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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화

충격을 금치 못하는 송정희를 뒤로 하고 유하늘은 쌀쌀맞게 눈길을 거두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현장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잠시 후, 권아람이 송우주를 데리고 급히 달려왔다.“엄마!”송우주가 울면서 뛰어왔다.유하늘은 어리둥절했고,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겼다.“엄마, 아빠는 괜찮아요? 지금 어떻게 됐대요?”송우주는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처음으로, 유하늘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두렵고 무기력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뒤따라온 권아람이 유하늘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여준 씨가 저렇게 된 거, 다 아람 씨 때문이죠?”곧이어 송우주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옆에 앉아 있던 송정희는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이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하늘을 바라보았다.“경호원 말로는 나쁜 사람들에게 습격당해서 여준이가 다쳤다고 했는데? 쟤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권아람이 냉소를 지었다.“아까 아래층에서 경호원들이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유하늘 오빠가 어떤 협력업체랑 문제가 생겼는데, 그쪽 사장이 앙심을 품고 하늘 씨를 납치했대요. 여준 씨는 구하러 갔다가 지금 응급실에 누워 있는 거예요. 완전 엉뚱한 화를 입은 거죠.”송정희는 어안이 벙벙하더니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송우주가 곧장 유하늘을 밀쳐냈다.“엄마 때문에 아빠가 다친 거네요!”힘이 어찌나 센지, 유하늘은 그대로 의자에 나자빠졌다.노은결이 곧장 다가와 유하늘을 부축하며 버럭 외쳤다.“지금 뭐 하시는 거죠? 그럼 이게 다 하늘 씨 탓이라는 말인가요? 하늘 씨가 위험에 처했을 때 송여준이 스스로 구하러 간 거잖아요. 누가 억지로 시키기라도 했나요?”송정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손가락으로 유하늘을 가리키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난 또 둘이 같이 있다가 봉변당한 줄 알았더니 고작 너 하나 구하려다 이렇게 된 거였어? 괜히 재수 없다고 한 게 아니었네! 여준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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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다만 그동안 추악한 얼굴들을 너무 많이 봐온지라 이제는 무덤덤했다.그나마 송우주가 호의를 보였을 때 무시해서 다행이었다.“됐어, 그만해.”유하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송우주를 바라보더니 뒤에 서 있는 두 여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만약 송여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목숨으로 갚을게요. 됐죠?”송정희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말을 하려는 순간, 유하늘의 냉혹하고 무정한 시선을 마주치자 완전히 압도당해 입만 벙긋하며 찍소리도 못 냈다.이렇게 무서운 눈빛은 처음이었다. 공허하고 차가운 눈동자는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마치 한마디라도 더 하면 유하늘이 그녀마저 끌고 가서 생매장해버릴 것 같았다.송정희는 침만 삼키고는 권아람을 잡아당겨 옆자리에 앉았다.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송우주는 몸을 돌려 권아람 품으로 숨었다.두 시간 뒤, 응급실 문이 마침내 열렸다.의사가 걸어 나오자 송정희와 권아람이 급히 달려 나갔다.“어떻게 됐어요? 선생님, 우리 조카 괜찮아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복부에 칼을 맞았는데 출혈 부위를 제때 발견하지 못해 큰일 날 뻔했어요. 다행히 지금은 목숨을 건졌고, 병원에서 사흘 정도 관찰이 필요합니다. 보호자 분들도 간호할 준비 하세요.”곧이어 권아람이 끼어들었다.“저 요즘 딱히 바쁜 일 없으니까 여준 씨를 돌볼 수 있어요.”의사는 그녀를 힐긋 쳐다보았다.“환자분이 수술 전에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아내 유하늘 씨와 전문 간호인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그쪽은 아이만 잘 돌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권아람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내 이를 악물고 유하늘을 돌아보았다.대체 왜?분명 저년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는데 유하늘만 지목한 이유는 뭐지?의사는 몸을 돌려 길을 터주며 유하늘에게 손짓했다.“어서 들어가세요.”유하늘은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뒤에서 권아람 일행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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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이내 송여준의 손을 뿌리치며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나 바빠. 여준 씨랑 있을 시간 없어.”송여준이 어리둥절했다.“뭐 때문에 바쁜데?”‘당신한테서 떠나기 위해.’유하늘은 시선을 피했다.“민석현이 오빠한테서 한몫 챙겨보겠다고 날 납치한 거야. 그래서 오빠 대신 처리해줘야 해.”“그 일 처리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아무리 그래도 병원에 잠깐 들를 시간도 없다는 거야?”송여준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냥 오기 싫은 거지?”유하늘은 입술을 깨물었고, 짧은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아마... 권아람이 네 옆에 있어 주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권아람 얘기는 이제 그만해!”송여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절박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오랜 시간의 출혈과 응급 처치 때문에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나도 알아. 요즘 내가 권아람한테 너무 신경 쓰는 것처럼 보여서 화난 거잖아. 하지만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할머니를 구해준 은인일 뿐, 제발 내 말 좀 믿어줄래?”유하늘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은인? 몸이 좀 안 좋다 하면 밤새 옆에서 간호하고,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 나가고, 생일엔 선물까지 챙겨줘, 쇼핑하면 네 카드로 계산하고... 나보다 권아람이 더 네 아내 같지 않아?”말을 마치고 송여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지금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정말, 조금도.실망이 쌓일 만큼 쌓이니 하루라도 빨리 떠나 오빠 곁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송여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그건 나름대로 은혜를 갚는 방식이었어. 난...”“도대체 얼마나 큰 은혜길래 아직도 갚고 있는 거야? 아니면 그걸 핑계로 권아람과 있고 싶은 건지, 너 자신만 알겠지.”유하늘이 싸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송여준의 숨이 가빠졌다.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날 조금이라도 믿어줄 수 없어? 몇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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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노은결이 뒤에서 유하늘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송씨 가문은 국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집안이고, 유하늘은 외롭게 고립된 처지였다.떠나고 싶다고 해도 무리하게 나서면 결국은 송씨 가문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꼴이 되기에 아무런 이득이 없다.유하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애초에 선택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타협만이 유일한 길이다.“의사 선생님이 사흘 동안 관찰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3일 뒤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하면 바로 떠날 거예요. 그때는 아무도 날 못 막아요. 물론 당신도 포함해서, 알겠어요?”유하늘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입가에는 냉소를 띤 채 송정희를 바라보았다.송정희는 꼭 떠나고 말겠다는 그녀의 결연한 태도에 깜짝 놀랐다.그동안 가느니 마느니 떠들기만 하던 사람이 이제는 진짜로 떠날 생각인 건가?“멍하니 서서 뭐 해요? 저한테 돌보라면서요? 그럼 괜히 참견하지 말고 볼일이나 보세요.”유하늘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송정희를 쏘아본 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떠난 후 노은결도 콧방귀를 뀌더니 눈을 흘기며 비아냥거렸다.“이렇게 좋은 조카며느리를 예뻐해도 모자랄 판에 내 신분을 도용한 가짜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니, 정말 눈이 삐었나 보네.”노은결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송정희를 힘껏 째려본 뒤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한편, 유하늘은 병실로 들어섰다.다시 나타난 그녀를 보자 송여준의 시선은 점점 뜨거워졌다.“하늘아, 역시 넌 날 버리고 갈 사람이 아니었어.”유하늘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말했다.“일어나서 물 마셔.”송여준은 갈라진 입술을 깨물고 힘없이 대답했다.“상처가 너무 심해서 혼자 일어나긴 힘들어.”그 말을 듣자 유하늘의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이내 베개 두 개를 받쳐주고 그를 부축해 앉게 한 뒤 물컵을 건네주었다.송여준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은은한 빛이 스쳤다.“하늘아, 역시 나 걱정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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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말을 마치자 송여준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이내 입술을 꽉 깨물고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미안해, 하늘아. 아까는...”“먹을 거 좀 사다 줄게.”유하늘은 그의 말을 단호히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병실 문을 나서고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깊게 패 있었다.그녀는 자신을 다독였다.송여준이 위독한 상태에서 벗어나 관찰 기간만 끝나면 자신의 임무도 끝이므로 송정희도 더는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방금 송여준이 내뱉은 원망 섞인 말에 자칫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할 뻔했다.멀쩡히 살아 있는데 감사하라고?유하늘은 복도 벽에 기대어 낮게 중얼거렸다.“안타깝게도 당신이 목숨 걸고 되살린 사람은 이제 한 달 남짓 후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 거야.”이내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돌아섰다.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 유하늘의 손에는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안에는 송여준이 평소 가장 좋아하던 반찬들로 가득했다.그녀는 밥과 반찬을 식탁 위에 놓고 젓가락을 내밀었다.“밥 먹어.”송여준은 유하늘에게 눈을 떼지 않았고, 조심스레 물었다.“하늘아, 화났어? 아까는 욱해서 한 소리야, 진심은 아니었어.”“알아. 아픈 데다 기분도 오락가락하니까 그럴 수 있지. 자, 얼른 먹어.”유하늘이 재촉하듯 말했다.그녀는 이 일로 송여준과 언쟁을 벌이기 싫었고, 그저 빨리 입 다물고 더는 언급하지 않기를 바랐다.송여준은 말문이 막혔다. 결국 젓가락을 받아 들고 밥을 먹어보려 했지만 어깨의 상처 때문에 팔을 움직이지 못했다.잘생긴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마치 늘 강인했던 사람이 갑자기 밥 한 숟가락도 뜨지 못하는 현실이 충격인 듯했다.유하늘은 그가 세 번이나 시도하다 실패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결국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내가 먹여줄게.”송여준은 마지못해 젓가락을 건네주었다.“나 참 못났지? 다른 사람이 챙겨줘야 하는 신세라니.”“움직이기 힘들 땐 남의 도움을 받는 게 당연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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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뜨거운 눈빛을 마주한 유하늘은 문득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래오래 살자라,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말인가.그녀는 결코 오래 살 수 없는 몸이다.송여준의 바람은 애초부터 실현될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유하늘은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얼굴 좀 씻고 올게.”빠른 걸음으로 병실 문을 나서는 순간, 복도 끝에서 임세빈을 마주쳤다.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보자 임세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어두운 안색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천천히 다가왔다.가라앉은 목소리에 푸념이 담겨 있었다.“그렇게 아픈 몸으로 송여준까지 돌봐야 해요? 설마 송씨 가문에서 간병인 한 명 못 구하는 건 아닐 테고.”유하늘은 검지를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임세빈이 양손을 흰 가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오라고 턱짓했다.그의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유하늘은 비로소 안심한 듯 입을 열었다.“송여준 고모한테 약속했어요. 사흘간의 관찰 기간만 무사히 넘기고 생명에 지장이 없으면 즉시 떠날 거라고. 그때는 아무도 저를 막지 못할 거예요.”“그래요. 보아하니 하늘 씨도 3일이 한계인 것 같아요.”임세빈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에게 부담 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한마디 보탰다.“요 며칠 시간 날 때 한 번 들러요. 뇌종양 상태가 어떤지, 혹시 더 커진 건 아닌지 한번 확인해줄게요.”이내 유하늘이 걱정할까 봐 급히 위로했다.“최근에 불편한 증상이 잦아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종양이 더 진행되지 않았다는 의미예요. 이건 아주 좋은 신호죠. 성장을 멈추기만 해도 훨씬 오래 살 수 있어요.”유하늘이 희미하게 웃었다.“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처음 말했던 두 달 남짓이잖아요? 이제 스무날이 지났으니 앞으로 한 삼사십일 남은 거죠?”임세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묵묵부답했다.그는 이런 무거운 주제를 언급하는 순간이 가장 괴로웠다.의사로서 시한부 환자 앞에서 도무지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다는 사실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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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유하늘은 문 앞에서 잠자코 기다렸다가 송여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그녀가 들어오자 권아람은 바로 눈물을 닦으며 다소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유하늘은 시선을 돌려 송여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둘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 자리를 피해줄까? 오늘 아람 씨가 간호할 거면 난 먼저 갈게.”권아람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저는 그냥...”“아람은 금방 갈 거야. 신경 쓰지 마.”송여준이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권아람은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며 표정이 약간 굳었다.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이지?물론 유하늘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탁자 쪽으로 가서 도시락을 정리하려는 유하늘을 보자 권아람이 바로 따라갔다.“제가 할게요!”그리고 팔을 뻗어 빼앗아 가는 순간 도시락 뚜껑이 열리면서 국물이 손에 튀었다.권아람은 재빨리 도시락통을 내려놓고 휴지를 집어 손을 닦았다.“이런! 결혼반지가 더러워졌잖아.”유하늘은 어리둥절하더니 무의식중으로 내려다보았다.권아람의 손에는 반지가 하나 끼어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결혼반지 스타일이다.유하늘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권아람이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듯 속상한 얼굴로 반지를 빼서 손에 들고 꼼꼼히 닦았다.이를 본 송여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심코 물었다.“아직도 그 반지 끼고 있어?”예전에 할머니가 권아람과 결혼을 추진하면서 웨딩드레스와 결혼반지 등 혼수까지 준비해 결혼식을 치르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권아람이 활짝 웃으며 반지를 손에 받쳐 들었다.“이건 할머니가 주신 선물이잖아. 지금까지 잘 간직해 왔어.”송여준은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이제 더는 숨길 생각이 없는 듯, 그녀가 모르는 일을 대놓고 드러내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유하늘은 역겨움을 느꼈다.이내 무덤덤하게 시선을 돌리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람 씨는 행동이 참 빠르네요. 지난번에 연애한다고 하더니 벌써 결혼반지까지 하고 있어요? 곧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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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권아람은 옷자락을 꼭 움켜쥔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할머니가 주신 반지를 한 번 껴봤을 뿐이야.”송여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내가 사준 것도 아니고, 우리 결혼식도 안 올렸잖아. 할머니가 일방적으로 선물한 물건이데 앞으로 결혼반지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권아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딱 잘라 선을 긋는 태도를 보자 이를 살짝 악물었다.유하늘을 향한 송여준의 감정이 이토록 깊을 줄은 미처 몰랐다.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 심지어 작은 오해조차 만들기 싫어할 정도라니.이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만약 유하늘이 떠나려는 걸 알았다면 송여준은 어떻게든 붙잡아 두려 했을 것이다.그래도 다행히 자신의 계획 덕분에 유하늘은 송여준에게 완전히 실망한 듯했고, 떠나려는 결심 역시 흔들림 없어 보였다.이제 남은 건 그녀가 떠날 때 한 줌의 미련조차 남지 않게 불을 한 번 더 지펴주는 일뿐이었다.곧이어 겉으로는 순순히 물러서는 척했다.권아람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알았어, 앞으로는 말조심할게. 하지만 아직 하늘 씨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도 아니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모를 거야.”그러나 송여준한테서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이상함을 느낀 권아람이 고개를 들자 싸늘한 시선을 마주쳤다. 눈빛에는 설명할 수 없는 냉기와 경고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채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이제 돌아가. 요즘은 하늘이랑 단둘이 시간 보낼 거야. 아무도 방해할 수 없어.”송여준은 미간을 문질렀고, 더는 그녀가 이 자리에 머무는 걸 원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권아람은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꽉 깨물고 조용히 돌아섰다.병실을 나선 다음 바로 자리를 뜨는 대신 산부인과 진료실을 찾아갔다.안에서 30분이나 머문 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그리고 직원 식당으로 향해 한 바퀴 둘러보았고, 역시나 구석 자리에서 유하늘을 발견했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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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임신 확인서에 적힌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안 보여요?”권아람은 뾰족한 손톱으로 종이를 꾹 눌렀다. 위에는 검은 글씨로 그녀의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네모반듯하니 너무나도 선명했다.유하늘은 어이가 없었다.송여준이 자신을 구한 데에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단지 그녀의 죽음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살아생전에 권아람이 임신했기에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임신 확인서를 바라보는 유하늘의 눈동자에 생기가 점점 사라졌다.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권아람을 응시했다.“떠날게요. 송여준의 옆자리, 비워주면 되죠?”권아람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임신 확인서를 집어 들었다.그러고는 여유롭게 한쪽 눈썹을 올렸다.“그래도 눈치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미리 떠나는 게 그나마 체면이라도 지키는 거예요. 나중에 쫓겨나게 되면 망신만 당할 테니까.”유하늘의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졌다.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권아람을 빤히 쳐다보았다.“아직 할 말 남았나요? 밥 먹는 중이라.”권아람은 임신 확인서를 가방에 넣고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이제 유하늘 앞에서 본색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유하늘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입안의 음식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삼켰다.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채우는 게 제일 중요했으니까.이런 사람들과 더는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이틀만 지나면 송정희의 방해도 없기에 홀연히 떠날 것이다.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이제 자신과는 무관했다.식사를 마친 유하늘은 병실로 돌아왔다.권아람은 이미 떠났고, 대신 송정희가 송우주를 데리고 와 있었다.송여준이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무언가를 타이르는 중이었다.“엄마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아빠는 물론 너도 목숨 걸고 구해야 하는 거야.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송정희는 급히 송우주를 감싸며 되받아쳤다.“우주도 너무 걱정하다 보니 말실수한 거지. 네가 정말 유하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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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송우주는 귀를 연신 문지르며 울먹거렸다.“귀가 떨어질 뻔했잖아요! 세상에 어떻게 엄마처럼 못된 사람이 다 있죠?”유하늘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마지막 경고야. 다음번엔 진짜로 안 봐줘.”“참나, 어처구니가 없네!”송정희는 화가 나서 말까지 꼬였다. 이내 급히 송우주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가며 대놓고 욕했다.“너희 엄마는 그냥 미친 여자야. 봤지? 이런 사람한테 굳이 잘해 줄 필요 없어. 아들한테도 손찌검하는데 애초에 모성애 따위 기대하지 말아야지, 쯧쯧.”유하늘은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송여준은 미간을 문질렀다. 이런 엉망진창인 상황이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하늘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너도 알잖아, 고모가 원래 저런 성격인 거.”“그럼, 이게 다 누가 만든 걸작인데. 그동안 나한테 삐딱하게 굴고 비아냥거릴 때마다 여준 씨가 하는 말은 항상 똑같았지.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웃기지 않아?”유하늘이 단호하게 받아쳤다.오늘 하루 속을 뒤집어놓는 일이 너무 많았던 탓인지 이제는 가식조차 떨기 싫었다. 따라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송여준은 어안이 벙벙했다.쌀쌀맞은 그녀의 태도에 놀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이내 죄책감이 묻어난 목소리로 사과했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당연하지. 다만 오늘 처음으로 여준 씨 고모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 송우주더러 날 엄마로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러니까 여준 씨도 굳이 중간에서 듣기 좋은 소리 안 해도 돼.”유하늘이 말을 마치자 병실 안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그녀는 충격에 휩싸인 송여준의 표정을 못 본 척했다.권아람이 내민 임신 확인서에는 임신 3주 차라는 내용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즉, 해외에 나가 오빠 회사 일을 도울 겸 본가에 들러 부모님을 찾아뵈었을 시기에 권아람은 이미 송여준과 몰래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송여준은 항상 권아람 따위에 관심 없는 듯 행동해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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