미 다 꺼진 뒤였다.보니 맹진영과 차유담은 어느새 머리를 맞대고 바짝 붙어 앉아, 무언가를 수군대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칼끝을 겨누듯 으르렁거리며, 당장이라도 서로를 눈밭에 처박아 굴릴 기세였던 둘이 지금은 한몸처럼 다정해 보였다.“안 싸워?”주연아가 툭 던지듯 말을 꺼내자, 두 아이는 깜짝 놀라 동시에 움찔했다.“아… 안 싸웁니다.”맹진영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슬쩍 차유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차유담은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마치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맹진영! 나… 나 방금 말이 좀 심했어. 내 잘못이야!”그는 말을 더듬다 잠시 숨을 들이켰다.“너… 너 동그란 구리솥에 끓인 양고기 좋아하잖아?”이내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거의 외치듯 내뱉었다.“내가 살게! 그걸로 사과할게!”맹진영은 곧장 주연아의 팔을 와락 끌어안으며, 활짝 웃었다. 눈이 반달처럼 휘어질 정도였다.“연아 언니, 들었죠? 이거 본인이 먼저 말한 겁니다! 오늘 우리 완전 호강이예요!”주연아는 이 어이없는 반전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아이들의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쉽게 달아오르고 또 쉽게 식어버린다.그녀로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가자. 차 공자께서 크게 한턱 쏘신다는데.”*산 아래에 세워진 마차 안은 온기가 가득했다.열무는 두툼한 흰 여우털이 깔린 연침에 기대 앉아,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붉은 매화 가지를 천천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꽃잎은 여리면서도 선명하게 붉어, 어둑한 마차 안에서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였다. 몇 송이는 이미 활짝 피어 있었고 더 많은 꽃망울은 아직 단단히 닫힌 채였는데 그 모습이 꼭 그녀를 닮은 것 같았다.열무의 머릿속에, 저도 모르게 한 얼굴이 떠올랐다. 맑으면서도 어딘가 기개가 서린 그 얼굴.우주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온 듯 초췌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신분에 어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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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3화

“멈춰라.”타로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열무는 마차에서 내려, 잠시 손에 들고 있던 붉은 매화를 내려다보았다.눈부시게 선명한 그 붉은빛이 시야를 찌르듯 스며들자, 그는 미묘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는 결국 그 매화 가지를 조심스레 마차 안의 부드러운 연침 위에 내려놓았다.“넌 먼저 행관으로 돌아가거라.”그는 타로에게 짧게 명했다.“난 잠깐 혼자 걷겠다.”“예, 한주.”타로는 감히 더 묻지 못하고, 곧바로 마차를 몰아 떠났다.주루 안에서는 구리솥이 ‘보글보글’ 끓으며 뜨거운 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맹진영과 차유담, 두 꼬마는 이미 싸움을 잊고 한 조각 두부를 두고 신나게 다투고 있었다.주연아는 그 소란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 속에 담긴 사람 냄새 나는 온기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아마도 그 시선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도 또렷하고 집요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시선.채소를 집어 들던 그녀의 손이 문득 멈칫했다. 그러고는 거의 본능처럼, 그 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그 사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붐비는 인파 속에, 한 사내가 조용히 서 있었다.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공기가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주연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정현에서 들었던 소림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그렇다면, 매번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났던 그 정체불명의 열 공자도 설마…주연아의 가슴속에서 경계의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며, 기름 묻은 입으로 먹는 데 정신없는 맹진영을 툭툭 쳤다.그러고는 그녀의 귀에 바짝 입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재빨리 몇 마디를 속삭였다.맹진영은 눈을 깜빡이며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주연아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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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4화

열무는 갑자기 굳어버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을 그렸다.그는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그 애매모호한 태도는, 차라리 솔직히 시인하는 것보다 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주연아의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비었다.대성조와 우륵은 오랜 세월 국경에서 부딪혀 왔다. 크고 작은 전쟁은 단 한 번도 완전히 멈춘 적이 없었다. 지금의 평화는 너무도 위태로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겨우 십 년을 버텼을 뿐이었다.그는…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걸까.구리솥 안의 양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김을 뿜어냈다.흐릿하게 피어오른 열기 속에, 맞은편 남자의 또렷한 윤곽이 아른거리며 번졌다.열무는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어, 종잇장처럼 얇게 썬 고기를 집었다. 끓는 양탕에 살짝 담그자 숨 한 번 돌릴 사이도 없이, 선홍빛 고기는 말려 올라가며 먹음직스러운 색으로 변했다.그는 그것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맛은 훌륭했다.부드럽고 연해, 혀끝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하지만 어딘가 부족했다.고기를 큼직하게 뜯고, 술을 사발째 들이켜는 그 시원한 맛은 아니었다.그의 시선이 어느새 다시 주연아에게 향했다.작고 아담한 몸.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여렸다.그렇다면 우륵의 통양구이를 그녀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이내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생각을 접었다.뭐, 어려운 일도 아니다.훗날을 위해 대성조의 요리사를 하나 따로 두면 될 일이다.주연아는 전혀 알지 못했다.맞은편의 사내가, 이미 자신의 앞으로의 삶을 우륵에서 어떻게 꾸려갈지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그녀는 지금 오로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열무가 정현에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무언가 기밀을 손에 넣은 건 아닐까. 화총의 설계도가 유출된 건 아닐까.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하나가, 그녀를 가시방석 위에 앉힌 듯 불편하게 만들었다.*주루 밖, 긴 거리 위에서 맹진영은 치마자락을 움켜쥔 채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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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5화

그녀는 한마디라도 더 끌어내기 위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열무는 그녀의 또르르 굴러가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경계와 탐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온몸의 가시를 곤두세운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작은 짐승 같았다.그는 그녀의 속셈을 굳이 짚어내지 않았다.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화제를 살짝 비틀며,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얹었다.“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연아 아가씨의 본명은 아직 모르겠군요.”주연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왔다. 역시, 그도 자신을 떠보고 있었다.“연아가 본명입니다.”그녀는 담담하게 두 글자를 내놓았다.성은 끝내 밝히지 않았다.열무는 그 두 글자를 입안에서 천천히 굴리듯 되뇌었다.“그렇군요...”그리고 낮게 읊조렸다.“대성조에는 ‘연’이라는 성도 있습니까?”그의 입에서, 이국적인 억양을 타고 흘러나온 그 이름은 이상하게도 더 길게 맴돌며 스며들었다.귓가를 간질이는 그 울림에 주연아는 순간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그녀는 입꼬리를 비죽이며 시선을 곧장 마주했다.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저만 그런 건 아니죠. 저도 아직 공자님의 이름은 모르고 있는데요. 서로 주고받아야 공평한 거 아닌가요?”분을 참는 듯하면서도 끝까지 밀리지 않으려 애쓰는 그 모습에, 열무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낮고 울림 있는 웃음소리가 좁은 객실 안을 잔잔하게 채웠다.그는 점점 더 확신했다. 오늘 산길에서 꺾어 들었던 그 붉은 매화 가지가 그녀와 꼭 닮았다는 것을.너무도 닮아 있었다.그때였다.객실 문이 밖에서 밀려 열렸다.맹서강이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잠시 열무를 스쳤다가, 곧장 주연아에게로 향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 사이로 곧장 걸어 들어와,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잠시 후, 그는 낮게 입을 열었다. 묵직하고 단호한 어조였다.“연아, 시간이 늦었다. 먼저 돌아가거라.”주연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더는 열무를 보지도 않고 미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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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6화

또 한 해의 궁연이었다.연말이 가까워지며 눈은 쉼 없이 내려, 천지는 온통 희게 덮였다.붉은 궁벽 위에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였고, 유리기와는 희미한 햇빛 아래에서 차갑고도 위엄 있는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두꺼운 차렴이 바깥의 냉기를 완전히 막아냈다.주연아는 품에 금빛으로 화조 무늬가 새겨진 손난로를 안고 있었다. 손끝은 따뜻했지만 몸은 힘없이 두툼한 방석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어딘가 기운이 빠진 모습이었다.마차는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나아갔고 청석길 위를 구르며 규칙적이고 잔잔한 소리를 남겼다.이윽고 궁문 앞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차렴 밖에서 시위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부인과 군주께 아뢰옵니다, 폐하의 전교가 있사옵니다. 상산왕부의 여인들은 하차하지 않으셔도 되며 신무문 측문으로 바로 입궁하라 하셨습니다.”마차 안에서 맹시은은 별다른 놀람 없이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주연아는 차렴을 살짝 들어 올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궁문 앞에는 이미 각 부의 마차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평소라면 금지옥엽처럼 귀하게 대접받던 부인들과 규수들이, 지금은 모두 마차에서 내려 궁인들의 인도를 받으며, 눈보라를 맞고 발을 헛디뎌가며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입김은 하얗게 피어올랐다가 차가운 바람 속에서 금세 흩어졌다.마차를 타고 그대로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 특권은 넓은 대성조 안에서도 오직 상산왕부 한 집안뿐이었다.마차는 다시 움직였다.두터운 궁문을 지나며, 밖에서 쏟아지던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모두 차단해 버렸다.구르는 바퀴는 쌓인 눈을 짓밟으며 그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못내 삼키지 못한 감정들마저 부수어버렸다.마침내 한쪽 편전에 이르러서야 마차는 완전히 멈춰 섰다.주연아와 어머니가 막 내리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궁녀들이 궁등을 들고 공손히 다가왔다.“부인, 군주 마마, 만복을 기원드립니다.”앞장선 궁녀가 무릎을 굽혀 인사하며 부드럽게 말했다.“폐하께서 승은전에 두 분을 위해 다과를 마련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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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7화

“군주 마마, 이건 따뜻합니다.”주연아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새 손난로는 손에 닿자마자 뜨겁게 달아올라, 손끝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줄기 냉기를 단번에 밀어냈다.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소림이 준비한 것이었다.그 남자는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주연아의 생각이 잠시 멀어졌다.기억 속의 소림은 어릴 적부터 말썽꾸러기였다.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뜯고, 괴상한 약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집을 태울 뻔한 적도 있는 그야말로 골칫덩어리였다.경성의 귀공자들은 그를 보면 슬그머니 길을 피하곤 했다.그런데 그런 그가 유독 그녀에게만큼은 남달리 인내심 있고 세심했다.그는 그녀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 강남의 매실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했고, 추위를 많이 탄다는 것도 잊지 않아 매년 겨울마다 가장 신기하고 따뜻한 난로를 구해다 주었다. 또 그녀가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기에 지금처럼 미리 모든 번거로움을 치워버리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작은 공간에 그녀를 온전히 놓아두었다.그들은 함께 자랐다. 말 그대로 소꿉친구였다.그 익숙함은 이미 뼛속 깊이 스며들어 서로가 서로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그는 언제나 가장 든든한 오라버니처럼 그녀를 대했다. 비바람을 막아주고, 그녀를 위해 세상을 버텨내듯.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문득 혼란스러워졌다.자신이 소림에게 품고 있는 이 의지와 신뢰가 과연 단순히 동생이 오라버니를 따르는 마음인지… 아니면, 남녀 사이의 감정인지.주연아의 마음이 서서히 어지러워졌다.전각 안은 지룡이 타오르고 향이 은은히 피어올라 따뜻함이 졸음을 부를 정도였다.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숨이 막히는 듯 답답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조각무늬가 새겨진 창을 살짝 밀어 열었다.“후...”차가운 바람이 단번에 밀려들어와 방 안의 답답함을 흩어버렸고 그녀의 정신도 또렷하게 깨웠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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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8화

열무의 시선이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노골적인 침습성을 띠었다. 마치 숨김없이 선언하듯, 그것은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의지였다.그때였다. 멀리서부터 잔잔하면서도 공손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등롱을 든 내시 하나가 눈길을 밟으며 서둘러 다가왔다.“폐하께서 이미 본전에 연회를 베푸셨사오니, 자리를 옮겨주시기 바랍니다.”그 말을 들었음에도 열무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주연아의 얼굴에 붙박여 있었다.잠시 뒤에야, 그는 천천히 입가를 끌어올렸다. 뜻을 알 수 없는 미소였다.“연아 아가씨, 연회에서 뵙겠습니다.”그는 손을 놓았다.정교하게 빚어진 붉은 옥 매화 비녀가 창턱 위에 그대로 남았다.주연아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 비녀를 바닥으로 쓸어 떨어뜨리려 했다.그러나 손끝이 닿기도 전에 차갑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문가에서 조용히 흘러들었다.“연아.”그 목소리에는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피로와 쉰 기운이 섞여 있었다.“그 사람 때문이냐. 그래서 몇 달이나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거냐.”주연아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녀는 번개처럼 뒤돌아보았다.어느새 전각의 문이 열려 있었고 그곳에는 소림이 서 있었다.회랑 아래의 등롱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것은 마치 넘을 수 없는 경계 같았다.그의 얼굴은 문 안팎의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경계에 걸려 있었다.반은 밝고, 반은 어두워 지금 그의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다만 숨이 막힐 듯 짓누르는 무거운 압박감만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주연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그녀와 소림 사이의 문제는 서로의 신분 때문이었고 자신조차 정리하지 못한 복잡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니 열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소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걸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한 걸음 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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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9화

그는 한 치씩 몸을 낮추며 그녀에게 다가왔다.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아니 그의 따뜻한 숨이 고스란히 그녀의 얼굴 위로 흩어질 만큼 가까이.그의 존재가 그녀의 호흡마저 완전히 빼앗아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입술 위로 서늘한 감촉이 스쳤다. 그리고 이내 그의 기운이 하늘을 덮듯 몰려왔다.주연아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버렸다.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이런 짓을…그녀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그녀의 힘은 그 앞에서 티끌만도 못했다.그녀가 발버둥칠수록 그가 그녀를 붙잡은 팔은 더욱 단단히 조여왔다.그 힘은 마치 그녀를 산산이 부수어 자신의 피와 살 속에 녹여버리려는 듯했다.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게 하려는 것처럼.그의 입맞춤은 아무런 규칙도 없었다. 거칠고, 집요하며, 사납기까지 했다.벌을 주듯, 몇 달 동안 쌓아온 그리움과 불안을 쏟아내듯, 그리고 거의 무너져내릴 듯한 공포를 담은 채.주연아의 입술은 금세 짓이겨지듯 아려왔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억지로 받아내야 했다.치욕, 충격, 분노…온갖 감정이 뒤엉켜 결국 뜨거운 눈물 두 줄기로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조용히 그녀의 눈가를 타고 떨어졌다.소림은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받쳐 꼼짝도 못 하게 붙잡고 있었다.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그러다 입술 끝에 스치는 짠맛을 느낀 순간, 그의 움직임이 갑자기 멎었다.그녀의 눈물이었다. 그를 뒤덮고 있던 분노와 광기가 그 한 방울에 절반쯤 꺼져버린 듯했다.그는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러나 완전히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거칠게 빼앗던 손길은 어느새 부드럽게 감싸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욕망의 불꽃이 어른거렸다.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연아, 너는… 짐의 황후다. 짐의 부인이란 말이다.”단정적인 어조였다.묻는 말이 아니라, 누구도 바꿀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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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0화

소림이 떠나자 넓디넓은 편전에는 순식간에 죽은 듯한 적막이 다시 내려앉았다.창밖에서는 그저 눈보라만이 지칠 줄 모르고 울부짖고 있었다.주연아는 천천히 차가운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앉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팔을 끌어안았다.하지만 뼛속 깊이 스며든 그 한기는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입술에는 아직도 그가 거칠게 빼앗아 간 흔적의 통증이 남아 있었고 공기 속에는 여전히 그의 강압적이면서도 맑은 용연향이 짙게 감돌고 있었다.주전 쪽에서는 희미하게 풍악 소리가 흘러왔다.술잔이 오가고 노랫소리와 춤이 어우러지는 태평성대의 기운.그때였다. 문 밖에서 미묘한 소란이 일어났다.병사들이 낮게 윽박지르는 소리와 궁녀들의 놀란 비명이 뒤섞여 들려왔다.“방자하다! 폐하의 명이 없이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너희는 대체 누구냐! 감히 궁 안에서 손을 쓰다니!”곧이어 둔탁하게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그리고 다시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주연아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멍하니 문 쪽을 바라보았다.“끼이익.”무거운 문이 밖에서 거칠게 밀려 열렸다.익숙하면서도 다급한 기척이 눈보라를 휘감은 채 역광 속에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연아!”어머니의 목소리였다.맹시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와 걱정이 가득했다.그녀의 뒤에서는 무비가 재빠르게 막아서려던 궁녀를 기절시키고, 곧장 문 앞을 경계하며 섰다.주연아의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팽팽히 당겨져 있던 마음의 끈이 어머니를 본 그 순간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어머니…”그녀는 떨리는 몸으로 바닥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 따뜻한 품으로 파고들었다.“어머니!”그녀는 맹시은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그 품에 묻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서러움과 공포가, 그 순간 산산이 터져 나오며 처절한 울음으로 쏟아졌다.“폐하께서...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어머니…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그녀의 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떨리고 있었다.맹시은의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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